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하나, 기사 둘 (1)
"천천히."
내 말에 투브가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그러자 뒤에서 따라오던 기사단원들이 타고 있던 말의 속도를 올려 내 곁으로 붙었다.
기동성을 높이기 위해 중갑은 모두 배로 실어 보냈기에 가벼운 차림의 칼이 옆으로 다가왔다.
"인원 보고하세요."
"총원……. 150 중……. 낙오……. 20……입니다. 인원 손실……없으며, 기마의……체력 고갈로 인한 낙오……입니다."
숙련된 기사라고 해도 빠르게 달리는 말에 있을 때 말을 하다가는 혀를 씹을 수 있기에 칼이 말의 리듬에 맞추어 튕겨 오르듯 말했다.
속도가 점점 느려져 가볍게 걷는 정도가 되서야 칼의 말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근처에 주둔 중인 부대에 기마 지원을 해 놓았으니 집결 예정지에는 각자 도달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합니다."
"낙오자 수가 생각보다 많네요. 신규 단원들인가요?"
기사단 인원 제한이 유명무실해진 이후, 영주들은 보란 듯이 기사단원들을 확충했다.
반오러 물질을 보유하고 있는 나는 그것이 무의미한 행위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최대한 충원을 보류했지만, 아무리 반오러 물질이 있어도 머릿수를 무시할 수는 없었기에 검은 늑대 기사단의 인원을 150으로 늘려 유지하고 있던 중이었다.
현재 제국, 아니 대륙에서 가장 이름 높은 기사단이라 하면 검은 늑대 기사단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에 명망 높은 기사들이 먼저 나를 찾아오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무적이라고 칭해도 과언이 아닌 기사단이었지만 사선을 넘나드는 전장의 일선에 있었기에 불가피하게 인원 손실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고, 이런 상황에서 먼저 찾아오는 기사들은 큰 힘이 되어 주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명망 있고, 실력 좋은 기사라고 해도 사람 하나하나가 탈인간 수준인 검은 늑대 기사단에 융화되기에는 상당히 시간이 필요했고, 당연히 이런 장거리 이동에서는 낙오하거나 뒤쳐질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대부분 신규 단원들입니다."
"가벼운 차림인데도 이렇게 낙오를 하다니……. 이제 갓 제국 남부에 들어섰으니 갈 길이 먼데……. 아니, 잠깐만요! 대부분이라는 건 무슨 소리죠? 기존 단원 중에 낙오한 사람이 있어요?"
칼이 조금 당황하며 말했다.
"그게…… 오델리아와 로하나스가……."
"예?"
주위를 둘러본 나는 그제야 둘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챘다.
적당히 무리에 섞여 따라오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내가 화낼 거라고 생각했는지 칼의 부연 설명이 이어졌다.
"아시다시피 오델리아를 버틸 만한 다른 말이 없지 않습니까. 대검 무게도 그렇고, 전장에서의 그 폭발력도 그렇고. 지금 오델리아가 데리고 있는 말 이외에는 어떤 말을 데려와도 힘들 겁니다. 때문에 오델리아는 장거리 이동에서 말을 바꿔 타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하긴 오델리아가 타는 말은 거의 황소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근육질 말이었다.
그 정도가 아니고서는 엄청난 크기의 대검을 휘두르는 오델리아를 버티지 못하리라.
시험 삼아 다른 말에도 탄 적이 있었는데, 일반적인 말들은 오델리아가 대검을 휘두를 때마다 그쪽으로 끌려가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대검을 휘두르지 않아도 말들은 기다란 대검의 무게에 지쳐 버리기 일쑤였다.
"그동안은 잘 따라오지 않았어요?"
"지원 부대에 대검을 맡기고 따라붙은 겁니다. 낙오는 하고 싶지 않다면서요. 무기는 몸에서 떨어트리지 않는 것이 기사의 철칙입니다. 오델리아는 그런 철칙을 포기하면서까지 낙오하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내 휘하에 있던 모든 부대들에게 테르다마스로의 결집령이 떨어진 상태였고, 그곳에서 가장 먼 곳에 있던 우리는 최대한 빠르게 합류하기 위해 불필요한 것들은 모두 줄이거나 배편으로 보낸 채 말을 이용해 달려가고 있던 중이었다.
워낙 급히 이동하는지라 지원부대의 도움을 받을 여유는 없었다.
이동하는 중간중간 툴리앗에 남아 있는 주둔군 부대에 들러 잠깐씩 휴식을 취하고, 부대 운영에 부담이 되지 않을 정도의 인원을 테르다마스로 보내라고 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배를 타고 이동하는 방안도 생각을 안 한 것은 아니었지만, 예상치 못한 해류로 시간이 더 걸릴 수 있는 위험이 있고, 이렇게 주파하는 것이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사기를 끌어올리는 데 효율적이라 생각해서 시행한 것이었다.
"오델리아는 그렇다고치고, 로하나스는 어떻게 된 거죠?"
"오델리아가 낙오했다는 말을 듣고는 도움이 필요할 거라며 뒤로 처졌습니다."
