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으로 향하는 별, 지상으로 떨어지는 별 (2)
피 끓는 음성으로 외친 에이젤은 무릎 꿇은 자세에서 그대로 고개만 들어, 나와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길게 자란 앞머리가 가린 에이젤의 이마 사이에, 흉터로 그려진 나의 문장이 보였다.
"아버지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 내게 무릎 꿇고, 아들은 죽은 아버지를 위해 내게 무릎 꿇는다라. 눈물 없이는 볼 수가 없군."
모멸적인 내 말에도 에이젤은 미동 하나 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에베 공작을 비롯해서 네 형인 암루흐 백작도 이민족에게 죽었다 들었다. 내가 너를 좋아하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이민족의 손을 빌어 너희 가문 남자들의 씨를 말리는 악취미는 없으니 돌아가라."
"각하! 저를 못 미더워하시는 것은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 번, 단 한 번 정도는 제 청을 들어주실 수도 있지 않으십니까! 놈은 제 아버지와 형을 죽인 원수입니다! 놈이 나타났다 들었습니다! 어찌 혈육의 원수를 가만히 보고만 있으란 말입니까! 제발! 저만이라도 좋으니 최전선으로 보내 주셨으면 합니다!"
에이젤이 서자라는 것은 나도 최근에야 알게 되었으니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것이 당연했다.
곁에 있는 참모들이 보기에는 에이젤 정도 되는, 공작의 핏줄이 아버지와 형의 복수를 위해 내게 무릎까지 꿇는 것이 크게 다가왔는지 몇몇은 내게 '본인이 그렇게 원하는데 보내 주자.'라는 은연의 눈빛을 보내오고 있었다.
"그렇게나 소중한 핏줄에 반기를 든 것도 너다."
얀타라나를 탈취해서 리히트 공작의 편에 붙은 뒤 자신이 에베 공작이라고 칭했던 과거를 꺼내 들자 막사 안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아니면 나라드마에게 가서 항복이라도 할 셈인가? 아버지의 오랜 정적에게도 숙이고 들어갔으니, 이민족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을 것 같은데."
치욕스러운 말에 고개를 떨구고 몸을 떨던 에이젤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에 눈물이 그렁거리고 있었다.
"어찌 그리 매정하십니까!"
"매정?"
내 반문에 에이젤이 악을 쓰며 외쳤다.
"각하가 같은 일을 당해도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을 것 같으……."
에이젤의 말을 끝나기 전에 나는 그의 어깨를 잡고 질질 끌다시피 밖으로 끌고 나갔다.
당황한 주위 사람들이 나를 말리려 들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밖으로 나간 뒤 에이젤의 머리채를 잡고 그의 시선을 앞을 향해 고정시켰다.
끝이 안 보이게 늘어서 있는 부대들이 펼쳐져 있었다.
어둠을 몰아내기 위해 피워 놓은 횃불들을 넘어서, 어디서 들리는지조차 아득한 함성들이 메아리가 되어 이곳까지 전해지고 있었다.
"매정? 매정한 건 너다, 에이젤! 똑바로 봐라! 전쟁이라는 이름 아래 모여들고, 스러지는 얼굴들을 똑바로 보란 말이다! 나는 이 모든 자들의 생사를 결정하는 사람이다! 네가 나를 붙잡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고 징징거리는 동안에도 적절한 지시를 받지 못한 장병 수백, 수천이 적들에게 둘러싸여 죽어 간다! 그들에게 매정한 건 너란 말이다!"
에이젤의 머리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그가 땅바닥에 엎어졌다.
"이 중 이민족에게 가족을 잃은 사람이 너 하나뿐이라더냐? 너만 화내고, 너만 분노할 줄 안다더냐? 다른 사람들은 바보라서 꾹꾹 참고 있는다더냐? 다들 분노를 억누르며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고 있는 것이다! 너처럼 알량한 감정에 좌지우지되는 것이 아니라!"
분노에 거칠어진 숨이 가라앉을 때쯤, 주위에 들리는 소리는 에이젤의 히끅거리는 소리밖에 없었다.
"돌아가 명령을 기다려라. 더 이상 에베 공작의 이름에 먹칠을 한다면 내가 먼저 너를 죽이겠다."
내가 몸을 돌렸을 때, 뒤에서는 에이젤이 악을 쓰면서 주먹으로 땅을 치고 있었다.
냉혹하고 매정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라드마와의 일전이다.
철저하게 그를 몰락시키기 위해서 전제되어야 할 것은 감정이 아니라 이성이었다.
다시 막사로 돌아가는 길, 누군가 내 앞에 섰다.
"말렸으나 듣지 않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에베 공작의 둘째 아들, 오그마 서비어였다.
에베 공작의 예측 못할 성질을 가장 많이 이어 받았다는 것이 세간의 평이었는데, 에베 공작의 죽음 이후로 사람이 확 달라졌다는 소리가 들렸다.
