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야관을 넘어서 (2)
끼이이이익.
일야관의 거대한 문이 활짝 열렸다.
그것을 보고 있던 내가 투브에게 생각을 전했다.
'가자.'
-이런 게 통한단 말이야? 인간은 알다가도 모를 존재야.
투브가 고개를 털레털레 젓더니 열려 있는 일야관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무기를 갖추지 않은 비무장 상태라는 것을 보이기 위해 양 손을 하늘로 뻗고 있던 나는 녀석의 등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다리에 힘을 단단히 주어야 했다.
내 뒤를 따라 어떠한 무장도 하지 않은 카몰군이 나와 같이 양손을 하늘로 뻗고 주욱 늘어서서 따라 들어오기 시작했다.
각자의 무구는 수레에 옮겨 담아 잘 가린 상태였다.
비무장 인원의 행렬이 계속해서 일야관 안으로 밀려들고 있었다.
일야관 성벽 위의 병사들은 물론이고, 아직 일야관에 들어가지 못한 귀족들이 벌떼같이 몰려들어 우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들 황당한 표정이었다.
일야관 성벽을 통과해 안쪽의 작은 도시에 도달하자 네찰이 나를 맞았다.
그는 굉장히 복잡한 표정이었다.
아마도 '이게 과연 잘한 짓일까.' 하는 생각이 저런 표정으로 나타나고 있을 것이다.
나는 손을 내리고 아래로 뛰어 네찰에게 다가갔다.
"내전이 종식된 것을 감사하며, 황제 폐하의 은덕을 칭송하기 위해 수도로의 순롓길에 오른 자들이다."
이것이 밤새 네찰을 반쯤은 협박, 반쯤은 어르고 달래서 나온 결과였다.
우리는 카몰'군'이 아니라 카몰'인'으로 황제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보기 위해 수도로 향하는 길이라는 명목이었다.
그 증거로 무장을 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안전을 위해 이들의 영주가 동행하고 있기도 했다.
그러나 내 말을 듣고도 네찰은 영 탐탁지 않은 얼굴이었다.
내가 인상을 쓰고 나서야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약속했던 문답을 했다.
"어디의 누구십니까?"
"카몰의 후작, 시안 몬트라우."
"통행의 목적이 어떻게 되십니까?"
"멀리서라도 황제 폐하의 존안을 보기를 원하는 카몰인이 많은 바, 이들의 열망을 무시할 수 없어 수도로의 여행을 허가하고 이들의 안전을 위해 직접 동행했다."
"신분패를 확인하겠습니다."
자연스럽게 품에 손을 넣었다.
그리고 느껴지는 감촉에 조금 당황했다.
하나가 아니라 두 조각이었다.
내 신분패는 현재 그레이스의 것 절반, 내 것 절반이 붙어 있는 형태였다.
이걸 꺼내면 괜히 그레이스를 물고 늘어지는 셈이 된다.
네찰이 내게 뭐하고 있냐는 표정을 지었다.
그에게 작게 속삭였다.
"이건 그냥 넘어가지."
"예? 무슨 소리십니까? 지금 보는 눈이 몇 인 줄 아십니까? 철저하게 해야 그나마 뒷말이 안 나옵니다. 어서 주셔야 합니다. 그래야 저나 각하나 편해지십니다."
신분패에 외형 변환 마법이라도 걸까 생각했지만 주위에 있는 마법사들이 마나의 움직임을 알아챌 것이 분명했다.
네찰의 말이 맞다.
철저하게 해야 뒷말이 나오지 않는다.
내 주위에 있던 다른 카몰 귀족들이 자신들의 신분패를 보여 주겠다고 나섰지만 네찰은 완강했다.
단체가 지나갈 때는 총책임자의 신분패를 확인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나.
결국 손에 신분패를 꼭 쥐고 꺼냈다.
네찰에게만 보여 주면 된다.
'이자도 어차피 공범, 내가 그레이스의 신분패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떠벌리고 다니지는 못하겠…….'
그때 뒤에서 말발굽이 또각거리는 소리와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허허허, 어제도 느꼈지만 자네는 정말 제국의 참 군인이로군."
베이카 장군이었다.
역시나 무장을 모두 벗은 모습이었다.
평상복 차림의 그는 무관보다는 문관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는 어젯밤 내내 나를 도와 네찰을 조련했었다.
말에서 내려 다가오는 베이카 장군을 보고 네찰이 자세를 바로 했다.
