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한 마검사의 복수-134화 (134/180)

천상으로 향하는 별, 지상으로 떨어지는 별 (5)

"아버지!"

시간이 정지했다.

제국의 공작이 이민족 대족장의 칼에 찔렸다.

그것도 자신의 진영 한복판에서.

모두가 혼란해하는 상황, 나는 더욱 강력하게 땅을 박찼다.

"죽여라! 살려 보내지 마라!"

누군가의 외침에 다시 시간이 흘렀다.

예상치 못한 일로 멈춰 있던 아군이 나라드마와 그를 보호하기 위해 따라 들어온 살수들을 향해 거침없이 오러를 발산하고 적의를 뿜어 댔다.

삽시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혼란한 가운데 나는 보았다.

아버지의 손이 허공에서 비틀대며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더듬거리던 아버지의 한쪽 손이 나라드마의 어깨에 가서 닿았다.

그리고 다른 손을 허리 뒤로 돌려 손도끼를 꺼낸 다음 마치 번개같이 나라드마의 머리를 찍었다.

그 찰나의 순간에 나라드마는 붙잡힌 상태에서 고개를 움직여 머리가 두 쪽 나는 것은 피했으나, 그의 목 바로 옆에 아버지의 도끼가 박혀 버렸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건지 나라드마는 자신의 어깨에 있는 아버지의 손을 떼어 내는 것에만 신경을 쓰고 있었다.

결국 아버지는 옆으로 천천히 쓰러졌고, 나라드마는 다른 살수 몇과 함께 다시 전장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내가 아버지께 도달한 것은 바로 그 직후였다.

기사들의 호위를 받은 채로 들것에 실려 후송되는 아버지의 곁에 내가 들러붙었다.

그 전에 투브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나라드마를 쫒아 줘!'

-네 곁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는 못 해!

'바로 갈게! 어서!'

투브는 쏜살같이 나라드마의 뒤를 쫒았고, 나는 아버지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다가섰다.

"아버지! 괜찮으신 겁니까!"

눈을 감고 있던 아버지가 눈을 떴다.

그리고 손을 들어 내 얼굴을 더듬었다.

"오래간만이구나."

"저 때문입니다! 제가 그런 무모한 작전만 안 세웠어도!"

그러자 아버지가 망토로 가려져 있던 상처 부위를 열어 보여 주었다.

정확하게 배와 허리를 관통한 줄 알았는데, 옆구리에만 상처가 있었고, 곡도가 들어가 망토가 찢어진 부분도 중앙이 아니라 외곽이었다.

내가 바라본 시점이 측면이었고, 너무 당황스러운 일이 벌어졌기에 차분히 보지 못한 것이 원인이었다.

"나는 괜찮다, 시안."

그래도 상처는 상처인지라 고통스러운 표정이 잠시 아버지의 얼굴에 스쳐 지나갔다.

심호흡을 길게 한 아버지가 내 뒷덜미를 잡고 끌어당겼다.

"아들아, 가서 놈을 죽이거라.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하, 하지만……!"

"아비는 걱정말거라, 너도 보았지 않느냐. 큰 상처가 아니다. 전투 중에 입게 되는 많고 많은 상처 중 하나일 뿐이야. 가거라! 어서! 놈이 멀어지지 않느냐!"

상처 입은 몸으로 어디서 그런 기운이 나는지 아버지가 나를 밀쳐 냈다.

나는 그 자리에 우뚝 섰다.

아버지를 호위한 기사들이 내 곁을 스쳐 지나갔다.

주위는 혼란했다.

기사들이 아군의 동요를 막고 있었지만, 이미 아버지가 실려 가는 것을 본 사람들이 많았다.

불길한 기운이 스멀스멀 기어오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오러를 잔뜩 끌어모았다가 한 번에 내뱉었다.

"대형을 유지하라!"

전장의 소음을 덮고 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불안한 얼굴로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던 아군 병사들의 고개가 앞으로 고정되었다.

그들이 다시 무기를 움켜쥐는 것이 보였다.

"우리는 오늘! 이곳에서 승리한다!"

잠시 간의 침묵 후,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쿵! 쿵! 쿵! 쿵!

