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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검사의 복수-136화 (136/180)

복잡다단 (2)

내 말에 몇몇의 얼굴에는 흥미가, 몇몇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스쳐갔다.

으레 황제를 논할 때는 무소불위, 유아독존이라는 말이 그 아래를 탄탄히 받치고 있었다.

그것은 이전부터 그랬고 앞으로도 그래야만 하는, 제국의 절대 법도와도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제국이라는 거대한 체제가 제대로 작동할 때 통용되는 질서일 뿐, 지금처럼 각지의 유력 귀족들이 주둔군과 손을 잡고 군벌이 되어 버리고, 변경백이 왕을 칭하고, 타국의 침략을 받는 제국에 어울리는 질서는 아니었다.

설령 내전이 끝나더라도 제국이 이전의 제국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것은 이미 많은 자들이 직감하고 있지 않을까.

"말을 중히 하도록 해라."

아버지가 엄하게 나를 향해 말했다.

생각으로 품고 있는 것과 그것을 말하는 것의 무게감은 크게 다르다.

더욱이 나는 이 전국(全局)에서 가장 중심적인 인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에, 내 말 한 마디는 다른 사람의 열 마디 이상의 파급력을 지니고 있었다.

아버지는 내 말이 실수라고 생각하고 계신 모양이었다.

"말을 중히 해야 하는 것은 제가 아닙니다. 황제 폐하이시지요."

"시안!"

아버지의 호통에도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제국의 만물은 황제를 향해 충성을 바쳐야 합니다. 그렇다면 황제는 자신을 숭앙하는 자들을 아끼고 보호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민족이 제국 경계를 넘어 들어온 이 초유의 사태에서 황제 폐하께서는 무엇을 하셨습니까? 많은 군단들이 귀족들과 결탁했다지만, 아직 수도 주위의 군단들은 폐하께 충성을 맹세하고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어째서 그 군단들에게 명령을 내리시지 않는 겁니까? 고통받는 나의 백성들을 지켜라! 용맹히 싸워 이민족에게 유린당한 땅을 수복하라! 왜 폐하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제 앞에 계신 겁니까? 이 자리에서 공을 치하하는 것은 아버지가 아니라 황제 폐하셨어야 합니다!"

내 말은 틀린 것이 하나도 없었다.

황제는 수도방위병단을 비롯한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한 병력을 단 한 명도 움직이지 않았다.

아버지도 내가 요청해서 내려온 것이지 황제는 아무 말도 없었다고 한다.

황제에게는 아주 좋은 기회였을 것이다.

이민족을 이용해 공작령이 두 개나 있는 땅을 망가트리고, 내 힘도 꺾어 놓을 좋은 기회.

그는 그저 이 내전 이후 자신의 권세를 강화하려는 생각에만 급급했다.

"폐, 폐하께서는 우리를 신뢰하셔서 굳이 대군을 움직일 필요가 없다고……."

키타리안 후작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며 발을 빼려고 했다.

실소가 나왔다.

"많은 영지가 불타고, 심지어 나라드마를 직접 보셨으면서 그런 말이 나오시오? 두 번 신뢰했다가는 이민족에게 모든 것을 내어 주었겠소?"

"더 이상은 듣지 않겠소! 아무리 도원수이고 총대장이라 해도 더 이상의 발언은 역심(逆心)이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겠소! 영명하고 자애로운 황제 폐하……!"

키타리안 후작은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그의 몸이 허공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마법으로 들어 올린 그의 몸을 내 앞으로 끌어왔다.

모두가 놀라 벌떡 일어났다.

"영명(英明)? 자애? 나도 한때는 그렇게 생각했었지. 그러나 그랬던 사람은 지금 없다. 나를 보고도 느끼는 것이 없나, 후작? 그대가 황제라면 내전이 끝나기도 전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을 타국으로 원정을 보내겠는가? 성공적인 원정을 마친 장군을 일개 호위대장으로 만드는 것은? 내가 지은 죄라고는 능력을 발휘한 것뿐이다. 그대처럼 능력도 없으면서 빽뺵 대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크게 소리 질렀다.

"그만!"

마법을 없애자 공중에 들려 있던 후작이 바닥에 떨어지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키타리안 후작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낮게 신음했다.

그의 신음 외에는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한숨을 길게 쉰 아버지가 말했다.

"회의는 여기까지요. 제뉴인군은 일주일 이내에 카몰 수군의 도움을 받아 돌아갈 것이오. 그 외의 일은 에베 안에서 해결하도록 하시오."

