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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검사의 복수-143화 (143/180)

두 개의 태양은 없다 (2)

강을 피로 물들이고, 구릉을 시체로 덮던 끔찍한 내전은 허무하게 끝이 났다.

하지만 이 내전이 제국에 미친 여파는 작지 않았다.

제국의 일곱 기둥이라 불리는 일곱 공작 중 둘, 리히트 공작과 에베 공작이 죽었다.

에베 공작의 자리는 오그마가 이을 테지만, 리히트 공작의 자식들 중 생사가 확인된 인물은 없으니 리히트 공작 가문의 대는 끊어졌다고 봐도 좋았다.

먼 친척들이 작위를 노리고 계승권을 주장할 법했으나, 현재 리히트는 에베 공작인 오그마 서비어의 지배 아래 놓여 있었다.

오그마는 내게 적극적으로 협력했을 뿐만 아니라 이민족의 남하를 막는 데 큰 공을 세웠으니 발언권에 힘이 실렸다.

이런 오그마에게 감히 리히트의 계승권을 주장한다는 것은 웬만한 명분 가지고는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귀족들의 죽음은 이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특히 이민족들에게 점령당했던 영지의 영주와 귀족 들은 남김없이 죽었다고 봐도 좋았다.

그나마 내전 중에 포로가 된 귀족들은 대개는 좋은 대우를 받았다.

어차피 귀족들이 혈연으로 얽혀 있기도 하고, 데리고 다니면서 귀족들의 가문에 몸값을 요구하는 편이 더 도움 되기도 했으니까.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고 웬만하면 귀족을 죽이는 내가 특이한 편이었다.

그러나 이민족들에게 제국의 귀족이라는 지위는 아무 쓸모가 없는 이름이었고, 적들을 남김없이 죽이거나, 그렇지 못하면 적 중 가장 높은 자를 죽이는 것이 많은 이민족들의 풍습이었으니 이민족들에게 잡힌 대다수 귀족들이 뼈와 살이 분리되고 말았다.

대부대를 이끄는 공작이나, 그들의 가신 격인 후작과 유력 백작들은 피해가 덜했으나, 애매한 위치에 있던 백작들과 그 이하 귀족들의 피해가 막심했다.

1황자의 목을 내걸어 내전의 종식을 선포한 황제가 빠른 시일 내에 논공행상을 하겠다고 밝혔음에도, 살아남은 귀족들이 주인이 없어진 땅을 차지하기 위해 군대를 해산하고 있지 않는 실정이었다.

때문에 아직 미묘한 긴장상태는 지속되고 있었다.

최후까지 1황자의 편에 섰던 노체 공작과 루지온 공작은 미련 없이 자신들의 과오를 인정했다.

이미 공작이 둘이나 죽은 상황이니 섣불리 자신들을 벌했다가는 귀족들 간의 균형이 무너질 수도 있다는, 나름대로의 계산을 끝낸 뒤에 나온 행동일 것이었다.

그리고 황제는 이 모든 사태를, 자신의 형이 단독으로 벌인 일이라 말했다.

아마도 1황자 편에 섰던 귀족들에게 황제의 밀사가 가서 앞으로의 충성에 대한 협박을 하고 있을 테지만,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황제가 귀족들을 용서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1황자에게 모든 책임을 지워 버렸지만, 죽은 1황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으니 참으로 기가 막힌 해결책이었다.

수도 없이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그것을 책임질 사람은 없는, 아리송한 결과였다.

"결국 이렇게 끝났네."

짜증이 밀려왔다.

1황자의 목을 바친 놈들 중 두 놈이 내가 죽여야 할 놈들이었다.

황제는 자비로운 사람이 아니다.

황제와 그놈들 간에 모종의 거래가 있었기에 그들이 살아남은 것일 터였다.

전쟁 중이라면 마음 놓고 목을 쳐도 되지만, 황제가 종전 선언까지 한 이 마당에 놈들을 죽이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개인적인 감정을 배제하고 내가 그들을 죽일 합당한 명분은 '적군'이라는 것인데, 이렇게 되면 명분이 많이 희석되고 만다.

더 빠르고 강하게 타우로 몰아쳤어야 했던 걸까?

제국 남부로 향한 것, 경계를 넘어 툴리앗으로 내려간 것, 나라드마와의 일전 등 그동안 겪어 왔던 시간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이 시간들이 헛된 것이었을까?

"전쟁은 끝났는데, 표정은 좋지 않아 보이십니다?"

칼이 말을 몰아 투브에 앉은 내 옆으로 붙었다.

내 생각과 다르게 흘러가는 이 상황이 답답했던 것인지, 평소라면 절대 말하지 않았을 속내가 나도 모르게 툭 튀어나왔다.

"이것으로 만족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칼은 별다른 말이 없었다.