오러를 공명시킨 상태에서 발로 땅을 찍는, 송곳니 기사단 특유의 의식, 사신의 발걸음이었다.

기사 몇이 시작한 그 행동은 빠르게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기사이냐, 병졸이냐, 제뉴인군이냐, 에베군이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오로지 여기서 살아 돌아가겠다는 의지로 뭉친 자들이 한 가지 행동으로 단합하고 있었다.

분명 느릿한 고동이지만 한 울림마다 피가 끓었다.

고양감으로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그때 내 앞에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웠다.

송곳니 기사단의 갑옷을 입고 있는 남자였다.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나는 그 사람의 눈만 보고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송곳니 기사단장, 한스였다.

"이곳은 저희가 맡겠습니다. 공작 각하의 말씀대로 놈을 따라가 죽이십시오."

나는 몸을 돌렸다.

나라드마에 대한 분노와 터질 듯한 고양감으로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런 내게 한스가 말했다.

"이 전쟁을 끝낼 수 있는 사람은 공자님뿐이십니다."

호흡을 가다듬어 조금 안정된 내가 그를 향해 말했다.

"그래도 후작인데, 공자님은 너무 옛날 호칭 아닙니까, 단장?"

그리고 그가 대답하기도 전에 난 나라드마와 살수들이 사라진 방향으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바로 투브에게 생각을 전했다.

'따라가고 있어?'

-빨리 와! 거리 한계가 아슬아슬해!

'그쪽으로 갈 테니까, 계속 따라가 줘!'

투브가 투덜거리는 소리가 전해져 왔지만 일단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상처 입은 야수는 살려 보내서는 안 된다.

더욱 흉폭해져 돌아오기 때문이다.

놈에게 남은 길은 죽음뿐이어야 한다.

***

나라드마는 생각했다.

'나는 분명 정확히 찔러 들어갔다. 그 짧은 시간에 몸을 틀어 급소를 피할 줄이야.'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제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가슴에 무언가 꽉 막힌 것처럼 답답했다.

나라드마는 속이 뻥 뚫리게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누군가 옆으로 다가왔다.

"대족장."

올빼미가 나라드마에게 물었다.

"상처가 깊습니다. 잠시 응급처치만이라도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제야 나라드마는 자신의 목 근처에서 솟아오른 피가 가슴을 흠뻑 적시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도끼는 직후에 바로 뽑아냈지만 상처가 꽤 깊었다.

손을 상처에 대자 끈적한 피가 묻어나왔다.

"됐다. 아직도 적진인데 내 처치를 위해서 멈추면 너희들이 죽는다."

이미 돌입한 둥지 자객의 절반 이상이 성난 적군에 의해 죽은 상황, 남은 인원이라도 살려 돌아가야 했다.

자신의 오만한 판단으로 인해 벌어진 일인 데다가 성공도 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나라드마의 속이 쓰려왔다.

자신이 중심을 지켜야 한다는 투클랍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수도로 가라는 아버지의 유언도 피어올랐다.

왜 하필 이런 상황에서 죽은 아버지가 떠오르는 것일까.

"부인도 있고, 아이도 있는데…… 떠오르는 게 노친네 둘이라……."

"예?"

"아니다. 계속 이동한다."

앞에 있던 기사의 머리통을 날린 나라드마가 가볍게 말했다.

상처에서 피가 다시 울컥 쏟아졌지만 그런 것을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남은 요원들이라도 살려 가기 위해 나라드마가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개의 모습으로 재빠르게 달려오고 있는 투브였다.

온통 새카만 저 개가 사실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죽음이 아닐까 생각한 나라드마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마음이 바뀌었다. 처치를 해라."

나라드마의 말에 올빼미는 의문이 들었지만 대족장의 말은 거부할 수 없었다.

바로 품에서 간단한 약과 처치 도구를 꺼낸 올빼미가 응급처치를 시작했다.

엄청난 고통이 전신을 통과할 것이 분명한데도 나라드마는 얕은 신음 하나 내지 않았다.

처치를 마친 올빼미가 몸을 돌렸으나 나라드마는 움직이지 않았다.

