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한 마검사의 복수-123화 (123/180)

설득 (1)

"오늘은 날이 아닌가 보네, 가자."

장작들이 얼기설기 쌓인 곳에 누워 있던 나는 몸을 일으켰다.

이곳에 올 때는 점심을 먹은 직후였는데, 어느새 해가 그림자를 길게 늘일 무렵이 되어 있었다.

가자는 소리에 주위 숲을 누비던 투브가 모습을 드러냈다.

몸 이곳저곳에 나뭇가지와 잎새를 묻히고 나타난 것이 주위의 숲과 산을 신나게 누빈 모양이었다.

-그냥 가려고? 네가 찾는 드워프가 근처에 있는 것 같던데?

투브의 말에 고개를 들어 움막과 통나무집 경계에 있는 집을 한 번 보고, 시선을 멀리 돌려 그 뒤로 펼쳐진 야트막한 산을 눈에 담았다.

"나오기 싫다잖아. 어디로 떠난 것도 아니고 계속 여기 있을 것 같은데 조금 더 기다려 보지, 뭐."

-너답지 않게 번거로운 방법을 쓰네? 당장이라도 산에 불을 지르라고 할 줄 알았는데?

"너 갈수록 우악스러워지는 것 같다?"

-보고 배운 게 누구겠어?

투브는 당당하게 나를 올려다봤다.

그 뻔뻔한 모습에 맥이 탁 풀렸다.

"원래 생각이 없었는데 여기까지 와서 랑운드를 포섭하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 아쉬워. 그리고 랑운드는 기인(奇人) 중의 기인이라 조금만 성질을 건드려도 어떻게 나올지 예측할 수가 없거든. 일단 이 정도 거리감을 가지면서 천천히 접근하는 게 좋아. 저쪽에서도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으니 나쁘지 않은 상태야."

-그런 섬세함을 그레이스에게 보였으면…….

"산탄다르 공작이 왜?"

투브가 입을 떼서 뭔가를 말하려다 고개를 내렸다.

-됐다. 말해 뭐 하냐, 가자.

그러고는 앞서서 터덜터덜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제법 내려가니 로하나스와 잘란이 나를 맞았다.

"만났나?"

잘란의 질문에 내가 고개를 저었다.

잘란이 안절부절못하고 주절거렸다.

"아이고, 사람을 보낼 수도 없고. 이것 참……."

"어디로 떠나지 않는 것만 해도 어디야. 애초에 내가 요구한 건 만남을 주선하는 것이니까 그대는 잘해 주고 있어."

"그렇게 생각해 주니 다행이네만……."

이번에는 로하나스에게 내가 물었다.

"철수 준비는 어떻게 되어 가고 있지?"

"얼추 끝나 가는 중입니다."

"병력 지원은?"

로하나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본국과 에베 공작, 양측 모두 적과 대치하고 있어 순환하며 주둔할 병력을 지원하기 어렵다는 입장입니다."

"예상은 했지만, 막상 들으니 기분이 썩 좋지는 않네."

"죄송합니다."

"네가 죄송할 건 아니지."

로하나스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참, 나시와르와의 강화 조약의 조건 중 하나였던 시찰단이 출발했다고 합니다."

"그래? 마법사가 많지 않을 것 같았는데 잘도 모아서 출발했네."

아마도 내가 지니고 있는 반오러 물질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한 목적도 있기 때문에, 이렇게 빨리 사람을 모아 출발시켰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구성원이 특이합니다."

"누군데?"

"라코 리온하트 경, 나발드 지하임 경, 로킨 포츠라니 경, 그리고 몇 명이 더 있다고 합니다."

사교도 소탕을 전문으로 하는 견정관 라코 리온하트, 제국에서 마법 사고에 관련된 자라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나발드 지하임에 시찰단에 합류하게 될 저비스의 행동 범위를 견제하기 위한 그의 아버지 로킨 포츠라니 백작까지.

완벽하게 나를 견제하기 위한 조합이었다.

황제의 견제가 지속되고 있음이 명명백백하게 느껴졌다.

로하나스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시찰단에 캐슬린 아가씨께서 계시다고……."

"무슨 소리야? 걔가 거기 왜 있어."

"저도 모르겠습니다. 시찰단 명단에 아가씨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수도에서 나시와르까지 이동하는 데만 몇 달이 걸리는 거리다.

대체 무슨 일로 캐슬린이 시찰단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버지, 어머니가 그걸 쉽게 허락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내가 모르는 무언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래? 우리는 곧 철수할 거니까 보지는 못하겠네."

"그것이 또……."

"왜, 또? 뭔데?"

"강화 조약을 제의하기는 했으나 나시와르는 얼마 전까지 제국에 적대했던 곳이라면서, 폐하께서 4군단에서 시찰단의 호위를 맡으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그런데?"

"시찰단은 툴리앗을 경유해 나시와르로 향할 것이며, 검은 늑대 기사단과 각하께서 직접 호위를 맡았으면 한다고……."

"하!"

