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먹고 사는 문제 (2)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는 겁니까?"
내가 삐딱하게 앉아 물었다.
앞에 앉아 있던 키스타의 시장, 요한이 당황스러운 얼굴을 하고 답했다.
"조금만 말미를 주셨으면 한다는 겁니다."
그 말에 내 곁에 있던 참모들의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요한을 비롯한 키스타 측 인물들의 얼굴에 긴장감이 어렸다.
회담이 열리고 있는 이곳은 내 군영이었다.
두 황제 간의 임시 협정이 맺어진 상태고, 회담 중에 상대를 죽이는 것은 강력한 지탄을 받을 짓이긴 했지만 내 말 한마디에 저들의 목숨이 끊어질 수도 있었다.
"제국의 땅을 수복하기 위해 급히 출발한 관계로 군량이 넉넉하지 않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요구한 조건만 받아들여진다면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고 말끔하게 이곳을 떠날 겁니다."
"12만이 한 달간 소비할 군량을 후작께 드리면 루지온군에게 보낼 군량에 차질이 생깁니다."
그 순간, 내 눈에 베이카 장군이 옅게 웃는 것이 보였다.
베이카 장군도 나랑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요한은 이런 상황에 익숙하지 못했다.
아군의 보급, 그것도 가장 중요한 군량 문제를 이리 쉽게 발설하다니,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요한은 스스로를 낮추고 있었다.
베이카 장군이 입을 열었다.
"아군의 선단이 멀지 않은 곳에 있소. 현재 세파라트강의 본류와 지류들을 오갈 수 있는 선단은 우리 선단뿐이오. 군량을 제공한다면 사힘으로 운반해 루지온군과 분배하도록 하겠소."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베이카 장군은 적당히 내 말에 살을 붙여 주고 있었다.
베이카 장군은 그동안 카몰에만 있어 좀이 쑤셨는지 합류 이후 적극적으로 나를 돕고 있었다.
내 행보가 노병의 가슴 저편에 잠시 놓아두었던 전의에 다시 불이라도 붙인 것일까.
베이카 장군의 말을 들은 요한이 더욱 쩔쩔맸다.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너무 많은 양입니다. 후작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영지나 도시에는 산출 계획이 있습니다. 이렇게 갑자기 요구하시면 저희도 시간이 필요합니다."
안다,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이렇게 더 압박하고 있었다.
내가 눈으로 슬쩍 신호를 보내자 베이카 장군이 알아채고 음성에 노기를 실었다.
"시장이 하고 있는 행위는 우리를 견제하기 위한 행위요! 아무리 현재 제국이 분란을 겪고 있다 하나, 공통된 적이 나타났거늘! 어찌 이리 좁은 식견으로 행동하시오!"
내전 이전부터 명장으로 제국 전체에 명성이 자자했던 베이카 장군이다.
노장의 호통에 요한이 어찌할 줄 몰랐다.
"잠깐."
여인의 목소리에 모두의 눈이 그곳을 향했다.
요한의 옆에 있던 마가렛이 앞으로 나섰다.
그 모습을 보고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올 뻔했다.
과거의 삶이었다면 마가렛은 지금쯤 이 세상 사람이 아니어야 했다.
분리 운동 초기, 키스타는 가장 먼저 제국에 반기를 든 도시 중 하나였다.
그 선두에는 잠자던 아내를 직접 찔러 죽인 남자, 추후에 누구보다 앞장서서 제국의 귀족들을 죽이고 다닌 남자, 자신은 귀족이 아니기에 성(姓)을 쓰지 않겠다 선언한 남자인 요한이 있었다.
당시에는 남부러울 것 없는 루지온 공작의 사위가 왜 앞장서서 부인을 죽이고 분리 운동을 지지한다고 선언했을까 궁금했는데, 지금 소문을 들어 보니 잡혀 사는 정도가 심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내 계획 때문에 분리 운동의 존재 자체가 성립하지 않은 현재에는 그 잔혹한 요한은 없었다.
그저 아내의 등장에 자리를 비켜 주는 허울뿐인 시장만이 내 눈에 보였다.
마가렛을 바라보는 요한의 눈에서 열등감과 비참함이 묻어 나왔다.
이용 가치가 있어 보였다.
하나 그것을 지금 티 낼 필요는 없었다.
일단은 마가렛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옆에서 듣고 있으니 걸리는 부분이 있는데."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이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대를 했다.