"올빼미."

"예."

"한 번만 말할 것이니 잘 들어라."

올빼미는 직감했다.

나라드마는 결국 대족장보다는 전사와 형제로 남으려고 하고 있었다.

"대족장!"

올빼미가 나라드마를 애타게 불렀으나 나라드마의 눈은 빠르게 다가오는 투브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의 입이 열렸다.

"브릿식을 불러들여라. 다음 대의 대족장은 브릿식이다. 네가 잘 보필해야 할 것이다. 투클랍에게 그를 잘 부탁한다고 전해라. 둥지의 아이들을 많이 잃게 해서 미안하다."

"살아야 합니다! 살아야 복수를 합니다! 살아남는 놈이 이기는 것입니다!"

"나는 그날 죽었어야 했다. 형제의 죽음을 눈앞에서 보고도 염치없이 살아 있었던 것이 부끄럽다."

"하우칼은 당신을 살리기 위해 죽었습니다! 대족장! 이곳은 당신이 죽을 곳이 아닙니다!"

"아마 유언일 것이다. 살아남아 잘 전해다오."

말을 마친 나라드마가 번개같이 올빼미를 공격해 기절시켰다.

둥지의 요원 하나가 와서 축 늘어진 올빼미를 받았다.

그에게 나라드마가 말했다.

"전 부족의 피해를 최소화하며 테르다마스까지 후퇴할 것을 명한다. 그리고…… 브릿식이 대족장에 오른다면 투클랍의 조언을 너무 고깝게 듣지 않았으면 한다고 전해라. 마지막으로 내가 놈을 죽이지 못한다면, 시안 놈과 싸우지 말라 전해라. 오로지 내실을 다지고, 부족 간의 결속을 도모해야 한다. 저놈이 죽기 전까지는 제국 내부로의 확장을 금한다."

결국 둥지의 모든 인원이 대족장을 뒤에 남겨 둔 채 떠나갔고, 나라드마는 적진에서 홀로 남아 추수하듯 적의 목을 베어 내기 시작했다.

많은 기사가 그에게 달려들었지만 그들의 목숨은 나라드마의 곡도에 묻은 몇 방울의 피로만 남았다.

거대한 그림자가 나라드마 위로 드리웠다.

늑대의 모습으로 변한 투브가 나라드마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달려드는 투브의 앞발에, 나라드마는 곡도를 들어 막았다.

엄청난 힘이 그를 덮쳤지만, 나라드마는 밀려나지 않았다.

응급처치만 해 놓은 상처가 벌어지는 것이 느껴졌으나 이미 나라드마는 몰아(沒我)의 경지였다.

그저 앞에 있는 것의 목숨을 빼앗겠다는 생각 하나만이 나라드마를 지배하고 있었다.

나라드마의 푸른 손이 투브의 발에 닿자 삽시간에 투브의 털이 푸르게 녹이 올랐다.

사람에게는 없던 현상이라 투브와 나라드마 모두 놀랐고, 투브는 뒤로 펄쩍 뛰어 거리를 벌리기까지 했다.

누군가 뒤로 물러난 투브의 등을 밟고 뛰어올랐다.

그리고 벼락처럼 나라드마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왔나?"

나라드마는 재빠르게 몸을 뒤로 물렸다.

그러는 와중에도 나라드마는 주위 적병의 목을 베는 것을 잊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나라드마가 있던 곳에 떨어진 시안이 그대로 나라드마를 향해 쇄도했다.

'이제는 피할 수 없다.'

자신의 상처를 노리고 들어오는 시안의 마나 소드가 나라드마의 눈에 들어왔다.

곡도를 들어 막으려 했으나 시안의 마나 소드는 나라드마의 곡도를 그대로 베어 냈다.

곡도의 파편이 떨어지며 쨍그랑 소리를 냈다.

베인 나라드마의 가슴에서 피가 후두둑 떨어졌다.

나라드마는 재빨리 땅을 구르며 이름 모를 병사의 무기를 집었다.

그의 숨이 거칠어지고 있었다.

시안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그 짧은 순간에 곡도를 놓고 몸을 뒤로 빼? 어지간히도 미쳤군."

