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득 (2)
산양주를 홀짝이는 소리만이 랑운드와 나 사이에 존재했다.
무슨 말이라도 해 보라고 재촉하고 싶었지만, 딱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첫째 이유로는 저 옹고집 노인네의 성격을 잘 알기 때문이었고, 둘째로는 내가 건넨 제안이 상당히 터무니없고 급진적임을 스스로도 느끼고 있기 때문이었다.
탁.
랑운드가 손에서 굴리던 빈 나무잔을 탁상에 올려놓았다.
그의 시선이 술잔과 그 옆에 놓인 약속 사이를 왕복했다.
"그 제안……. 아니, 제안이라고 부르고 싶지도 않군. 큼, 거절한다면 어떻게 할 텐가?"
"깔끔하게 물러가겠습니다."
랑운드가 '헛!' 하고 혀를 찼다.
"참나, 나를 어떻게 할 생각을 하지 말라고 하자마자 자기가 데리고 있는 대장장이와 만나 보지 않겠냐고 하더니, 그 제안을 거절해도 내게 아무 해코지를 하지 않겠다고? 대체 무슨 생각인 건가?"
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랑운드에게 내가 데리고 있는 벙어리 대장장이, 긴 후사인과 만나 보지 않겠냐는 말을 꺼냈다.
긴이 이곳으로 올 수는 없으니 랑운드가 카몰로 왔으면 좋겠다는 말도 함께였다.
미사여구를 붙여서 말의 본질을 흐리는 것은 내가 좋아하는 화법이 아니었다.
그 말을 처음들은 랑운드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며 온몸을 부풀렸다.
당장이라도 망치나 정을 들고 내 머리를 쪼갤 기세였지만 그는 약속을 보고 간신히 마음을 다스리는 것 같았다.
"말 그대로입니다. 저는 당신을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솔직히 말해 당신이 툴리앗 사람이었다면 제안은 없었을 겁니다. 납치를 해서라도 카몰로 데려갔겠죠. 하지만 당신이 땅의 아이이기 때문에 제안했고, 땅의 아이인 이상 저의 제안을 거절해도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생각보다 겸손하군? 겸손은 그대와 같은 사람이 가지고 있을 덕목이 아닌데?"
"저를 그리 잘 아십니까?"
랑운드가 산양주를 술잔에 꼴꼴 따르더니 못마땅하게 나를 바라보고 술을 털어 넣었다.
그러고는 수염에 묻은 술들을 손으로 털어 내며 말했다.
"잘 알지는 못 해도 소문 정도는 듣고 있네."
"소문은 언제나 부풀려지기 마련이지요."
"핫! 나 정도로 나이가 먹게 되면 소문을 온전히 믿지는 않지. 소문에서 사실을 골라 빼먹는다네. 제국의 절반을 평정한 것, 툴리앗을 침공한 것 그리고 몇 달 만에 왕도를 점령하고 나시와르와도 강화 조약을 맺은 것, 이 정도는 틀림없는 사실이겠지?"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본 랑운드가 말을 계속했다.
"이민족도 막아 냈다고 들었네만 그건 뭐 중요하지 않은 것 같으니 넘어가자고."
사실 다른 무엇보다도 나라드마를 격퇴한 것이 복수를 제외하면 가장 큰 자부심이었지만, 그것은 과거에 있던 나라드마와 나 사이의 악연을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그저 그런 사건 중 하나인 모양이었다.
내가 반박을 해야 하나 하고 고민하던 차에도 랑운드는 쉴 새 없이 떠들고 있었다.
그걸 보던 투브가 조용히 내게 말했다.
-교훈, 드워프를 상대할 때는 좋은 술, 아니 정확히 말하면 툴리앗의 산양주를 가지고 가면 좋다. 딱딱하고 뻣뻣해 보이던 놈들이 저 술 몇 잔에 아주 가족이라도 된 것처럼 군다.
'아! 백 번, 천 번 공감이야.'
그 사이에도 랑운드의 말은 이어졌다.
"수도 황제를 지지하는 자에게 그대는 천상에서 내려온 장수겠지. 타우 황제를 지지하는 자들에게는 지옥불에서 태어난 악마일 것이고."
"과찬이군요."
랑운드의 눈이 빛났다.
"그대의 아군과 적군의 공통점이 뭔 줄 아나?"
"……."
"자네의 얘기를 한다는 것이지. 사람들의 입과 입을 거치면서 자네의 이름은 더욱 높아질 것이 분명해. 이미 영웅이지 않나. 어쩌면 영웅의 경지를 넘어 신화와 전설에까지 이를지도 모르지.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이 하나 있지."
내가 말을 받았다.
"겸손하지 않군요."
랑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그 역시 장인을 넘어선 경지에 있기 때문에 저렇게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래, 겸손은 개나 준 작자들이 많지. 그들은 오만과 자만 사이 어딘가에 자신을 가져다 놓고 스스로를 애정해. 그런데 현 시대, 아니 앞으로도 몇 없을 위업을 이룬 그대가 겸손을 떨어?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지."
푸흣.
멀지 않은 곳에서 바람이 빠지는 것 같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나와 랑운드의 눈이 동시에 돌아갔고, 그 곳에는 투브가 있었다.
-미안…….
투브의 말이 랑운드에게 들리지는 않았겠지만, 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말을 알아듣는다더니 정말인가 보군……."
나는 일단 군말 없이 물러섰다.
"뜻은 알겠습니다. 약속은 약속이니……."
랑운드와 약속을 번갈아 내려다보았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랑운드는 약속을 끌어안고 이곳저곳을 조심스럽게 만졌다.
마치 비단결에 묻은 먼지를 털 듯 섬세하고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그리고 손이 닿은 이후에는 어김없이 눈을 대고 미세한 무늬 하나하나를 눈에 담고, 심지어는 코에 가까이 대고 천천히 느릿느릿 냄새를 맡기도 했다.
간간이 터져 나오는 '아……!' 혹은 '뜨흣……!' 같은 추임새를 통해 그가 오롯이 이 순간에 몰입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랑운드는 왕관을 5번 정도 돌리고, 8번 정도 내부와 외부를 만진 후에야 조금 몰입에서 벗어난 것 같았다.
