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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검사의 복수-147화 (147/180)

뱀들의 연회 (2)

나는 잠시 멈칫했다.

서로 말만 꺼내지 않았을 뿐, 우리는 이미 많이 엇나가 있었다.

나는 황제의 신하인가?

마음속에서 강한 부정이 용솟음쳤다.

그러나 나는 한 번 참아 냈다.

"폐하께서 저를 신하라 생각하시면 신하일 것이며, 신하가 아니라 생각하시면 신하가 아닐 것입니다."

내 답을 들은 황제가 나를 바라보았다.

"말장난이로다. 누군가 그대를 평하기를 곰의 용맹과 뱀의 혀를 가진 자라 하던데, 그의 안목을 칭찬해야겠구나."

그리고 황제는 몸을 돌려 옆에 놓여 있는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는 친히 손을 들어 건너편에 있는 의자를 가리켰다.

"앉으라, 감히 황제를 내려다볼 셈인가."

예상치 못하게 벌어진 사태에 잠깐 멈칫하자 황제가 건조하게 말했다.

"짐에게 말장난을 하고 내려다보는 것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 것인가?"

다음으로 황제의 시선이 향한 곳은 투브였다.

그는 짐짓 다정하게까지 느껴질 정도의 어투로 투브에게 말을 건넸다.

"말을 알아듣는다 들었다. 그리 긴장하고 있을 것 없다. 네 주인을 해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투브는 여전히 몸을 일으킨 채였다.

-누구보고 주인이래? 잘못 알아도 한참 잘못 알고 있네.

투브의 불평도 잠시, 뒤에 덧붙인 황제의 말에 정신이 확 들었다.

"적어도 지금은 말이다."

"농이 지나치십니다."

자비롭던 황제의 얼굴에 위엄이 서렸다.

"농으로 들리는가?"

나는 분명 황제를 내려다보고 있었으나 무언의 압박감이 몸을 꽉 옭아매고 있는 것 같았다.

과연 서비어의 적통, 만인지상다운 기세였다.

그러나 몇 번의 수라장을 헤쳐 나온 나에게 이 정도는 크게 다가오지 않았다.

가볍게 압박감을 뿌리치고 황제가 가리킨 의자에 앉았다.

내가 의자에 앉고 나서야 비로소 투브도 몸을 편히 했다.

황제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이 나왔다.

"짐은 그대가 되고 싶다."

"……."

"짐은 그대가 미우며 동시에 부럽다. 그대와 동시대를 산다는 것에 가슴 벅찬 기쁨을 누리다가도 끝없는 절망에 빠져들곤 한다."

황제의 입에서 나오기에는 적절치 않은, 해일에 떠다니는 배와 같이 위태한 단어들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말하는 어투와 표정은 건조하고 차갑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아마 그대가 있는 한, 짐은 끊임없이 그대와 비교당할 것이다. 왕도 아닌 일개 제후에게 비교당하는 황제가 될 것이란 말이다."

황제의 몸에서 격한 오러가 뿜어져 나왔다.

그의 눈이 온통 하얗게 변해 있었다.

주위의 사물들이 파르르 떨리다가 퍼석 소리를 내며 부서지기 시작했다.

의도적인 것 같지는 않았다.

감정의 동요를 이기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런 황제의 분노를 온몸으로 받아 내고 있었다.

"후작이여, 그대가 꿈꾸는 것은 무엇인가? 시안이여, 내가 그것을 이루어 주겠노라.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동원해 그대가 나아갈 길을 터주겠노라. 그 보답으로 단 한 가지만 내게 주면 된다."

내 앞에 있는 사람은 황제가 아니었다.

닿을 수 없는 타인에 절망하는 한 남자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고귀한 핏줄을 타고나 제왕의 길에 서 있는 자, 절망에 그치지 않았다.

절망 속에서도 나름대로의 길을 개척하려 하고 있었다.

남자의 입이 열렸다.

"조용히 사라지면 된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황제는 간신히, 어렵게, 온 힘을 다해 한 단어, 한 마디, 한 문장을 토해 놓고 있었다.

제국의 지배자이자 대륙의 강자가 내게 부탁하고 있었다.

"그대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짐은 그대를 죽일 수 없다. 그대의 목숨은 나의 손을 벗어났다. 그대가 공작이 되고 싶다 하면 공작에 봉하겠다. 대공의 자리에 오르고 싶다 하면 내 직접 그대를 제국 최초의 대공에 봉하겠다. 아니다, 아니야. 영토를 떼어 왕의 자리를 내어 주마. 제국 역사를 통틀어 누구도 들어 보지 못한 제안일 것이다. 그대는 원하는 것을 내게 말하고, 내가 그것을 시행하는 것을 본 뒤, 약조의 선물로 작위와 영토를 받아가거라. 그리고 그곳에서 여생을 보내면 된다. 짐은 그것으로 후작에게 감사할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제안이었다.

황제는 나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두려움에 잠식될까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 주고, 내가 세상에 나오지 않길 바라고 있었다.