나라드마가 내뱉었다.

"네 아버지보다는 못했지. 거기서 급소를 피할 줄은 상상도 못 했거든."

"긴장했나 봐?"

나라드마가 씩 웃었다.

"아니, 독을 묻혀 놨는데 그대로 즉사해 버리면 아쉽잖아. 천천히 시간을 가지고 고통에 몸부림치다 죽어야지."

시안의 표정이 굳었다.

시안이 나라드마에게 물었다.

"도망갈 수 있었을 텐데."

"어찌 사내가 같은 적에게 두 번이나 뒤를 보이지? 그건 제국 놈들이나 하는 짓이야. 그리고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네놈 머리에 칼을 꼽아 줄 기회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더라고."

나라드마가 죽음을 각오하고 있다는 것을 시안은 알아차렸다.

시안의 한 손에 마나 소드가 잡히고, 다른 손에 마법진이 전개됐다.

"그래, 너는 그런 남자였지, 나라드마. 잠시 잊고 있었어."

"나를 잘 아는 것처럼 말하는군, 역겨워."

시안이 달려드는 것과 동시에 나라드마 역시 몸을 움직였다.

그날 이민족은 패배했다.

그러나 양측 수장의 혈투는 이민족들이 패퇴한 후에도 계속해서 이어졌다.

둘의 싸움은 전쟁의 승패와는 관련이 없었다.

오로지 둘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이었다.

두 맹수의 투기에 다른 사람들은 접근조차 쉽지 않았다.

결국 제국의 별이 초원의 별을 무릎 꿇리고 나서야 제국군은 마음 놓고 승리를 부르짖을 수 있었다.

적수와 원수 사이

"달리 생각할 것이 없습니다! 놈의 사지를 자르고 배를 갈라야 합니다! 그 일은 제가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자식의 머리는 저희 가문에서 영구적으로 소유할 것입니다!"

에이젤이 흥분해서 소리쳤다.

공작인 아버지가 동석해 있는 자리에서 내뱉기에는 부적절한 말이었지만, 말을 꺼낸 사람이 아버지와 형을 잃은 에이젤이니만큼 다들 그러려니 하는 분위기였다.

오그마도 동생인 에이젤을 말리지 않고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이민족들의 남하로 인해 삶의 터전을 잃고,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에베 공작령에만 수십만을 헤아렸다.

나라드마에 대한 저들의 분노는 그른 것이 아니었다.

"너무 감정적으로 접근해서는 안 되네."

배를 빙 두른 붕대를 감고 있어 갑옷을 벗고 있는 아버지가 침착하게 에이젤을 말렸다.

아버지를 찌른 검에 독이 묻어 있다는 말은 나를 흔들기 위한 나라드마의 술수였다.

급소와 장기 들을 피해 찔린 덕분에 거동이 조금 불편한 정도에 그쳤다.

아버지의 말이 이어졌다.

"나라드마를 죽이는 것에는 찬성이지만, 굳이 그리 잔혹한 방식으로 처리해야 하나 싶네. 너무 궁지로 몰면 쥐도 고양이를 무는 법이니, 시체 정도는 이민족에게 돌려주는 것이 어떤가 싶네만."

아버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에베군 쪽의 인물들이 득달같이 반박했다.

"말도 안 됩니다! 영지를 유린한 놈의 시체를 돌려보내다니요! 후손들에게 뭐라고 말한단 말입니까!"

에베 공작 가문의 오랜 가신이자, 제국 내에서도 강경파로 손꼽히는 키타리안 후작이었다.

"놈을 직접 죽이지 못하는 것도 분통한데, 어찌 그리 가벼이 말씀하십니까! 부당한 처사입니다!"

그러자 제뉴인 쪽의 인물들이 공작 각하 앞에서 말을 삼가라며 키타리안 후작에게 반발했다.

키타리안 후작은 그런 것에 지지 않고 더욱 큰 목소리를 뿜어 댔다.

"제뉴인 공작께서 직접 병력을 이끌고 이 먼 곳까지 내려오신 것은 백 번, 천 번 감사한 일이지만, 이것은 각하께서 개입할 일이 아니십니다! 에베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이 이상은 영주와 귀족 들에게 부여된 자치권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행위입니다!"