내가 툴리앗에서 죽지 않자 황제는 나를 제국에서 멀리 떨어뜨려 놓고 싶은 모양이었다.

도원수에서 표기장군으로 격을 낮춘 것도 모자라서 시찰단의 호위단장 정도로 내 이름을 차근차근 작게 만들 요량인지도 몰랐다.

이미 나는 그에게 큰 위협으로 느껴지고 있는 걸까.

"여기서 몇 달간이나 죽치고 기다리고 있으라는 말이야?"

"한 달 안쪽일 겁니다."

"무슨 소리야? 계속 이동한다고 해도 수도에서 트리스트렘까지는 족히 3달은 걸릴 건데."

"급한 일이라고 판단하신 폐하께서 전이 마법 사용을 허가하셔서 시찰단은 어제 제국 남부 경계로 이동했을 겁니다. 그곳에서 바로 마차를 타고 이곳으로 이동 중이지 싶습니다."

전이 마법사라는 말에 내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 것이 느껴졌다.

투브의 말에 따르면 캐슬린은 전이 마법사의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본인이 느끼지 못하고 있을 뿐.

'설마! 캐슬린이 각성한 건가?'

지금으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캐슬린을 꼭 만나 볼 필요가 있었다.

"알겠어. 기사단에는 미안하지만, 집에 가는 게 늦어지겠네."

"괜찮습니다."

"너만 그렇게 생각하는 걸 수도 있을걸? 다른 부대들은 차질 없이 예정일에 철수할 수 있도록 해. 그리고 4군단을 비롯한 카몰군에는 분명히 주지시켜. 내 명령 없이는 절대 움직이지 말라고. 설령 그게 폐하의 명이라고 해도."

"알겠습니다."

내가 키워 놓은 병력을 내가 없는 사이 누군가 낚아채 가는 꼴은 죽어도 볼 수 없었다.

특히 우리 황제 폐하께서 내 병력에 눈독을 단단히 들이고 있는 것 같은데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시찰단이 이곳으로 온다고?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나와 로하나스 간의 대화를 들은 잘란이 끼어들었다.

일련의 소동으로 그와 나는 거의 격의 없는 말투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전 삶에서 꽤 첨예하게 대립했던 것을 생각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내 생각도 그런데 위대하신 어느 분의 생각은 그렇지 않나 봐."

"……황제를 좋게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군."

"내 꼴을 봐. 좋게 생각하게 생겼나."

"허허허, 그대가 황제의 오른팔이라던데 옆에서 보고 있자니 과연 그런가 싶구먼."

"스스로 오른팔을 자르려는 사람도 있나?"

감정이 격해져서 나도 모르게 나온 말이었다.

로하나스와 잘란이 모두 굳었다.

"못 들은 거로 해."

로하나스가 고개를 끄덕이고, 잘란은 괜히 무안했는지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런 잘란에게 내가 물었다.

"약속의 봉인을 푸는 작업은 어디까지 진행됐지?"

툴리앗 왕의 침소에 감추어져 있던 비밀 창고를 세상에 밝힌 것이 몇 주 전의 일이었다.

안에서는 드워프와 툴리앗의 보물들이 쏟아져 나왔고 하나하나 정체가 드러날 때마다 역사가와 고고학자 들이 뒤집어졌다.

나야 이미 한 번 겪었던 일이라 무덤덤했다.

이걸 어떻게 알았냐는 물음에는 그저 정보통이 있다는 불확실한 말만 흘렸다.

정확한 출처를 밝히지 않는 내 말 때문에 나를 보는 의심의 눈초리가 많아졌으나, 모든 보물은 그 원주인에게 돌려주겠노라는 선언은 그런 의심을 제기하는 자들도 무시할 수 없을 만큼 내 위상을 높이 올려 주었다.

게다가 내가 그 왕관이 약속이라는 확실한 정보까지 주었기 때문에 잘란은 매우 빠르게 드워프 의회에게 지원 요청을 했고, 20명의 드워프 마법사들이 자신들의 고대 유물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전이 마법까지 사용하며 그날 즉시 트리스트렘으로 이동해 온 상태였다.

다행히도 전이 마법을 시도한 드워프 마법사가 죽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르면 내일, 늦어도 이번 주 안에는 마무리될 거라던데."

"봉인이 풀리면 바로 가져가나?"

"그래야겠지."

"전이 마법으로?"

"타그나가 전이 마법으로 돌아가는 것을 완강히 거부하고 있네. 앞으로 자신의 삶에서 또 다른 전이 마법은 없을 거라고 바득바득 우겨대더군."

타그나는 전이 마법사인 드워프의 이름이었다.

약속을 위해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전이 마법을 실행한 그의 용기가 나는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하루만 빌려 주지 그래?"

잘란의 눈이 가늘어졌다.

"약속을?"

내가 걸어 내려온 뒤쪽을 흘끗 바라보고 말했다.

"약속 정도면 저기 박혀 있는 숲의 아이인지 땅의 아이인지도 호기심에 나와 보지 않겠어?"

