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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검사의 복수-132화 (132/180)

천상으로 향하는 별, 지상으로 떨어지는 별 (3)

"단장! 이거 위험한 거 아닙니까?"

송곳니 기사단의 부단장인 훌린 가비우스가 무기에 묻은 이민족의 피를 닦아 내며 단장인 한스에게 물었다.

제뉴인 공작과 송곳니 기사단을 비롯한 제뉴인군 일부가 야음을 틈타 세파라트강 근처의 작은 마을에 내린 것이 3주 전이었다.

세파라트강의 수많은 지류 중 서쪽으로 뻗은 지류를 타고 이동해 내렸기에 이곳은 이미 이민족들이 득실대는 곳이 되어 있었고, 제뉴인군은 상륙한 그날 밤부터 끊임없이 전투를 벌여야 했다.

"그랑베르트에 있을 때는 종일 경계만 서는 게 지겹다던 분이 누구셨더라?"

과묵한 한스 대신 패기 좋은 기사인 궤이르 프레이드가 부단장의 말을 받아쳤다.

송곳니 기사단의 일부가 시안을 따라나선 이후, 추천을 받아 송곳니 기사단에 들어온 궤이르는 가문 기사단에 매이지 않는, 이른바 '자유 기사' 중 실력으로 정평이 난 자였기에 송곳니 기사단에 들어온 것이 꽤 화제가 될 정도의 인물이었다.

30대 후반인 훌린과 궤이르는 서로 밉지 않게 투닥거리는 게 일상이었다.

"그때는…… 그때고! 지금 우리 꼴을 봐라! 거지꼴이지 이게!"

훌린의 말대로 제뉴인군의 상태는 엉망이었다.

상륙하고 이민족 부대를 습격한 것이 소문이라도 났는지, 근처의 이민족들이 죄다 몰려들고 있어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전투를 이어 가고 있었다.

누이론트 백작의 선단이 계속해서 물자와 인원을 실어 나르고는 있었지만 그것도 며칠에 한 번, 재수가 좋지 않으면 강변에 늘어선 이민족들의 집중 공격을 받아 물자도 제대로 내려놓지 못하고 가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제국에 이름 높은, 송곳니 기사단의 상징과도 같은 전체가 검은 갑옷도 이민족의 병장기를 막느라 이곳저곳이 우그러들어 있었다.

"쯧쯧쯧, 이래서 가문 기사단에 오래 있던 양반들은……. 부단장! 내가 사힘에서 정찰대에 잠시 머무를 때는 말이죠. 하루 종일 오러를 운용해도 힘들지가 않았다, 이 말입니다. 왜냐? 이민족들과 싸우다 보면 힘들다는 생각도 잊어버렸기 때문이지!"

"저놈의 옛날 소리, 젊은 기사들이 너를 피해 다니는 이유가 있다니까. 그리고 말이 좀 짧다? 아무리 동년배라고 해도 부단장인 내게 존중 정도는 하라는 게 단장의 명령이었잖아?"

"예이예이, 상호 존중해 드립죠. 부, 단, 장. 그리고 우리만 고생하나? 합류한 에베군도 똑같이 고생하는구먼. 안 그런가……요?"

똑같이 귀족 가문의 핏줄이었지만 금욕적으로 기사의 길을 걸어온 훌린과 거의 용병 비슷한 자유 기사로 자유롭게 살아온 궤이르는 서로 지독하게 안 어울린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각자가 서로에게 품고 있는 생각일 뿐, 다른 기사단원들이 봤을 때는 어릴 때부터 같이 자라온 친구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옆에서 이죽거리는 궤이르를 쫓아내고 다시 자리에 앉아 무구들을 정성스럽게 닦아 내던 훌린이 갑자기 버럭 짜증을 냈다.

"아무리 급하게 오더라도 종자 녀석은 데리고 왔어야 했는데! 싸우기도 바쁜 판국에 직접 무구 손질이나 하고 있고!"

그때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렇군. 급하게 내려오다 보니 생각을 못 한 부분이었어."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본 훌린이 놀라서 벌떡 일어섰다.

"각하!"

제뉴인 공작, 제로 몬트라우가 서 있었다.

다른 귀족들이 전장에 나서면 몸을 보호하기 위해 두꺼운 갑옷을 잔뜩 입는 것에 반해 제뉴인 공작은 움직이기 불편하다는 이유로 최대한 가벼운 장비를 걸쳤다.

그리고 검 한 자루를 옆에 차고, 단창을 등 뒤에 장비하고, 손도끼를 허리에 끼우고 전장으로 나섰다.

멋들어진 명품이 아니라 평범한 대장장이가 만든 것 같은 평범한 무기들이었다.