밤낮으로 나라드마에 대한 복수만을 꿈꾸며 살고 있다는 것이 바뀐 평의 주류였다.
오그마의 눈빛을 보니 알 수 있었다.
이 남자가 품고 있는 마음은 에이젤처럼 한순간의 혈기가 아니었다.
오그마의 눈을 보고 있자니 마치 다른 사람이 되어 나의 눈을 보는 것 같았다.
내가 나를 죽인 놈들을 바라보는 눈과 오그마가 나라드마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
"별말씀을, 데리고 가서 몸조리 잘 시키시오."
"그 말씀은……?"
"에베군은 훌륭한 전력이오. 그들을 썩힐 생각은 없소. 지금은 때가 무르익지 않았을 뿐."
나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동생을 데리러 가는 오그마를 뒤로하고 지휘 막사로 들어섰다.
내가 에이젤을 끌고 나갈 때 따라 나갔던 참모들이 허겁지겁 들어왔다.
"상황 보고해! 하나도 빼놓지 말고!"
이제 겨우 개전 첫날이었다.
***
"좌익의 붕괴는 막아 냈습니다."
눈가에 피곤함이 잔뜩 묻어 있는 로하나스가 내게 보고했다.
열흘.
무려 열흘 내내 이어진 공세였다.
마치 날뛰는 파도처럼, 몰려오는 용암처럼 이민족들은 열흘 내내 한순간도 쉬지 않고 들이닥쳤다.
이틀이 지나고 나서는 아예 다른 곳들은 공격을 멈추고, 오로지 처음 공격을 시작했던 아군 좌익만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그 탓에 아군 진형도 그에 맞춰 좌익에 집중된 형태가 될 수밖에 없었다.
강을 따라 늘어선 배에서 쏘아 대는 마법 포격과 지상에서 이루어지는 마법 지원, 이민족 샤먼들이 쏟아 내는 사술 때문에 좌익 근처의 마나 분포가 매우 불안정하다는 보고가 연속적으로 이어지고 나서야 공세가 멈췄다.
테르다마스의 좌측을 울창하게 덮고 있던 숲은 시체가 들어차고, 허공에서 마나 불꽃이 튀어 오르는 죽음의 땅이 되어 버렸다.
"피해 상황은?"
"4군단 내에서만 3개 연대급 인원이 사망했습니다. 부상자는 파악되지 않았습니다. 4군단 내의 부대 조정이 불가피하다는 페제 베이카 장군의 보고가 있었습니다. 7군단 역시 2개 연대급 인원이 사망, 부상자는 파악 중입니다. 통신 마법사 20명의 생존이 확인되지 않고 있으며, 해군 마법사 12명이 체내 마나 과밀 증세로 한동안 전장을 이탈해야 한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열흘 간의 전투라고 믿기에는 엄청난 피해 상황이었다.
몇 군단, 몇 연대로 뭉뚱그려진 저 지칭 안에 수많은 장병의 목숨이 묻어나왔다.
"적군 상황은?"
"각 귀족들의 기사단의 활약으로 궤멸시킨 적 부족 단위의 부대의 수만 16개입니다. 부족 깃발을 확보한 것만 해도 7개입니다."
그중에는 속임수로 만든 부족도 있겠지만, 저들은 부족의 중심에 가장 큰 부족기를 꽂아 둔다.
일단 확실한 건 7개의 부족에게 궤멸적인 피해를 입혔다는 것이었다.
인원 피해 상황만 봤을 때는 아군 측의 승리에 가까웠다.
가장 묻고 싶었던 것을 물었다.
"나라드마는?"
로하나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추포나 사살에 실패했습니다. 통신 마법 중개소를 덮친 놈과 검은 늑대 기사단이 마주쳤지만, 오히려 기사단원 몇을 죽이고 탈주했습니다."
나도 모르게 어금니를 악물었다.
"쉽지 않군, 역시는 역시야."
로하나스가 살짝 눈치를 살피고 고개를 숙여 내게 작게 말했다.
"칼 단장이 중개소 순환 임무는 다른 기사단에 맡기고 나라드마 추적 임무를 맡고 싶다고 합니다."
"안 돼!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내 기사단에게 맡긴 거야."
둥지 놈들의 기습에 이어 나라드마 본인이 직접 나서서 단원을 죽이고 다니니 칼의 눈이 돌아 버린 모양이었다.
그의 분노를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 침착하고 낙천적인 칼의 이성을 잃게 할 정도의 나라드마였다.
본인이 직접 전장에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아군의 사기를 꺾고, 판단을 흐리고 있었다.
실로 대단한 자신감이었다.
누군가 막사 내부로 들어왔다.
로하나스가 그를 얼른 맞았다.
"오셨습니까?"