그의 주위를 환기하기 위해 질문을 하나 던졌다.
"제국어가 제법 능숙하십니다?"
왕관의 뼈대인 나무와 보석의 이음새를 보고 있던 랑운드가 눈도 돌리지 않고 답했다.
"알아들을 만한가? 제국에도 간 적이 있거든. 꽤 되었지, 30년 정도 전인가. 혼자 다니려면 말 정도는 익혀 다니는 게 기본 아닌가."
"그렇습니까? 전혀 몰랐습니다."
랑운드가 내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제국어를 할 줄 안다는 것이 그대의 제안에 응한다는 것은 아니네."
"누가 뭐라 했습니까? 그런 억지는 안 부립니다."
랑운드는 다시 약속으로 눈을 돌렸고, 그가 내 쪽으로 그 아름다운 왕관을 밀어 놓은 것은 꽤나 시간이 지난 후였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대의 예술품을 보고 그는 어떤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일까.
감히 예상하기 어려웠다.
나는 조심스럽게 약속을 집어 들었다.
"랑운드."
그가 고개를 들었다.
마치 방금 담금질한 쇠처럼 뜨거운 열기가 몰아치는 눈이었다.
약속이 풀무가 되어 그의 마음에 바람을 한껏 불어넣은 모양이었다.
"내가 말한 그 대장장이가 당신의 맘에 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랑운드의 표정이 굳었다.
"에잉, 좋은 걸 보고 느꼈는데, 그딴 이야기로 귀를 버리는군."
"당신의 기술을 이을 자는 긴밖에 없습니다. 당신이 그랬지요.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돌아야 영웅이 되고, 전설이 되고, 신화가 된다고. 사람들이 당신의 이름을 계속 부를까요? 제자 하나 없이 자신만의 기술을 '가졌던' 대장장이를?"
"나는 장인이야!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가는 중요하지 않아!"
가져온 것을 품에서 꺼내어 탁상에 올려놨다.
"긴이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몸을 일으켰다.
"2주 뒤, 주력 부대가 카몰로 복귀를 시작합니다. 그 편으로 가시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길일 겁니다. 생각이 있으시면 그때까지 트리스트렘으로 오셔서 저를 찾으시면 됩니다. 너무 딱 맞춰 오시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가신다고 한다면 드워프 의회나 잘란이 가만있지 않을 것 같으니 오셔서 의사 표시 정도는 해 주셔야 제 입장도 곤란하지 않을 것 아닙니까."
그러고는 거대해진 투브를 타고 언덕길을 내려갔다.
뒤에서는 늙어 가는 드워프가 욕을 섞어 가며 길길이 날뛰는 소리가 들렸다.
-때려 눕혀서라도 데려갈 줄 알았는데?
"아무리 자기 가문이랑 척을 지고 있다고 해도 이름 높은 드워프 장인이야. 납치했다간 외교 문제로 비화될 수 있어."
-생각을 안 한 건 아닌가 보네?
내가 아무 말도 없자 투브가 잠깐 걸음을 멈췄다.
-진짜로?
"생각은 했지. 그런데 행동은 안 했잖아."
-흠, 올까?
"몰라, 나는 할 수 있는 데까지 했어. 그리고……."
-그리고?
"아마 올 거야."
-어떻게 그렇게 확신해?
"천재는 천재를 알아본다잖아?"
***
며칠 뒤, 나는 당장 와 달라는 급한 전갈을 받고 주툴리앗 드워프 대사관에 와 있었다.
그중에서도 대사인 잘란의 집무실 앞, 문을 열기도 전에 안에서는 굵고 거친 드워프어가 오가고 있었고, 심지어는 무언가 날아다니고 부서지는 소리도 연신 들려오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요?"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문 앞에 서 있는 렌시오네에게 물었지만,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냥 나를 한 번 원망스럽게 쳐다보고는 문을 두드렸다.
-무슨 일이긴? 소리만 들어도 재밌는 일이 분명한데.
투브가 눈을 빛내며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말했다.
렌시오네가 문을 두드렸음에도 불구하고 문은 열리지 않았고, 오히려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만 더 커졌을 뿐이었다.
한숨을 깊게 쉰 렌시오네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자 엉망이 된 대사관실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내가 발을 안에 들여놓자마자 안에 있던 두 드워프, 잘란과 랑운드가 나를 향해 드워프어로 마구 소리를 질러 댔다.
천천히 말해도 알아듣기 어려운 것이 드워프어인데 둘 다 얼굴이 붉게 상기된 채로 나를 향해 말을 쏟아 내고 있으니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잘란이 내게 뭔가 말하려하자 랑운드가 재빨리 다른 소리를 지르며 잘란에게 달려들었고, 랑운드를 피하느라 잘란이 나동그라졌다.
그 소동을 보고 있던 렌시오네가 다시 한숨을 푹 쉬더니 방 한쪽 편에서 굴러다니던 역석을 집어 마법을 사용했다.
둘의 말이 그대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시안 공! 당신 랑운드 님께 무슨 말을 한 거요? 우리 사이에 이러기요? 무슨 바람을 불어 넣었길래 랑운드 님께서 제국으로 가시겠다고 하시는 거요!"
랑운드가 한 치도 지지 않고 맞섰다.
"에라이, 미친놈아! 내가 간다고 하지 않았느냐! 멀쩡한 두 다리가 있는데 내가 어디로 가든 네가 무슨 상관이냔 말이다! 내가 사라지면 너도 편할 것이 아니냐!"
"의회에서 랑운드 님을 붙잡아 놓으라고……."
"누가 그러더냐? 감히 누가 나를 붙잡아!"
분노에 찬 랑운드가 책상을 손으로 쓸자 서류들이 온통 흩날렸다.
그것으로도 성에 차지 않았는지 랑운드는 아예 책상을 들어 엎을 기세였다.
"게다가 의회라니! 나를 감시하는 것도 싫었는데, 지들이 뭔데 나를 붙잡아! 레르냐? 레르, 그놈이 그러더냐?"
랑운드가 길길이 날뛰는 것으로 보아 현재의 드워프 의회 의장은 역시 또 다른 디네베인 레르 디네베가 맞는 모양이었다.