***

며칠 뒤, 나는 전에 누워 있던 장작더미에 앉아서 투브의 털을 골라 주고 있었다.

여전히 근처의 산을 온통 헤매다 온 투브의 털은 엉망진창으로 꼬여 있었다.

저벅저벅.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투브를 쓰다듬고 있었다.

"그, 그게…… 약속인가……?"

고개를 들자 수염과 머리 곳곳이 하얗게 센 드워프 하나가 서 있었다.

그의 눈은 내 이마, 아니 정확히 말해서 이마에 얹어져 있는 왕관에 고정되어 있었다.

내가 왕관을 벗어 두 손으로 들고 말했다.

"속세와 떨어져 사는 줄 알았더니, 알음알음 소문은 듣고 사시나 봅니다?"

"오오! 아름답구나……. 완벽이라는 말 이외에는 나오지 않아……."

랑운드가 홀린 얼굴을 하고 터벅터벅 앞으로 걸어왔다.

그리고 그의 손이 약속에 닿기 직전, 나는 왕관을 다시 내 머리 위로 올려 씌웠다.

랑운드의 표정에 여러 가지 감정이 드러났다.

허탈, 허무, 갈망, 분노 등등 역시 내가 예전에 만났던 것처럼 그는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데 솔직했다.

금속을 다루는 데는 신이라 불릴지 몰라도 그 외에 다른 것은 순수한 아이와 비슷했다.

"이게 뭔지 아시는 것 같으니 제가 누군지도 아시겠군요."

랑운드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딱딱하시긴, 저랑 얘기 좀 하시죠. 얘기를 마친 후에 이걸 살피게 해 드리겠습니다."

랑운드가 등을 돌렸다.

"할 말 없다. 나는 누구와도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그는 평생에 걸쳐 그 순수한 성품 때문에 많이 이용당했다.

다른 종족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그의 가문인 디네베 가문도 랑운드를 이용해서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시킬 생각만 가득이었다.

모두 그에게서 직접 들었던 내용이었다.

"이 아름다운 물건을 다시 볼 기회는 없을지도 모릅니다. 내일이면 약속은 사톨란으로 갑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 내가 사톨란으로 가면 언제든 볼 수 있을 테니. 나를 잘 모르나 본데, 나는……."

내가 그의 말을 가로챘다.

"랑운드 디네베죠. 정확히 말하면 랑운드인가요? 디네베를 붙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 같던데."

랑운드의 어깨가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랑운드와 랑운드를 이용하려고만 하는 디네베 가문의 사이는 극도로 안 좋았다.

많은 대장장이들의 성원에도 불구하고 랑운드가 사톨란산맥에 터를 잡지 않고 밖으로 도는 이유는 순전히 가문 때문이었다.

"약속은 땅의 아이 모두의 것이기는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디네베 가문의 소유물. 가문으로 돌아간다면 당신이 이걸 보고 싶다고 해서 아무 대가 없이 보여 줄까요? 설마 그렇게까지 순진하지는 않겠죠? 설령 돌아간다고 해도 너무 비굴하지 않나요? 신의 손을 가지고 불을 타고 논다는 랑운드가 고작 왕관 때문에 수십 년을 반목하던 가문과 화해하다니."

장인들뿐만 아니라 한 분야에서 대가를 이룬 자들은 누구나 외골수적인 기질이 있었고, 그 바탕은 결국 자신감과 자존감이다.

그것을 살살 긁고 있으니 랑운드는 내 말에 반박하지 못할 터였다.

"저랑 얘기만 좀 하신다면 약속을 살펴볼 수 있게 해 드리겠습니다. 셀 수 없는 시간을 건너서 등장한 고대의 유물을 살펴보는 첫 대장장이가 바로 랑운드 당신이 될 기회입니다."

어느새 내 쪽으로 몸을 돌린 랑운드가 내게 말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지는 모르겠지만 이야기는 1시간 안쪽으로 할 것."

"그렇게 하죠."

"그리고 난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가고 싶은 데로 갈 것이니 날 어떻게 할 생각은 말 것."

"이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의회의 감시가 있다는 것쯤은? 여기서 제가 뭘 하려고 했다가는 의회가 절 가만두겠습니까?"

의회는 랑운드가 자신들의 감시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랑운드는 이미 오래전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오히려 그들을 적당히 이용해 귀찮은 것들을 처리하고 있었으니 서로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상황이었다.

"큼! 마지막, 네 녀석이 할 말만 하고 돌아가 버릴 수도 있으니 약속은 내 곁에 둘 것."

"저와 대화하는 동안 눈이 그쪽으로 가거나 손으로 만지지 않으실 수 있겠습니까?"

"노력해 보지."

"좋습니다."

그대로 마법을 이용해 땅에서 의자와 탁상을 만들어 냈다.

"마법사였나?"

랑운드가 물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의자를 빼서 앉은 뒤, 약속을 탁상에 올려 랑운드가 앉게 될 자리 쪽에 가깝게 밀어 놓았다.

"앉으시죠."

판은 깔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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