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들의 연회 (1)
"시안."
아버지가 나를 불렀다.
"예."
"감정을 앞세우지 말고, 차분하게 할 말만 하거라. 천천히 가르쳐 주어야 할 것이 많은데, 네가 이른 나이에 후작이 되어 카몰로 가 버리는 바람에 알려 주지 못한 것이 많구나."
"아직 시간이 조금 있습니다. 간략한 것이라도 좋으니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들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아버지가 주위를 잠시 둘러보았다.
화려함과 정갈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넓은 방이었다.
붉은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사각(死角) 없이 방 곳곳을 감시하고 있었다.
경비 업무에 제국 최고의 기사단이라는 평가를 받는 붉은 방패 기사단을 투입한 것은 과도한 처사가 아니냐고 할 수 있겠지만, 이곳에 모여 있는 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전혀 과하지 않은 배치였다.
여섯 명의 공작이 황궁 정전으로의 입장을 앞두고 모여 있었다.
"음, 감정이 앞서서는 안 된다는 점이겠지. 특히 이런 자리에서는 더더욱 말이다. 대개의 경우에는 침묵이 달변보다 더 큰 무게를 가진다."
원수 놈들은 이미 정전에 입장해 있다.
과연 그들을 보고도 이성적인 판단이 앞설 수 있을까 고민됐지만 지금까지도 잘해 왔으니 큰 걱정은 없을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숨을 한 번 고르고 인물들의 면면을 살폈다.
아버지인 제뉴인 공작, 제로 몬트라우.
산탄다르 공작, 그레이스 바크하임.
에베 공작, 오그마 서비어.
그랑베르트 공작, 웨르텅 서비어.
루지온 공작, 콜레 루지온.
노체 공작, 런진 노체.
대가 끊겨 작위 계승자가 없어진 리히트 공작을 제외한 모든 제국의 공작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는 셈이었다.
긴장된 분위기 때문인지 서로 말 한마디 없이 경계하고 있는 것이 현재 제국의 현실을 잘 보여 주고 있는 것 같았다.
심지어는 같은 편에 섰던 아버지와 그레이스, 그랑베르트 공작도 아무 말이 없었고, 1황자의 편에 섰던 루지온 공작과 노체 공작 역시 아무 말이 없었다.
본인의 선택은 아니었지만 원래 1황자 편에 섰다가 나와의 맹약으로 입장을 바꿔 현 황제를 지지한 오그마의 얼굴엔 약간의 불편함이 떠 있을 뿐이었다.
아마 서로가 조금씩의 불편함을 가지고 있을 것이지만 이 자리에서 가장 불편한 것은 누가 뭐래도 나였다.
아버지를 제외한 모든 사람의 눈이 계속 나를 흘끔거리고 있었다.
심지어는 경비 업무에 충실해야 할 기사들까지도!
-즐겨, 이제 와서 뭐 어쩌겠어.
내 옆에서 엎드려서 계속 그레이스를 향해 무언의 애교를 보내는 투브가 말했다.
'네가 옆에 붙어 있는 것도 이 시선들의 원인 중 하나라는 거 몰라?'
정전에 늑대가 들어가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게 노신(老臣)들의 의견이었지만, 이미 이 개는 황제의 용안 앞에 나아간 적이 있다는 논리로 시종장이 모두 물리쳐 주었다.
문무백관과 귀족 들이 정전에 모이는 것은 예정된 수순이었지만, 작위와 벼슬의 고하에 따라 다른 곳에서 대기하다 입장하게 되어 있었다.
나는 자연히 후작들이 있는 곳에서 입장해야 했는데, 무슨 일인지 이쪽에서 대기하게 되었다.
아마 몬트라우 가문 핏줄이라는 것과, 무엇보다도 내전에서 다져진 내 입지를 반영한 것이 클 터였다.
그렇지 않으면 아마 입장 시에 후작이 공작들 사이에 끼어 있는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다른 귀족들에게 내 인상을 안 좋게 만들려는 황제의 얄팍한 술수라든가.
내관이 들어와 순차적으로 입장하게 될 것이라 알렸다.
내관이 나감과 동시에 또 다른 긴장감이 맴돌았다.
아마 이 순서도 치밀하게 계산되어 있는 것일 가능성이 컸다
결국 최후에 입장하는 자가 가장 황제의 신임을 많이 받고 있다고 봐도 좋았다.
루지온 공작이 에베 공작인 오그마를 향해 심통을 부렸다.
"아직 폐하께 정식인가도 안 받은 공작이 이곳에 끼어도 되는 겐가?"
오그마도 밀리지 않고 맞섰다.
