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잡다단 (1)
기분이 좋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어두운 감옥이 펼쳐졌다.
나는 마치 제3자가 된 것처럼, 나라드마와 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내 앞에 있던 나라드마는 변함없는 나라드마였지만, 나라드마 앞에 선 나는 내가 아니었다.
판이 자신의 뜻대로 흘러간다는 자만감에 가득 찬 돼지.
그것이 나라드마 앞에 있는 자의 모습이었다.
나라드마가 내 제안을 수락할 리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를 사로잡지 말았어야 했다.
그냥 전장에서 죽이는 것이 나라드마를 존중하고, 아군을 위한 길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알량한 자만과 감상에 빠져 그리 하지 못했다.
나라드마의 말이 머릿속에 울렸다.
-내게 너는 죽여야 할 대상이다!
그의 왼손이 나를 죽이기 위해 다가오는 느낌이 생생했다.
어둡고 습한 감옥의 공기, 쇠사슬이 벽과 바닥을 긁으며 내는 마찰음, 나라드마에게서 풍겨 나오던 역겹고 퀴퀴한 냄새까지, 몇 분도 되지 않는 시간이 하나하나 머릿속에서 되풀이되고 있었다.
죽은 자는 나라드마였고 살아 있는 자는 나였지만 그 순간의 승자는 나라드마였다.
수치와 분노, 그 어디쯤에서 신음이 기어 나왔다.
"큭……!"
적장을 죽이고, 이민족이 물러간 것을 기뻐하는 함성이 온 군영을 뒤덮고 있었지만 나는 그 함성 속에 녹아들지 못했다.
나라드마에 대한 열패감이 나를 뒤덮고 있었다.
-등신 같네.
나락에 빠져 있는 내 모습을 보고 투브가 나를 향해 한마디를 했다.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들어 투브를 바라봤다.
녀석의 노란 눈동자가 나를 쏘아 보고 있었다.
-며칠 동안 나가지도 않고, 꼬락서니가 그게 뭐냐? 연인이라도 죽었어?
"시끄러워."
-누구든 다 네 말에 귀 기울이고, 알았다고 하니까 나라드마도 그럴 줄 알았나 봐? 후작 나으리?
"시끄럽다고 했어."
투브가 훌쩍 뛰어 긴 탁상에 올라갔다.
그리고 한 발 한 발 나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녀석의 몸에서 살기가 피어올랐다.
원래의 모습인 늑대 형태도 아니고, 조금 큰 개만 한 크기였는데도 압박감이 몸을 옥죄었다.
전장에서 투브 앞에 있는 적들이 이런 감정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피어오를 때쯤, 이미 투브는 내 지척에 와 있었다.
-네 목표는 나라드마를 죽이는 것이었나?
간신히 입을 열었다.
"……아니."
-그럼 왜 그딴 표정을 짓고 있지? 인생의 목표를 다 이룬 노인이 허무감에 젖어 있는 것 같은.
"애초부터 홀로였고, 강했던 너는 몰라! 나라드마는……."
말문이 턱 막혔다.
나라드마는 내게 무엇이었을까.
그는 마지막 순간 나를 보고 자신의 적수라고 했다.
나에게 나라드마는 적수 이상이었다.
부러워했고, 친근감을 느꼈고, 동시에 죽이고 싶었고, 넘어서고 싶었다.
-내가 아는 시안은 자신이 설정한 목표에 닿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놈이야. 지금처럼 작은 봉우리 하나 넘었다고 감상에 젖어 있는 놈이 아니라!
쾅!
투브가 본래의 모습으로 변했고, 거대해진 투브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책상이 박살 나 버렸다.
"각하!"
로하나스와 다른 인물들이 뛰어 들어왔으나 나와 투브를 보곤 더 이상 접근하지 못했다.
-명심해. 내가 별다른 저항 없이 네가 하자는 대로 하는 건, 지금까지 내가 봐 왔던 너의 행적이 흥미롭기 때문이야. 지금처럼 따분하고 짜증 나는 걸 참아가면서 고분고분할 생각은 없어. 네 할 일을 해.
자기 할 말을 마친 투브가 몸을 작게 만들곤 휙 하니 막사 밖으로 나가 버렸다.
의자 뒤로 목을 젖히고 한쪽 팔을 들어 눈에 얹었다.
예전 기억이 떠올랐다.
분명 투브에게 이렇게 채찍질당한 때가 있었다.
귀족들이 모인 연회 직후였던가.
나도 모르게 피식피식 웃음이 나왔다.
손을 내리지 않은 채 말했다.
"로하나스."
"예!"
"다 불러 모아. 앞으로의 방향을 논의한다."
로하나스의 얼굴이 밝아졌다.
나라드마를 죽이고 바로 막사로 돌아온 뒤 며칠 동안이나 아무 명령이 없었으니 내심 불안했던 것이 아닐까.
마법을 사용해서 투브가 망가트린 책상을 원상 복구시켰다.
까칠하긴 해도 참 쓸모 있는 녀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본인은 싫어할 테지만 강아지 모습의 투브를 안고서 둥개둥개라도 해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 정신 차리라고 일부러 그런 거지, 짜식.'