평생 거친 일을 하며 살아온 랑운드의 힘은 역시 대단한지 나무로 만든 거대한 책상이 랑운드의 힘을 못 이기고 차츰 들썩이고 있었다.
잘란이 놀라서 달려가 랑운드의 허리를 잡았다.
"어르신! 어르신! 진정 좀 하세요! 진정 좀. 시안 공! 와서 말리지 않고 뭘 하는 게요!"
드워프의 완력은 인간의 것을 아득히 상회하는 데다가 그것도 일반 드워프가 아니라 드워프 대장장이였다.
오러를 쓰면 큰 문제가 없겠지만 나는 살짝 빠져 있기로 했다.
"종족 내에서 해결하는 것이 맞는 것 같아서……."
"시안 공!"
책상을 놓은 랑운드가 당당히 선언했다.
"나는 제국으로 간다."
"어르신!"
울상이 된 잘란에게 내가 말했다.
"의회에는 내가 잘 말해 주지. 게다가 약속의 소재 파악과 연구 지원 그리고 내게 신경을 쏟느라 잠시 랑운…… 아니, 어르신의 흔적을 놓쳤다고 합시다. 워낙 자유분방하시니 그 정도면 면책 사유가 되지 않겠어?"
"하지만……."
"카몰에 도착하는 대로 영주 대리가 다시 의회에 연락을 하면 확실하겠지?"
내 말에 둘은 조금 진정을 취하는 모양새였다.
"랑운드 경의 이름은 아주 유명하지만 생김새를 아는 사람은 얼마 없지 않나? 그냥 회군 길에 땅의 아이 하나가 붙어서 따라갔다고 해. 그리고 거듭 말하고 싶은 부분인데, 난 아무것도 안 했어."
내 시선이 랑운드에게 가서 닿았다.
랑운드가 가슴을 쭉 펴고 말했다.
"그래! 이건 오롯이 내 의지다! 랑운드 디네베의 결정이란 말이다!"
그렇게 나는 무사히 랑운드의 카몰행을 매듭지을 수 있었다.
그리고 군영의 내 막사 안, 랑운드가 내가 두고 간 것을 내밀었다.
"정말 그 대장장이가 만든 거란 말이지?"
나와 랑운드 사이에 반오러 물질을 막는 가면에 들어가는 페다판(板)이 있었다.
비록 아직 약물 처리와 마법 처리를 하지 않아 그냥 별 볼일 없는 손바닥만 한 페다였지만, 그 작은 판에는 수많은 요철과 가는 무늬가 그려져 있었다.
마법을 부여했을 때, 마나들의 길이 되는 마나 회로였다.
랑운드가 품에서 몇 개의 페다를 더 꺼냈다.
모두 내가 저번에 놓고 온 것이었다.
다른 것들에도 처음 것과 한 치의 오차도 없는 회로들이 그려져 있었다.
"긴 혼자 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역할이 9할이 넘는다고 합니다."
"이 물러 빠진 광물을 단단하게 연마한 것도 제법인데 그 위에 이런 그림을 그려? 그것도 몇 개나 똑같이?"
"몇 개가 아닙니다."
랑운드의 눈에 의문이 떠올랐다.
"제가 가지고 있는 것만 1만 개이고, 그중 불량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나는 그 얘기를 듣고 랑운드가 놀랄 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콧방귀를 한 번 피식 하고 말았다.
"당연한 것 아닌가? 장인이 세상에 물건을 내놓는데 하나라도 불량이 있으면 안 되지. 암, 그렇고말고. 여하튼 제법 흥미가 생겼으니 한 번 얼굴이나 보러 가지."
"감사합니다."
"감사는 개뿔. 나는 그쪽을 도우러 가는 게 아니야. 쓸 만한 대장장이를 보러 가는 거지."
그리고 랑운드가 몸을 돌려 나가려 했다.
"출발일까지는 시간이 좀 있습니다. 어디에 계실 겁니까?"
"오랜만에 큰 도시에 왔으니 즐겨야지. 대사관 연회장에 있겠네."
"계속 말입니까?"
"그럼, 술 마시는 데 연회장 말고 다른 좋은 곳이 있나? 잘란 놈을 털면 좋은 술이 나오겠지."
그리고 이번에는 랑운드가 내게 물었다.
"카몰에 다른 땅의 아이가 있나?"
"아마…… 없을 겁니다."
"쯧, 고향 말을 하는 사람이 하나 없는데 그곳까지 가다니. 미쳤어, 나도 단단히 미쳤어. 드디어 이 랑운드도 노망이 들어 버린 게야."
자조 섞인 한탄을 하며 나가는 랑운드의 등을 향해 내가 말했다.
"카몰의 영주 대리가 어르신의 고향 말을 할 줄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푸핫, 위로도 그럴듯해야 믿지. 사톨란에 오는 인간 대사들이 수십 년을 연마해도 제대로 못 하는 게 우리 말이야. 그런 하얀 거짓말은 넣어 두게."
나는 그냥 빙그레 웃고 말았다.
북부 야만인들과도 어느 정도 소통이 가능했던 알버트가 드워프의 말을 못 할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알버트의 시선
늦은 밤, 시안 대신 카몰의 영주 대리를 맡고 있는 알버트는 간신히 한숨을 돌리며 자신의 방에 앉았다.
툴리앗 정벌을 훌륭하게 완수한 귀족들과 병졸들에 대한 개선 행렬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냈던 그였다.
일이 그뿐이랴, 카몰뿐만 아니라 카몰 서부의 디시간, 동부의 안즈와 그 남쪽의 리벤트까지 카몰군의 침공을 받았던 지역은 실질적으로 카몰의 영향력 아래 있었기에 그곳에서 올라오는 일거리는 끊임이 없었다.
카몰 내의 다른 귀족들이 물심양면으로 도와준다고는 하지만, 평범한 인간이라면 일 중에 몇 번이고 졸도했을 업무량이었다.
'평범한 인간과는 거리가 멀어 다행이야.'
자신의 심장을 비롯해 온몸을 순환하고 있는 이타르의 마나를 떠올리며 알버트가 생각했다.