공식적으로 그녀는 루지온 가문에서 추방당한 상태이니 평민 신분이었다.
평민이 후작에게 하대를 한다?
상상도 못 할 일이었지만 마가렛은 그런 쯤은 고려도 하고 있지 않은 눈치였다.
어머니 쪽의 가문인 로제 가문과 마가렛의 가문인 루지온 가문은 친교가 두텁다 하니 나를 조카뻘로 보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회담장에서 전권을 가지고 있는 상대편을 대하는 태도로는 절대 옳지 못한 태도였다.
그녀의 오만한 삶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요구한 조건이 받아들여진다면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고 떠난다? 그럼 조건을 수용할 수 없다고 하면?"
"글쎄요.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뒤에 한마디를 덧붙였다.
"제게 거역한 자들에 대한 풍문 정도는 들어 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키스타 측 인물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이들은 대부분 루지온 가문의 가신이거나 지역 토호일터, 날붙이가 오가는 상황은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마가렛이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표정을 풀고 내게 친근하게 대하기 시작했다.
"통할 구석이 있는 것 같으니 독대를 했으면 하는데?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네 어머니가 결혼하기 전까지만 해도 친하게 지낸 사이야. 수도에 머물던 내가 잠깐 집에 내려온 사이……."
마가렛이 말을 끊고 요한을 한 번 쳐다보았다.
경멸? 애정? 소유?
보는 것만으로는 파악하기 어려운 복합적인 감정이 담긴 눈길이었다.
그리고 다시 마가렛이 입을 열었다.
"복잡한 일이 있어서 다시 수도로 가지 못하게 되었지만, 그동안 듣지 못했던 언니의 이야기를 좀 듣고 싶어."
나는 단박에 그 제안을 거절했다.
"사사로운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적합지 않습니다. 또한 당신은 키스타의 책임자가 아닙니다. 책임자와의 독대라면 받아들일 의향이 있습니다."
말은 존댓말이었지만 네 주제를 알라는 말이었다.
마가렛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러고는 쏘아보듯 요한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 눌린 요한이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말했다.
"저, 저는 카몰 후작과의 독대를 원합니다."
"좋습니다. 잠시 뒤에 준비가 되면 부르겠습니다."
내 말이 떨어지자 로하나스가 키스타에서 온 사람들을 막사 밖에 준비된 다른 천막으로 안내했다.
마가렛이 뛰듯이 가장 먼저 밖으로 나섰다.
등을 돌리고 있어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잔뜩 성이 난 것이 분명했다.
요한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안절부절못하다가 자리를 박차고 마가렛의 뒤를 따랐다.
계속 웃음이 흘러나올 것 같아서 이를 악물고 요한의 등을 바라보았다.
내 눈에 요한은 타기 좋은 땔감처럼 보였다.
그곳에 적당히 기름을 치고 불을 살짝 댕겨 준다면 삽시간에 불이 붙을 것 같았다.
열등감이라는 그 불이 키스타를 태우는 장면이 머릿속에서 상상되고 있었다.
막사 안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나가자 나는 요한을 데려오라고 명했다.
홀로 내 앞에 앉게 된 요한은 어딘가 긴장되어 보이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뭔가를 결심하고 온 것 같기도 했다.
그런 그에게 먼저 물음을 날렸다.
"뭐라고 합디까?"
분명 마가렛이 전하라고 한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던진 말이었다.
요한은 잠시 움찔하더니 내게 말했다.
"마가렛, 아니 키스타는 카몰 후작과 협력 관계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 말은?"
"지금 요구하는 군량은 단시간에 다 가져올 수 없지만, 일단 힘이 닿는 데까지 모아서 보내겠습니다. 대신 키스타를 떠나야 하며, 이 일을 비밀문서로 남겨 카몰 후작과 키스타 시장이 한 부씩 나누어 가지는 조건입니다."
말을 하면서도 요한은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이런 답답하기 짝이 없는 조건들을 수락하느니, 병력 손실을 감수하고 키스타를 점령한 뒤 창고를 터는 방안이 낫다는 것 정도는 아마 요한 본인도 알 것이다.
하지만 현재는 수도, 카몰, 에베 어디에서도 병력 지원을 받기 어려운 상태이기 때문에 나는 최대한 병력 손실을 방지하고 싶었다.
마가렛도 그것을 짐작하고 이런 배짱 좋은 짓을 하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은 마가렛이 아니라 요한이었다.
