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한 마검사의 복수-139화 (139/180)

결국 먹고 사는 문제 (1)

"시장님! 시장님!"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요한은 눈을 떴다.

비서인 소넷의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달콤했다.

부인인 마가렛이 허구한 날 성질을 내며 자신을 무시하는 것과는 천차만별이었다.

눈을 뜬 요한은 아직 밖이 어두운 것을 알았다.

그는 다시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리고 동시에 소넷을 끌어안았다.

"아직 한밤중인데 왜 그래? 마가렛이라도 왔어? 그 여자는 둔해서 우리 관계를 알아채지 못한다니까. 우리만 조심하면 절대로……."

평소였으면 교태와 애교를 부리면서 품에 안겨 왔을 소넷이지만, 오늘따라 심기라도 불편한 것인지 몸을 비틀어 요한의 품에서 빠져나갔다.

소넷이 요한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근심 어린, 빠른 목소리였다.

"밖에 무슨 일이 난 것 같아요."

"무슨 일……? 일은 낮에 충분히 하잖아. 얼른 군량을 보내라는 장인어른 등쌀에 죽겠는데 너까지 이럴 거야?"

요한은 다시 한번 소넷을 품에 끌어들였지만 소넷은 완강히 저항했다.

짜증이 확 솟은 요한이 벌떡 일어나서 소넷을 향해 신경질을 냈다.

"아, 좀!"

그러나 소넷은 어느새 침대를 빠져나가 빠르게 옷을 갖춰 입고 있었다.

"소넷! 어디 가!"

소넷은 아무 말도 없이 빠르게 옷을 입더니, 머리까지 질끈 묶었다.

순식간에 완벽한 비서의 모습으로 변한 소넷이 요한을 향해 말했다.

"아무래도 상황을 좀 봐야겠어요. 시장님도 빨리 정리하고 나오세요. 옷을 입혀 드릴 시간은 없을 것 같네요."

말을 마친 소넷은 조심스럽게 문에 귀를 대 보더니, 이내 시장실로 통하는 복도로 빠져나갔다.

순식간에 바람맞은 꼴이 된 요한이 어이가 없어 허탈하게 앉아 있었다.

정신이 좀 돌아오고 나서야 요한은 밖이 아직 어두컴컴한데도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린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요한이 시장으로 있는 키스타는 제국의 격렬한 내전 중에도 나름대로 평안한 곳이었다.

어둠 속에 혼자 남겨진 사실과 밖에서 들려오는 웅성임에 요한은 덜컥 겁이 들었다.

재빠르게 옷을 입고 시장실로 향한 요한은 당황한 소넷과 마주칠 수 있었다.

"정체불명의 군대가 도시를 포위하고 있다고 해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무슨 말이냐고 물을 새도 없이 요한의 부인인 마가렛 루지온을 필두로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마가렛의 눈길이 요한과 소넷을 훑었다.

장인어른인 루지온 공작의 눈빛과 똑같다는 생각에 요한은 몸을 떨었다.

저택 주방에서 잡일을 하던 잡부가 자신의 첫째 딸을 임신시켰다는 사실을 듣고 저놈을 죽이라 말하던 루지온 공작의 눈빛을 요한은 잊지 못했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그 눈빛만 생각하면 오금이 떨릴 지경이었다.

아마 마가렛이 몸을 던져 막아서지 않았다면 요한은 그날 틀림없이 죽었으리라.

하지만 당시만 해도 순수한 청년이었던 요한은 억울했다.

자신의 방에 잠깐 오라는 마가렛의 말을 듣고 갔다가 당했을 뿐이었다.

자기 말을 잘 들으면 남부럽지 않게 살게 해 준다는 말을 한 것도 마가렛이었다.

격노한 루지온 공작은 마가렛과 요한을 내쫓고 둘에게 도움을 주는 놈은 누구라도 각오하라고 루지온 지역 전체에 공문을 내릴 정도였다.

그러나 공작의 첫째 딸이라는 이름은 쉽게 사라지지는 않는 것이라 공작 부인의 도움과 줄을 대고 싶어 하는 기타 귀족들의 뇌물로 적당한 생활수준은 유지할 수 있었다.

평민이었던 요한에게는 꿈도 못 꿀 생활이었지만 마가렛은 짜증을 내며 공작 부인에게 돈을 더 보내 달라고 편지를 쓰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렇게 공작의 눈 밖에 난 지 10년이 되어서야 공작은 둘을 불러들였다.

손자와 손녀를 보고 루지온 공작의 입꼬리가 씰룩일 때를 놓치지 않고 공작 부인이 이만하면 되었지 않냐고 바람을 불어넣었다.

