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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검사의 복수-122화 (122/180)

사라진 약속 (4)

"어, 어쩐 일로 사전에 말씀도 없이……."

툴리앗 왕궁 안으로 들어서자 관료 여럿과 통역관들이 내게 달라붙었다.

옆에 있는 잘란을 향해 말했다.

"다른 소리 안 나오게 그쪽에서 잘 수습해."

"푸후……."

아직 숙취가 다 가시지 않은 모습의 잘란이 속 깊은 곳에서 끌어 올린 숨을 내뱉었다.

산양주의 흔적이 남아 있지만 잘란의 속내가 섞여 불쾌함을 유발하는 그 냄새에 주위에 있던 관료들이 질겁을 하며 한 발 물러섰다.

"그러게 작작 드시지 그랬어."

"그런 술을 앞에 두고 절제를 한다면 땅의 아이가……. 꺼억! 아니지."

잘란이 유창한 제국어로 답했다.

"능숙하지 않다더니, 잘하네?"

"일상 대화 정도는 우습지. 라카 가문의 땅의 아이는 태어나면서부터 못 해도 두 가지의 말을 한다고. 땅의 말, 돌의 말! 하하핫! 끄어어어억!"

다시 한번 그가 거대한 트름을 하자 주위의 사람들이 재빠르게 코를 쥐어 잡으며 뒤로 더 물러섰다.

봉두난발을 하고 있는 그의 수염과 머리칼은 물론이고 주사에 가까운 주절거림을 보았을 때, 그는 아직 술이 덜 깬 것이 분명했다.

그 독한 산양주를 밤새 들이마시고는 아침에 몇 시간 자고 나온 것이 다이니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도 할 수 있었다.

드워프들은 다른 종족에 비해 술을 좋아하고 많이 마실 수 있었지만, 저 양반은 마셔도 너무 마셨다.

"그래 가지고 제대로 알아볼 수는 있겠어?"

내 질문에 잘란이 옆에 있던 드워프 마법사를 가리키며 말했다.

"알아보는 건 내가 아니라 이 친구지!"

어제 밤에 통성명한 바에 따르면 드워프 대사를 보필하고 있는 이 마법사의 이름은 렌시오네 두자람.

어젯밤 잘란이 내 막사에서 밤새 산양주를 홀짝거릴 동안 옆에서 저비스와 밤새 마법 얘기를 하던 마법사다.

드워프가 술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고 있는 나나 투브는 산양주를 앞에 두고도 마법 얘기만 하는 렌시오네를 보고 초인적인 인내라고 감탄했었다.

마법사가 많이 나는 드워프 가문인 두자람 가문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실력자라는 잘란의 설명도 있었다.

"틀린 말은 아니네. 그럼 바로 가자고."

그리고 주위에 서 있던 내관 하나를 손으로 지목한 뒤 물었다.

"속국의 군주께서는 어디 계시지?"

내관이 더듬거리며 내뱉는 말을 옆에 있던 통역관이 말끔하게 바꿔 주었다.

"아직 기침하실 시간이 아니시라 거처에 계신다 합니다."

-해가 중천에 떴는데 일어날 시간이 아니라고? 왕 노릇도 편하구먼.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투브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해 주니 속이 시원할 지경이었다.

"자는 사람한테는 미안하지만 좀 깨워야 할 것 같네, 가자."

***

"무슨 일이십니까?"

왕의 침소 앞, 네펠타 3세의 호위대장 정도로 보이는 자가 내 앞을 막아섰다.

'이런 녀석도 있었나? 가물가물하네.'

흐릿한 인상을 뒤로한 채 내가 말했다.

"나와, 침소에 볼일이 있어."

"아직 왕께서 일어나지 않으셨습니다. 누구도 신의 자손을 깨울 순 없습니다."

통역관이 잔뜩 쫄아서 호위대장의 말을 내게 전하는 사이 투브가 슬쩍 호위대장이 막고 있는 뒤편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호위대장이 재빠르게 투브가 지나가려는 쪽으로 몸을 밀어붙여 틈을 좁혔다.

-요놈 보게?

투브가 개의 모습에서 거대한 늑대의 모습으로 변하자, 호위대장은 복도의 기둥과 투브 사이에 끼인 모양새가 되어 버렸다.

"끄으으으……."

투브가 기둥 쪽으로 몸을 밀어붙이자 결국 호위대장은 오러를 운용할 새도 없이 기절해 버렸다.

그것을 본 다른 호위대들이 무기를 뽑아 들었다.

뒤에 서 있던 렌시오네가 어눌한 제국어로 내게 외쳤다.

당황스러움이 그대로 묻어나는 말이었다.

"시안 공, 이게 무슨 일입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얌전히 좀 있지. 꼭 일을 벌여요.'

