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국면 (1)
"새로운 갑옷이 도착했습니다."
로하나스가 내게 말했다.
"그래도 우리가 테르다마스를 떠나기 전에는 도착했네, 다행이야."
"확실히 갑옷의 무게나 이음새가 이전 것과는 다릅니다."
"강도는 어떤 것 같아?"
"기존 것보다 조금 약하기는 합니다. 하지만 무게가 줄어든 것에 비하면 크게 나쁜 수준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 그렇다면 고민을 좀 해 봐야겠는데……. 몇 벌이나 왔지?"
"500벌이 왔습니다."
"일단 최전선 보병 부대에 먼저 보내. 사소한 장단점 모두 확인해서 보내라고 하고."
인간 중 가장 뛰어난 장인과 드워프 중 가장 뛰어난 장인이 만든 갑옷이었지만, 현장에서 쓰다 보면 예상치 못한 문제점이나 개선점이 발견될 수 있었기에 꼼꼼히 확인하라는 말도 함께였다.
저비스가 툴리앗 시찰단에 포함되어 반오러 물질의 양산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현재, 일선 보병 부대들의 갑옷을 경량화하는 것은 커다란 모험이었다.
기본적으로 반오러 물질을 전장에 살포해서 적 기사들을 무력화하고, 뒤에 이루어지는 백병전을 위해 갑옷 개선을 주문한 것이었는데 아직 상황이 그렇게까지 진척되지는 않고 있었다.
기사단 인원 제한이 유명무실해진 뒤, 각 가문이나 부대는 기사의 비중을 크게 늘렸고, 그에 따라 기사의 돌진을 막아 내야 하는 보병들의 장비도 무거워지고 있는 추세였다.
장비 개선을 시도한답시고 섣부르게 움직였다가 적의 기사들에 병력이 쓸려 나갈 수도 있었다.
반오러 물질을 더 뽑아 낼 수 없는 현실이 아쉬웠다.
"대장장이들을 모아 놓은 것처럼 저비스에게도 마법사를 좀 붙여서 양산 체제를 구축해야 했나……."
그러나 믿을 만한 마법사가 흔하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기술 유출이 걱정이었다.
독점의 지위를 포기할 수가 없었다.
나가려던 로하나스가 내 혼잣말을 듣고 멈칫했다.
"예?"
"아니야, 나가서 볼일 봐."
로하나스가 나가려다 말고 망설였다.
"할 말이라도 있어?"
"그…… 사힘 지방으로의 이동 때문에……."
로하나스의 말에 인상이 찌푸려졌다.
"결정된 사안에 왜 뒷말이 나오지?"
"구체적인 내용이 없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현재 사힘은 이민족들과 타우 황제 세력이 뒤엉켜서 난리라고 들었습니다. 그런 곳을 우리만으로 가는 것이 괜찮을지 걱정하는 목소리가 많습니다."
황제는 전군에 사힘 수복과 타우 황제 토벌을 명했지만, 에베를 비롯한 제국 남부는 전화(戰火)로 인해 발생한 피해 복구를 이유로 황명을 보류한 상태였다.
말이 보류지 실상은 거절이었다.
과거 같았으면 당장 반역자로 낙인찍히고 중앙에서 토벌군이 내려올 일이었으나, 상황이 상황인지라 황제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오그마가 일단은 황제의 눈치를 보느라 '거절'이 아니라 급한 곳만 막아 놓고 움직이겠다는 '보류'의 의사를 보냈기 때문이기도 했다.
예전에 비해 황제의 위신이 많이 떨어진 것이 눈에 보였다.
그 일에 내가 가장 크게 일조하고 있지만…….
내가 아무 말도 없자 로하나스가 계속해서 말했다.
"제뉴인 공작 각하께서도 제뉴인으로 돌아가신 상태고, 무엇보다 사힘으로 들어가게 되면 보급선이 너무 길어지게 됩니다. 생산 기반이 무너지다시피 한 남부에서 보급을 받는 것은 어불성설이고, 장기간 지속된 전쟁으로 카몰과 리벤트의 생산량도 한계에 이르렀습니다. 설령 보급 물자가 난다 하더라도 사힘에는 세파라트강 같은 커다란 강이 없습니다. 따라서……."
