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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검사의 복수-127화 (127/180)

기사 하나, 기사 둘 (3)

로하나스가 지나치면서 본 민가는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전란에 환멸을 느껴 도망간 지가 제법 되었는지 곳곳에 먼지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로하나스가 집 안으로 질풍과 숨결을 끌고 들어오자 오델리아가 기겁했다.

"왜 마구간에 두지 않고!"

오히려 로하나스가 반문했다.

"딱 봐도 농가인데 마구간이 어디 있습니까. 돼지나 닭을 치던 흔적이 있긴 한데, 군마에게는 너무 좁습니다."

"밖에다……."

그래도 말은 밖에 두라고 말하려던 오델리아는 이내 자신들의 처지를 깨달았다.

폐가에 가까운 민가에 묶인 군마 둘.

그것도 아주 잘 관리된 것이 분명해 보이는 군마다.

손쉬운 표적이 될 수 있었다.

로하나스가 식탁 비슷한 것에 있는 먼지를 팔로 쓸어 내고 품에서 지도를 꺼냈다.

그런 로하나스를 향해 오델리아가 물었다.

"우릴 공격한 건 어떤 놈들이지? 평범한 놈들은 아닌 것 같던데."

오델리아나 로하나스도 나이에 비하면 굉장한 성취를 이룬 기사들이었다.

그런 둘이 습격을 당하면서 적의 그림자도 보지 못했으니 오델리아의 물음은 지극히 합당한 것이었다.

"모르겠습니다. 이곳은 제국과 툴리앗의 접경 지역이라 오랜 기간 영토 분쟁이 끊이지 않던 곳입니다."

"툴리앗의 왕이 우리를 처리하려고 한 건가?"

"확신할 수는 없지만 가능성은 열어 둘 필요가 있습니다. 가장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이곳의 영주인 베카 백작은 리히트 공작 편에 선 죄로 가문 자체가 풍비박산이 났으니 저 정도의 인력을 동원할 여력이 없을 겁니다."

로하나스의 말을 들은 오델리아가 다른 가능성을 제시했다.

"황제…… 폐하는?"

침묵이 흘렀다.

기사도에 몸을 담고 정치에 무관하려 애쓰는 둘이라 해도 황제가 시안을 눈엣가시로 여기는 건 알고 있었다.

시안이 긍정하든 부정하든 지금 시안을 떠받치고 있는 것은 압도적인 군세, 그중에서도 신생 기사단임에도 무적이라 일컬어지는 검은 늑대 기사단이었다.

황제가 시안을 죽이기 위해 주위 가지를 꺾어 내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로하나스의 머리를 스쳤다.

"……가능성 중 하나입니다."

시안의 부관으로 있으면서 제법 여러 가지의 수를 생각할 줄 알게 된 로하나스였지만, 이민족의 급습이라는 선택지는 떠올리지 못했다.

현재의 위치가 나라드마가 거점으로 삼고 있는 곳과 멀기도 했고, 아무리 수가 적고 육로로 이동 중이지만 설마 시안이 있는 곳에 직접적으로 인원을 보내겠냐는, 약간은 안일한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나라드마의 무서움이었다.

가능성이 0이 아닌 이상 어떤 방법이라도 시도하는 남자.

나라드마는 그렇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적을 꺾어 왔고, 지금 나라드마의 적은 시안이었다.

황제라는 말에도 부정하지 않는 로하나스를 보고 오델리아가 잠깐 굳어 있는 사이, 로하나스는 말들의 상처를 살폈다.

"다행히 화살이 박히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다 생채기에 그쳤습니다."

"곧 떠날 수 있는 건가?"

"말들이 지치기도 했고, 시간이 지난 후에 퍼지는 독이 화살에 발라져 있을 수도 있으니 오늘 밤 정도는 경과를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말을 꺼내 놓고 나서야 로하나스는 자신이 둘이 함께 밤을 지새워야 한다는 말을 했다는 것을 깨닫고 얼굴이 빨개졌다.

오델리아는 혹여 아까 화살을 막아 낸 것 때문에 날이라도 상했을까 대검을 살피느라 그런 로하나스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며칠을 제대로 씻지 못해 꼬질꼬질한 모습이었지만 날카로운 눈으로 대검 이곳저곳을 살피는 오델리아를 보고 로하나스는 자신도 모르게 예쁘다는 말을 입 밖으로 낼 뻔했지만 곧 정신을 차렸다.