자신을 신뢰하는 것은 고맙기 그지없는 일이나 이렇게 과중한 업무를 맡길 줄 알았다면 조금은 약한 모습을 해도 좋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한 알버트가 책상에 놓여 있는 작은 상자로 눈을 돌렸다.
시안이 자신에게 전달하라고 했다는 상자였다.
자신 앞으로 보낸 밀봉된 편지도 한 통 있었다.
먼 길을 떠난 시안이지만 알버트에게 간단한 업무 지시, 업무 보고, 안부 외엔 다른 걸 잘 보내지 않았다.
그렇기에 더욱 알버트는 호기심을 느꼈다.
그리고 안에 어떤 것이 들어 있어도 놀라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영주 대리로 있으면서 놀란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시안이 보냈다고 하면서 도깨비 둘이 찾아왔을 때도 깜짝 놀랐다.
밤에 산책을 하다 정원에서 자신을 각각 벼랑구른돌과 이끼위의물이라 소개하는 도깨비들을 만나는 것은 전혀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물론 둘은 이대로 크루슈산맥으로 돌아가기가 싫어 안내로 붙였던 사람을 홀려 카몰로 와 버린 것이지만, 알버트가 그런 것까지 알 리가 없었다.
도깨비 둘은 시안이 자신들을 이곳으로 보냈다는 말만 하고, 더는 물어보지 말라는 말과 함께 이곳에 눌러앉았다.
일단 비밀 공간에 둘을 감춰 놓고 사람을 시켜 알아보니, 정말 시안이 전장에서 도깨비를 데리고 다녔다 하니 내쫓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오늘 낮, 귀족들의 귀환을 축하하기 위해 마련된 연회 자리에는 드워프 하나가 털레털레 걸어 나와서는 긴이 어디 있는지를 물었다.
몇 달 동안의 카몰행을 함께하며 주위의 카몰군에게 알버트의 이름을 들어 왔던 랑운드는 알버트에게 무례하게 굴지는 않았다.
자신과 같이 노년의 증거가 얼굴 곳곳에 묻어 있는 알버트를 보고 동질감이라도 느낀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알버트가 살아온 나날에 비하면 초로의 드워프인 랑운드도 아기로 보일 지경이었지만, 랑운드가 그런 것까지 알 요량은 없었다.
제법 예를 갖추어 인사를 한 랑운드가 대화 중에 자신도 모르게 드워프어로 이렇게 말했다.
"병사들이 집에 빨리 가고 싶어 하는지 말을 험하게 몰아 제법 힘들었습니다. 수레 안에서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것이 고역이었지요."
주위에 있던 귀족들의 어리둥절한 표정을 보고서야 랑운드는 자신이 무의식중에 드워프어로 말했다는 것을 알았고, 재빨리 제국어로 말해 주려다 들려오는 익숙한 말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런, 다치지는 않으셨습니까?"
말이 느리긴 했지만 분명 드워프어였다.
심지어 디네베 가문만 사용하는 발음과 어조가 섞여 들어가 있었다.
과거 왕족이었던 디네베 가문에서만 이어져 내려오는 말은 디네베 성을 단 드워프들에게 큰 자부심이었지만, 다른 가문들에게서는 아직 왕족일 때의 습관을 못 버렸다고 눈총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 그 말을 제국 한복판에서 듣게 될 줄이야, 심지어 인간의 입에서!
랑운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알버트에게 물었다.
"정말 땅의 아이들의 말을 하실 줄 아십니까? 어디서 배우신 겁니까?"
알버트가 기분 좋은 웃음을 내비치며 말했다.
"알아들을 만합니까? 여행 중에 배운 뒤로 쓸 일이 없어 가물가물했는데, 다행이군요."
"여행 중에요? 그런 것치고는 상당히 유창하십니다. 게다가 그 어투는 우리 가문 사람들만이 구사하는 어투입니다."
"역시! 디네베 가문이셨군요! 익숙한 수염 매듭이라 맞나 한참을 고민했습니다. 한데 어째서……."
랑운드는 혹시나 자신의 이름 때문에 날파리들이 꼬일까 봐, 랑운드 디네베가 아니라 다른 이름을 대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자신의 정체가 들킨 것이 아닌가 하고 뜨끔했다.
그러나 디네베라는 말이 나와도 드워프 말로 했기 때문인지 주위의 귀족들은 알아듣지 못했다.
그저 드워프어로 드워프와 대화를 나누는 알버트를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주위의 눈치를 살짝 살핀 랑운드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크흠, 사정이 있습니다. 기회가 되면 다 밝히도록 하겠습니다."
"누구나 사정이 있지요. 알겠습니다."
알버트가 능숙하게 마무리를 지었다.
그때 시종이 다가와서 준비가 다 되었다며 랑운드를 긴에게 안내해 주겠다고 말했다.
랑운드가 제국어로 주위 귀족들에게 이제 가 봐야 한다고 인사를 했다.
뭐하는 드워프인지는 몰랐지만 시안이 직접 툴리앗에서 카몰로 보내기도 했고, 무엇보다 복귀하면서 이런저런 병장기들을 손봐 준 덕택에 랑운드에게 좋은 감정이 있던 귀족들이 그동안 고생했다며 나중에 술이나 한잔하자고 랑운드를 배웅했다.
그리고 알버트와 인사를 할 때, 랑운드가 드워프어로 물었다.
"혹시 경께서 시안 공에게 우리들의 수염 매듭 구분법을 알려 주신 겁니까?"
잘란에게 듣기로는 시안도 수염 매듭으로 드워프 가문을 구분한다 했으니 알버트를 범인으로 의심한 랑운드였다.
그러나 알버트는 보기 좋게 랑운드의 기대를 배반했다.
"예? 저는 그런 적이 없습니다."
끈질긴 랑운드는 알버트의 말이 능청스러운 거짓말이라 생각하며 물러갔다.
낮의 일을 생각하던 알버트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허허, 도깨비에 드워프라니! 제국에 이런 곳이 또 있으려나……."
어째 대마법사를 섬길 때보다 어린 주인을 섬기면서가 놀라는 일이 더 많다고 생각을 하며 알버트는 서신의 봉인을 뜯었다.
