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야관을 넘어서 (1)
일야관으로 다가갈수록 주위에 더 많은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다들 제국 각지에 영지를 가지고 있는 귀족들과 그 일행이었다.
어찌나 다급했는지 말 몇 기로 달려 나가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대개는 자신의 위세를 과시라도 하려는 듯, 가문의 문장이 그려진 깃발을 앞에 세우고 기사단을 대동하고 있었다.
아예 나처럼 자신의 아래 있는 군세를 동원한 자들도 있었다.
"그때 장교가 말하기로는 일야관 안쪽부터 수도까지는 무장이 금지되었다고 했는데, 어쩌려고 저렇게 우르르 데리고 가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상당히 멀찍한 곳에서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 나가는 한 무리의 기사단을 본 로하나스가 혼잣말인지, 내게 묻는 것인지 모를 말을 했다.
나는 로하나스의 말을 듣고 장난으로 되물었다.
"그건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야?"
"그, 그럴 리가요. 각하께서는 저들과 다르시지 않습니까."
당황한 로하나스가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그러자 투구로 얼굴을 가리고 있던 오델리아가 로하나스를 향해 한마디를 툭 뱉었다.
"말은 적게 할수록 도움이 된다, 애송이."
로하나스는 얼굴이 빨개지더니 그런 게 아니었다고 투덜거렸다.
역시 둘 사이에 뭔가 있는 게 분명했다.
'네가 말한 게 맞는 것 같아.'
-척하면 척이지, 말이라고.
둘의 관계 진전도에 대해 투브와 한창 열을 올리고 있자니 4군단 표식을 달고 있는 장교 하나가 내게 다가왔다.
"베이카 장군께서 각하를 뵙고자 하십니다."
내가 잠시 눈을 흘겼다.
"또 누구를 달고 오시는 건 아니지?"
"그런 일은 아니라고 제게 몇 번이고 말씀하셨습니다."
1황자의 편에 섰던 귀족들은 아군 깃발을 확인하면 멀리 사라지곤 했지만, 황제를 지지한다고 선언했던 귀족들은 그렇지 않았다.
몇 번이고 사람을 보내 나를 만나고 싶다고 청해 왔다.
여러 번 내 직위가 바뀐 것 정도는 알고 있을 텐데도 아직도 황제의 측근으로 아는 건지 싶었다.
나와 동행하면 절차가 조금 더 간단해질 것이라는 기대가 있는지도 몰랐다.
나는 행렬 중앙에서 검은 늑대 기사단과 함께 움직이며 그런 모든 만남을 일체 거부했다.
그래도 어느 정도의 예의는 차려야 하기에 그런 귀족들의 응대를 모두 베이카 장군에게 맡겨 둔 상태였다.
비록 출신은 평민일지라도 내전 이전부터 명장으로 이름 높고, 지금은 카몰군의 주력이라 할 수 있는 4군단 군단장인 베이카 장군에게 함부로 대할 귀족은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베이카 장군도 순순히 그렇게 하겠다고 했으나 그도 사람인지라 자신과 안면이 있는 인사들의 청에 어쩔 수 없이 내 곁으로 데리고 온 일이 몇 번 있었다.
그것을 경계해서 되물었던 것이다.
지금 베이카 장군 곁에 다른 귀족이 없다는 것을 몇 번이나 확인하고 나서야 나는 베이카 장군 곁으로 가자고 투브에게 부탁했다.
투브는 귀찮다는 기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왔다갔다 하기 귀찮아.
'베이카 장군은 한참이나 뒤에 있단 말이야. 그리고 내가 그쪽으로 가면 어차피 너도 와야 하잖아.'
거대한 늑대의 모습을 하고 나를 태우고 있던 투브가 개의 모습으로 변했다.
이젠 익숙한 일이라 나도 공중에서 몸을 움직여 균형을 잡고 바닥에 내려섰다.
투브는 본론을 꺼냈다.
-그럼 그 노인을 본 뒤에는 좀 달릴 수 있는 거야?
계속해서 배를 타고 이동했고, 행군 보조를 맞추느라 천천히 이동 중이었기 때문에 녀석은 굉장히 좀이 쑤시는 것 같았다.
녀석이 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걸 좋아하는 것 정도는 나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해 주지 못할 사정이 있었다.
'미안하지만 그건 안 돼. 나를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은 상황에서 쏘다니면 무슨 일에 휘말리게 될지 몰라. 최대한 조용히 움직이고 싶어.'