'정신 차려! 다른 낙오한 동료들의 생사도 불분명한데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각하께 돌아가야 해!'

괜히 혼자 민망해진 로하나스가 숨결의 안장 옆에 매여 있던 주머니 중 하나를 풀어 건조 식량을 꺼냈다.

절반 정도를 오델리아에게 내밀자 오델리아는 사양하지 않고 받아서 조곤조곤 씹기 시작했다.

질풍이 그런 오델리아를 빤히 보고 있었기에 그녀는 건조 식량을 내밀었다.

날름 받아먹은 질풍이 턱을 돌려 몇 번 우적거리더니 더 달라는 듯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걸 본 로하나스도 식량을 덜어 숨결에게 먹였다.

어두운 폐가에 사람과 말이 으적거리는 소리만 작게 울려 퍼졌다.

"그…… 아까는 미안했어……."

오델리아가 말을 꺼냈다.

로하나스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고 오델리아를 바라봤다.

오델리아가 로하나스의 시선을 피하며 웅얼거렸다.

"평민이네, 어쩌네 해서……. 정말 몰랐어."

로하나스가 픽 웃으면서 가볍게 넘겼다.

"됐습니다.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평민이건 귀족이건 관계없이 로하나스라는 기사는 훌륭한 기사야. 미래의 검은 늑대 기사단의 단장인 내가 인정할 만큼."

기분 좋게 웃던 로하나스의 얼굴이 떨떠름해졌다.

"어째서 기사단의 단장이 그쪽 겁니까?"

"그 정도는 되어야 각하께 도전할 수 있지 않나 싶어서, 당연한 거 아니……?"

로하나스가 손을 들었다.

오델리아는 말을 멈췄다.

혹시 몰라 옆에 두었던 방패를 조심스럽게 착용한 로하나스가 대검을 집으려는 오델리아를 향해 손짓했다.

"끈질긴 놈들이군요, 많습니다."

잠시 눈을 감았다 뜬 오델리아의 몸에서 투기가 끓어올랐다.

"찾아가는 수고를 덜었네. 어떤 놈들인지 얼굴이나 보자고."

바깥쪽에서 접근하던 자들도 낌새를 눈치챘는지 미미하게 느껴지던 기척이 사라졌다.

모두가 숨을 죽인, 영겁과도 같은 몇 초가 흘렀다.

로하나스가 오델리아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오델리아가 오러를 전신으로 밀어 보냈다.

그리고.

콰아아앙!

대검을 휘둘러 집의 기둥을 그대로 베어 버렸다.

"커허어!"

안쪽의 동향을 살피기 위해 접근했던 이민족 하나가 기둥과 함께 잘려 나갔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지 오래된 집은 기둥에 충격이 가해지자마자 한쪽으로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놀란 질풍과 숨결이 동시에 푸르륵거리기 시작했다.

오델리아와 로하나스가 재빠르게 각자의 말고삐를 붙잡고 말에 올랐다.

"이랴!"

무너져 가는 집에서 탈출한 둘의 눈에 들어온 것은 짙은 어둠 속에 꾸물거리는 무언가였다.

"죽여라!"

정체를 들킬까 싶어 제국어로 외친 올빼미의 말을 알아들은 둥지의 요원들이 둘을 향해 쇄도하기 시작했다.

***

"낙오한 사람들의 흔적이 없어요?"

내가 칼을 향해 물었다.

심각한 얼굴의 칼이 답했다.

"지금쯤이면 못 해도 절반은 복귀해야 하는데, 하나도 복귀하지 않고 있습니다. 근처 부대들에 인원을 보내서 알아봤는데, 미리 요청했던 곳에 보급 물자와 임시로 탈 말을 가지고 나가 있었는데, 우리 단원을 본 사람이 없답니다. 단 1명도요."

그때 밖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뛰어나가 보니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기사 하나가 역시 전신의 상처에서 피를 뿜고 있는 말을 타고 군영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말의 한쪽 눈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고, 거친 숨을 뿜을 때마다 코에서 붉은 피가 조금씩 비치고 있었다.