루지온 공작은 여전히 마가렛이 루지온 성(姓)을 쓰는 것을 거부했다.

그러나 힘을 써서 요한과 마가렛의 아이들을 수도로 유학시키고, 루지온 지역의 중요 도시이자 요충지인 키스타의 시장으로 요한을 앉혔다.

성(姓)을 못 쓴다고는 하나 마가렛이 루지온 공작의 첫째 딸이라는 것을 모르는 루지온 사람은 없었고, 마가렛은 키스타에서 열렬한 지지를 얻었다.

언젠가 한 번, 요한은 루지온 공작이 왜 마가렛이 아니라 자신을 시장 자리에 앉혔는지를 마가렛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마가렛의 답은 간단했다.

"미쳤어? 귀족인 내가 아랫것들이 뽑는 시장이 되게? 반쯤은 영지에 가깝긴 하지만 그런 귀찮은 자리는 당신이 딱이야."

요한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잠시 다른 생각에 빠져 있던 요한이 번뜩 정신을 차렸다.

도시 밖에 있는 군대에 걸려 있는 깃발이 카몰 후작의 것 같다는 보고가 들어온 직후였다.

"카몰 후작?"

마가렛과 요한이 같이 내뱉었으나 사람들의 시선은 마가렛에게 향했다.

요한은 주눅이 들었다.

마가렛을 임신시킨 순간부터 자신은 늘 마가렛의 곁다리였다.

시장실에 와 있던 사람들이 웅성이며 각자의 의견을 말했다.

마가렛이 요한에게로 다가왔다.

갈수록 루지온 공작의 날카로움을 닮아 가는 마가렛의 자태에 요한은 자기도 모르게 긴장했다.

요한의 앞까지 도달한 마가렛이 옆에 서 있는 소넷을 향해 눈을 돌리고 말했다.

"오랜만이네."

소넷이 여유롭게 응수했다.

"찾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죄송할 게 있나? 내 남편 보좌하느라 바빠서 그런 것인데, 그렇지?"

자신에게 동시에 꽂히는 두 여자의 눈길에 요한은 당장이라도 탈진할 것 같았다.

그는 간신히 대답했다.

"어? 어! 마가렛에게 더 신경 쓰도록 해, 소넷. 나보다 더."

소넷의 표정이 딱딱해지고, 마가렛의 표정에 부드러운 미소가 퍼졌다.

표정을 풀지 못하고 있던 소넷이 요한에게 말했다.

"나가서 차를 좀 가져와도 될까요? 방문객 분들께서 갈증을 느끼실 것 같습니다."

소넷이 평소에는 하지도 않던 말을 먼저 꺼냈다.

이 상황이 지속되다가는 먼저 졸도할 참이라 요한은 어서 그렇게 하라고 소넷을 내보냈다.

소넷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마가렛이 요한에게 물었다.

"대책은 있어?"

"일단은 사람을 먼저 보내 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마가렛은 반말, 요한은 존댓말.

둘 사이의 격차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언어 상황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마가렛이 혼잣말을 했다.

"카몰 후작이라면 일라이자 언니의 아들인가? 흠……. 나쁘지 않을 것 같네."

귀족들 간의 혈연과 지연을 통해 뭔가 돌파구를 찾아낸 모양이었다.

평민인 요한은 끼어들 수 없는 내용이었다.

사람들을 향해 이리저리 지시를 내리는 마가렛을 보며 요한은 생각했다.

'역시 나보다는 마가렛이 이 자리에 어울리는데…….'

일단은 상황을 지켜보면서 접촉하자는 공감대가 퍼지고 난 후에야 사람들이 시장실 밖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무리의 맨 뒤에서 사람들을 다독이며 나가는 마가렛을 보고서야 요한은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바로 다음 순간, 마가렛이 몸을 돌려 요한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리고 긴장한 요한에게 얼굴을 바짝 대고 물었다.

"계집질하는 재미는 좋아?"

훅 들어오는 질문에 요한은 말문이 턱 막혔다.

그리고 직감했다.

이미 다 들켰다.

아니라고 우길까? 인정할까?

눈 한 번 깜빡하기도 짧은 시간 동안 요한은 수천 번 갈팡질팡했다.

결국 요한은 체념했다.

오랜 기간 몸에 익혀 온 복종이었다.

"죄송합니다……."

마가렛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퍼졌다.

방금 전, 요한이 소넷보다 자신의 편을 들어주었을 때보다 몇 배는 큰 만족감의 미소였다.

"그래그래, 당신은 그렇게 순종적인 면이 참 좋아."