황제라는 이름은 무의미했다.

바그안트 서비어라는 남자가 순수한 욕망을 위해 가장 절실하게 내게 애원하고 있었다.

내 말 한마디면 모든 영화(榮華)가 주어질 것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부질없게 다가왔다.

황제의 손을 빌어 모든 것을 끝내고, 영화로운 삶을 보내기 위해 이 고생을 했던가.

내 손에 죽어 가던 스테판과 스와라가 떠올랐다.

정확히 말하면 그들의 심장에 칼을 박아 넣을 때 샘솟던 환희와 당겨지던 입꼬리를 기억했다.

"제가 원하는 것이 폐하의 뜻과 다르다면, 그때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내 말에 황제의 몸에서 일렁이던 오러가 사라지고 그의 눈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군주의 뜻과 다른 신하가 어찌 신하라 하겠는가. 짐의 모든 것을 동원해 짐의 손에서 벗어난 그대의 목숨을 다시 손으로 끌어오겠노라."

노골적인 발언이었다.

황제는 나를 죽이는 것도 고려하고 있다는 소리였다.

충돌은 필연적이었다.

"제가 원하는 것은 폐하의 길과 다릅니다."

나는 레이바 비텔스바흐와 지크프리드 발터를 죽여야 했다.

그러나 노체 공작을 대우하는 것으로 봐서, 황제는 이들을 중용할 것이 뻔했다.

칭황(稱皇)한 자를 죽일 계획을 세우고 실행한 자들이니 공을 높게 쳐 줄 것이었다.

황제가 노성을 질렀다.

"말하라! 명이다!"

내가 직접 죽이고 싶은 이유도 있었지만 나는 레이바와 지크프리드를 죽이라고 황제에게 말하지 못했다.

황제는 1황자파 귀족들을 기용해 공신들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견제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내 의도야 어찌 되었든 저 둘이 죽으면 결과적으로 내가 포함된 공신 세력의 정적이 제거되는 셈이었다.

나를 두려워하고, 의심하는 사람에게 정적을 제거해서 내 영향력을 높여 달라는 소리를 할 수는 없었다.

황제는 내 정확한 의도를 모른다.

이 자리가 끝나면 결과적으로 우리는 적대하게 될 가능성이 컸다.

적에게 패를 내보일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신하인 제가 아니라 한 사람으로서의 제가 품은 뜻이기에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이루어 주겠다고 하지 않았더냐! 말하라!"

고개를 저었다.

"거래와 협상의 재료로 쓰려고 품은 뜻이 아닙니다."

황제의 얼굴이 괴로운 듯 일그러졌다.

"그렇다면 짐은 그대를 죽일 수밖에 없다. 그래도 좋단 말이더냐."

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부디 폐하께서 제게 선사하시는 죽음의 때가 제 뜻을 모두 이루고 난 뒤이길 바라겠습니다."

다시 주위의 물건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아까보다 더 격렬한 떨림이었다.

이번에는 황제가 아니라 내 몸에서 퍼져 나오는 오러 때문이었다.

"만일 제 뜻을 이루기 전에 저를 죽이려 하신다면……. 제 앞길을 막았던 자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그들의 최후를 살피시길……."

쾅!

황제가 탁상을 치며 일어섰다.

내 오러와 황제의 오러 사이에서 간신히 버티고 있던 탁상이 수십 갈래로 찢겨 나갔다.

"무엄하다!"

방금 전과는 비교도 안 될 기세였지만 나는 꼿꼿이 황제를 바라봤다.

이미 황제는 내게 자신의 두려움을 내비쳤다.

두려움을 품은 자의 기세는 허장성세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문 밖에서 갑옷을 입은 자들이 급히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탁상이 찢겨 나가는 소리를 들은 기사단이 황급히 뛰어 들어오는 소리일 것이다.

"……가라,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황제가 몸을 돌려 자신이 들어온 문으로 향했다.

그가 밖으로 나가는 것을 확인하고 나도 몸을 돌렸다.

황제와 다른 방향이었다.

***

황제가 내려다보는 가운데 시작된 논공행상은 일주일이 넘게 계속되었다.

아침에 시작하여 저녁이 되면 끝났지만, 귀족들은 자신들이 없는 사이 다른 귀족들이 술수를 부릴까 황궁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기껏해야 논공행상 기간 내내 연회가 열리는 귀족원에 출입할 뿐이었다.

물론 귀족원에 나아가는 것도 모두 자신이 배제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의 말로에서 나온 행동들이었다.

대체로 1황자파에 붙은 귀족들의 영지가 조금씩 분할되어 공신파 귀족들의 영지에 병합되었다.

결정권자인 황제는 공신들이 1황자파 귀족들의 영지를 과도하게 뺏으려는 것을 교묘하게 피해 갔다.

그렇다고 해서 공신들이 불만을 품었느냐?

그것은 또 그렇지 않았다.

이민족으로부터 수복한 사힘 지역 중 많은 부분이 공신들에게 돌아갔다.