아버지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배를 타고 멀리까지 와서 듣는 소리가 내정간섭이니 황당해하실 만도 했다.

호통 소리가 튀어나왔다.

"우리를 돕기 위해 멀리서 오신 분께 무슨 무례요!"

오그마가 키타리안 후작에게 일갈하는 소리였다.

키타리안 후작은 억울하다는 듯 오그마에게 무언가를 말하려했지만, 에베 공작인 사누스 서비어와 장남인 암루흐 서비어가 죽은 지금 오그마는 차기 에베 공작이 확실시되는 상황이었다.

아무리 후작이라지만 미래의 공작을 막 대할 수는 없었는지 키타리안 후작은 불만 가득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오그마가 아버지를 향해 입을 열었다.

"각하께서 염려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압니다. 나라드마를 죽여 이민족들의 반발이 거세지면 제뉴인군이 이곳에 오래 머물게 될 것을 걱정하시는 것이겠지요. 이해합니다. 그러나 저는 빈손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지아비를 잃은 저의 어머니와 형수, 아비를 잃은 제 조카의 얼굴을 봐서라도 빈손으로 돌아가지 못합니다. 상실의 고통을 겪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아십니까! 놈의 시체는 놈에게 지아비를 잃은 부인들의 손에 뜯겨야 합니다. 놈에게 아비를 잃은 아이들이 뱉은 침으로 범벅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조차 할 수 없다면 제가 무슨 낯으로 그 과부들과 고아들이 사는 곳의 공작이 될 수 있겠습니까."

오그마의 말이 끝나자 막사 안에는 정적만이 맴돌았다.

"제뉴인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각하께서는 어떻게 하셨을지 미루어 생각하셔서 판단을 내려 주시면 좋겠습니다."

분명 틀리지 않은 소리였지만 아버지의 표정은 뭔가 내키지 않는 듯했다.

나라드마를 사로잡은 이후 각지에서 이민족들의 움직임이 격해지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오고 있었다.

여기서 나라드마의 시체를 훼손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사태가 장기화될 것은 불을 보듯 뻔했고, 이미 발을 깊게 들인 제뉴인군은 빠져나갈 길 없이 장기 주둔을 하게 될 수도 있었다.

아버지가 도움을 구하듯 내게 물었다.

"네 생각은 어떠냐?"

모든 눈이 나를 향했다.

성공적인 툴리앗 원정에서 명을 받고 급히 올라와 절대적인 공을 세운 것도 나였고, 나라드마와 결전을 벌여 잡아들인 것도 나였다.

내 영향력은 절대적이라고 해도 좋았다.

내 한마디에 나라드마의 시체가 그나마 온전하게 돌아갈 것이냐, 아니면 잘게 쪼개져 유린당할 것인지가 결정될 것이었다.

"생각을 좀 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다시 막사가 시끄러워지기 전에 일어나 밖으로 나섰다.

나는 그곳에 있는 모두와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

군영의 한쪽, 내가 다가서자 병졸들이 나를 알아보고 군기가 바짝 든 경례를 보였다.

병졸들의 뒤쪽으로는 마법사들이 보였다.

나라드마가 갇혀 있는 곳을 향해 마법사들이 다양한 마법을 유지하는 중이었다.

테르다마스 내부에 있는 감옥을 개조해 나라드마를 가두어두고 있었다.

테르다마스 앞에 진을 치고 있던 이민족들은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멀리 후퇴한 뒤라 가용한 모든 병력을 나라드마 감시에 쓰고 있었다.

전장에서 나라드마가 보여 주었던 위력 때문에 삼엄할 정도의 경비가 그를 24시간 감시했다.

그곳에서 에베군 복식을 한 장교와 귀족 몇이 나왔다.

그들의 손에는 피 묻은 몽둥이가 들려 있었다.

나라드마에게 손을 대지 말라는 명을 내렸지만, 저들에게 내 명은 멀고, 간수와 마법사를 압박하는 길은 가까웠을 것이다.