"저한테 말도 없이요?"
"각하께서 계속 선두에 계셔서 전할 새가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로하나스는 기사단원인 동시에 내 부관이었다.
부관이 상관을 두고 이탈하다니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동료를 보조하러 간 것이니 무턱대고 화를 낼 수도 없고…….
"음, 일단 잠시 휴식했다가 계속 이동하죠. 낙오 시 지침도 모두에게 전달해 놓은 상태이니 걱정할 필요는 없겠죠."
투브가 노래하듯 흥얼거렸다.
-상관보다 여인을 택한 사내가 있었네. 전장에서도 사랑은 꽃피는구나.
'사랑?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야?'
-아니.
'뭐야! 근데 그런 소리는 왜…….'
-둘이 그런 사이는 아니지. 근데 하나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수도 있지.
'그래? 왜 나는 몰랐지? 자세히 말해 봐.'
투브가 잠시 멈칫하더니 계속 발걸음을 옮겼다.
-너는 아직 어려서 이런 얘기를 듣기에는 멀었다.
'아! 왜!'
***
"워워! 괜찮아, 진정해."
오델리아가 애마인 질풍의 목 언저리를 툭툭 쓸어 주며 말했다.
질풍은 자신의 주인인 오델리아가 뒤로 처진 것이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지 거친 숨을 내뿜으며 달려 나가고 싶어 했다.
지금도 어서 자신의 등에 타라는 것처럼 오델리아를 향해 연신 눈을 맞추고 있었다.
"절대 달리지 못하게 하세요. 근육이라도 파열되면 그대로 발 묶이는 겁니다. 좀 쉬어야 해요."
질풍의 상태를 유심히 살피던 로하나스가 말했다.
그런 로하나스를 오델리아가 흘끗 보고는 대꾸했다.
"왜 뒤로 온 거지? 네 말은 충분히 더 달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실제로 로하나스의 말인 숨결은 질풍과 비교했을 때 훨씬 쌩쌩했다.
어릴 적 잠깐 어느 기사의 종자 노릇을 해 봤던 로하나스였기에 스스로가 말 관리에 관심이 많기도 했고, 폭발력에 강점이 있는 질풍과 다르게 숨결은 지구력이 좋기도 해서였다.
"낙오해도 옆에 단원이 붙어 있어야죠. 혼자 떨어지면 그거대로 큰일 아닙니까."
실제 지침 중 하나가 옆 사람이 낙오할 것 같거나 속도가 떨어지면 다른 인원이 붙어 낙오 인원을 보조하라는 것이었지만, 낙오 당시 로하나스는 오델리아의 곁에 있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시안의 부관인 로하나스가 자신을 보조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오델리아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은 채, 오델리아는 그냥 넘겨 버렸다.
지금 오델리아에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라 어서 본대로 합류하는 것뿐이었다.
그렇기에 오델리아는 등자에 발을 걸고 질풍에 올라타려고 했다.
"안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숨결에 올라타 있던 로하나스가 득달같이 내려와 오델리아의 어깨를 붙잡았다.
오델리아가 그 손을 뿌리쳤다.
"한시가 급해!"
오델리아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질풍이 푸르륵거리며 콧김을 내뿜었다.
그러나 로하나스는 완강했다.
로하나스가 질풍의 고삐를 붙잡은 채로 말했다.
"급한 건 알지만 이대로는 합류할 수 없습니다! 말을 죽일 셈입니까! 당신을 태울 수 있는 건 이 말뿐이지 않습니까!"
그 말을 들은 오델리아가 멈칫했다.
질풍은 여전히 오델리아를 향해 눈짓하고 있었다.
그걸 본 로하나스가 한숨을 푹 쉬었다.
"후, 주인이나 말이나 무모한 건 똑같네."
오델리아가 로하나스를 째려봤으나 로하나스 역시 지지 않고 맞섰다.
그러더니 로하나스는 질풍의 옆에 매달려 있던 건조 식량 뭉치를 풀어 숨결의 안장 옆에 매달았다.
"최대한 부담을 덜어 주면 회복이 빠를 겁니다."
그리고 건조 식량이 매달려 있던 곳의 반대편으로 넘어간 로하나스는 그쪽 옆구리에 고정시켜 놓은 오델리아의 대검과 마주했다.
대검 무게만 해도 엄청날 텐데 균형도 한쪽으로 쏠려 있는 상태에서 먼 거리까지 달려오다니 지금껏 버틴 것만 해도 용한 수준이었다.
대검집을 고정하던 고리들을 풀려던 로하나스의 손이 멈칫했다.
그리고 몸을 돌려 숨결을 바라봤다.
숨결이 주춤했다.
'설마 그걸 내게 달겠어.' 하는 의도가 종을 초월해 로하나스에게 도달했다.
"이건……. 말의 회복을 위해 잠시 들고 가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건조 식량을 옮겨 단 것만으로도 훨씬 편한 얼굴을 한 질풍을 봐서 그런지, 오델리아도 이번에는 별 불만 없이 대검집을 풀어 본인의 허리 뒤에 단단히 고정했다.