익숙한 시안의 글씨체가 알버트의 눈을 가득 채웠다.
가벼운 안부로 시작하는 편지에 시안은 전장의 상황이나 승패 같은 것은 적어 놓지 않았다.
그저 '이겼어.'라는 짧은 단어로 그 당시의 상황만을 짧게 알려 주고 있을 뿐이었다.
'도련님답다면 가장 도련님다운 방식이네.'
일정 간격으로 시안의 아버지인 제뉴인 공작으로부터 시안에게 연락이 온 것이 없냐는 보챔을 당하는 알버트였기에 이렇게 간단한 근황이 왠지 서운하기도 했지만, 시안이 구구절절 상황을 써 놓는 장면이 당최 상상이 가지 않았기에 그냥 그러려니 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부분을 읽으면서 알버트는 믿을 수가 없어 몇 번이고 눈을 위로 돌려 읽던 부분을 다시 읽어야 했다.
알버트의 눈이 커졌다.
편지에는 분명히 쓰여 있었다.
-이타르를 만났어.
숨의 가빠지고 심장이 쿵쿵 뛰었다.
작은 방에 심장이 뛰는 소리만 가득 찬 것 같았다.
흥분을 간신히 가다듬으며 알버트는 계속 편지를 읽어 나갔다.
그가 잡고 있던 편지의 귀퉁이가 사정없이 구겨졌다.
-그는 죽기를 원하고 있었어.
시안은 당시 이타르가 느꼈던 감정과 생각을 그대로 전달하려고 하다가 마음대로 되지 않았는지 몇 번이나 지우고 다시 쓴 흔적이 있었다.
그 시도는 헛된 것이 아니었는지 인간의 수명을 한참 초월한 알버트에게도 전해지고 있었다.
알버트도 포기하고 싶었던 적이 왜 없었겠는가.
자신은 그나마 다음 마검사를 찾아내고 보필하라는 이타르의 명을 훌륭하게 수행했지만, 이타르는 그 긴 세월을 끝에 결국 자신의 목표가 잘못된 것이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알버트는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이타르의 고통, 전부를 이해할 순 없지만 그가 가진 허무와 절망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는 알 것 같았다.
다음 문장에서 시안은 담담히 써 내려가고 있었다.
-나는 이타르의 의견을 존중하기로 했어. 이타르는 내게 흡수되어 마나로 변해 날아갔어.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주름이 훈장처럼 새겨진 피부를 따라 눈물이 아래로 또르르 굴렀다.
턱까지 이른 눈물이 툭 떨어져 편지에 짙은 얼룩을 만들어 냈다.
눈물이 편지에 그려진 시안의 문장(紋章)을 적셔 더욱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이제 전쟁고아였던 자신을 거두어 준 이타르는 세상에 없었다.
그러나 알버트는 왠지 이타르가 웃으며 죽음을 맞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르는데, 이타르는 스스로가 얼마나 두려웠을까.
시안의 존재는 이타르에게 큰 위안이었으리라.
무슨 일이 터져도 일단 크게 웃음부터 내지르는 것이 알버트의 기억 속 이타르였다.
그렇게 울지 말라고 얘기하던 이타르의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리는 듯했다.
그러나 웃어야지, 웃어야지 하는 생각과는 다르게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상실감과는 다른, 오랜 시간 고통 속에 스스로를 내던졌을 이타르를 향한 경외와 찬사의 눈물이었다.
그렇게 한참 아무 말 없이 눈물을 쏟던 알버트가 좀 진정된 후 편지와 함께 전해진 상자를 열었다.
다시 눈물이 차올랐지만 애써 억누르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작은 상자 안에는 알버트도 잘 아는 조각상이 들어 있었다.
어린 시절, 까까머리의 자신이었다.
그러나 이미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손때가 묻어 마치 원래부터 그랬던 것처럼 거뭇거뭇하고, 얼굴은커녕 눈, 코, 입의 정확한 모습도 알 수 없는 조각상이었다.
알버트가 조심스럽게 조각상을 집었다.
화아아!
조각상에서 마나가 주위로 거세게 뿜어져 나왔다.
놀란 알버트가 의자를 뒤로 빼고 일어섰다.
그 마나가 이룬 형상을 보고 알버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아……!' 하는 탄식만이 알버트의 혀끝에서 맴돌았다.
"오랜만이네?"
마나로 이루어진 이타르의 형상이 알버트를 향해 말했다.
알버트는 간신히 고개만을 끄덕였다.
이타르가 알버트를 보고 씩 웃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눈물이 많은 건 여전하구나?"
알버트가 재빨리 손을 들어 눈물 자국을 지웠다.
"너무 슬퍼하지 마. 내가 원하는 마지막이었어. 아니, 어쩌면 원하던 것보다 더 아름답고 멋진 죽음이었지."
그리고 둘은 마주 보았다.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랜 세월을 넘어 다시 만난 주인과 종자에게 말은 너무 거추장스러운 수단이었다.
그저 서로의 눈빛을 읽고, 각자의 눈빛으로 보듬는 것이면 충분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이타르의 입이 열렸다.
"수고했어, 다음 주인도 잘 부탁해. 시안 그거 성격이 보통 아니라서 네가 고생 좀 하겠더라."
알버트도 입을 뗐다.
"제가 도련님의 예절 교육 선생이었는데 그분의 성격이 보통 아니라 하심은……."
예상치 못한 일격을 맞은 이타르가 잠시 얼빠진 표정을 짓더니 호쾌하게 웃었다.
알버트의 기억에 남아 있는 그의 웃음소리 그대로였다.
"와하하하하! 한 방 먹었네. 벌써부터 다음 주인 편을 든다? 서운하네?"
한참 즐겁게 웃던 이타르가 오른손을 내밀었다.
"먼저 간다."
알버트도 오른손을 내밀어 이타르의 손을 붙잡았다.
이타르에게서 마나가 흘러나와 알버트의 몸 곳곳을 맴돌고 나갔다.
"이건……?"
"너를 이렇게 만들고 제대로 봐준 적이 없잖아. 처음이자 마지막 점검이야."