요한은 치욕감에 몸을 떨었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20년 전, 방으로 잠깐 오라던 마가렛의 속삭임은 꿀보다 달콤했으나 그 꿀은 온몸에 엉겨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달콤한 향기와 불쾌한 감각이 온몸을 덮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요한을 지배했다.

그런 요한의 감정 따위는 아무렇지 않은 듯, 마가렛이 차갑게 말했다.

"소넷은 고향으로 돌려보내."

공작의 사위이자 시장과 불륜을 저질렀음에도 죽이지 않고 고향으로 보내라는 말에 요한은 잠시 안심했다.

아마 소넷은 고향으로 가는 도중 도적 떼를 만나 죽게 될 것이지만 요한은 그 사실을 몰랐다.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도적 떼라는 사실도 아마 평생토록 모를 것이었다.

안도감도 잠시, 마가렛의 말이 요한의 귓전을 때렸다.

"본가에 사람을 보내 비서로 쓸 만한 사람을 보내라고 할게."

"알겠습니다……."

마가렛이 잔뜩 풀 죽은 요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따스한 손길에 요한이 조심스럽게 마가렛과 눈을 맞췄다.

마가렛은 요한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에 가득한 미소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잔인하고 차가운 눈이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해."

요한이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자 마가렛이 몸을 돌렸다.

그녀가 시장실 밖으로 빠져나가며 말했다.

"준비해 둬."

"예?"

얼빠진 요한의 대답에 마가렛이 고개만을 돌려 요한을 날카롭게 쳐다봤다.

"카몰 후작 말이야. 무슨 꿍꿍인지 모르겠어, 아마 날이 밝으면 뭔가 행동을 취하겠지."

마가렛은 다시 휙 하니 몸을 돌려 가볍게 밖으로 나섰다.

요한은 맥이 탁 풀렸다.

"하아……."

잔뜩 힘을 주어 펴고 있던 허리가 스르르 풀렸다.

땀 때문에 등과 목 주변이 축축했다.

자신과 같은 범부(凡夫)에겐 너무 가혹한 밤이라는 생각을 하며 요한은 간신히 무너져 내리는 본인을 붙잡았다.

***

"뭐래?"

로하나스가 봉인된 서신을 하나 들고 들어오자 내가 물었다.

나뿐만 아니라 지휘 막사에 모인 모두가 로하나스의 말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로하나스가 키스타 측에서 보내 온 서신을 펼쳐 읽었다.

"제국의 7 기둥 중 제뉴인의 아들인, 카몰 후작의……."

귀족들 특유의 미사여구가 떡칠된 문장이 처음부터 튀어나오자 냅다 손을 휘저었다.

"그딴 건 필요 없고! 핵심만!"

로하나스가 빠르게 서신을 눈으로 훑었다.

"이민족을 토벌하기 위해 형과 아우가 힘을 합친 바, 황제 폐하의 뜻을 받들어 각하께 최대한의 편의를 제공하겠다고 합니다."

"쓰여 있는 그대로 읽은 거지?"

"그렇습니다."

"거기 쓰인 황제 폐하는 우리 폐하가 아니라 타우 황제를 말하는 것일걸?"

로하나스의 얼굴이 당황으로 붉게 물들었다.

의도치 않게 적 세력의 수장을 높인 셈이었다.

"아, 아니 그런 것이 아니라……."

"됐어, 나도 가끔 헷갈려. 치고받고 싸울 나이는 한참 전에 지난 양반들이 서로 황제라 우기니……."

막사 곳곳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지만 다들 자제하는 표정이었다.

로하나스가 건넨 서신을 쭉 읽었다.

요약한 그대로였다.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최대한의 편의'가 어디까지인지 좀 보고 싶었다.

"아군 전체 병력이 얼마랬지? 10만?"

요새 계속 전투가 있었고, 에베군 및 제뉴인군과의 합동작전을 펼쳐서 정확한 병력 규모가 떠오르지 않았다.

듣고 있던 베이카 장군이 점잖게 일러 주었다.

"전투 병력 10만, 비전투 병력 1만 5천가량입니다."

살짝 고개를 숙여 베이카 장군의 호의에 감사를 표했다.

다해서 11만 5천의 병력이었다.

카몰군을 데리고 그렇게 쏘다녔음에도 오히려 일야관에서의 10만보다 병력이 늘어 있었다.

하지만 아마 이 정도가 카몰의 한계일 것이다.

판을 더 벌리지 않는 이상 내가 쓸 수 있는 최대한의 패였다.

그리고 지금, 이 패를 살짝 내비쳤다.

"12만이 소모할 한 달 치 군량을 내놓으라고 키스타 측에 전해, 이곳을 우리 보급 중추로 삼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