-답답하게 굴잖아. 나는 오고 싶지 않았는데 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온 거란 말이야. 빨리 마치고 돌아가서 쉬고 싶은데 별 같잖은 놈이 딱딱하게 구는데 그걸 그냥 보고 있어?

'마음은 이해하지만, 방법이 너무 과격했어.'

아직도 수습되지 못하고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호위대장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검을 꺼내 든 다른 호위대원들을 향해 눈을 돌렸다.

"여기서 피를 본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또 피를 보고 싶지는 않다. 왕에게 용무가 있을 뿐이다. 저자는……. 실수다, 미안하게 되었다."

내 말이 전해졌지만, 호위대원들의 경계하는 기색은 옅어지지 않았다.

왕의 후궁을 왕궁 안에서 참살하고 호위대장도 졸도시켜 버린 직후이니 통할 리가 만무했다.

이들을 제압하거나 죽이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지만, 스와라를 죽이는 것과는 또 다른 문제였기에 손을 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이들이 날 공격할 테고, 그걸 맞고만 있을 정도로 내가 유한 성격도 아니었다.

그때 뒤에서 큰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

툴리앗의 말이기에 제대로 알아듣기는 힘들었지만, 그 호통에 호위대가 슬슬 자기들끼리 눈치를 보면서 무기를 내렸다.

뒤에 관료를 몇 대동하고 따라온 잘란이 내 옆으로 쪼르르 달려와 말했다.

"잠시 눈을 떼었더니 그새 이런 사고를 칠 줄이야!"

"이건 내가 아니라……."

"혈기왕성할 때인 걸 알지만 얌전히 있으면 좀 좋나?"

잘란은 내 말을 들을 생각도 없이 훈계조로 말을 이었다.

'진짜 나 아닌데…….'

이 상황에서도 투브는 자기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쓰러진 호위대장 옆을 빙빙 돌고 있었다.

내 뒤에서는 아직도 호통이 이어지고 있었다.

돌아보자 꼿꼿한 노인이 호위대를 향해 목에 핏대를 올려 가며 소리를 질러 대는 중이었다.

"저 노인은?"

"툴리앗의 재상, 케르트 오플린이네."

얼굴을 보니 어렴풋이 기억이 날 것 같았다.

내 침략으로 쑥대밭이 된 과거의 툴리앗을 보존하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던 사람이었다.

지금도 노인의 반열이었지만 그때는 훨씬 더 늙었으니 얼굴이 가물가물할 만했다.

툴리앗에 대한 충심이 대단함과 동시에 현실적인 상황도 잘 파악하는 인물이었다.

그쪽으로 다가가 통역관에게 내 말을 케르트에게 전하게 시켰다.

"너무 뭐라고 하지 마시오. 이들은 할 일을 했을 뿐이오. 내 실수가 크오."

그제야 케르트는 목소리를 낮췄다.

호위대는 뭔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멍청한 녀석들, 재상이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너희들은 죽었을 수도 있었어.

자신이 더 화를 내서 내가 개입할 여지를 차단할 속셈이었다면 케르트의 의도는 정확히 들어맞은 셈이었다.

"부디 화내지 마시길……."

"내 실수인데 내가 왜 화를 낸단 말이오. 그나저나 왕을 좀 만나고 싶은데……."

"왕께서는 신의 자손이시니 저희 같은 인간이 함부로 깨울 수 없습니다."

"그건 툴리앗 사람에게나 통하는 소리지. 나는 툴리앗인이 아니니 해당 사항이 없겠지?"

내 말에 케르트는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고 딴짓을 했다.

암묵적인 동의였다.

나를 막는 것은 툴리앗에 아무 이득 될 것이 없으니 충심과 현실 둘 모두를 잡는 방법이었다.

거기에 쐐기를 박아 주었다.

"당신을 비롯한 관료들, 호위대들이 나를 막으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고 전해 주지."

그리고 거침없이 왕의 침소를 향해 나아갔다.

당황한 궁인(宮人)들이 어찌할 줄을 몰라 하며 우왕좌왕했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침소의 방문을 열어 젖혔다.

내 눈에 들어온 것은 큰 침대와 방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술과 음식 그리고 반쯤 나체가 된 채로 침대에 잠들어 있는 여성 몇 명과 네펠타 3세였다.

"참나……."

왕도까지 빼앗긴 왕의 모습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한심한 모습이었다.

암군도 이런 암군이 있을까.

뒤따라 들어온 잘란과 렌시오네가 민망한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할짝.

투브가 널브러져 있던 여인 중 하나의 이마를 핥았다.

여인이 게슴츠레 눈을 뜨고 이리저리 살피더니.