몸에서 느껴지는 청량하고 가뿐한 느낌에 알버트는 놀랐다.
"감사합니다."
"감사해야지, 내가 직접 봐주는데."
이타르의 모습이 차츰 부스러져 공기 중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진짜 안녕이네."
"……."
계속해서 솟아오르는 눈물을 이타르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 알버트는 고개를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노인의 눈에서 만들어진 눈물은 그칠 줄 모르고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만 울라니까, 이 녀석아? 나라서 이런 울보를 종자로 쓴 거지. 다른 주인은 '이놈!' 할지도 몰라요. 그만, 뚝!"
작은 것에도 울음을 터트리던 어린 알버트를 달래던 이타르의 말투 그대로였기에 알버트의 눈물은 더욱 거세졌다.
그러나 이타르를 보내는 자리에서 울고만 있을 수는 없었기에 알버트는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들었다.
이미 몸의 절반 정도가 사라진 이타르가 다시 웃었다.
"하하하하하, 가는 건 나인데 네가 우는 건 이상해."
마지막으로 사라지기 직전, 이타르가 한마디를 더 했다.
"쉽지 않은 삶이었지만 너와 함께 있던 시간은 다시 생각해도 즐거웠어."
"이타르 님!"
"안녕, 알버트. 너는 훌륭한 마검사의 종자야. 앞으로도 시안을 잘 부탁해, 친구."
친구.
이타르가 사라지며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었다.
친구라는 과분한 호칭에 알버트의 온몸으로 찌릿한 전류가 흘렀다.
그리고 시안을 잘 부탁한다는 이타르의 유언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겼다.
다 닳아 버린 조각상을 소중히 집어 책상에 올려 두었다.
새것 같은 알버트 조각상 하나와 세월의 흔적이 묻은 알버트 조각상 하나가 노인 알버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물을 닦아 낸 알버트가 깊게 심호흡했다.
대마법사가 그의 종자에게 부과한 과업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이타르의 유지를 잇기 위해서는 눈물을 흘리는 시간도 아까웠다.
정신을 맑게 하기 위해 알버트는 창문을 열었다.
창문 밖 먼 곳에서 붉은빛이 깜빡깜빡 점멸하는 것이 보였다.
제법 거리가 있는 야산에 터를 잡은 대장간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빛이었다.
산 전체를 대장장이들이 쓰고 있으니 대장간이라는 말은 이상하기도 했다.
땅, 땅.
그곳에서 옅게 들려오는 쇠를 단련하는 소리를 들으며 알버트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시안에게 보낼 답신을 적기 시작했다.
-도련님께서 보내 주신 편지는 잘 받아 보았습니다. 분에 넘치는 일이 계속 생겨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캐슬린 아가씨께서 도련님이 계신 곳으로 가셨다 들었습니다. 아마 이 편지를 받아 보실 때쯤에는 이미 아가씨와 함께 나시와르에 계시겠지요? 다시 한번 영원한 감사와 무한한 영광을 기원하며 이만 줄이겠습니다.
짧은 만남
"까망이!"
캐슬린이 부르자 투브는 재빨리 캐슬린 옆으로 다가가 꼬리를 흔들었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강아지 모습으로 변해 배를 까뒤집기도 했다.
그걸 보고 있던 로하나스가 놀란 표정을 하고 작고 조심스럽게 내게 물었다.
"오델리아나 산탄다르 공작께도 저렇게 친근한 모습은 아니던데, 뭔가 기준이 있는 걸까요?"
"나야 모르지, 저놈 마음 아니겠어? 근데 캐슬린한테는 예전부터 저랬어."
투브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 거기! 아이고, 시원하다. 역시 캐슬린이 날 제일 잘 알아. 다들 쓰다듬기만 해서 마음에 안 들었어! 그렇지! 그렇게 긁어야지!
한참을 그렇게 투브와 놀아 주던 캐슬린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투브는 놓칠 수 없다는 듯 캐슬린의 뒤를 졸졸 따라왔다.
못 본 사이 캐슬린도 많이 성장했다.
시종들이나 주위 사람들은 캐슬린이 미인이라는 소리를 달고 살았지만, 오빠인 내가 보는 캐슬린은 어릴 때나 커서나 그냥 캐슬린이었다.
미인은 무슨…….
어릴 때처럼 나를 졸졸 따르지는 않았지만, 오랜만에 봐도 서먹함이 없을 정도로 친하기는 했다.
"우리 언제 출발해?"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오빠가 책임자잖아."
캐슬린을 비롯한 조사단은 툴리앗의 왕도인 트리스트렘으로 합류했다.
나는 주둔 병력 일부를 제외한 다른 병력들을 카몰로 올려 보낸 뒤, 검은 늑대 기사단만을 데리고 호위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조사단과 함께 나시와르로 향하는 길이었다.
"좋아서 책임자가 된 줄 알아?"
주위의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도원수에서 표기장군, 표기장군에서 조사단 호위로.
말도 안 되는 좌천을 여러 번이나 겪고 있는 상황에서 내 심기가 불편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캐슬린의 대답은 걸작이었다.
"그러게, 잘 좀 하지."
로하나스의 얼굴이 잔뜩 당혹한 얼굴로 변했다.
"그, 그리 말씀하시면……."
그러나 나는 호탕하게 웃어 버렸다.
"와하하하하, 그래, 내가 더 잘할 걸 그랬네."
나를 본 첫날부터 매일 내가 당한 일은 부당하다는 소리를 입에 달고 사는 캐슬린이었다.
잘 좀 하라는 소리가 진짜 그런 것이 아니라 본인이 더 억울해서 하는 소리라는 걸 어찌 모르겠는가.
"오빠! 오빠가 그러면 안 된다니까! 더 독기를 품어야지!"
"내가 못 한 거라고 말한 건 너다?"
티격태격하고 있으니 칼이 다가왔다.
"출발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오늘 중으로 툴리앗과 나시와르의 접경지대에 이를 것 같습니다."
캐슬린이 나를 향해 눈초리를 흘기며 말했다.
"오빠는 가만히 있고 일은 칼 단장이 다 하네."