어젯밤의 기억도 그렇고, 아무래도 귀족색이 강한 나보다는 진짜 군인인 베이카 장군이라 긴장하는 모양이었다.
베이카 장군이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는 네찰에게 말했다.
"지금은 순례자 중 하나일 뿐이지만 나는 본디 군단장이라네."
네찰이 잔뜩 기가 죽어 대답했다.
베이카 장군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감을 못 잡아 두려워하는 모양새였다.
"예……. 그렇지요."
"제국의 법률에 보면 군단장은 의전 시에 후작에 준하는 대우를 받게 되어 있지. 그 정도는 알고 있겠지?"
"그렇습니다."
"그러니 내 신분패면 후작 각하의 신분패와 동일하지 않겠나?"
순 억지였다.
거짓말은 아니었지만 수도로의 여행을 승인한 것은 나다.
그러니 이 일행의 책임자 역시 나였다.
그러나 상대가 베이카 장군이니만큼 네찰은 고뇌하고 있는 듯했다.
베이카 장군의 마지막 말에 결국 네찰은 무너지고 말았다.
"일야관에 참 군인이 있다고 내가 직접 카멜에게 말해 주도록 하지."
네찰의 직속상관, 수도방위병단의 총책임자인 카멜 할 장군을 마치 친구나 동네 아이 부르듯 '카멜'이라 칭하는 베이카 장군의 뒤에서 후광이 비치는 것 같았다.
네찰은 결국 10만이 넘는 '순례자들'의 일야관 통행을 허가했다.
일야관이라는 말 그대로 하룻밤 만에 거대한 관문을 넘어선 것이다.
그것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채로.
우리가 하는 것을 보고 일야관 밖에 있던 많은 귀족들이 같은 방식으로 데리고 왔던 기사단이나 병력의 무장을 모두 한 곳에 모은 채로 통행을 시도했지만 네찰은 모두 거부했다.
아마 꽤나 곤혹스러울 테지만 내가 알 바는 아니었다.
일야관에서 조금 안쪽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10만이 넘는 병력이 계속해서 들어와야 하니 며칠 정도 걸릴 수 있었다.
잠시 짬을 내 베이카 장군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큰 덕을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베이카 장군이 웃으며 말했다.
"절반이 다른 신분패이니 내보이기는 힘드실 테지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나와 그레이스만 아는 일을 베이카 장군이 어떻게 알고 있단 말인가.
놀란 감정이 얼굴에 묻어 나왔는지 베이카 장군이 얼른 말을 덧붙였다.
"테르다마스에서 제뉴인 공작 각하를 뵈었을 때 들었습니다. 산탄다르 공작께서 각하의 신분패 절반을 가지고 계시다고요. 그렇다면 산탄다르 공작 각하의 신분패 절반은 어디 있겠습니까. 각하께서 가지고 계시겠거니 했지요."
"아버지와 그런 말씀을 나누셨다고요?"
"예."
"장군 말고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 있습니까?"
"일단 저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모르지요. 제뉴인 공작 각하께서 누구에게 또 말씀하셨는지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버지가 예전에 내게 했던 말이 생각났다.
-설마 산탄다르 공작과 혼인하려고 만인지상의 자리를…….
진짜로 그렇게 믿고 계신 건 아니겠지…….
테르다마스에 와 계실 적에도 부쩍 그레이스 얘기를 자주 꺼내곤 하셨다.
나와 그레이스를 이어지게 하기 위해 아버지가 물밑 작업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부쩍 강하게 들었다.
공작 가문의 직계 간의 혼인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지만, 지금은 나, 그레이스, 아버지 모두 큰 공신이고, 황제의 입김이 많이 약해져 있는 상황이다.
아버지가 마음먹고 황제에게 청한다면 못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 제발 제가 생각하는 것이 아니길 빌겠습니다!'
지금은 수도로 많은 귀족들이 모이고 있는 상태, 아버지가 귀족원에 가서 여론을 만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최대한 빨리 수도로 가야 했다.
베이카 장군에게 이건 전략적 제휴라고 몇 번이고 설명하고, 절대로 새어 나가지 않게 해 달라는 부탁을 간곡하게 한 뒤 내 막사로 돌아왔다.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었다.
"아니, 그레이스는 왜 그런 실수를 한 거야. 그것도 하필이면 아버지한테 들키게! 전장에서 신분패 꺼낼 일이 얼마나 있다고?"