투브가 투덜거렸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끌고 움직이면서 조용히는 무슨…….
'이건 필요해서 그런 거고!'
-몰라! 더럽고 치사해! 나는 안 가.
그러곤 녀석은 강아지의 모습으로 변해 바닥에 벌렁 누워 버렸다.
요새 이 자식의 꼬장이 점점 늘고 있는 것 같은데…….
게다가 하려면 늑대의 모습으로 누워 버릴 수도 있을 텐데 일부로 강아지로 변해 누운 것을 보아 의도는 뻔했다.
'네가 안아서 데려가라.'
결국 나는 투브를 품에 안고, 기사단에서 관리하는 말 한 마리에 앉아 베이카 장군을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장군을 보좌하는 장교가 나를 맞았다.
"장군께서는 어디 계시지?"
"마차 안에 계십니다."
내가 잠시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베이카 장군은 천성이 군인이라고 해도 좋은 사람이라 이동 시에도 웬만하면 말을 이용하거나, 심지어는 서슴없이 말에서 내려 걷기도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이동 중에 마차를 이용한다는 것이 이상하게 다가왔다.
나의 이런 기미를 눈치채기라도 한 것인지 장교가 말했다.
"귀족분들이 남기고 간 증표나 서신이 너무 많아 말에서는 살펴보기 힘들 정도입니다."
결국 내가 그에게 맡긴 소임 때문이라는 소리였다.
내가 왔다는 기척을 내고 마차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안에는 며칠 사이 부쩍 수척해진 듯한 베이카 장군이 있었다.
그가 고개를 들어 나를 보더니 힘없이 실소를 내뱉었다.
"허허, 오셨습니까. 이렇게 고될 줄 알았다면 절대 안 하겠다고 했을 겁니다……."
마차 안에 펴진 간이 책상에는 온갖 가문의 문장이 그려진 서신이 봉투도 열지 않은 채로 수십 장이 쌓여 있었고, 장군의 발치에는 다양한 재질의 상자들이 놓여 있어 안 그래도 넓지 않은 마차 안이 더욱 비좁아 보였다.
"이…… 이렇게 많았습니까?"
귀족의 전령으로 보이는 자가 영내로 들어오기를 청한다고 내게 올라오는 보고는 하루에 한두 건밖에 되지 않았기에 전혀 예상하지 못한 그림이었다.
심지어는 서신 옆에 신분패가 놓여 있기도 했다.
녹색과 푸른 빛이 도는 것으로 봐서는 자작과 남작들의 신분패였다.
"신분패도 놓고 갑니까?"
귀족들의 혈통은 귀족원에서 엄격하게 기록과 관리가 되고 있기 때문에 설령 신분패를 분실했다하더라도 귀족원에 말하면 재발급을 받을 수 있다고는 하지만, 기본은 항시 몸에 지니고 있는 것이 기본이기 때문에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래도 자작과 남작 선에서 그치나 보군요."
내 말에 베이카 장군은 고개를 저었다.
"그 정도의 귀족들이 신분패를 이렇게 증표로 사용하지는 않지요."
"그러면요?"
"후작이나 백작 정도 되는 귀족들은 자신들의 신분패를 보내기 부끄러우니까 친족들의 신분패를 보냅니다. 이러지 말라고 해도 막무가내입니다. 선물이랍시고 제멋대로 저런 걸 두고 가는 건 또 어떻고요. 직접 찾아오는 자들도 부지기수입니다."
베이카 장군이 울상이 된 채로 마차 바닥을 메우고 있는 상자들을 가리켰다.
그의 이런 표정은 처음 본 것 같았다.
제법 쌓인 것이 많았던 것인지 베이카 장군은 그답지 않게 불평을 늘어놓았다.
"이제 주위에 있는 귀족들은 물론이고 이미 일야관 안에 들어가 있는 귀족들, 심지어 수도에 있는 귀족들도 사람을 보내오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수도로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이 빠르게 퍼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연로한 나이에 좁은 마차 안에 갇혀서 하루 종일 서신만 뜯어보고 있었을 베이카 장군을 생각하니 미안함이 몰려왔다.
"죄송합니다,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일입니다. 장군이 아니면 맡을 사람이 없습니다."
장군의 말에 따르면 후작이나 백작 정도 되는 귀족들이 직접 보내온 사적인 서신이다.