"주군의 일은 곧 제 일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아가씨처럼 미인을 모시는 일은 일이 아니지요. 즐겁기만 합니다."
사힘, 아니 제국 서부 남자들은 느끼한 말이 술술 나온다더니, 칼 역시 그곳 사람이긴 한지 시키지도 않은 아부가 술술 나왔다.
"어머! 용병술만 뛰어난 줄 알았더니, 아부도 용병술 못지않으세요?"
"어찌 아부겠습니까, 제 소박한 진심입니다."
칼의 아부에 만족했는지 캐슬린은 얼굴 가득 만족스러운 웃음을 띠웠다.
내가 캐슬린에게 말했다.
"곧 출발한다니까 마차로 돌아가."
"나도 말 타고 가면 안 돼?"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아예 갑옷 입고 무기 찬 다음에 검은 늑대 기사단을 하겠다고 그러지?"
"아! 좀!"
캐슬린이 내 귀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속삭였다.
"라코 경은 무슨 말을 해도 단답이라 재미없단 말이야! 아니 애초에 라코 경은 마법사도 아닌 견정관인데 왜 조사단에 포함된 거야?"
조사단은 총 여섯.
제국 마법 수사단의 단장 나발드 지하임, 나발드의 부하이자 제국 마법 수사단 소속 리헴 호르헤, 황실 마법사이자 전이 마법사인 말로리 스트레치, 내가 억지로 끼워 넣다시피 한 저비스 포츠라니, 사정청 소속 견정관 라코 리온하트 그리고 전도유망한 마법사……인 캐슬린 몬트라우까지.
"나머지 다섯도 대체 네가 왜 끼어 있나 하고 있을걸?"
"그건……!"
눈을 굴리던 캐슬린이 탄식처럼 내뱉었다.
"그렇지……."
캐슬린도 말만 안 할 뿐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이 무리에 어울리지 않는 캐슬린과 라코가 끼어 있는 것은 황제가 가족과 사정청을 이용해 나를 압박할 속셈이란걸.
뻔히 보이지만 동시에 강력한 수였다.
아예 나발드는 기사단원들에게 대놓고 반오러 물질에 대해 캐묻고 다니고 있었다.
또한 저비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수준이었다.
나시와르의 마법 시설을 조사한다는 것이 이 조사단의 표면적인 목적이었지만, 실상은 내 행동을 감시하고 꼬투리나 하나 잡아 볼까 하는 것이 본래의 목적일 것이었다.
"그리고 말로리 경이랑은 가까이하지 마."
"왜? 내가 말로리 경한테 홀딱 반할까 봐? 말로리 경이 잘생기긴 했어. 스트레치 가문이면 백작 가문이기도 하고 본인도 황실 마법사니 능력이 출중하기도 하고. 어머! 오빠, 지금 나 관리하려는 거야? 안 어울리게 왜 이래? 후작이 되고 나서 집에 편지도 잘 안 하던 사람이 웃긴다?"
특수 능력 마법사들은 능력이 자연적으로 발현된다는 것이 이 시대의 상식이지만, 미래에서는 전쟁 병기로의 쓰임을 위해 마법사들을 연구하던 중 특수 능력을 반강제로 끄집어내는 여러 방법이 발견됐었다.
대부분은 엄청난 시설과 많은 수의 마법사들을 필요로 했다.
또한 나는 방법이 있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 그 상세한 과정은 모르기에 시행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이른바 '각성'이라고 부르는 가장 확실한 단계의 방법은 알고 있었다.
동종의 특수 마법사와 같이 있거나 해당 마법의 시전에 함께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미래에는 소수의 마법사 중에서도 소수라 할 수 있는 특수 마법사들이 아카데미에 소속된 어린 마법사들 앞에서 자신의 특수 마법을 보여 주는 것이 매우 중요한 커리큘럼 중 하나였다.
확률에 매우 의존하는 방식이라 이렇게 해도 특수 마법이 발현된다고 확답할 수 없었지만, 그나마 윤리적이고 정상적인 방법이었다.
"그런 거 아니니까 하라는 대로 해."
투브의 말에 따르면 발현되지 않았을 뿐, 캐슬린은 전이 마법사다.
제국 전체를 통틀어 다섯도 안 되는 전이 마법사와 재수 없게 동행하고 있는 상황이니 전이 마법을 각성할 수도 있었다.
캐슬린이 전이 마법사가 되어 철저한 제국의 감시 아래에서 살아가는 꼴은 볼 수 없었다.
"오빠라는 생물들은 여동생들 남자관계에 관심이 그렇게 많다더니 틀린 말이 아니었네. 오빠마저 이럴 줄은 몰랐어."
"그런 거 아니라니까. 마차로 돌아가기나 해."
"어쩜 이렇게 내가 하기 싫어하는 것들만 하라고 하지? 해 준 것도 없으면서?"
"못 본 사이에 많이 까칠해졌다? 사춘기야? 그리고 내가 해 준 게 왜 없어? 너 아카데미 숙제 도와주고, 마법을 알려 준 게 누구야? 나 아니야?"
"에? 그걸 지금 이유라고 대는 거야? 마법사인 걸 감쪽같이 숨겨 놓고 도와주긴 뭘 도와줘! 오빠가 마법을 쓸 줄 안다는 걸 제뉴인 성에서 들어야 해? 왜 숨겼어! 왜 숨겼어!"
"그……건 다 사정이 있었어!"
"무슨 사정! 아니, 그 전에 마법사인데 왜 아무것도 안 느껴져!"
"나도 몰라! 너도 이런데 다른 사람들이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은 걸 알았으면 얼마나 피곤해졌겠어! 빨리 마차로 가! 출발해야 해!"
어느새 주위 사람들이 힐끔힐끔 우리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을 알았는지 캐슬린이 주위를 확인하더니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마차로 휙 날아갔다.
"마지막으로 뵈었을 때보다 아가씨께서 많이 거칠어지신 것 같습니다."
나와 캐슬린의 언쟁을 목격한 로하나스의 말이었다.
-순둥순둥한 캐슬린도 좋지만 날카로운 캐슬린도 좋은데? 나한테만 잘해 주면 된 거지, 뭐.
이건 계속 캐슬린 옆에 있던 투브의 말.