-놀고 있네. 가끔 네 생각과 시야를 공유한다고 했어, 안 했어? 갑자기 시커먼 남정네 생각이 떠오르면 얼마나 기분 나쁜지 알아?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생각하란 말이야. 응? 그레이스도 있고, 오델리아도 있고, 캐슬린도 있잖아!
마지막 이름에 인상이 찌푸려졌다.
투브는 모른다.
여동생을 생각하는 오빠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
테르다마스 중앙에 위치한 청사로 향하는 길, 로하나스가 내 쪽으로 몸을 기울여 빠르고 작게 속삭였다.
"공작 각하께서 오십니다."
몸을 돌려 보니 아버지가 한스와 다른 귀족들을 대동하고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재빠르게 길 한쪽으로 비켜섰다.
내 앞까지 다가온 아버지가 주위의 귀족들을 향해 말했다.
"아들과 이야기를 좀 하고 싶은데."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아버지에게 연이라도 대 볼까 엉겨 붙던 에베 지방의 귀족들이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뒤로 물러섰다.
내가 아버지의 뒤에 섰다.
그러자 아버지가 장난스럽게 뒤로 한 발 물러섰다.
나도 다시 몸을 뺐다.
"후작이 공작과 나란히 걸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만든 법도이고, 너와 내가 부자 관계인 것은 하늘이 만든 법도인데, 어떤 것이 우선한다고 생각하느냐?"
아버지가 농을 걸었다.
다른 귀족들에게는 절대 하지 않을 농담이었다.
설령 다른 귀족에게 했다손 치더라도 그 냉엄한 제뉴인 공작이 이런 농담을 했다고 믿을 귀족은 없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아버지와 발을 맞춰 걸었다.
흐뭇한 웃음이 아버지의 얼굴에 퍼졌다.
내 옆에 있던 투브가 앞으로 나서서 걷기 시작했다.
많은 귀족들과 장교들이 검은 개 뒤를 따르는, 기묘한 행렬이 완성되었다.
"두문불출 한다길래 밥은 잘 먹고 있나 걱정했는데, 생각보다는 얼굴이 좋아 보이는구나."
"생각할 것이 있었습니다."
"사적인 생각이었느냐, 공적인 생각이었느냐?"
"공적이었지만 사적으로 끝난 생각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더 묻지는 않으실까 걱정했지만 아버지의 다음 말은 내 예상을 크게 벗어난 것이었다.
"그렇다면 되었다."
오히려 내가 물었다.
"더 묻지 않으십니까?"
아버지의 입 근처가 들썩였다.
분명 뭔가 물어보고 싶어 하시는 것 같았다.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짓던 아버지가 내게 말했다.
"아니다. 일라이자가 출발 전에 내게 당부하더구나. 너도 성인이니 생각이 있을 것이라고. 네가 먼저 말하지 않는다면 억지로 묻지 말라더구나. 게다가 공적인 일이 얽혀 있다고 하니 더더욱 그래야겠지."
가족들에게 만큼은 항상 관심을 쏟는 아버지가 혹시나 나를 불편하게 할까 봐 어머니가 미리 당부해 두신 모양이었다.
역시 어머니는 아버지를 꽉 잡고 계셨다.
어머니와 제뉴인 상황을 아버지의 입을 통해 듣다 보니 어느새 테르다마스 청사였다.
제뉴인군과 에베군, 카몰군의 지휘부로 쓰이고 있는 청사 연회장으로 들어섰다.
수뇌부를 위해 비워진 긴 탁자를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상석에 앉은 아버지를 필두로 다들 재빠르게 자신의 자리를 찾았다.
이민족이 떠난 곳을 순회하러 떠난 오그마와 에이젤의 대리로 남겨진 키타리안 후작에게 아버지가 물었다.
"이민족들이 점령하고 있던 곳의 피해는 좀 어떻다고 하오?"
"문제없습니다. 2~3년만 지나면 이전보다 더욱 강성해질 것입니다."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회의에 참가하기 전에 본 그동안에 들어온 정보를 요약해 온 보고서에 따르면 에베 지역의 북부는 말 그대로 쑥대밭이었다.
이민족들이 점령하고 있을 때도 극심한 착취를 당했지만, 그들이 사힘 지방으로 물러날 때 양민들을 학살하고 건물들을 불태운 탓에 10년이 지나도 이전과 같은 정도로 회복은 힘들 것이라는 의견이 있었다.
키타리안 후작은 괜한 허장성세를 부리고 있었다.
후작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연이은 전쟁과 그에 따른 징집으로 남부의 정세가 어지러운 이때에 북부에 가까운 제뉴인군이 이곳에 머무는 것은 정치 역학적으로나 지역 정서적으로나 굉장히 불합리한 일입니다. 에베 공작 가문 적장자의 대리인으로서 제뉴인 공작 각하께 깊은 감사를 표하는 동시에 각하의 빠른 결정을 기다리고 있음을 알려 드립니다."
완고하지만 확실한 축객령이었다.
그 말을 들은 제뉴인 측에서 즉각 몇몇이 반박했다.