그곳에는 주인 없는 땅이 많았다.

설령 살아남은 영주들이 있다 해도 사힘 변경백 아래 붙은 자들은 남김없이 황제가 언도한 죽음을 맞았다.

1황자파 귀족들에게 보여 준 자비와는 크게 다른 모습이었다.

누군가는 만족을 하고, 누군가는 불만을 가지겠지만 논공행상이란 원래 그런 것.

슬슬 마무리가 되어 가고 있었다.

"왜 아무 말이 없어? 네 한마디면 벌벌 떨 사람이 수두룩한데? 아예 리히트 공작령을 달라고 해. 에베 공작도 별말 없이 내줄걸?"

휴식 시간 중, 그레이스가 내게 말했다.

"땅에는 관심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그렇게 열심히 싸웠어? 그럼 뭘 원하는데?"

"요새 부쩍 제 속내를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습니다."

황제를 두고 말하는 것이었지만 그레이스가 그 일을 알 리가 없었다.

"그거 궁금해하는 사람 모아 놓으면 황궁 벽을 뱅뱅 돌고도 남을걸? 뭔데? 나한테만 알려 줘봐."

그레이스가 몸을 가까이 댔다.

아직 나뉘어져 있는 신분패 생각에 몸을 살짝 뺐다.

멀지 않은 곳에 아버지가 보였다.

분명 우리 쪽을 보고 있다가 급히 고개를 돌리셨다.

그레이스를 향해 말했다.

"곧 알게 되실 겁니다."

그리고 다시 정전에 모였을 때, 나는 황제 앞으로 나아갔다.

일주일 내내 한마디도 없던 내가 앞으로 나아가자 모든 이가 입을 다물고 나를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개의 모습을 한 투브가 내 옆에서 나란히 걸었다.

황제가 올라앉은 단상 아래까지 나아간 내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신(臣) 시안, 폐하께 아뢰옵나이다."

"말하라."

"1황자를 죽인 주범인 몰트 비텔스바흐, 레이바 비텔스바흐, 지크프리드 발터, 이르한 노체의 죽음을 바라나이다. 제국을 분열시킨 것으로 모자라 자신의 군주를 죽인 자들이옵니다. 승냥이 같은 자들이니, 제국과 황실에 도움 될 것 하나 없는 자들이옵니다. 또한 신은 제국의 안정을 위해 몸 바쳐 나아간 바, 직접 이들을 죽임으로써 마무리를 짓고자 하나이다."

아주 잠깐 무거운 침묵이 찾아왔다.

그리고 폭발하듯 이곳저곳에서 고함이 들려왔다.

이 논공행상은 사실 공신파와 1황자파 귀족 세력 간의 균형을 유도하기 위해 황제가 마련한 자리라고 봐도 좋았다.

내 발언은 지금까지 진행되어 온 논공행상을 모두 뒤엎는 일이었다.

고개를 들어 황제를 바라보았다.

소란 속에서 그와 나의 눈이 마주쳤다.

황제는 내 발언을 파훼할 수 없다.

승낙했다가는 세력 균형이 무너지고 그것을 통해 황제가 이룩하려던 절대 권력은 날아간다.

거절하면 공신들의 거센 반발이 찾아 올 것이었다.

내관들이 뛰어다니며 소란을 진정시켰다.

황제의 입이 열렸다.

"짐은 번복하지 않겠다."

그는 자신의 권력을 택했다.

다시 한번 거대한 소란이 덮쳐왔다.

내관 하나가 쪼르르 시종장에게 달려가고, 내관의 귓속말을 들은 시종장이 빠르게 황제에게 다가가 속삭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동시에 끼익 하는 소리를 내며 정전의 정문이 열렸다.

쏟아져 들어온 빛 때문에 무릎 꿇은 내 앞으로 길게 그림자가 졌다.

일단의 무리가 발소리를 울리며 정전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들을 알아본 다른 귀족들이 매우 당황해하며 웅성였다.

정전 중앙의 통로를 걸어 단상 앞까지 이른 무리의 선두가 나처럼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를 따라 들어온 자들 역시 한쪽 무릎을 꿇었다.

가장 처음 무릎 꿇은 자가 황제에게 말했다.

"부름받고 왔나이다. 알맞게 오지 못한 결례를 부디 용서하소서."

황제의 표정에 당황이 가득했다.

내 옆에 무릎 꿇은 자가 황제를 향해 고개를 숙인 채로 말했다.

나에게만 들릴 정도의 소리였다.

"제뉴인의 공자가 카몰의 후작이 되었군."

나도 고개를 숙인 채로 작고 짧게 답했다.

"그래서 이전의 약조가 바뀐 겁니까?"

태산 같은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몬트라우가 이나타를 도운 사실은 변하지 않지. 그리고 이번에는 이나타가 몬트라우를 돕도록 하겠네."

내가 보낸 편지를 받고 비밀리에 달려온 남자, 북부의 태산, 히베아 변경백 페익스 이나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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