그 말에 투브가 바닥을 구르며 깔깔댔다.
한참을 그렇게 구르던 녀석이 나를 보고 말했다.
-야.
"왜."
-과연 실수일까?
어?
***
다시 며칠 뒤, 나는 익숙한 성벽 앞에 있었다.
제국의 중심부, 그 상징성으로 인해 다른 이름이 붙지 않은 곳, 수도였다.
내 뒤에는 여전히 무장하지 않은 '순례객'들이 따라오고 있었다.
몇 번이고 수도방위병단에서 사람을 보내 인원을 해산할 것을 요구했지만, 나는 이들이 무장하지 않았으며, 전쟁의 승리를 기뻐하는 제국민이라는 이유를 들어 거절했다.
게다가 '일부는' 내전에 참여한 역전의 용사이니 이들을 막을 수는 없다고도 했다.
눈 가리고 아웅이었지만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고, 무엇보다도 내 발언이었기에 무시 못 할 힘이 실려 있었다.
"날파리들이 제법 많네."
내 말에 로하나스가 즉각 반응했다.
"접근을 막고는 있습니다만……."
"됐어, 탓하는 거 아니야."
명목상으로는 순례객이긴 했지만, 무구들은 모두 수레에 실려 우리와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즉, 현재 수도 주위에서 무장이 가능한 병력은 우리와 수도방위병단밖에는 없는 상황이었다.
수적으로는 아군이 수도방위병단의 2/3 정도로 열세였지만, 아군은 한군데 뭉쳐 이동하고 있는 상황이고, 수도방위병단은 수도 주위에 퍼져 여러 관문들을 지키고 있기에 우리를 주목하는 눈이 많았다.
그 눈들은 우리가 수도로 향할수록 더욱 불어났고, 수도의 지척에 이른 지금에 이르러서는 아군 주위에 거대한 군중 무리가 생겼을 정도였다.
황제의 소집령에 응한 귀족들도 있었고, 수도 주위에 사는 일반인들도 있었다.
일반인들은 멀리서라도 내 얼굴을 보고 싶어 하는 선에서 그쳤지만 귀족들은 온갖 줄을 내세우며 나를 직접 만나보고 싶어 했다.
일이 이렇게 되니 더더욱 수도방위병단에서는 우리의 처리를 곤란해하고 있었다.
그렇게 수도의 서쪽 문 앞에 자리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전령이 말을 타고 군영으로 들어왔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키스타에 머물 때 황제의 명을 전했던 노인이었다.
"수도방위병단의 지휘관인 카멜 할 장군은 제국 도원수, 카몰 후작, 시안 몬트라우 님 및 이하 귀족 분들의 수도 입성을 허가했습니다."
서신을 넘겨받은 로하나스가 다시 한번 내용을 확인하고 내게 틀림없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리고 노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황제 폐하의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노인은 저번에도 황제의 명을 전했으니 아마 할 장군의 허가는 곁다리였을 것이고, 이것이 진짜 내용일 것이었다.
저번에 키스타에서 마법으로 봉인된 칙서를 펼친 것과는 다르게, 이번에는 노인이 평범하게 품속에서 두루마리를 꺼냈다.
황가의 문장이 그려진 고급스러운 두루마리의 등장에 많은 사람들이 긴장했다.
노인은 두루마리 위의 매듭을 손수 풀더니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내용을 읽었다.
"역전의 용사들이 직접 수도를 방문한다는 소식에 짐은 기쁨과 경탄을 금치 못하겠노라."
딱딱한 명령체의 글이 아니라 황제의 말투 그대로가 담긴 친서(親書)였다.
한참 동안이나 우리를 격려하던 노인의 목소리가 마지막에 이르렀다.
"그대들의 수도행을 밤낮으로 기념하고 싶으나 현재 내전에 대한 정리가 덜 된 바, 많은 귀족들이 모여 있기에 그리하지 못하는 것이 짐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구나. 친히 약조하건대, 그대들의 노고를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을 터이니, 부디 섭히 여기지 말고 조금만 기다리고 있으라."
병력의 입성은 허가하지 않겠다는 말을 길게도 늘려 쓴 것뿐이었다.
나는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수도와 수도방위병단에서 우리 순례객들의 잠자리와 먹을거리를 책임진다면 이들은 얼마든지 기다릴 것이라 전하시오."
노인이 돌아간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렇게 하겠다는 회신이 돌아왔다.
나는 베이카 장군에게 남은 이들의 지휘권을 맡겼다.
