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먹고 사는 문제 (3)
키스타 외곽에 마련된 카몰군 주둔지, 우리가 이곳에 주둔한 지 한 달가량이 지났다.
내가 루지온에 상륙해 키스타를 점령했다는 사실은 빠르게 제국 각지로 퍼졌다.
내 행동거지 하나하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온 제국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으니 그다지 놀랍지도 않은 일이었다.
다만 이번 행동은 그 동안의 내 행보와는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었기에 파장이 컸다.
루지온 공작을 위시한 타우 황제 측에서는 연일 사절을 보내서 내 의도를 묻고 있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당장에라도 육두문자를 섞어 가며 나를 지탄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나를 회유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그 철없고 오만했던 1황자 생귀니엘 서비어가 반쪽짜리 황제가 되고, 궁지에 몰리다 보니 몸을 조금 숙이는 법이라도 배웠나 싶었다.
그러나 나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것이 아니라 했다.
생귀니엘 서비어는 고쳐 쓰기는커녕 대화가 통할지도 의문인 인물이었다.
내가 '아' 하면 본인은 '멍' 하고, 내게 '멍'이라 하지 않았다고 분노할 사람이 생귀니엘 서비어였다.
타우 황제가 보내온 '공식' 사절은 그래도 시종일관 내게 정중한 태도를 유지했지만, 키스타의 실지배자였던 루지온 공작이 보내온 '비공식' 사절은 얘기가 달랐다.
"부엌에서 남은 것이나 집어 먹던 잡부를 거두어 들였더니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적에게 붙다니! 내 직접 네놈의 눈을 뽑고 심장을 씹어 먹겠다!"
키스타의 성벽 멀리에서 루지온 공작이 보내온 마법사가 목소리를 증폭해 포고문을 읽는 소리였다.
우리가 공격이라도 할까 봐 말에 앉은 채 한 문장 읽고 쉬고, 다시 한 문장 읽는 꼴이 우습기 그지없었다.
마법사 하나가 귀한 판국에 저런 헛짓을 하는데 이용하다니, 어지간히 열이 받은 모양이었다.
"가서 죽일까요?"
로하나스가 내게 물었다.
"내버려 둬, 재밌네."
대화를 옆에서 듣던 베이카 장군이 점잖게 내게 일렀다.
"군의 사기란 사소한 것으로부터 무너질 수 있습니다. 처리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장군께서 권하시니……. 로하나스! 기사 몇을 내보내서 겁주는 시늉만 하라고 해."
내 명령이 떨어지고 얼마 있지 않아 기사들이 마법사가 있는 쪽으로 말을 달렸다.
마법사와 옆에 있던 사람들이 허겁지겁 말 머리를 돌려 달아났다.
그것을 본 아군에게서 큰 웃음이 터졌다.
마법사는 도망가는 와중에도 목소리를 울려 포고문을 읽었지만 말에 있었던 터라 중간, 중간에 '으윽!', '허헙!' 과 같은 소리를 냈고, 그것은 더 큰 웃음만 불러올 뿐이었다.
한참 신나게 웃고 있으니 키스타에서 보낸 군량이 도착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요한은 착실하게 내가 요구한 군량을 보내오고 있었다.
내가 요구한 양 자체가 원래 루지온군에 보내야 할 양보다 확연히 적었기 때문에 서로 상부상조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런데 군량을 이끌고 온 행렬에 요한이 있었다.
그는 키스타 안에 있어야지, 밖에 있으면 안 됐다.
놀란 내가 그에게 급히 다가가 물었다.
"온다는 소리도 없이 어쩐 일입니까?"
요한이 피골이 상접한 몰골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매일 악몽을 꿉니다. 당장이라도 루지온 공작이 대군을 끌고 와 제 목을 치는 꿈입니다. 게다가 밖에서 울려 대는 저 소리…….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습니다."
마가렛을 구금하고, 루지온 가문과 관련되어 있는 키스타 인사들을 숙청하던 때의 광기 넘치던 요한과는 다른 사람이 있는 것 같았다.
그는 흥분과 고양에 사로잡혀 있다가 현실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키스타가 내게 붙은 것은 이제 고작 한 달.
아직 내부 정리도 다 끝나지 않았는데, 책임자가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이고, 밖으로 나오는 것은 좋지 못한 판단이었다.
역시 요한은 몰라도 너무 몰랐다.
일단 지금은 그를 안정시키고 자신감을 불어넣는 것이 우선되어야 했다.
"마법사는 쫓아 보냈습니다. 걱정할 거 없습니다.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합니다. 요한, 당신의 판단은 그르지 않았습니다. 내가 그렇게 만들 것입니다."
나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요한에게 시종일관 존댓말을 하고 있었다.