어떤 무기든 능숙하게 오러를 발출하는 그에게 다른 무기는 과분했다.

손이 비면 근처에 떨어져 있는 무기를 주워다 쓰면 그만이었다.

심지어 이곳에 도착한 후 겪은 몇 번의 전투에서, 제뉴인 공작이 거칠고 조악한 이민족의 무기로도 견고한 오러를 뿜어내는 것을 보고 아군과 적군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전장은 그에게 무기 창고나 다름없었다.

"나는 무거운 갑옷을 좋아하지 않으니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었어.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네."

"아, 아니, 제 말은 그런 의도가 아니라……."

"그렇지 않아도 다음 수송선엔 종자들과 대장장이를 비롯한 정비 인원들이 올 걸세. 그때까지만 고생해 주게나."

"예? 예! 너무 마음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뉴인 공작이 다른 인원들을 살펴보러 떠났다.

공작 앞에서 쩔쩔매던 훌린을 보고 웃겨 죽던 궤이르를 흠씬 두들겨 패 주러 훌린이 뛰어갈 때쯤, 초소에 올라가 있던 인원들이 크게 외쳤다.

"배다! 수송선이 온다!"

이것은 강변에 설치된 초소에 올라가 있던 인원의 외침.

"적습! 적습이다! 전원 대비!"

이것은 군영 최외곽에 설치된 초소에 올라가 있던 인원의 외침이었다.

제뉴인군과 에베군은 불평하면서도 재빠르게 무구를 장비하고, 전투 진형을 갖추었다.

다시 한번 무기들이 교차하고 거친 숨결이 얽혀 들었다.

생사가 뒤섞이는 전장에서, 제뉴인 공작은 시선을 느꼈다.

제법 거리가 되는 곳에 있는 야트막한 언덕에서 한 남자가 말에 앉아 팔짱을 끼고 있었다.

제뉴인 공작은 남자의 시선이 정확히 자신을 향해 있음을 알았다.

공작은 눈 쪽으로 오러를 운용해 그 남자의 모습을 자세히 보려고 했으나, 샤먼들이 무슨 술수를 부렸는지 남자의 모습이 정확하게 잡히지 않았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팔짱을 끼고 있는 남자의 팔 한쪽이 푸르게 물들어 있었다.

***

"역시! 놈이 이곳에 나타날 거라는 예측이 틀리지 않았습니다!"

에베군과 제뉴인군의 참모들이 모인 막사 안, 에이젤이 상기된 얼굴로 떠들었다.

그런 동생의 모습을 본 오그마가 차분하고 낮게 말했다.

"앉아 에이젤, 우리만 있는 것이 아니다."

무안해진 에이젤이 자리에 앉자 오그마가 상석에 앉아 있는 제뉴인 공작을 바라보고 말했다.

"아드님 되시는 분의 안목이 대단한 것 같습니다."

제뉴인 공작이 남쪽에 등장했다고 하면 자신이 전장에 나타나지 않아 몸이 달은 나라드마가 아버지를 노릴 것이라 생각한 시안이 일부러 이민족들과의 전투 경험이 있는 에베군을 이쪽으로 긴급히 실어 나른 것이었다.

공작인 자신의 아버지를 적진 한가운데 떨어트려 유인을 위한 미끼로 쓰는, 감히 생각도 못 할 정도로 과감한 전략이었지만 제뉴인 공작은 흔쾌히 그 작전을 승인했다.

아들이나 아버지나 제정신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오그마가 말을 이었다.

"공작 각하와 제뉴인군의 헌신과 희생에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오그마의 눈이 빛났다.

"놈의 목은 제가 취하겠습니다."

제뉴인군과 에베군이 진을 치고 있는 곳은 들어오는 적을 잡아먹기 좋은 구조의 지형이었다.

강변 근처의 범람원에 세워져 평탄한 지형이 대부분인 테르다마스와는 다른 지형이기에 시안은 이곳이 변수를 통제하기 쉽다고 판단했고, 그가 생각하는 결과는 나라드마의 죽음이었다.

"기회가 되면 그렇게 되었으면 하네. 자네 아버님의 죽음은 나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으니 말이야. 하지만 오직 그 기회를 만들기 위해서 움직이지는 않을 걸세."

"이해합니다."

정론을 말하는 제뉴인 공작이었지만 오그마는 다른 느낌을 받았다.

몬트라우 가문은 이름 높은 무가(武家), 현재 몬트라우 가문의 가주이자 제뉴인 공작인 제로 몬트라우 본인도 내로라하는 무인(武人)이었다.