그리고 카몰의 귀족들과 기사단 중 귀족 출신인 자들을 데리고 수도로 들어섰다.
연회의 서막
어느 지저분한 골목, 나는 일전에 본 적이 있는 낡은 문 앞에 서 있었다.
문을 가볍게 두드리자 문에 나 있는 창이 거친 소리를 내며 열렸다.
얼굴의 반쪽도 안 되는 창에 얼굴을 들이민 남자가 물었다.
"어떻게 오셨소?"
약속된 빠르기와 정도로 문을 두드리고, 내가 알고 있는 암호를 말했다.
"호기심이라는 바다에 잠겨 사실이라는 섬을 향해 나아가려 하네."
비밀 정보기관, 태양달에 들어가기 위한 암호였다.
이곳을 이용한 지가 한참 되었으니 암호가 바뀌었을 것 같았지만, 일단 내가 아는 암호는 저것이었다.
놀랍게도 덜커덕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남자는 재빠르게 예를 갖추며 옆으로 물러났고, 예전에 왔을 때처럼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나를 맞았다.
과거의 여인과는 분명 다르지만 비슷한 얼굴, 그리고 같은 드레스였다.
취향 하나는 올곧다고 생각하는 순간, 뒤에서 문이 닫혔다.
여인이 나를 안내하기 전, 예전 기억을 더듬어 내가 먼저 발걸음을 안쪽으로 옮겼다.
문득 궁금해져 물었다.
"한 번 생성된 암호는 계속 사용하나? 일전에 쓰이던 암호와 같던데."
"사람에 따라 다릅니다."
"왜 내 암호는 달라지지 않았지?"
"접촉할 기회가 없었으니까요."
자신들이 직접 접촉하지 않는 이상 관계는 달라지지 않는다.
관리에 자신이 있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문주께서 검은 늑대도 함께하길 원하십니다."
"문주? 여기가 무술 문파인 줄은 몰랐는데."
"태양달은 모든 정보가 모이는 곳, 여닫는 문(門)이 아니라 들려오는 것들[聞]이 종착하는 곳이기에 이곳의 주인을 문주(聞主)라 부릅니다."
그리고 여인은 다시 한번 투브가 함께 와야 함을 강조했다.
투브는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해 밖에서 망을 보고 있었다.
저번에 왔을 때는 투브를 입에 담지도 않았는데, 왜 갑자기 이러나 싶었다.
"없어, 나 혼자야"
내 말을 들은 여인이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대꾸했다.
"영수를 그리 쉽게 놓고 다녀도 되는 겁니까? 그리고 후작께서 계신 곳에는 항상 검은 늑대가 함께했습니다. 단 한 번의 예외 없이요."
여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나는 손을 앞으로 뻗었다.
앞으로 향한 내 손에는 마나 소드가 들려 있었다.
창처럼 길게 변한 마나 소드가 여인의 미간에 닿기 직전이었다.
"뭘 더 알고 있지?"
투브가 영수라는 것을 알아챈 것은 같은 영수인 아라크네와 투르가 말고는 없었다.
이 여인은 어떻게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인가.
그러나 여인은 내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오히려 빛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꽤나 많은 것을 알고 있지요. 더 많은 것을 알고 싶기도 합니다. 제국 최고의 화젯거리가 각하 아니겠습니까."
"알고 있는 것을 다 말해. 그렇지 않으면 죽인다."
"정보를 얻기 위해 이곳에 오신 것이 아니었나요? 저를 죽이면 태양달은 각하를 적으로 규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각하의 정보를 요구하는 자들에게 모든 것을 제공할 수밖에요. 각하에 대한 정보를 내놓으라는 요구가 어찌나 빗발치는지 모르실 겁니다."
"나를 협박하는 건가?"
여인이 슬쩍 마나 소드를 보았다.
"이런 것이 협박 아니겠습니까."
당돌하고 대범한 여인이었다.
감히 나를 협박할 생각을 하다니.
"투브가 동행해야 하는 이유는?"
"해를 끼치지는 않을 겁니다. 고대의 존재인 영수를 실제로 볼 기회는 흔치 않습니다. 귀중한 자료가 될 겁니다."
"흔치 않다……. 태양달이 가지고 있는 영수에 대한 기록은 언제가 가장 최근이지?"
여인이 눈을 흘겼다.
정보 상인인 자신과 거래하려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겠지.
그러나 나는 굽히고 들어갈 생각이 없었다.