그들은 아직 나를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다.

내 뒤를 따르던 로하나스가 그걸 보고 앞으로 나섰다.

"군령을 무엇으로 알고……!"

그런 로하나스를 내가 제지했다.

"놔둬. 죽이지 않는 것만 해도 많이 참는 거야."

장교와 귀족 들이 사라지고, 나는 감옥 안으로 들어섰다.

몇 겹의 철문과, 수십의 인원과, 마법사들의 당부의 당부를 통과하고서야 나라드마 앞에 도달할 수 있었다.

특수한 구속구로 손발을 봉인한 것도 모자라 사지를 당겨 벽에 고정하다시피 묶여 있는 나라드마가 내 앞에 있었다.

하나 남은 외눈마저 퉁퉁 부어 있었고, 몸에는 상처가 없는 곳이 없었다.

나와 벌였던 결전의 여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상처들이었다.

벌겋다 못해 시퍼렇게 변한 나라드마의 눈두덩이가 움찔했다.

그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죽여라."

나라드마가 온몸을 뒤틀었다.

그때마다 벽과 나라드마의 사지를 연결하고 있는 굵은 쇠사슬이 철그렁거리며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자아냈다.

"나를 죽이란 말이다!"

그가 몸을 뒤틀수록 구속구는 그의 팔목과 발목을 조였고, 피가 줄줄 흐르고 나서야 나라드마의 발악이 멈추었다.

"쉽게 죽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너무 순수한데?"

그대로 나라드마를 바라보며 내가 말했다.

"로하나스, 바깥의 마법사들을 제외하고 경비 인원들을 물려. 둘만 이야기하고 싶다."

잠깐 머뭇거리던 로하나스는 이내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나라드마의 구속구와 연결되어 있는 쇠사슬의 길이를 늘였다.

벽에 거의 밀착되다시피 붙어 있던 나라드마가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는 낮은 신음을 내며 바닥에서 꿈틀거렸다.

"네가 죽으면 어떻게 될까? 한창 그걸로 논의 중이거든. 첫 번째 선택지는 사지뿐만 아니라 몸의 마디마다 토막 내서 전쟁에 참여한 귀족들과 부대에 전승품으로 나누어 주는 선택지. 아마 네 머리와 푸른 팔 그리고 외눈 정도가 가장 인기 있는 부위겠지. 에이젤은 아예 네 머리를 다 가져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니까."

오랫동안 매달려 있다 몸이 풀린 탓인지 사지를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있는 나라드마를 향해 계속 말했다.

"두 번째는 그나마 낫지. 아버지께서는 네 시체를 이민족들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는 입장이시거든. 적어도 시신이 훼손될 일은 없지 싶네. 네 아랫것들이 네 시신을 받고 얌전해지느냐는 좀 다른 문제이긴 하지만."

비척비척 몸을 일으켜서 벽에 기대앉은 나라드마에게 다가갔다.

간신히 목을 가눈 그의 시선이 나를 향해 있었다.

"나라드마, 죽음을 아나?"

그의 눈빛이 떨렸다.

"죽여 달라고 말하는 사람은 많아. 하지만 그중 죽을 때 웃는 사람이 몇이나 있지? 죽음을 원하는 사람은 없어. 원해 봐야 입으로만 원할 뿐, 속내는 누구보다 살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이지."

"마치 죽음을 아는 것처럼 말하는군."

알지.

너무 잘 알지.

그 죽음이 나를 복수귀로 만들었으니까.

그리고 본론을 꺼냈다.

"나라드마, 나는 너를 알아. 너는 죽기에 아쉬운 인물이야."

과거의 삶, 현재의 삶.

나라드마는 내가 겪었던 수많은 사람들 중 내가 진심으로 경탄한 남자였다.

"내게는 너를 살릴 힘이 있어. 모든 걸 잊고 나를 섬겨. 죽어서 남는 건 썩어 가는 시체뿐이야. 살아서 나를 도와.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내가 돕겠어."

그렇게 나를 괴롭혔기에, 나는 나라드마를 죽이고 싶어 했던 것만큼, 어쩌면 그 이상 그의 죽음을 원치 않고 있었다.