로하나스는 안장까지 풀어 가며 질풍의 상태를 꼼꼼하게 살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어 했던 아까와는 다르게 질풍은 편해진 상태에 만족한 듯 보였다.
다시 안장을 채우면서 로하나스가 말했다.
"근육 몇 군데가 조금 부어 있기는 한데, 뼈가 상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천천히 이동하고 냉찜질을 좀 해 주면 금방 가라앉을 것 같습니다. 이 녀석은 타고난 강골이군요."
질풍이 기분 좋게 푸르릉거렸다.
오델리아가 놀라는 표정을 했다.
"질풍이 나 말고 다른 사람에게 이러는 건 처음 보네. 말을 잘 아나 보지? 의외의 모습이야."
숨결의 안장에 달려 있던 여러 주머니 중 하나에서 당근을 꺼내 숨결과 질풍에게 던져 준 로하나스가 말했다.
"어릴 적 잠시 종자 노릇을 했었습니다. 그때 배운 것들이죠."
"종자? 송곳니 기사단 출신 아니었나? 제뉴인 공작 각하의 제자라고 들었는데."
로하나스는 물론이고 주위 동료들의 신상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오델리아이기에 자신이 종자였다는 로하나스의 말에 놀라 되물었다.
또한 오델리아의 물음에는 귀족이 아니었냐는 뜻도 내포되어 있었다.
그러자 오히려 로하나스가 황당한 듯 되물었다.
"모르셨습니까?"
종자 일을 했다는 것까지 시시콜콜하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로하나스가 평민 출신이라는 것은 알려질 대로 알려진 사실이었다.
정식 작위를 받지는 않았지만 송곳니 기사단의 부단장직을 맡아 로하나스 경(卿)이라는 소리까지 듣기에 평민들의 우상 중 하나인 로하나스였다.
따라서 로하나스의 반문은 당연하다면 아주 당연한 물음이었다.
오델리아가 작게 말했다.
"당연히 귀족인 줄로……."
건조하게 로하나스가 되받았다.
"같은 부단장이 평민이라 실망하셨습니까?"
오델리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무의식중에 본인의 편견을 내비친 것 같아 오델리아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실력 지상주의인 검은 늑대 기사단 내에서 평민이냐, 귀족이냐는 아무 제약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기사단 대부분이 귀족 출신이었고 오델리아는 내심 로하나스를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특출 난 역량을 보이는 로하나스가 당연히 어느 명망 있는 귀족 가문의 자제일 것이라 생각했었던 것뿐이었다.
"아,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라……."
황급히 오델리아가 손까지 내저어 가며 부인했지만 로하나스는 고개를 돌렸다.
평민의 신분으로 기사가 된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기사 계층의 절대 다수가 귀족이었기 때문에 평민 출신 기사들은 실력이 좋아도 알게 모르게 배척을 당했다.
'로하나스도 당연히 그런 대우를 받았겠지? 괜히 쓸데없는 말을 해서 상처를 건드린 건가?'
오델리아는 자신이 로하나스의 상처를 건드려서 로하나스가 고개를 돌린 거라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예쁘다…….'
전장에 있으면 오델리아는 갑옷과 투구로 온몸을 꽁꽁 싸매고 있지만, 지금은 기동성을 위해 무거운 짐은 모두 보내 버리고 가벼운 차림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따라서 오델리아는 투구도 쓰지 않은 모습이었고, 그녀가 얼굴을 붉히는 모습이 로하나스의 가슴에 직격타로 꽂힌 것뿐이었다.
테르다마스에서 오델리아에게 끌어당겨진 이후, 로하나스는 결국 자신이 오델리아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티를 내지 않으려고 무던 노력했으나 뒤처지는 오델리아를 보고 자신도 모르게 속도를 늦추고 말았다.
로하나스의 가슴은 계속 쿵쿵 뛰고 있었다.
어찌나 크게 느껴지는지 로하나스는 이 소리가 오델리아가 들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한 명은 미안해서, 한 명은 부끄러워서 각자의 말고삐를 잡고 조용히 걸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잘못한 것 같으니 사과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오델리아가 입을 열었다.
"저……."
움찔한 로하나스가 고개를 돌려 오델리아를 바라봤다.
로하나스의 표정이 바로 심각하게 굳었다.
'역시 아직 화가 많이 났나 봐.'
마음을 굳게 먹고 미안하다는 말을 꺼내려는 찰나, 오델리아의 눈에 들어온 것은 자신을 향해 몸을 날리는 로하나스였다.
"우윽!"
갑자기 달려드는 로하나스 때문에 오델리아가 뒤로 밀쳐져 쓰러졌다.
"이게 무슨……!"
화가 나 소리치는 오델리아를 향해 로하나스는 손가락을 세워 입과 코 앞에 가져다 댔다.
방금 전까지 오델리아가 서 있던 자리에 화살 하나가 박혀 있었다.
그리고 오델리아가 자세를 바로잡기도 전, 여러 개의 화살이 소리 없이 둘을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