쿠당탕 하는 소리를 내며 말에서 떨어지는 기사를 칼이 받았다.

"오귀르! 어떻게 된 거야!"

"다, 단장……님, 적습입니다……."

"누가! 적이 누구야!"

"확인하지……. 푸헉……. 못 했습니다."

오귀르가 피를 토했다.

상처가 심각해 보였다.

일단 마법으로 그를 재웠다.

"치료해."

동료 기사들이 그를 들쳐 업고 데려갔다.

흥분한 말도 잘 다독여서 다른 기사에게 고삐를 넘겨주었다.

분명 제국의 영토에 진입했는데 적습이라니…….

감히 내 기사단에게!

분노가 끓어올랐다.

"각하, 출격 명령을! 감히 누가 우리를 공격한단 말입니까!"

칼이 애끓는 목소리로 외쳤다.

전장과 훈련에서는 엄격하기 그지없지만 평시에는 누구보다 단원들 하나하나를 아끼는 것을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새 기사단 전원이 나와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명령만 떨어지면 당장이라도 사지로 달려 나갈 것 같은, 굳은 의지가 그대로 전해지는 눈빛이었다.

그러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급한 건 여기가 아니에요. 우리는 정해진 날짜까지 테르다마스로 가야 합니다."

"각하!"

"말들을 쉬게 해야 해요. 빠듯한 이동입니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자는 내 말에 모두 입술을 질끈 물었다.

"칼."

"예, 각하."

"아침까지 내가 오지 않더라도 예정대로 이동하세요."

놀란 얼굴을 칼이 보였다.

내가 걸어가자 기사들이 길을 텄다.

그 끝에 이미 늑대의 모습으로 변해 있는 투브가 있었다.

몸을 날려 투브에 올라탔다.

'말들은 지쳤지만 너는 안 지쳤지?'

-골수까지 뽑아 먹어라! 골수까지!

퉁명스러운 투브였지만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밤을 가로지르며 달릴 생각에 투브의 근육 하나하나가 잔뜩 흥분하고 있다는 것을.

"다녀올게요."

"부탁드리겠습니다."

칼과 인사를 나누기 무섭게 투브가 움직였고, 풍경이 뒤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감히 내 비장의 한 수를 건드린 정신 나간 놈들이 어떤 놈들인지 얼굴이라도 봐 두고 싶었다.

얼굴을 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얼굴에 공포를 새겨 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운 야행이 되리라.

***

"달려요!"

로하나스가 뒤를 향해 거칠게 소리쳤다.

이미 이곳이 어디쯤인지도 파악되지 않은 지가 꽤 되었다.

마나도 오러도 느껴지지 않아 가볍게 봤던 적이었지만, 신체를 뒤틀고 늘리는, 전혀 접해 본 적 없는 방식으로 둘을 압박하고 있었다.

푸르르.

아직 회복되지 않은 질풍이 많이 움직이는 게 힘겨운지 거친 숨을 내뱉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서 보이는 인영(人影)에 로하나스가 놀라 숨을 들이켰다.

나무에 올라앉은 한 남자가 올빼미처럼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의 등 뒤에서 쏟아지는 달빛 때문에 오로지 섬뜩하게 번뜩이는 눈밖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 모습에 로하나스는 깨달았다.

'우리를 사냥하고 있다.'

난생 처음 느껴 보는 약자의 입장이 로하나스의 가슴을 옥죄어 왔다.

"힘내! 질풍!"

오델리아가 자신의 말을 다독였다.

당장이라도 평소처럼 엄청난 파괴력을 내뿜으며 다 죽여 버리고 싶은 오델리아였으나 질풍의 몸 상태가 좋지 않은 지금 그런 짓을 했다가는 질풍이 회복 불가가 될 수도 있다는 로하나스의 엄포가 있었기에 오러 발출을 최대한 억제하고 있었다.

'그래도 꽤나 줄었어.'

추격전 와중에도 끊임없이 적의 목에 대검을 박아 준 덕에 자신들을 쫓는 그림자가 많이 줄었다는 것을 오델리아는 알았다.

속도를 줄여 오델리아의 옆에 붙은 로하나스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오델리아에게 물었다.

"몇 명이나 죽였습니까?"

"8명."

"죽은 걸 확인한 숫자만 묻는 겁니다."