로하나스의 인사를 받은 누이론트 백작이 나를 향해 눈인사했다.
내가 그를 향해 마주 인사를 한 뒤에 누이론트 백작은 자신을 위해 비워 둔 자리에 앉았다.
"어땠습니까?"
누이론트 백작은 서부와 북부에서 대치 중이던 타우 황제와 수도 황제 소속의 병력을 실어다가 이민족과 대치하고 있는 요지에 내려주고 온 참이었다.
서로 대치하던 병사들이 같은 배를 타고 남부로 오게 될 줄이야, 참 기구한 것이 운명이었다.
"16군단장과 21군단장을 만났는데, 그들은 이민족과 적극적으로 싸울 이유를 찾지 못하는 모습이었습니다."
16군단과 21군단은 모두 타우 황제의 세력권에 속해 있는 군단이었다.
내가 북진을 시작하면 타우 황제는 자신들과 대치하고 있는 그랑베르트 공작과 아버지의 세력을 제압하지 못한 채 나를 맞아야 한다.
그들은 이민족이 기세를 뻗치는 지금이 한숨 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오히려 이런 상태를 방조할 수도 있었다.
실제로 내가 나라드마가 포함된 이민족의 본대를 막는 동안 타우 황제 쪽은 자신의 세력권 내에서 천천히 서쪽이나 남쪽으로 이민족을 밀어내는 것이 약조된 큰 그림이었는데, 들어온 보고에 의하면 그들은 전혀 전진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쪽에 있는 이민족 부대장의 능력이 대단한 건지, 아니면 타우 황제 놈들이 일부러 격전을 피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쪽의 피해만 눈덩이처럼 불어 가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누이론트 백작에게는 이런 상황을 타개할 임무를 맡겨 둔 상황이었다.
"아버지께서는 잘 내리셨습니까?"
"예, 밤을 틈타 잘 내려 드렸습니다."
제뉴인군을 수도와 테르다마스의 중간 정도 되는 지점에 내려 그곳을 거점 삼아 이민족들의 보급로를 깨부수며 테르다마스로 합류하는 작전이었다.
비록 배의 수용 인원 때문에 현재 남쪽으로 온 제뉴인군은 많은 수가 아니지만, 끊임없이 배들이 강을 왕래하며 인원과 물자를 실어 나르고 있으니 금세 불어날 것이었다.
"테르다마스에서 보자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전에 이민족을 처리하고 먼저 올라오는 것도 환영이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하하하, 아버지다운 말씀이네요. 며칠 더 있으면 새로 건조된 배들이 합류할 것입니다. 수고스러우시겠지만 강에 계실 일이 많아질 것 같습니다."
발시안을 비롯한 제국 동부의 해상 도시에서 건조된 배들이 이쪽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그 배들 중에는 새로운 갑옷을 실은 배도 있었다.
반격을 위한 준비가 차곡차곡 쌓여 나가고 있었다.
"로하나스."
"예."
"에베군 일부를 실어 아버지께 합류시켜."
"알겠습니다."
"그리고…… 잠깐…… 눈 좀……."
열흘 간 쪽잠을 자며 버텨 왔던 나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잠에 잠겨 들었다.
***
"식량을 싣고 올라가던 내 딸이 습격을 받았소!"
나라드마의 곁에서 푸른 달 부족의 부족장이 격하게 외쳤다.
다른 부족장들이 푸른 달 부족장에게 진정하라고 했지만, 딸과 부족민의 시체를 확인한 그는 쉽사리 진정하지 못했다.
푸른 달 부족장이 가져온 천 쪼가리를 나라드마가 들었다.
"뭐지 이건?"
"생존자가 그린 거요. 습격한 놈들의 깃발에 그려져 있던 그림이라고 하오."
마치 아이가 그린 것같이 서툰 그림이 그려 있었다.
"헉!"
누군가가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다.
나라드마가 고개를 돌렸다.
나라드마가 사힘 변경백, 하마렐리온 드와이트를 죽인 후 그에게 투항한 많은 사힘 지방의 귀족 중 하나였다.
"이게 뭐지?"
나라드마가 천을 들고 그 귀족에게 들이댔다.
이름 모를 귀족이 눈치를 보며 천을 돌려 들었다.
강아지 같은 모습이 드러났다.
"급하게 그린 것 같지만…… 이건 제뉴인 공작의 문장이오."
"제뉴인 공작?"
"제국의 7공작임과 동시에 어떤 무기로든 오러를 발출할 줄 아는 인물이오. 그리고…… 카몰 후작의 아버지이기 하오."
"시안 놈의 아버지?"
나라드마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번졌다.
그는 전장 곳곳을 누볐음에도 시안이 등장하지 않아 굉장히 짜증이 난 상태였다.
나라드마의 입이 열렸다.
"이자를 사로잡으면 놈도 모습을 드러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