아무에게나 그 내용을 보게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일단 이 꼴을 보니 내가 직접 하기는 더욱 싫었다.
"알지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슨 방안이라도 고려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렇게 하겠다고 장군에게 말하고 마차 밖으로 나섰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거대한 구조물이 보였다.
일야관이었다.
내가 나온 기척을 알아채고 내 곁으로 온 투브가 내가 바라보는 곳을 같이 쳐다봤다.
그러고는 한마디를 했다.
-저 위에서 아래를 볼 때랑, 아래에서 위를 볼 때의 느낌이 되게 다르네.
'그러게.'
내가 말이 없자 투브가 슬쩍 물었다.
-나라드마 생각이 나나 봐? '어떻게 저길 공격할 생각을 했을까?' 이런 거?
'나라드마는 공격했고, 나는 막았지. 결국 놈은 내 손에 죽었고.'
잠시 생각을 정리한 뒤 투브에게 말했다.
생각으로 전하는 것이 아니라 입 밖으로 내뱉는 말이었다.
"나는 나라드마가 아니야. 그러니 나는 일야관을 넘는다."
***
아군의 행군은 일야관에서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곳에서 멈추었다.
선두는 멈추었지만 아직 후미는 한창 움직이고 있을 것이었다.
여기저기서 숙영을 위해 천막을 치고, 밤을 밝히기 위해 횃불을 만들었다.
천막이 슬슬 모습이 갖춰질 무렵, 일야관의 문이 열렸다.
말에 탄 기수 몇이 우리 쪽으로 급히 접근했다.
일야관을 담당하는 책임자가 보낸 전령이었다.
나는 그들을 돌려보냈다.
책임자가 직접 나오지 않으면 이야기하지 않겠다는 말과 함께였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일야관의 책임자와 이야기할 수 있었다.
"네찰 피게트입니다."
기억이 났다.
귀족 중에는 특이하게도, 대대로 군인이 되는 것을 자랑으로 삼는 피게트 자작 가문의 인물이었다.
그 피게트 가문 중에서도 이 네찰이라는 인물은 만난 적이 있었다.
네찰이 굳은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내게 말했다.
"황제 폐하께서 수도 주위에 무장해제를 명하셨습니다. 일시적인 조치이긴 하나 예외는 없어야 한다는 것이 폐하의 명령이십니다."
그의 말에 나는 잠시 과거 생각에 젖어들었다.
분리 운동을 정리하고 수도로 돌아오던 길, 자신의 형이었던 전대 황제를 죽이고 황위에 오른 2황자는 내게 명령을 내렸었다.
병력을 멈춰 세우고, 어떠한 무장도 없이 맨몸으로 수도에 들어올 것.
그리고 오랜 기간 지속된 전쟁에 지쳐 있던 나는 그 조건을 수용해 그의 앞으로 나아갔고, 내 상징과도 같았던 망토를 새로운 황제 앞에 내려놓았다.
그때 그 명령을 들고 왔던 자가 지금 내 앞에 있는 네찰 피게트였다.
비록 다른 장소와 다른 직위로 만났지만, 그가 내게 과거와 매우 흡사한 명령을 전달하고 있는 것이 우스웠다.
운명은 참 장난을 좋아하는구나 싶었다.
나도 모르게 친근하게 그를 불렀다.
"네찰."
나도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다정한 목소리였다.
동석해 있던 베이카 장군, 내 옆에 서 있던 로하나스, 심지어 한쪽 구석에서 앞발로 벌레 잡기에 열중하던 투브도 고개를 들어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볼 정도였다.
살짝 무안해진 내가 재빨리 말했다.
"자네가 어떻게 그 자리에 있는 줄 알고 있나?"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짓던 네찰이 사색이 되었다.
나는 그의 생각을 확인시켜 주었다.
"이전 책임자였던 데마 오리스가 이적 행위를 하다 발각되어 내 손에 죽었기 때문이지."
사색이 되다 못해 얼굴이 허옇게 변해 버린 네찰은 아랑곳하지 않고 내가 말했다.
"이미 꽤나 많은 사람이 내 손에 죽었지만, 그래도 같은 직책에 있는 다른 두 사람을 죽이는 건 영 내키지 않는 일이라네. 우리 한번 합의점을 찾아보도록 하지. 자네와 내가 만족하면서, 동시에 폐하께서도 납득하실 만한 그런 합의점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