"꺄아아악!"

자다 일어난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우렁찬 소리를 질러 댔다.

그 소동에 주위에 있던 다른 여인들뿐만 아니라 마침내 네펠타 3세도 눈을 떴다.

네펠타 3세는 제대로 뜨지도 못한 눈으로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무언가 떠들어 대고 있었다.

아직 우리가 들어온 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후……."

내가 깊은 한숨을 내뱉자 이쪽을 돌아본 네펠타 3세의 눈이 왕방울만 하게 커지더니 재빠르게 내가 있는 곳의 반대편으로 멀어졌다.

그러고는 큰 소리를 질러 대고 있었다.

이성을 상실한 것처럼 질러 대는 그 소리에 머리가 띵할 지경이었다.

"부탁 좀 합시다."

내 말에 잘란이 빠르게 역석을 꺼냈고, 렌시오네가 마력을 불어 넣었다.

네펠타 3세의 말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누구 없느냐! 이자가 왜 여기 있단 말이냐! 시안 공, 이것은 약속과 다르지 않소! 자치권과 특권을 인정해 준다는 것이 약조 아니었소! 나를 죽이면 툴리앗이 가만히 있을 것 같소이까!"

아무래도 그는 내가 자신을 죽이러 왔다고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가!"

내 말에 네펠타 3세 곁에 있던 여인들이 옷가지를 챙겨 끌어안고서 재빠르게 밖으로 뛰어 나갔다.

"왜, 왜! 왜 이러는 것이오! 잘란 대사! 당신들도 한패요? 우리가 드워프와 함께한 세월이 얼마인데!"

네펠타 3세는 방에 혼자 남게 되자 더더욱 꽥꽥거리며 악을 써 댔다.

드워프 면전에 드워프라고 하는 것은 큰 금기 중 하나였지만, 그런 것쯤은 아랑곳하지 않을 정도로 정신이 쏙 빠진 모습이었다.

나는 한숨을 푹 쉬고 말했다.

"아무 위해도 가할 생각 없소, 나오시오."

투브가 커다란 늑대의 모습으로 변해 침대에 깔려 있던 이불의 귀퉁이를 잡고 끌어내렸다.

그 탓에 위에 있던 네펠타 3세도 이불과 함께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그리고 거대한 암석판을 통짜로 깎아 만든 툴리앗 왕의 침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호오! 만년절옥(萬年絶玉) 아닌가. 이 정도 크기의 것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이 귀한 걸 침상으로 쓰고 있었다니……."

아무리 외교에 주력한다 하더라도 본질은 드워프라 잘란이 암석 침대에 관심을 가지고 접근해서 이리저리 살폈다.

나는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만년절옥?"

"마법이 닿은 물건을 감추기에는 이만한 게 없지만, 아주 귀해서 같은 양이라면 황금의 12배쯤 비싸다네. 이만한 만년절옥이라면 산 한두 개 정도 사는 건 우습겠는데."

"이 정도 크기의 물건은 드물다고?"

"그렇다네."

"그렇다면 눈에 잘 담아 두는 게 좋겠네."

어리둥절한 표정을 한 드워프 둘과 인간 하나를 뒤로하고 내가 침상에 올라섰다.

넓은 침상의 중간까지 걸어간 뒤, 손에 마나 소드를 만들어 냈다.

마나 소드를 어깨 위로 치켜들자 뒤에서 다급한 소리가 들렸다.

"안 돼! 그게 몇 년을 내려온 건데! 감히 왕의 침소에 들어온 것도 모자라서 전통과 역사가 새겨져 있는 물건을 맘대로 부수려 하다니!"

네펠타 3세의 절규.

"내 말을 무엇으로 들은 게야! 이만한 크기는 아주 드물다니까! 그거 당장 내려놔! 절대 부수면 안 돼!"

잘란의 외침.

"그러니까 눈에 잘 담아 두라고 했잖아. 이제 못 볼 테니까."

그대로 마나 소드를 침상에 꽂았다.

제법 저항감이 느껴졌지만 마나 소드를 막을 암석 따위가 존재할 리 없었다.

오른손이 침상에 거의 닿을 정도로 깊이 찔러 넣은 뒤, 그대로 마나 소드를 없앴다.

침상에 난 작은 구멍에서 일어난 균열이 순식간에 침상 전체로 뻗어 나갔다.

나는 재빨리 몸을 날려 침상 밖으로 벗어났다.

그리고 쿠르릉거리는 소리와 함께 침상이 붕괴하면서 그대로 아래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굉음 소리에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이곳이 왕의 침소인 것을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잠시 뒤, 모두의 눈앞에 드러난 것은 지하로 향하는 계단이었다.

"짜잔! 비밀 창고 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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