왜 말을 걸어 놓고 자기가 말이 없나 싶어서 고개를 돌려 보자 칼은 의문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입을 열었다.

"제국 역사에 길이 남을 공을 세우시고도 만족하지 못하신다니,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게 그런 것들은 아무 의미가 없어요. 저는……. 제가 이루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이 내전은 그것을 이룰 좋은 기회였어요. 손 안에 들어온 기회가 날아간 것만 같아 아쉽습니다."

"흠, 만족의 범위는 각자가 다른 것이니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잠시 앞을 보며 말을 몰던 칼이 말했다.

"하지만 제가 옆에서 지켜봤을 때, 각하께서는 누구보다 열렬하게 전장에 서 계셨습니다. 그 결과로 살아남아 많은 것을 이루어내셨지요."

평소의 낙천적이고 유들유들한 칼의 말투와는 전혀 다른, 제법 진지하고 차분한 목소리였기에 놀라 그를 쳐다봤다.

칼은 내 시선이 부끄러운 건지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마치 '나도 필요할 때는 이렇게 한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하긴 칼이 유하기만 했다면 단원들이 그렇게 굳은 신뢰를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각하. 감히 묻지는 않겠습니다만 각하의 목적을 위해 달려 나가시면 됩니다. 살아 있는 한, 노력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시점에서 각하만큼 목적을 이루기 쉬운 위치에 있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위로해 주시는 겁니까?"

"위로라기보다는……."

칼은 책임자가 기운 없어 보이면 그 기운이 다른 사람에게도 전파가 된다느니, 제일 기뻐하셔야 할 사람이 매가리가 없어서는 안 된다느니 하며 횡설수설을 하다 괜히 로하나스를 부르며 멀어졌다.

뒤쪽 어디에선가 로하나스가 크게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칼의 말이 맞았다.

그동안의 시간은 절대 헛된 것이 아니었다.

목표로 한 네 명 중, 두 명을 죽였다.

절반의 성과가 있었다.

그리고 과거엔 내가 온전히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로하나스 하나뿐이었지만, 이번에는 나를 믿고, 내가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미 시안 몬트라우라는 이름은 하나의 세력이었다.

칼이 사라진 뒤로도 내가 말이 없자 투브가 말을 걸어왔다.

-우냐?

'너는 조용히만 있으면 진짜 이쁨받을 텐데 입이 방정이야, 입이. 한동안 조용하더니…….'

-한동안 조용하더니 왜 그러냐고?

'그래.'

-우리가 '동화'되고 있는 현상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말이야.

'오! 뭔가 실마리가 잡혔어?'

-아니, 전혀. 감도 안 잡히더라고.

'그런 것치고는 너무 당당한 거 아니야?'

-나라고 뭐든 다 아는 줄 알아? 그리고 내가 말했지? 이건 네가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나는 몰라.

'너는 가만 보면, 어떤 때는 되게 오래 산 현자 같은 느낌인데, 어떤 때는 그냥 햇볕 좋은 날에 배 까고 누워 있는 강아지 같단 말이야.'

-지금 욕하는 거야?

'이게 왜 욕이야?'

-오호! 욕이 아니라 이거지.

말이 끝나자마자 투브가 강아지 모습으로 변했다.

내가 위에 타고 있다는 것쯤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러고는 작아진 모습으로 바닥에 등을 대고 마구 비비기 시작했다.

주위에 있던 병사들이 그 모습을 보고 귀엽다며 폭소를 터트렸다.

웃음소리와 비례해서 내 얼굴도 새빨개졌다.

"야! 왜 이래! 빨리 원래대로 안 돌아올 거야? 야!"

-오늘은 배 까고 누워 있고 싶은 기분이야. 건들지 마. 그리고 어차피 배에 타면 이 모습이 편해. 그러니까 네가 들고 가.

결국 녀석은 오델리아의 품에 안겨서 이동하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키스타에서 좀 떨어진 곳에서 배에 올랐다.

배에서 나를 맞이하는 누이론트 백작에게 물었다.

"많이들 가고 있던가요?"

"말도 못 합니다. 전력으로 수도를 향해 말을 달리는 무리를 여럿 보았습니다. 합당한 대가를 치를 테니 저희 배를 이용하고 싶다는 무리도 있었습니다."

전후 처리와 논공행상을 위해 황제는 거의 모든 귀족을 수도로 불러들였다.

공이 있는 자는 자신에게 떨어질 것을 한 움큼이라도 더 많이 주장하기 위해, 과가 있는 자는 자신에게 돌아올 불이익을 막아 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움직일 것이 불 보듯 훤했다.

오지 않으면 도태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귀족들의 머리를 좀먹고 있었다.

멍청한 놈들, 황제가 원하는 것은 자신의 말에 헐레벌떡 달려오는 귀족들의 모습인 줄 모르고…….