이것 또한 나와 요한이 동등한 위치에 있다는 걸 보여 줌으로써 위축된 요한을 살려 주기 위한 방책이었다.
내 말을 들은 요한이 쓰러지듯 내 앞에 엎어졌다.
"오오……. 제가 믿을 분은 후작뿐이십니다. 두렵습니다, 저는 필부(匹夫)일 뿐입니다."
어찌나 잔혹하게 귀족들을 죽여 댔든지 귀족의 고기를 구워 먹고, 귀족의 피로 목욕한다는 괴소문이 퍼졌던 과거의 요한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자신이 지배했던 영역에서는 누구도 받지 못한 칭송을 들었던 인물이다.
아직 자신의 진정한 능력을 깨닫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의 어깨를 잡고 일으켜 세웠다.
"당신도 필부고 나도 필부입니다. 그대는 잘해 나갈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루지온 공작은 그대를 해하지 못합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키스타 앞에 루지온 가문의 문장을 건 군대가 도열해 있을 것만 같습니다."
베이카 장군이 나를 거들어 요한을 안심시켰다.
"루지온 공작이 오고 있다면 우리 정보망에 걸려들었을 거요. 하지만 그는 저렇게 마법사만 보내고 있지 않소. 루지온 공작은 영지를 늘리려는 욕심에 사힘에 너무 깊이 발을 들였소. 그는 오지 못하오. 설령 그가 이곳에 도달하더라도 내가 직접 그를 격퇴하겠소."
"오오……!"
베이카 장군의 눈빛과 기세를 마주하면 거목 앞에 놓인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흔들림 없는 태도에 요한도 눈을 반짝였다.
베이카 장군의 말이 맞았다.
자신의 사위가 맡고 있던 도시를 통째로 적에게 가져다 바쳤음에도 루지온 공작은 병력의 머리를 돌릴 수 없었다.
이민족들이 기세를 잃고 영역이 많이 축소되었다고는 하나, 사힘을 뺏기지 않기 위해 결사 항전을 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었다.
게다가 사힘 변경백이 사라진 지금, 계속해서 이민족들이 사힘으로 유입되고 있었다.
루지온 공작은 후퇴하려면 엄청난 병력 손실을 각오해야 할 것이었다.
명장(名將)을 논하는 데는 여러 조건이 있겠지만, 나는 '시작과 끝을 잘 정하는 장군'이 명장이라 생각한다.
전투와 전쟁은 달리기처럼 시작과 끝이 정해져 있지 않다.
어느새 시작되고, 끝을 알 수 없는 것이 전쟁이었다.
루지온 공작은 영지 욕심에 사힘 깊숙이 진격했고, 전쟁이라는 깊은 늪에 잠겨 버린 셈이었다.
하반신이 늪에 박힌 채 소리만 꽥꽥 질러 대는 짐승을 무서워할 이유는 없었다.
"돌아가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세요. 걱정은 다른 걱정만을 부를 뿐입니다."
조금 나아진 얼굴로 요한이 돌아간 후, 수도 황제가 보낸 사절이 와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걸 듣고 내가 베이카 장군에게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폐하께서도 급한 것이겠지요."
내가 키스타에 도착한 지 3주 후부터 매일같이 수도 황제가 보낸 사절들이 도달하고 있었다.
어떤 자는 다 해져 가는 옷으로, 어떤 자는 온몸에 흙을 묻힌 채였다.
현재 내가 점령하고 있다고는 하나, 키스타의 주위는 아직 루지온 공작령, 즉 적지였다.
수도 황제는 적지에 사절을 밀어 넣으면서까지 나를 움직이려 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어떤 방법을 선보일지 기대되는군요."
사절이 기다리고 있다는 막사로 들어가자 구부정한 노인이 허름한 옷을 입고, 지팡이를 짚고 서 있었다.
내가 상석에 앉자 노인이 입을 열었다.
"제국 도원수, 카몰 후작 시안 몬트라우는 황명을 받들라."
원래 같으면 황제의 칙서를 받을 때 몸을 낮추고 무릎걸음으로 사절 앞까지 가는 것이 예의였으나 나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 사태에 당황한 것은 노인뿐이었다.
처음에는 나에게 이래선 안 된다던 참모들도 몇 번 같은 상황을 겪다 보니 이제는 손을 놓은 상태였다.
나는 그저 노인만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노인이 내 시선을 피하며 헛기침을 했다.
"크흠……."
그러고는 빠르게 지팡이에 자신의 마나를 밀어 넣고, 지팡이 이곳저곳을 만졌다.
역시 내가 느낀 대로 노인은 마법사였다.
아마 저 지팡이는 노인의 마나에만 반응하게 만들어진 특수한 봉인 장치일 것이다.