"수운으로 보급을 기대할 수 없으니 육로로 보급선을 이어야 하는데, 그건 현실적으로 힘들어 보인다?"
내가 말꼬리를 가로채자 로하나스가 잠시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만족스러운 웃음이 내 입가에 걸렸다.
그동안 로하나스를 부관으로 달고 있던 것이 헛된 일은 아닌 것 같았다.
로하나스는 단지 나를 보조하는 것뿐만 아니라 전장을 큰 굴레에서 이해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것을 자신이 아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내가 과거보다 빠르게 성장한 것처럼, 그에 맞추어 로하나스도 급격히 성장하고 있었다.
이 문답이 즐겁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네 생각은 어떤데?"
"전투에 관해서는 아군 능력을 의심하지 않으니 제쳐 두겠습니다."
"좋아."
당연히 이길 것이라 상정하는 로하나스의 태도에 자만 같은 것은 없었다.
마치 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말투였다.
그 정도로 아군에게 승리는 익숙한 일이었다.
"일단 현지 조달 방안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로하나스가 살짝 내 눈치를 보고 말했다.
"기각입니다."
"왜지?"
"이민족이 점령했었던 에베 북부의 경우로 미루어 보아, 아직 그들이 점거하고 있는 사힘의 상황은 더했으면 더했지, 낫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민족들은 오랜 세월 사힘을 넘지 못하고 좌절했던 한풀이라도 하는 것처럼 사힘을 짓밟았다.
남자는 죽이고 여자는 겁탈했으며 아이는 노예로 썼다.
불태우고 약탈하는 것을 숭배하는 사도처럼 자신들의 지배 아래 놓인 제국의 땅에 파괴의 복음을 전파했다.
그 탓에 남아 있는 것은 시체와 한때 그것이 건물이었던 것을 알게 하는 흔적뿐이었다.
게다가 나라드마의 죽음 이후 이민족은 유력 부족들의 불화로 갈라져 싸우고 있었다.
자신들끼리 분열하여 세력이 약화되고 있다는 것은 환영할 만한 소식이었지만 그 불똥은 제국민들에게 튀기 십상이었다.
온갖 사술의 실험체가 되고, 분풀이의 희생양이 되어 죽어 가는 것은 제국의 양민들이었다.
"좋아, 다른 방안은?"
"넓은 강이 없을 뿐, 사힘에도 여러 강이 흐르니 선단을 쪼개 소규모로 만든 뒤 보급을 시도할 수 있습니다."
"그 경우에는 진행 방향을 강 주위로 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강 쪽에 머물면서 선단 위치를 파악하는 인원이 필수적이겠네. 나쁜 방안은 아니지 않아?"
로하나스가 살짝 내 눈치를 보며 말했다.
"지금까지 각하를 모시면서 느낀 건데, 어디로 가실지 예상을 하기가 보통 힘든 것이 아닙니다. 지금 당장 말 머리를 돌려 히베아로 간다고 하셔도 저는 그러려니 할 겁니다. 하지만 지금 사힘으로 들어가면 산발적인 전투가 일어날 것이 뻔합니다. 강을 따라 움직인다는 대전제가 무너질 가능성이 큽니다."
"첫 번째 이유와는 다르게 추측이나 가능성에 근거하네? 일단 보류."
로하나스의 말처럼 선단을 쪼개서 운용하는 방법도 생각을 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사힘을 통과하는 강들은 유속이 빠르고 강이 얕아 배가 거슬러 오르기에 좋지 못했다.
그리고 로하나스의 말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나라드마라는 거대한 위협도 사라진 지금, 뭔가 일이 있다면 내가 먼저 움직일 것 같았다.
과거 같았으면 절대 움직이지 않았을 일도 지금은 몸이 먼저 움직였다.
힘을 가진 부작용이라면 부작용이었다.
"둔전(屯田)은 어때?"
"둔전은 주둔이 장기화되었을 때 가능한 방법이기에 계속 이동해야 할 우리에게는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마치 준비라도 한 것처럼 로하나스가 내 질문을 능숙하게 피해 나갔다.
여러 가지 방안을 생각해 봤음이 분명했다.
그리고 내 앞에서 말을 꺼낼 정도면 나름의 해결 방안도 가지고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했으면 하지?"
잠깐 머뭇거리던 로하나스가 내게 말했다.