"루지온 공의 폐하는 이미 황천에 계시지 않습니까? 잘도 이곳에 와 계십니다?"
발끈한 루지온 공작이 버럭 외쳤다.
"멍청한 네 아비가 배신만 안 했어도!"
"아버지가 카몰 후작과 손을 잡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제국은 이민족들의 발아래에서 신음하고 있었을 겁니다!"
"어디라고 결과론을 들이대는 것이냐! 네 동생이 얀타라나를 훔쳐 들고 공작 행세를 했다지? 아비는 협잡에, 아들은 절도라니! 잘도 돌아가는 집안 꼴이구나!"
"내 가문을 모욕하지 마시오!"
오그마의 눈이 희게 변하기 시작했다.
오그마 역시 서비어의 핏줄, 굉장한 압력이 주위를 잠식했다.
기사들이 재빠르게 무기를 꺼내 들고 두 공작 사이에 끼어들었다.
루지온 공작도 호흡을 가다듬으며 오러를 끌어 올렸다.
루지온 공작도 귀족가의 일원이니만큼 오러의 운용법 정도는 알고 있을 테지만, 서비어의 핏줄인 오그마의 것에 비해 빈약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기사단을 믿기 때문인지, 루지온 공작은 더욱 큰소리로 호통쳤다.
"어디라고 힘자랑이더냐!"
"닥치시오!"
일촉즉발이었다.
"에베 공!"
"루지온 공!"
아버지와 노체 공작이 동시에 외쳤다.
워낙 동시에 외쳤던 탓인지 아버지와 노체 공작은 서로를 힐끔 쳐다봤다.
아버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
"화합을 도모하고, 조화를 도모하기 위해 폐하께서 마련하신 자리에서 이 무슨 추태요! 폐하와 선대 에베 공의 얼굴에 먹칠을 할 셈이요?"
황제와 죽은 선대 에베 공작이 언급되자 오그마가 멈칫했다.
이번에는 노체 공작이 루지온 공작을 향해 호통쳤다.
"경솔하게 행동하지 마시오!"
입술을 꾹 깨문 오그마가 오러 운용을 멈췄다.
압력이 차츰 사라졌다.
그러나 아직 긴장감은 머물고 있었다.
그때 내관이 들어와 오그마의 입장을 알렸다.
루지온 공작의 얼굴에 의기양양함이 퍼졌다.
'내가 너보다는 영향력이 있다.' 하는 얄팍한 자부심이 여기까지 느껴졌다.
오그마가 몸을 돌려 나갔다.
얼마 뒤, 아득한 함성이 들려왔다.
이미 정전에는 후작들과 유력 백작들이 가득했다.
독립된 영지를 가진 후작, 백작 들도 있지만 많은 수는 공작의 영지에서 가신 노릇을 하는 자들이었다.
주군의 등장을 열렬히 환호하는 소리였다.
루지온 공작의 얼굴에 띄워진 의기양양한 미소가 사라지기도 전에 다음 순서는 루지온 공작이라는 것을 내관이 알렸다.
잠시간의 간격을 두고 그랑베르트 공작, 산탄다르 공작이 통로를 향해 나아갔다.
둘은 모두 나가면서 나와 노체 공작을 한 번씩 살펴봤다.
특히나 그레이스는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며 나한테 뻐끔거렸다.
-뭐야?
내가 읽은 그녀의 입모양은 분명 그랬다.
후작인 내가 아직도 남아 있는 것과 1황자파의 수장이라고 할 수 있는 노체 공작 역시 남아 있는 것에 대한 의문일 터였다.
'전들 알겠습니까?'
똑같이 뻐끔거리며 어깨까지 으쓱해 보였지만 그레이스는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내가 뭔가를 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걸까?
어색한 침묵이 나와 아버지 그리고 노체 공작 사이에 흘렀다.
"폐하께서는 어떤 그림을 그리고 계신지 궁금하지 않소?"
노체 공작의 목소리였다.
조용했던 방과 그의 낮은 목소리 덕에 방 전체에 그의 목소리가 웅웅이며 퍼졌다.
"자신에게 반대했던 자들까지도 포용하겠다는 걸 보여 주고 싶으신 것 아니겠소?"
아버지의 말이었다.
노체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버지께 제안했다.
"그럼 내기하지 않겠나? 내가 먼저일지, 공이 먼저일지?"
담이 큰 건지 정신이 반쯤 나간 건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이 굳은 분위기를 풀기 위해 넌지시 건넨 농일 수도 있었겠지만, 아버지는 딱딱하게 거절했다.