나라드마를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의 능력이라면, 내가 가진 병력의 절반을 뚝 떼어 지휘를 맡겨도 아깝지 않았다.

나라드마가 고개를 떨궜다.

피식.

실소가 흘렀다.

피식, 피식.

실소는 이내 광소가 되어 사방을 울렸다.

한참을 미친 사람처럼 웃던 나라드마가 고개를 들었다.

"시안, 나도 네게 비슷한 것을 느꼈다. 네가 내 부하였다면, 네가 우리 부족이었다면, 심지어 네가 내 형제가 되는 꿈도 꾼 적이 있었다. 그 꿈에서 우린 앞을 막는 것들을 부수고! 세계를 지배했다. 그러나 현실에서 너와 나는 다른 옷을 입고 마주할 뿐이었지."

나라드마가 몸을 뒤틀자 쇠사슬이 철그렁거리는 소리가 따라왔다.

"네 제안을, 스스로는 대범하다 생각하고 있겠지? 개소리! 너는 그저 무엇이 중요한지를 잊은 채 네가 생각하는 것만을 향해 달려가는 괴물일 뿐이다! 주위의 것들을 먹어 치우면서 종국에는 본인마저 먹으려드는 아귀란 말이다!"

나라드마는 짐승이 포효하는 것처럼 말을 쏟아 냈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 현실에서 너는 내 형제와 동포 들에게 죽음을 선사한 적의 우두머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말머리를 함께하고 대륙을 누비는 형제가 아니란 말이다! 내게 너는 죽여야 할 대상이다! 머리를 숙여야 할 대상이 아니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물 위에서 부유하다 갑자기 발에 땅이 닿은 것만 같았다.

그래, 나라드마는 내게 속할 사람이 아니었다.

연이은 성공으로 인해 내가 안일했다.

연민과 아쉬움을 버리고 앞을 향했어야만 했다.

정신을 차렸을 땐 나라드마의 왼손이 지척에 다가와 있었다.

너덜거리는 구속구와 뽑혀 나와 그의 왼손에 딸려 오는 쇠사슬이 눈에 들어왔다.

다음 순간 나라드마의 가슴에 마나 소드가 꽂혔다.

나를 향해 매서운 기세로 날아오던 나라드마의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쇠사슬이 땅을 긁는 소리가 귀를 긁었다.

"푸헉!"

나라드마의 입에서 쏟아진 피가 내 팔을 적셨다.

"그래……. 이 정도는 되어야 대족장의 적수 아니겠는가."

나라드마의 몸이 차갑고 어두운 감옥의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어둠 때문인가, 그의 입에 옅은 미소가 걸린 것도 같았다.

확인해 볼까도 싶었지만 더 이상 그의 앞에 있고 싶지 않았다.

밖으로 나오니 로하나스가 내게 달려왔다.

"각하! 이 피는 다 어찌 되신 겁니까!"

로하나스의 물음에는 답하지 않았다.

여전히 손을 타고 뚝뚝 흐르는 나라드마의 피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나라드마의 시체를 잘 수습해서 이민족들에게 보내. 그들에게 3일의 말미를 준다는 말도 같이."

"말미라 하심은……."

"에베 공작령 밖으로 퇴각할 기한. 이후에 남겨진 자들은 모조리 죽게 될 거야."

로하나스가 알겠다는 말을 하고 주위 병사들과 함께 감옥으로 뛰어 들어갔다.

막사에 와서 의자에 앉았다.

아직도 손에 묻어 있는 나라드마의 피로 책상에 나의 문장을 그렸다.

성공에 매몰되어 나의 본질을 잊고 있었다.

나라드마는 마지막 순간, 내 본질을 정확히 짚어 낸 셈이었다.

나는 아귀이자 복수귀였다.

복수만 할 수 있다면, 스스로가 집어삼켜지는 것은 아무렇지 않았다.

탕!

나라드마의 피로 문장을 그렸던 곳에 손바닥을 내리쳤다.

이제 그곳엔 나라드마의 피로 그려진 나의 문장은 없었다.

복수를 위한 희생양의 피로 그려진 나의 흔적만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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