"각하께서도 동생분과 계실 때는 영락없는 평범한 오빠가 되시는군요. 의외의 면을 본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역시 미인은 화를 내도 미인입니다."
이건 넉살 좋게 웃으며 말하는 칼.
"그렇게 이쁘면 칼이 좀 데려가요."
내 말에 칼의 얼굴이 뻣뻣하게 굳었다.
"어찌 공작 영애의 거취를 그리 쉽게 정하십니까. 저 따위는 아가씨의 배필로 한참이나 모자랍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칼의 얼굴이 제법 엄숙해졌다.
그의 입이 다시 열렸다.
"저는 결혼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몸입니다."
캐슬린에게 보여 주었던 그 현란한 미사여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예? 왜요?"
"세상에 이성은 많은데 한 남성이 한 여인과, 한 여인이 한 남성과 살아가기는 너무 안타깝지 않습니까? 아름다운 것은 품을 때가 아니라 바라볼 때 가장 아름다운 법, 저는 아름다운 여인들을 많이 바라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이미 칼이 그동안 자신의 신념을 많이 설파한 듯 주위의 기사단원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었다.
"에……. 저야말로 단장의 의외의 면을 본 것 같네요."
투브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음, 나는 조금 알 것도 같아. 나는 캐슬린이 가장 좋지만 오델리아의 투박한 손길도, 그레이스의 기품 있는 손길도 좋아하거든. 모두 각자의 매력이 있어. 어느 하나만 가져야 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고통이야.
'넌 좀 닥쳐.'
***
제법 긴 기간을 함께할 줄 알았건만 이 동행은 그리 오래가지 못하고 끝이 났다.
우리가 툴리앗과 나시와르의 접경 지역에 다다랐을 무렵, 그곳에 미리 도착해 있었던 전령이 내게 칙서를 내밀었기 때문이었다.
"흠, 용케도 먼저 와 있었네?"
칙서를 다 읽은 내가 전령을 향해 물었다.
"제국 내부에서는 전서구를 이용해 칙서를 운반했고, 이후에는 제가 받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곳까지 운반해 왔습니다. 중간에 따라잡기는 힘들 것이라 생각해 진로에 미리 자리를 잡은 것이 천만다행입니다."
황제의 칙서는 황제가 지정한 인물이 직접 대상자에게 가져다주는 것이 대원칙이다.
그런 칙서를 전서구를 통해 이송했다니 급하긴 어지간히 급한 모양이었다.
꾀죄죄한 몰골의 전령과 말이 이곳에 도착한 것은 몇 시간 전이라고 했다.
전령의 말대로 우리를 따라올 셈이었다면 아마 한참의 시간이 더 걸렸으리라.
참 얄궂은 운명이었다.
나를 내친 황제가 얼마나 되었다고 다시 나를 찾고 있었다.
"제국에 인물이 그리 없나?"
내 혼잣말에 전령이 답했다.
"주제넘게 한 말씀드리자면 현재 이민족 세력이 걷잡을 수 없이 제국 내부로 밀어닥치고 있는 상황입니다. 출정한 다른 장군들은 패배하여……."
"거기까지."
전령의 말을 끊었다.
다 칙서에 쓰여 있는 말이었다.
에베 공작령 북부를 점거하고 있던 나라드마가 사힘 왕국을 무너트려 이민족들이 제국 내부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고, 그것을 막기 위해 출정한 다른 귀족들과 장군들이 이민족의 무력 앞에 패배했다는 말.
심지어 에베 공작이 나라드마에게 죽었다고까지 했다.
이민족의 거센 물결 앞에 수도 황제와 타우 황제가 일시 휴전을 맺을 정도였으니 나라드마가 제법 날뛰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에 다시 나를 도원수로 임명하고, 나라드마를 막으라는 명이었다.
'아주 지 편한 대로 불렀다가 내쳤다가. 가관이네, 가관.'
-불경하기 짝이 없구나, 이 녀석아.
'불경이고 나발이고 올라가면 가만 안 둔다. 봐줄 만큼 봐줬어. 앞길에 걸리적대면 이제 황제고 뭐고 없다.'
일어나 천막을 열어젖혔다.
대체 무슨 일인가 사람들이 앞에 모여 있었다.
그중 로하나스를 향해 말했다.
"짐 싸라, 트리스트렘에 있는 주둔군 중 우리랑 교대할 호위 인원들이 오면 우리는 제국으로 올라간다. 카몰에 다시 병력 오라고 편지해. 가장 빠른 걸로, 말을 이용하든 배를 이용하든."
"아니, 각하! 이럴 수는……."
조사단의 실질적인 단장인 나발드가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다.
나를 감시하고 탈탈 털어야 할 텐데 그동안 얻은 것은 좀 있으려나?
내가 그에게 짜증스럽게 말했다.
"남부를 거쳐서 내려왔으면 돌아가는 상황 정도는 알았을 것 같은데 일언반구도 없었네? 황제 폐하 명이야, 나는 올라가야 해."
그리고 손짓해 저비스를 부른 뒤 작게 물었다.
"뭐 걸린 거 없지?"
"철저하게 입단속 중입니다."
"앞으로도 잘해. 나시와르 쪽에 우리 정보가 넘어갔는지도 잘 살피고."
"알겠습니다."
"그리고 캐슬린이 말로리 경이랑 가깝게 지내는 거 같으면 네가 막아. 알았어? 너는 캐슬린이랑 아카데미 동기에 제국대학 진학도 같이 했잖아."
"아카데미 동기가 그거랑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게다가 캐슬린 님과 저는 신분 차이가……."
"시끄러,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 알겠어?"
"각하는 사람이 아닌 줄 알았는데, 그래도 캐슬린 님에 관련된 일에는 사람다워지시는군요?"
"너도 닥쳐."
저비스를 밀어낸 뒤, 분주하게 움직이는 조사단과 기사단을 바라보고 있으니 오델리아가 다가왔다.
"각하."
"응?"
"다시 전장으로 돌아가는 겁니까?"
"그런 셈이지."
"이민족 수장의 머리를 각하께 바치겠습니다."
내가 픽 웃었다.
"놈은 내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