오그마가 듣기에 제뉴인 공작의 말은 마치 '네가 죽인다면 어쩔 수야 없겠지만, 내 앞에 놈이 있으면 싸움을 걸겠다.'라는 무인의 호언으로 들렸다.

이미 몇 번의 전투에서 신분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전투의 일선에서 신들린 듯한 무의를 보여 준 공작.

그 모습을 직접 본 오그마는 나라드마의 목을 빼앗기지 않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했다.

"적의 세력이 많이 불어났나?"

제뉴인 공작이 참모 하나에게 물었다.

무려 대족장인 나라드마가 직접 행차했으니 대규모 부대라도 끌고 왔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정탐 결과 몇 개 부대가 합류한 것 같긴 하지만 눈에 띌 정도의 규모는 아니라고 합니다."

오그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배로 이동한 자신들과 그리 차이 나지 않는 기간에 나라드마가 이곳에 등장했다.

제뉴인 공작의 출현 소식을 듣고 이곳에 도달하기 위해 엄청난 속도로 기동했음이 틀림없었다.

아마 핵심 부대 중에서 기동력이 어느 정도 받쳐 주는 부대만 데리고 왔을 것이지만, 오그마는 그 사실만으로도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병력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본인의 존재 여부만으로 전장의 판도를 바꿀 수 있다는 자신감인가. 믿을 수 없군.'

지체하지 않는 행동력과 광오 할 정도의 자신감.

순간 오그마는 나라드마라는 거대한 압력이 자신을 짓누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음이 꺾이려는 찰나, 그에게 죽은 아버지와 형을 생각하며 오그마는 다시 한번 마음을 바로 세웠다.

어찌나 이를 악물었는지 혀끝에 아련하게 비릿한 피 맛이 맴돌았다.

굳어 있는 오그마를 향해 공작이 물었다.

"긴장했나?"

"아, 아닙니다."

"적당한 긴장은 나쁘지 않아. 놈의 퇴로 차단은 어떻게 되어 가지?"

"예정대로 도달했다는 소식입니다."

기분 좋게 '흐음!' 하는 콧소리를 흘린 공작이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섰다.

"야간에도 놈들이 들이닥칠 것 같긴 하지만 내일의 작전을 위해 다들 잘 쉬어 두게."

지휘 막사에서 나와 개인 막사로 돌아가는 공작을 보고 훌린이 한스에게 물었다.

"단장."

말의 갈기를 정리해 주고 있던 한스가 자신에게 말을 건 것이 훌린인 걸 보고 무심하게 답했다.

"말하게."

"각하 표정이 묘하게 즐거워 보이지 않으십니까?"

한스가 말의 목덜미에 얹어져 있던 손을 내리고 훌린에게로 몸을 돌렸다.

"자네한테 딸이 있던가?"

"예, 하나는 7살이고, 하나는 5살인데 어찌나 귀여운지 모릅니다. 제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얼른 모든 일을 마무리하고 돌아가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건 왜 물어보십니까? 단장도 드디어 딸의 귀여움에 대해 알아 버리신 겁니까? 평생 결혼은 안 하실 거라더니요?"

주절주절 딸 자랑을 늘어놓는 훌린을 향해 질리지도 않냐는 표정을 짓던 한스의 입이 열렸다.

"자네랑 자네 딸이 전쟁에 나갔는데, 딸이 전쟁 영웅이 되었다고 생각해 봐. 제국 전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대단한."

"아니, 각하 표정을 여쭤 봤는데, 대체 무슨 얘기를 하시는 겁니까?"

훌린의 답답하다는 표정과는 반대로 평소의 침착한 얼굴 그대로인 한스가 계속해서 말을 했다.

"그리고 자네와 딸이 너무 멀리 있어 몇 년 만에 본다고 생각해 보게. 만나기로 예정된 전날 밤, 자네 표정이 어떨 것 같나?"

잠시 생각하던 훌린이 답했다.

"엄청 기대되고, 생각만 해도 기분 좋고……. 어? 그 말씀은……!"

어느새 다시 말 쪽으로 몸을 돌린 한스가 훌린을 향해 말했다.

"떠들고 다니지 말게. 극비 사항인데 자네라 알려 준 거야."

놀란 훌린이 멀어져 가는 사이, 한스는 한 남자를 생각하고 있었다.

결혼을 하지 않은 자신이었지만, 마치 아들처럼 느껴졌던 기사가 이었다.

'그 녀석이 기사단의 부단장이라……. 쉽사리 믿기 어려웠는데 내일 녀석을 볼 수 있겠군.'

공작의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와 비슷한 미소가 자신의 입가에 걸린 것도 모르는 채 한스는 내일의 전투를 상상했다.

그리고 날이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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