"내기는 좋아하지 않아서."
대화가 끊겼다.
노체 공작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입장하는 앞 순서에 1황자파 공작들을 모두 배치해 버리면 자연스럽게 말이 나올 것이었다.
노체 공작은 1황자파 귀족들의 수장이자 이유야 어찌 되었든 섭정까지 맡았던 인물이니 상징성이 있었다.
그런 자의 순서를 뒤로 배치함으로써 1황자에게 가담했던 귀족들을 버리지 않겠다는 의도를 보여 주고 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경고일지도 몰랐다.
자신을 지지했던 귀족들이라도 더 충성하라는 경고.
그리고 그 경고는 어쩌면 내게 직접적으로 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어찌 되었건 다음 순서는 나라고 생각했기에 몸을 일으켰다.
통로 쪽으로 다가가자 서 있던 내관이 몹시 당황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다음에 정전으로 향하실 분은 카몰 후작이 아니십니다. 제뉴인 공작 각하와 노체 공작 각하, 두 분이 동시에 가시겠습니다."
아버지의 얼굴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노체 공작의 얼굴은 더 가관이었다.
누가 주먹으로 때리기라도 한 듯, 그는 턱을 떨어트린 채로 나와 내관 사이를 빠르게 훑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내뱉었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공작가의 직계가 후작인 것도 거슬리는데, 나보다 뒤에 입장하다니! 대체 폐하께서는 몬트라우 가문에 어느 정도의 편의를……."
그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본인도 이상함을 느꼈을 것이다.
우리 가문을 봐주는 것이라면 아버지를 맨 나중에 입장하게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런데 아버지마저 나보다 먼저 가다니, 의전 순서가 이상해도 한참 이상했다.
내관이 두루마리를 펼쳐 보더니 말했다.
"순서에 이상은 없습니다. 두 분, 가셔야 합니다."
내관의 재촉에 아버지와 노체 공작은 여전히 의문스러운 표정을 하고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통로로 사라졌다.
역시 거대한, 하지만 아득한 함성이 아련하게 들려왔다.
아무래도 무언가 황제의 노림수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아니 곧바로 노림수와 직면하게 되었다.
줄곧 엎드려 있던 투브가 몸을 세웠다.
-온다. 재밌는 놈이네, 저것도.
투브가 바라보고 있는 방향은 계속해서 공작들이 사라졌던, 정전으로 연결된 통로 방향이 아니었다.
처음에 이곳으로 안내될 때 열고 들어온 문이었다.
소리 없이 문이 열렸다.
붉은 갑옷을 입고 있는 기사들이 철그럭 소리를 내며 무릎을 땅에 댔다.
이제는 문 너머의 존재가 내게도 선명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옷감이 바닥을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모두 물러라. 카몰 후와 독대하겠다."
옥음(玉音)이었다.
그의 말 한마디에 기사들이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내가 굳어 있는 사이 황제는 내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그대와 단 둘이 보는 것은 오래간만이구나. 마지막은 짐이 아직 황자이던 시절, 짐의 궁에서였던 것 같군."
자세를 낮추며 말했다.
"신 시안,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내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황제는 자신의 말을 풀어 놓았다.
"그때의 그대는 후작이 아니었으며, 그때의 짐도 황제가 아니었었다."
"……."
황제는 시선을 투브에게로 돌렸다.
"그대의 짐승도 여전하구나."
아주 짧은 찰나의 순간 황제의 눈에서 이채가 스쳤다.
그리고 황제의 한마디가 덧붙여졌다.
"영수라는 존재라던데?"
아무 내색을 하지 않았으나 머릿속으로는 수많은 생각이 얽혔다 풀어졌다를 반복했다.
'황실과 거리를 두고 있다는 태양달의 말은 거짓이었나? 황제는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이지? 애당초 이곳에 나타난 목적은 뭐지?'
생각할수록 풀어지는 것은 없고 얽히는 것은 많았다.
당장 해답을 내릴 수 없는 문제들이었다.
호흡이 떨리지 않도록 가다듬으며 답했다.
"어느 순간 신에게 다가왔을 뿐입니다."
"그러한가? 도깨비에, 영수에…… 세상 기연은 후작이 다 가진 것 같구나."
황제는 내게 어떠한 위협의 의사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나를 이리저리 굴리며 노골적으로 죽음으로 향하게 했던 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였다.
황제의 입이 열렸다.
"카몰 후작."
"신 시안, 이곳에 있나이다."
"신(臣)이라……."
그가 내게 물음을 던졌다.
아마 답이 정해져 있는 질문일 것이다.
"그대는 정말 짐의 신하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