"답해."
"200여 년 전, 거대 해일이 밀려와 섬 하나가 사라진 기록이 있습니다. 그것이 영수의 행동으로 추측되는 가장 최근의 기록입니다."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지만 내가 이곳에 온 목적 중 한 가지를 제외할 수 있었다.
아라크네의 행방을 물어보려 했건만, 이들은 수도까지 침투한 영수인 아라크네에 대한 것을 알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하나 더."
"각하께서 저희에게 제공하신 정보로는 이것도 과한 것입니다! 영수에 대한 정보는 비밀 중에서도 극비……!"
재빠르게 여인의 말을 끊었다.
"연기하지 마. 너희는 투브가 영수라는 확신이 없었을 거야. 그런데 내 반응으로 투브가 영수라는 것을 확신했겠지. 이 정도면 어마어마한 수확 아닌가? 오히려 그쪽이 제공한 정보가 빈약해 보이는데?"
영수라는 말이 나왔을 때 모르쇠로 일관할 수도 있었지만 바로 반응한 이유였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정보를 가진 사람이 눈앞에 있을 때, 정보기관인 이들이 과연 냉정할 수 있을까?
저 여인은 내가 미끼를 문 줄 알았겠지만 사실 미끼를 문 것은 여인이었다.
투브의 존재를 이용해 여인에게서 정보를 살살 빼낼 생각이었다.
게다가 안쪽으로 들어가서 정식 절차를 거치게 되면 거금의 정보료가 들지만, 이 여인이 여기서 말하는 것에는 정보료를 지불할 필요가 없으니 일석이조였다.
"정보의 가치를 아는 자라면 200년 전의 죽은 정보와 현재의 살아 있는 정보가 같은 가치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내 말에 여인이 입술을 꾹 물었다.
그런 여인에게 내가 물었다.
"태양달은 원래 황실 기관이라고 들었는데."
여인이 고개를 끄덕거리려고 했다.
그러나 마나 소드로 여인의 턱 아래를 지지해 끄덕이는 것을 막았다.
"기다려, 이게 본 질문이 아니니까."
다시 여인을 향해 말했다.
"폐하께서 나에 관한 것을 태양달에 요구한 적이 있는지, 그리고 그에 대한 너희의 행동은 어땠는지."
"질문이 두 가지나 되는군요."
"문장은 하나였어."
여인이 눈을 굴렸다.
"검은 늑대에 대한 정보는 어디까지 제공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 와중에도 정보의 가치를 저울질하고 있었다.
무서울 정도의 집념이었다.
예전에 왔을 때 나를 맞았던 여인은 이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녀석이 불쾌해하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협조하지."
"좋습니다."
여인이 짧게 숨을 들이 마시고 말했다.
"폐하께서는 각하에 대한 것을 저희에게 계속 요구하고 계십니다. 갈수록 주기가 짧아지고 있습니다."
"너희는 어떻게 하고 있지?"
"본디 저희가 황실 기관이었다고는 하나 지금은 엄연히 분리된 곳, 회원의 정보를 쉽게 노출하지는 않습니다."
"어렵게는 노출한다는 소리인가?"
내가 말꼬리를 잡자 여인이 나를 째릿 하고 노려봤다.
"저희가 판단하기에 내밀한 정보는 당사자의 동의 없이 공개하지 않는다는 의미였습니다."
"좋아, 그렇다고 쳐. 그걸 어떻게 믿지?"
"만약 저희가 중립을 지키지 않고 폐하의 편에 섰다면 지금쯤 이곳에 황군이 들이닥치지 않았겠습니까?"
"너무 일차원적인 논리 구조인데."
주위에 마나를 펼치자 정말 아무도 느껴지지 않기는 했다.
당장 지금은 위협이 없다는 소리였다.
벽에 걸려 있던 횃불이 붉은빛에서 푸른빛으로 바뀌었다.
"마법을 쓰셨군요."
"횃불이 감지 기능을 하나 보군. 상당히 정교한데? 마나를 안 퍼트려 봤으면 저런 역할을 하는지 몰랐을 거야."
여인은 내 감탄에 별 반응을 보이지 않고 나를 재촉했다.
약속은 약속이니 투브를 불렀다.
'야, 너 좀 보잔다.'
-나를 왜? 너 나 팔았냐?
뜨끔했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당당하게 나가기로 했다.
'판 게 아니라 아라크네의 행방을 캐내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
-또 뭐라고 입을 털었길래……!