"그럼 시장의 부인이 아니라 시장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제 의견 역시 이것과 같……."
"나는 당신이 넓게 보기를 바랍니다. 당신의 부인과는 다르게요."
"예?"
"내 얘기는 전해 들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타우 황제도, 수도 황제도 나만큼의 공을 세우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이 허울 좋은 명분 놀음을 할 때, 나는 제국의 동부와 남부을 규합했지요. 심지어 국경을 넘어 왕국 하나의 수도를 정복하기도 했습니다. 누구도 이루어 내지 못한 일입니다. 두 명이 된 황제든, 공작인 당신의 장인이든."
루지온 공작 얘기를 꺼내자 요한이 흥미로운 기색을 보였다.
때를 놓치지 않고 기세를 더했다.
"비록 키스타가 지금은 루지온군의 여러 보급 기지 중 하나이지만 나는 키스타의 잠재 가치를 아주 높게 보고 있습니다. 루지온 공작에게 군량을 보내는 것을 중지하고 내게 보내시지요. 나는 적에겐 잔혹하나 아군에게는 자비로운 사람입니다. 그렇게만 한다면 키스타, 그중에서도 시장의 공을 섭섭지 않게 대우해 드리지요."
아직 요한의 눈에서 의심이 사라지지는 않았으나 그는 어느새 몸을 내 쪽으로 슬며시 기울이고 있었다.
"하지만 후작께서 요구하신 군량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수치입니다."
생쥐가 슬금슬금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낚아채야 했다.
"정말 불가능한 것은 아닐 텐데요."
요한의 얼굴이 굳었다.
아무리 마가렛의 인형으로 살아왔다지만 도시를 책임지는 시장이다.
최소한의 감 정도는 갖추고 있을 것이었다.
나는 최대한 이질감 없게, 마치 악마가 속삭이는 것처럼 말했다.
"루지온 공작에게 보내는 군량 공급을 중지하면, 내가 요구하는 물량 정도는 충분히 상회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끼 냄새에 홀린 생쥐가 자신이 향하는 곳이 뱀의 아가리라는 걸 눈치채기 전, 다시 한번 달콤한 미끼 냄새를 풍겼다.
"공작 영애의 남편이 아닌, 키스타의 시장 요한의 판단과 행동은 길이길이 남을 것입니다. 아마 마가렛은 위대한 결정을 내린 남자의 이름 모를 부인 정도로만 알려지겠지요."
내 마지막 말을 들은 요한이 잠시 움찔했다.
너무 나간 것이 아닌가 하고 흠칫하고 있을 때, 요한의 눈이 마치 꿈꾸는 것처럼 풀렸다.
그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음이 분명했다.
평생 잊고 살았던 자존감과 꿈이 막을 새도 없이 부풀어 오르고 있는 것 같았다.
나와 요한의 대화를 듣던 투브가 역시나 나를 향해 한마디를 했다.
-뱀이 붙어야 할 사람은 나라드마가 아니라 너였어야 했네. 아닌가? 네 혀 자체가 뱀인가?
이제 쥐의 목덜미에 뱀의 송곳니를 박아 넣을 차례였다.
"둘만 있으니 하는 말입니다. 지금의 나는 감히 황제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내 한마디면 당신을 귀족으로 만드는 일 따위는 우습다는 겁니다. 어쩌면……."
정신을 차린 요한이 자신도 모르게 내 말을 따라했다.
"어쩌면……?"
나는 최대한 사람 좋게 보이며, 상큼한 미소를 지었다.
"키스타의 시장이 아니라 루지온 지역 전체를 관할하는 사람이 당신이 되어도 좋지 않겠습니까?"
요한의 눈과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충격, 공포, 열망, 환희.
내가 느끼기에는 대충 이런 순서였다.
이자는 너무 순진하고 순수했다.
이런 혼란의 시대에 순진하고 순수하다는 것은 곧, 잡아먹힌다는 소리였다.
다음 날, 우리는 키스타로 입성할 수 있었다.
직후에 요한이 내게 요청한 것은 마가렛의 구금, 내가 요한에게 요구한 것은 키스타로의 출입을 엄금하고 루지온 공작에게 내가 키스타를 약탈했다는 서신을 보낼 것.
썩 만족스러운 거래였다.
아니, 표정으로 봐서는 요한이 나보다 훨씬 행복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