"공작 각하께 이 무슨 무례요!"
"우리가 없었다면 지금쯤 에베에는 이민족들만 득실거렸을 거요!"
각 측의 설전으로 잠시 연회장이 시끄러워졌다.
"크흠!"
아버지의 헛기침이 있고 나서야 연회장이 조금 잠잠해졌다.
"후작의 말이 틀림이 없소."
그 말에 에베 측 인사들의 얼굴이 밝아지고 제뉴인 측 인사들이 아버지께 뭐라 말을 올리려 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말은 바로 이어졌다.
"그러나 어폐가 좀 있는 것 같소. 나는 지근거리에 있는 그랑베르트가 역도들의 손에 침탈당해도 움직이지 않았소. 그들이 강력하다 해도 전력을 다하면 얼마든지 막아 낼 자신이 있기 때문이오. 그런 내가 에베까지 온 것은 에베군을 돕는다거나, 내정간섭을 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저 아들의 얼굴을 보기 위함이었소. 그 과정에서 뱃놀이도 했으니 참으로 즐거운 유흥길이었소. 후작은 한때의 놀이를 두고 너무 의미를 부여하지 말기 바라오."
킥킥거리는 웃음이 제뉴인 측에서 터져 나왔다.
'내가 너희를 도우러 온 줄 아냐? 아들의 얼굴이나 보러 온 김에 겸사겸사 처리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은 놀면서도 그 정도는 가뿐하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노골적으로 무시를 당한 키타리안 후작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지만 본인이 먼저 던져 놓은 것이 있어서 그런지 대꾸를 하지 못했다.
"그리고 걱정하지 않아도 곧 떠나 드리겠소. 남부의 습한 바람을 오래 맞았더니 아침마다 관절에 물이 차는 기분이라오. 언제 한번 제뉴인으로 초대할 터이니 부디 사양 말고 와서 제뉴인의 청량한 공기를 느꼈으면 좋겠소."
그리고 아버지가 내게 고개를 돌려 물었다.
"시안, 무슨 말이 하고 싶어 모두를 불러 모은 것이냐?"
그 말과 동시에 연회장에 있는 모든 눈이 내게 집중되었다.
이민족의 수장을 죽이고, 이민족을 격퇴했음에도 총대장이 아무 말도 없으니 다들 궁금하긴 했을 것이다.
"두 명의 황제가 맺은 협정, 얼마나 갈 거라고 보십니까?"
모두의 얼굴에 미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이민족으로 인해 맺은 임시 협정이니 이민족의 세력이 사힘 지방 안쪽으로 축소된 지금은 협정이 파기되는 것이 맞았다.
그러나 두 세력 다 아직까지는 이민족을 제국 밖으로 밀어내기 바빠서 아슬아슬한 힘의 줄타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누군가가 말했다.
"어쩌면 이대로 분리될 가능성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몇몇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산탄다르를 제외하면 제국 생산량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남부였다.
그런 남부는 현재 속해 있는 두 개의 공작령, 리히트와 에베가 엄청난 피해를 입었고, 툴리앗 원정으로 인해 생산력을 담당해야 할 장정들이 복무를 하고 있었다.
생산 기반이 무너지기 직전이라는 소리였다.
내전이 장기화되면서 비단 남부뿐 아니라 동부와 북부에서도 불만의 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수도 황제보다 상대적으로 적은 영토를 차지하고 있는 타우 황제 측도 문제가 컸으면 더 컸지, 작지는 않을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은 두 명의 황제가 서로를 인정하지 않을까 하고 조심스럽게 짐작하고 있었다.
사상초유의 일이겠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 중 생귀니엘 서비어나 바그안트 서비어를 직접 본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
둘 다 직접 만난 적이 있는 내 답은 '전혀 아니올시다.'였다.
가지고 왔던 서찰을 품속에서 꺼내 아버지에게 드렸다.
서찰을 펴 본 아버지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그리고 옆에 있던 키타리안 후작에게 서찰을 넘겼다.
서찰을 읽는 키타리안 후작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대체 폐하께서는 무슨 생각이시랍니까!"
거의 던지듯이 서찰을 내던진 키타리안 후작이 분노에 차서 내뱉었다.
타우 황제의 세력이 사힘 지방 수복을 위해 군사력을 집중하는 사이 제뉴인, 에베, 카몰 연합군은 병력을 최대한 징발해 타우를 향해 진격하라는 내용이 황제의 직인과 함께 쓰여 있었다.
내가 이끈 카몰군은 그동안 피해를 최소화하며 전투를 했음에도 손실 병력의 수가 꽤나 많았다.
이민족과 대대적으로 전면전을 하고, 심지어 수장인 에베 공작까지 죽었던 남부, 특히 에베의 피해는 말할 것도 없었다.
황제는 복구에 전념해도 부족할 지역에 징발과 북진을 명하고 있었다.
키타리안 후작이 잔뜩 힘을 준 탓에 구겨진 서찰을 내가 챙겨 접었다.
"폐하께서는 아직 모르시는 게지요. 복잡다단해진 상황이 황제의 자리를 흔들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