"제 생각에는……."
로하나스의 말을 들은 내가 활짝 웃었다.
"이제야 내 생각을 좀 알아채는데? 훌륭한 부관이야! 아주 좋아! 어디 흘리지는 말고, 조용히 알고 있기만 해."
칭찬을 받아 뿌듯한지 의기양양해 보이던 로하나스가 나가기 전에 잠시 알쏭달쏭한 표정을 지었다.
"각하, 그런데 그렇게 되면 결국 첫 번째 방안과 같지 않습니까? 현지 조달 같습니다."
"사힘 현지 조달이 아니잖아."
로하나스는 깨달았다는 얼굴을 하고 밖으로 나섰다.
밖을 내려다보니 이동할 준비가 한창이었다.
강에는 인원 수송을 위한 배들이 한가득 떠 있었다.
어서 배를 타고 이동하고 싶었다.
모두의 허를 찔러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
테르다마스를 떠나기 전날 밤, 투브가 슬그머니 내가 머물고 있는 곳으로 들어왔다.
요즘 들어 부쩍 내 시야에서 벗어나는 일이 많긴 했지만, 녀석이 멀리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부르면 바로 오기도 했고.
그런 녀석을 향해 농담을 건넸다.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그런 셈이지.
녀석이 단답을 하는 바람에 입이 어색해져 버렸다.
괜히 딴청을 부리다 불현듯 떠오른 것을 물었다.
"나라드마는 뭐였을까? 분명 반오러 물질이 몸속으로 들어갔을 텐데 어떻게 나와 대등할 수 있었던 거지?"
-제3의 힘일 수도 있지.
"제3의 힘?"
-마나도 오러도 아닌 다른 힘.
"그런 건 들어본 적 없어!"
-가장 처음 오러나 마나가 세상에 등장했을 때도 사람들은 비슷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을까?
"과거의 내 삶에 등장했던 나라드마에게도 그런 힘은 없었어!"
-어떻게 확신할 수 있지? 과거의 시안도 반오러 물질을 사용했나? 과거의 나라드마에게 영수가 함께했나?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과거와 비교하기에 현재는 너무 달라져 버렸다.
-나처럼 오래 살게 되면 어느 순간 세상의 흐름에서 한 발짝 멀어져서 보게 되는데 말이야. 거기서 내가 느낀 것은 이거야. '세계는 균형을 유지하려 한다.'
내가 옅은 신음을 흘렸다.
-사람뿐만이 아니라 지성을 가진 존재라면 한 번쯤 하는 상상이 있지.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 그러면 모든 일을 알고 있으니 잘만 풀릴 텐데.' 이걸 직접 겪고 있는 네 생각은 어때? 마냥 편하고 행복하기만 해?
"그렇……지는 않지."
생각해 보면 순탄한 길은 아니었다.
아라크네에게 납치당하고, 사령 마법사와 얽히고, 영수와 함께하고 손에 닿는 것은 녹슬게 하는 나라드마와 겨뤘다.
과거의 나였다면 몇 번이고 죽었을 삶이었다.
-그래, 알고 있다는 것 자체는 큰 힘이지만 그것으로 세계가 변해. 그리고 변한 세계는 특이점에 대항해 균형을 맞추려 하지. 특이점은…….
"나군."
투브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창조주가 있는지 없는지, 그걸 신이라 부르는지 아닌지 나는 관심 없어. 그런데 세계는 결국 인과율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생각해. 너라는 특이점이 있는 이상 인과율은 계속해서 움직일 거야. 과거의 네가 알던 모든 것이 뒤집힐지도 모를 일이지.
"제법 무거운 얘기네."
-나름 잘해 왔지만, 긴장 풀지 말라는 소리야.
못내 아쉬웠다.
나라드마를 바로 죽이지 않고 투옥해 둔 이유도 나라드마가 보여 주었던 그 힘을 캐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를 조사한 마법사들의 말에 의하면 아무 이상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저 강인한 신체와 오러를 다룰 수 있는 능력이 나라드마가 가진 전부였다.
그가 죽어 버린 지금, 나라드마에 대한 비밀은 영원히 사라진 셈이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 투브가 부르는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그리고 녀석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나를 경악케 하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내 생각에는 우리가 동화되고 있는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