모두가 재빠르게 일어섰다.

당장이라도 이곳을 벗어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버지가 나를 향해 말했다.

"나 좀 보자꾸나."

***

"가장 믿음직스러운 지인들 간에도 함부로 하지 못할 말을 그런 자리에서 하다니 대체 무슨 생각인 것이냐?"

테르다마스 한쪽에 마련된 처소에서 아버지가 나를 꾸짖었다.

"쉬이 하지 못할 말이지만 아예 하지 못할 말은 아니지 않습니까."

아버지의 얼굴이 더욱 굳어졌다.

나는 말을 이어 갔다.

"굳이 제 얘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피해에 신음하고 있는 지역에 병력을 징발하라 하는 것이 군주가 내릴 명입니까? 캐슬린은 어떻고요! 듣자하니 시찰단으로 적국에 가는 것과 전장에 차출되는 것 중 하나를 고르라고 했다던데, 캐슬린이 아무리 마법사라지만 공작 가문의 여식입니다. 이런 대우는 가당치도 않습니다."

캐슬린의 이름이 나오자 아버지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지혜롭고 용맹하신 분이셨습니다. 적어도 제가 기억하는 '2황자'는 그랬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아버지가 보시기에는 과연 그분이 지금도 지혜롭고 용맹합니까?"

깊은 눈으로 한참이나 나를 바라보던 아버지의 입이 열렸다.

"내가 물어본 것은 그것이 아니지 않느냐."

"황제에 대한 환상을 깨야 합니다. 에베 지역은 수장을 잃고 피해를 많이 입은 곳입니다. 황제의 무자비한 처사에 불만을 가질 것입니다. 게다가 가장 부당한 처우를 당한 제가 직접 그렇게 열을 냈으니 이 일은 분명 빠르게 퍼질 겁니다."

아버지의 눈빛이 바뀌었다.

"일부러 그리했다는 말이냐?"

"예, 황제의 영향력을 축소해야 합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긴 세월 동안 만들어진, 제국인들의 머릿속에 있는 '황제의 동상'을 깨는 것입니다. '서비어, 특히 황가는 신이 아니라 추악한 욕망을 가진 인간이다.' 이것이 심어지는 순간, 황가는……."

'몰락'이라는 말을 하려다 말을 고쳤다.

"힘을 많이 잃을 것입니다."

잠시 간격을 둔 뒤, 다시 아버지가 내게 물었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너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냐?"

"제국을 안정시키고 모두가 일상으로 되돌아갔으면 하는 것이 제 바람입니다."

또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내가 하는 생각은 대부분 복수를 위한 것이었다.

"그것은 네가 생각할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만인지상에 오른 자가 고민할 영역이야."

아버지가 잠시 숨을 들이켰다.

"너는 만인지상이 되려는 것이냐?"

아버지는 내가 황제가 되고 싶어 하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황제라니, 그 귀찮고 번거롭고 암중모략이 넘실대는 지위를 내가 원할 리가 없었다.

"제가 그리한다면 제 바람과는 아주 멀어지게 될 것입니다."

긴장감이 팽팽했던 아버지의 얼굴에 아주 조금의 안도감이 보였다.

"다만 과거와 같은 무소불위의 권력은 말 그대로 과거의 것이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황제의 편에 서는 것이 나의 복수에 유리했다.

내가 짜 놓은 판에서 황제라는 말은 훌륭하게 역할을 했다.

황제는 내가 그의 말인 줄 알았겠지만 나는 그저 가벼이 미소 지으며 황제의 착각을 즐기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 말이 판을 벗어나려 하고 있었다.

판을 벗어나 움직이는 말은 그 순간부터 말이 아니다.

짓밟아야 할 대상일 뿐.

다만 황제가 가진 상징성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살아 움직이려는 말의 팔다리를 자르고 숨만 붙여 놓을 셈이었다.

"너는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이냐?"

아버지의 물음에 확실히 답할 수 없었다.

제국이 사라진 미래, 황제가 사라진 미래, 무엇도 답이 아닌 것 같았다.

한참을 생각하다 말했다.

"제가 마지막에 웃는 미래입니다."

"……그래, 이에 대해서는 더 이상 묻지 않으마. 다만 오늘은 네가 행동이 경솔했다. 뜻과 말은 품고 있을수록 득이 된다 했다. 자중했으면 좋겠구나."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듯, 아버지가 시종을 불러 물 한 잔을 쭈욱 들이켠 뒤 다시 내게 물었다.