"……5명."

둥지에 소속된 요원들은 오러나 마나를 익히지 않은 평범한 인간이지만 동시에 평범한 인간과는 거리가 멀었다.

목을 절반 이상 잘라도 몇 분 이내에 다시 붙이기만 하면 숨을 쉬는 놈, 심장이 왼쪽에 아닌 오른쪽에 있는 놈 등 일반적인 상식과는 거리가 먼 놈들투성이였다.

로하나스도 단창으로 심장을 찌른 놈이 달려드는 것을 보고 기겁해서 머리를 날려 버린 참이었다.

"너는?"

"확실히 죽인 건 셋 정도입니다."

올빼미가 잔뜩 성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애초에 30 대 2라는 압도적인 숫자인데도 불구하고 이쪽만 일방적인 사상자가 발생하고 있으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분노가 머리끝까지 오른 올빼미가 제국어를 하는 것도 잊고 초원의 말로 외쳤다.

"죽여라! 저 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죽여!"

재빠르게 나무 사이사이를 건너뛰던 다른 요원들이 더 악착같이 둘에게 따라 붙었다.

질풍이 속도를 조금 낮춘 순간, 활을 손에 쥐고 있던 남자의 눈이 빛났다.

무언가를 보여 줘야 한다고 스스로 굳게 다짐한 박쥐였다.

피이잉.

박쥐가 쥐고 있던 활시위가 떨렸다.

작은 화살이 맹렬히 회전하다 오델리아의 어깨에 박혔다.

"오델리아!"

화살을 맞은 충격으로 낙마할 뻔한 오델리아가 간신히 중심을 잡았다.

그녀의 눈은 분노로 까뒤집히기 직전이었다.

그리고 오델리아가 마치 주문처럼 중얼거렸다.

"죽인다, 죽인다, 죽인다, 죽인다, 다 죽인다."

오델리아가 질풍을 멈추게 하고 아래로 뛰어내렸다.

놀란 로하나스가 옆으로 달려와 소리쳤다.

"뭐 하는 겁니까!"

"피하는 건 적성에 안 맞아. 죽어도 싸우다 여기서 죽겠어."

"오델리아!"

"가려면 가, 안 말려. 각하랑 겨뤄 보지 못하고 가는 게 한이 되긴 하겠지만 만족스러운 삶이었어."

"후……."

숨결의 머리를 돌려 떠나려던 로하나스가 멈칫했다.

"아오!"

다시 말머리를 돌려 오델리아의 곁으로 온 로하나스가 말에서 내려 질풍과 숨결을 근처 어둑한 곳에 숨겼다.

오델리아가 제법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좀 남자다운데? 다시 봤어."

남자답다는 말에 로하나스는 뭐라 반응해야 할지 멈칫했다.

그사이 오델리아가 윗옷을 훌훌 벗었다.

그리고 로하나스를 향해 등을 내밀었다.

"뭐, 뭐 하는 겁니까?"

"화살 뽑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빨리! 놈들 멀지 않아!"

자신은 대체 이런 여자의 어디에 반한 것일까, 자조 섞인 고민을 하며 로하나스가 오델리아의 어깨에 박혀 있던 화살을 뽑았다.

크윽 하는 짧은 오델리아의 비명과 함께 붉은 피가 울컥울컥 밀려 나왔다.

간단하게 지혈을 한 로하나스가 오델리아에게 말했다.

"지혈만 해 놓은 거니 무리하면 절대 안 됩니다."

"괜찮네."

상처가 불편하지 않게 한쪽 팔을 뜯어낸 옷을 입은 오델리아가 가볍게 내뱉었다.

"다시 말하지만 무리하면……."

후두두둑.

액체가 로하나스의 얼굴에 튀었다.

자신을 향해 접근하는 적들을 향해 기세 좋게 대검을 휘두른 오델리아의 상처가 벌어져 튀는 피였다.

로하나스는 처음으로 오델리아에게 반말을 하고 말았다.

"말 좀 들어 처먹어!"

그러거나 말거나 이미 분노에 눈이 뒤집힌 오델리아는 대검을 휘두르며 적들과 일전을 벌이고 있었다.

사방에 튀는 피가 그녀의 것인지, 아니면 그녀의 적의 것인지는 판별하기 힘든 부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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