잠시 후, 지팡이가 열리며 봉인된 두루마리가 나왔고, 노인이 손을 대자 황제의 문장이 떠올랐다.
주위에 모든 사람이 그 문장을 보고 부복했지만 나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시큰둥한 눈으로 노인에게 말했다.
"폐하께서 내게 명하신 것이 무엇인가?"
노인이 큰 소리로 칙명을 전달하기 시작했다.
'제국의 땅이 유린당하는 이때에 제국의 빛과도 같은 카몰 후작의 행동에 짐은 통탄을 금할 수 없도다.'로 시작된 훈계조의 칙명은 한참 동안이나 키스타로 진격한 나를 질책하고 있었다.
어찌나 길었던지 다 끝났을 때는 노인이 쌕쌕거리며 숨을 고를 정도였다.
숨을 고르고 있는 노인을 보고 내가 말했다.
"끝인가?"
매번 이런 식이었다.
황제는 협정을 무시하고 루지온 공작령으로 진격한 나를 질책하는 칙명을 보내는 척하면서 자신의 진짜 의도를 숨겼다.
때로는 칙명이 쓰인 종이가 찢기더니 새로운 글자를 허공에 만들어 내는 경우도 있었고, 아니면 칙명에 새겨진 글자 중 몇몇 만이 떠오르는 경우도 있었다.
"흡!"
노인이 작게 기합을 넣으며 다시 칙서에 마나를 밀어 넣었다.
칙서가 허공에 떠오르더니 마치 보이지 않는 원뿔에 감기듯 빙빙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감기는 것이 멈추자 기울어진 글자들 사이로 꼿꼿이 서 있는 문장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왜 키스타에서 멈추어 있는가! 당장 타우로 진격해 제국을 분열시킨 역도의 목을 가져오라!
나도 모르게 어금니에 힘이 들어갔다.
아무런 지원도 없으면서 잘도 저런 소리를 하고 있었다.
결국 레이바와 지크프리트를 죽이기 위해 위로 올라가긴 할 테지만 그것은 나의 의지지 황제의 명 때문이 아니었다.
내 목적과 황제의 목적이 합치한다는 사실이 급격히 불쾌했다.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도 칙서에 떠오른 문장을 보고 얼굴이 굳어지고 있었다.
우리가 피 흘리고 죽어 가는 것은 황제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황제는 겹겹이 쳐진 높은 성벽으로 보호되는 수도 안에서 역정만 내고 있을 뿐이었다.
그의 뻔뻔함이 역겨웠다.
사절에게 말했다.
"새로 점령한 지역이 내외부로 심상치 않아 바로 떠나기에 무리가 있다고 전하라."
노인이 머리를 숙였다.
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 앞은 완연한 적지, 현재 내 아래 있는 병력만으로는 진격에 난관이 많으니 폐하의 아래 있는 정예군의 지원이 필요하다. 원군이 오기 전까지 우리는 이곳에서 벗어날 수 없다."
정면으로 황명을 거부하고 신경전을 펼치기로 마음먹었다.
내 말에 잔뜩 당황한 사절이 말을 절었다.
"하, 하지만 폐하께서 분명히 타우로……."
로하나스가 벌떡 일어나 외쳤다.
"각하께서는 군의 전권을 가지고 계신 바, 영내에서 누구도 각하의 명을 거부할 수 없소! 설령…… 그것이 폐하라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소!"
그 소리에 몇몇 젊은 참모들이 일어서서 동조하기 시작했다.
사절이 베이카 장군을 바라봤다.
친분이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베이카 장군이 입을 열었다,
"나는 이미 후작 각하께 전권을 드렸으니 할 말이 없소."
사절이 외쳤다.
"베이카! 군의 존재 이유가 무엇이오! 황제 폐하께 충성하고 제국에 안정과 평화를 가져오는 것 아니오!"
베이카 장군이 눈을 꾹 감고 말했다.
"나는 할 말을 다 했소. 돌아가시오, 헤스."
헤스라 불린 노인은 급히 군영을 빠져나갔다.
짐짓 걱정이 된 내가 베이카 장군에게 물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저야 워낙 제 마음 가는 대로 하지만 장군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무게가 다릅니다."
베이카 장군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군은 제국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황제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맹목적인 충성은 곧 군주의 눈을 멀게 할뿐이라 생각했습니다. 제 발언으로 폐하께서 조금이라도 정신을 차리신다면…… 그것으로 된 것 아니겠습니까."
베이카 장군의 마음이 전해지기라도 한 건지,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한 군단 중 일부가 지원 병력으로 키스타에 실어 날라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타우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황제는 그렇게 부르짖던 '역도의 목'을 마주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