"너는 어찌할 셈이냐?"

시종이 나가는 것을 확인한 내가 답했다.

"저는 일단 사힘 쪽으로 이동하려 합니다."

"협정이 오래 가지 못할 것으로 보는 것이냐?"

"예, 그나마 둘 중 이성적인 황제가 이 모양인데, 1황자가 얌전히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상대적으로 부족했던 영토를 늘리기 위해 미친 듯 사힘을 점령하고 있다 하니, 충돌은 머지않을 것입니다."

"그 후에는?"

"타우까지 진격해야지요. 누구보다도 먼저 도착해서 1황자를 사로잡겠습니다. 내전의 시작과 끝을 제가 가져간다면, 황제의 입지는 더욱 좁아질 것입니다."

빙그레 웃은 아버지가 내게 말했다.

"모든 것을 다 그리고 있었던 것 같구나. 내가 여기 올 필요도 없었던 것 아니더냐?"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미처 반박을 하기도 전에 아버지는 손을 휘휘 저었다.

"농이다 농. 네가 움직였다는 소식이 들리면 나도 위에서 돕도록 하마. 그랑베르트 공작과 산탄다르 공작도 함께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으니 걱정하지 말거라."

"감사합니다."

아버지의 눈이 반짝였다.

"그런데 말이다. 산탄다르 공작과는 무슨 일이 있었느냐?"

"무슨 일이라 하심은……?"

"산탄다르 공작이 내게 너에 대한 것을 부쩍 많이 물어봐서 하는 말이다."

"아무 일도……."

답을 하려던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묘한 웃음을 짓고 있는 투브였다.

그리고 그레이스의 말이 떠올랐다.

-신분패를 나눠 가지는 거, 전쟁터로 정인(情人)을 보낼 때 그렇게 하는 거래.

나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거렸다.

되레 내가 급해져서 말했다.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아쉽구나……. 하긴 두 공작 가문의 직계가 혼인해 버리면 다른 귀족들의 견제를 심하게 받겠지."

"혼인이라니요! 당치도 않은 말씀입니다!"

내 강한 부인에도 아버지는 혼인이라는 말을 혼자 되뇌더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설마 산탄다르 공작과 혼인하려고 만인지상의 자리를……."

"아버지!"

내가 강하게 나가고 나서야 아버지는 나를 놀리는 것을 그만 두었다.

괜히 사람들에게 이상한 소리하시면 안 되는데…….

아버지의 처소를 나와 돌아가는 길, 투브가 무언가를 흥얼거렸다.

-사랑을 쟁취하려고 황제가 되려는 자가 있네~. 이 얼마나 낭만 넘치는 이야기인가~.

"야!"

내가 소리치자 투브가 아니라 내 뒤를 따르던 로하나스가 깜짝 놀라 다가왔다.

"필요한 것이라도 있으십니까?"

"아, 아냐."

그사이 투브는 꼬리를 흔들면서 저 앞으로 뛰어가 버렸다.

저놈의 자식…….

***

며칠 뒤 바람이 좋은 날, 세파라트강 위에 수십 척의 배가 늘어서 있었다.

제뉴인으로 인원들을 나르기 위한 수송선들이었다.

아직 황제의 승인을 받지 못했지만 일단 에베 공작 작위에 오른 오그마가 아버지를 배웅했다.

"큰 도움,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별 말씀을, 내 아들이나 잘 도와줬으면 하오."

아버지와 오그마가 동시에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고, 나는 그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오그마를 뒤로한 아버지가 내게 다가왔다.

"잘해 왔지만 앞으로 더 잘할 것이라 믿어도 되겠지?"

"물론입니다."

"어서 이 난리가 끝나고 가족끼리 모두 모였으면 좋겠구나."

그런 시절이 있었던 사실조차 아득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아버지가 몸을 돌려 배에 올랐다.

"산탄다르 공작에게 네 안부를 전해 주마."

"그러실 필요……."

내가 말을 미처 마치기도 전에 아버지는 배에 올랐고, 선단이 천천히 강을 거슬러 오르기 시작했다.

오그마가 내게 다가와 물었다.

"후작께선 사힘으로 가신다고 들었습니다."

내가 힘주어 대답했다.

"예, 가야지요."

사힘 너머의 서쪽과 북쪽에 아직 내가 죽이지 못한 원수 둘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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