제국의 상징이자 절대 권력의 상징, 황제라는 이름은 많이 빛이 바래 있었다.

신성하고 공고해야 할 권좌를 두고 형제가 서로의 목숨을 노렸다.

황제의 검을 자처했던 각지의 군단들이 소리 소문 없이 유력 영주, 대귀족과 결탁했다.

제국 곳곳에서 목숨으로 벼려지고 피로 쓰인 전설이 탄생하는 동안 황제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그런데도 지금 귀족들은 황제의 부름에 혹시나 자신이 불이익이라도 받게 될까 싶어 허겁지겁 달려 나가고 있었다.

묶어 놓고 기른 가축은 목줄을 풀어도 우리 밖을 나서지 못한다고 했든가.

지금 하는 꼴이 딱 그런 꼴이었다.

몽둥이를 잃어버린 조련사가 몽둥이 대신 갈대를 들고 흔드는데, 조련당한 동물이 '저 갈대가 얼마나 아플까!' 하며 몸을 움츠려 바닥에 머리를 파묻는 꼴.

웃기지도 않았다.

내가 전쟁터에서 굴러가며 만들어 놓은 밥상을 황제의 권위 세우기에 바칠 수는 없었다.

이 내전의 시작이 나였으니 끝도 나여야 했다.

"수도로 향하는 모든 길에 검문이 강화되었다고 합니다."

누이론트 백작의 말이었다.

"뱃길도 마찬가지겠죠?"

내 말에 백작이 끄덕였다.

"그리고 그걸 핑계로 질질 끌며 사람들을 묶어 놓고 있을 테고."

"맞습니다. 수도의 성벽에서 일야관까지 귀족들이 진을 치고 있다고 합니다."

"그것참, 고약한 버릇이네요."

권력의 우위를 잘 나타내는 것이 시간이다.

우위에 있는 자는 자신이 원할 때 열세인 자를 만나고, 열세인 자는 우위인 자를 보기 위해 하염없이 기다린다.

황제는 자신이 우위에 있음을 명백히 선포하고 있었다.

내가 다시 물었다.

"사람들 분위기는 어떻다고 합니까? 절대 좋을 수가 없을 것 같은데요."

"그렇지 않아도 작은 충돌들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내전이 종식되었다고는 하나 그것은 선언일 뿐이지, 바로 며칠 전까지 칼을 맞대며 싸웠던 감정이 한순간에 사라질 수는 없었다.

그런 사람들을 모아 놓고 마냥 기다리라고만 하고 있으니 당연히 잡음이 발생할 것이었다.

그리고 그 분쟁은 아마 수도방위병단이 적극 개입해서 막을 것이다.

내전 내내 황제에 대한 충성심을 공고히 내비치며 수도를 수호했던 바로 그들이.

그것 또한 황제의 권위를 세우는데 일조하리라.

어이가 없을 정도로 뻔뻔한 계략이었지만 황제이기에 마치 당연한 것처럼 느껴졌다.

문득 그가 황자였던 시절이 떠올랐다.

그때의 그는 무던히도 나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 했었다.

지금은 황제가 된 그때의 황자는 나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증오할까? 미워할까? 거들떠도 보지 않을까?

나는 아무래도 좋았다.

다만 그가 나의 대척점에 서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되면 나는 바그안트 서비어를 죽일 수밖에 없었다.

어떤 면에서 그는 나라드마 같았다.

황제와 나는 섞일 수 없는 사이였다.

***

수도로 향하는 며칠간의 일정에서 보급을 위에 배가 뭍에 닿을 때마다 나는 내 문장을 찍어 편지를 보냈다.

이들이 꼭 내 부름에 응답하길 바랐다.

다시 며칠 뒤, 배를 얼기설기 놓고 위에 판자를 쭉 얹어 강을 막는 자들이 보였다.

그들의 깃발에는 황실의 문장과 수도방위병단의 문장이 번갈아 그려져 있었다.

그중 하나가 우리 배에 올라 말했다.

"더 이상 강을 통해 올라가시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육로로 이동해 주셔야겠습니다."

"가장 가까운 육로는 어디지?"

"여러 곳이 있으나 그나마 일야관이 가장 통행하시기 편할 겁니다."

누이론트 백작이 명령을 내리자 병사들이 일사불란하게 하선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배에 올라온 장교가 머뭇거리다 말했다.

"저……. 현재 무력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수도 주위에서는 무장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병력을 동반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셀 수 없는 전공을 세운 내가 1황자 밑에 붙은 귀족들과 같은 대우를 받아야 하냐며 내 참모들이 득달같이 따졌지만, 이 장교는 그저 본인 할 일을 했을 뿐 죄가 없었다.

부하들을 말리고 말했다.

"그만하고 내려! 그리고 해산은 없다. 이대로 간다."

황제 폐하, 폐하의 충신이 나아가나이다.

부디 각오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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