'별 말 안 했어! 이 여자가 알고 있는 정도로만 얘기한 것뿐이야!'
투브가 잔뜩 화를 낼 줄 알았는데, 전혀 의외의 반응이 돌아왔다.
-여자? 예뻐?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문 앞에 투브가 서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참, 한결 같은 놈이다, 진짜로.
안내를 받은 나는 이곳에 처음 왔을 때 나를 담당했던 남자와 마주하게 되었다.
그때처럼 여전히 턱 위를 가리는 가면을 쓴 남자였다.
턱 아래로 노출된 그의 피부는 과거에 비해 주름이 많이 늘어 있었다.
"두 번째 이용이시군요."
"그렇소."
"먼저 여식의 무례를 사과드립니다."
나를 맞이했던 여인이 문주의 딸이었던 모양이었다.
내가 고개를 까딱하고 말했다.
"자질은 좋으나 아직 좀 급한 것 같던데."
남자가 고개를 주억였다.
"동감입니다, 제 어미와 다르게 아주 급하지요. 자, 본론으로 들어가시지요. 어떤 정보를 원하십니까?"
예전에 나를 안내했던 여인은 이 남자의 부인이자 여인의 어머니인 모양이었다.
남자가 내 앞으로 종이와 잉크, 깃펜을 밀어 놓았다.
그리고 한마디를 덧붙였다.
"저는 제 여식처럼 호락호락하지 않을 겁니다."
***
똑똑.
누군가 내 방문을 두드렸다.
정신을 차려 보니 벌써 밖이 밝아 오고 있었다.
내가 손을 휙 휘두르자 태양달에서 받아 온 자료들이 저절로 척척 정리되었다.
그리고 책상 서랍이 소리 없이 부드럽게 열리더니 자료들이 그 안으로 스르륵 들어가 닫혔다.
황궁의 비밀 통로들, 수도방위병단 내 부대들의 배치 현황, 귀족원 내의 극심한 파벌 갈등 등이 적혀 있는, 어디 가서도 얻지 못할 자료였다.
양이 워낙 많고 방대해서 태양달을 방문한 지 며칠이 지난 지금에서도 정리가 덜 된 상황이었다.
비싸기도 엄청 비쌌던지라 만만치 않은 지출이 있었다.
아무리 돈이 좋다지만 이런 걸 함부로 내놓아도 되냐는 내 질문에 태양달의 문주는 이렇게 답했다.
"각하께서는 이것들을 누구보다 필요로 하시고, 누구보다 잘 이용하시리라 믿기 때문에 드리는 겁니다."
과거에 방문했을 때와 같은 가면을 쓴 문주의 눈이 웃음 지었다.
"황실에서 알면 난리가 날 텐데……."
내 혼잣말에 문주가 여전히 가면 너머의 눈웃음을 없애지 않은 채로 말했다.
"황실에서도 어느 정도 알고 있겠지요. 저희는 저희 최선의 정보를 제공해 드리지만 이것이 전부라고 믿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사기 정보로군."
"그렇게 말씀하시면 서운합니다, 허허허. 이 정도라도 제공할 수 있는 곳은 천지에 저희 말고는 없습니다."
내가 던져 준 투브에 대한 곁가지 정보 몇 개를 확인한 문주는 꽤나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딸과는 다르다는 그의 호언장담처럼 그는 마치 거대한 암석 같았고, 내 쌈지에서 나간 액수를 생각하니 가슴이 아파왔다.
이미 나간 돈은 어쩔 수 없기에 얼른 잊고 밖을 향해 소리쳤다.
"일어났어! 곧 나가!"
나이가 들어 이제는 목소리에 힘이 많이 빠진 저택의 집사, 케인즈가 오전 내에 부모님께서 저택에 오실 거라는 말을 전하고 내려갔다.
아버지를 제외한 네 공작과 한 명의 내정자는 이미 수도에 들어와 있는 상태, 서로 편을 나누고 칼을 겨누던 자들이 한 곳에 모여 있는 셈이었다.
그리고 그날 정오쯤, 아버지와 어머니가 저택에 오심과 거의 비슷한 때에 황실에서 보낸 사자 역시 도착했다.
"제뉴인 공작, 제로 몬트라우와 카몰 후작, 시안 몬트라우는 내전의 논공행상을 위해 명일 입궁할 것을 명한다."
진흙탕 개싸움에 참여할 것을 권하는 황제의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