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한 마검사의 복수-148화 (148/180)

뱀들의 연회 (3)

황제가 변경백을 향해 말했다.

조금 전의 당황했던 표정은 어느새 사라진 뒤였다.

"히베아를 지켜야 할 변경백이 이곳에는 무슨 일인가?"

변경백 뒤에서 황제를 향해 무릎 꿇고 있던 여인이 우렁차게 답했다.

"폐하께서 제국의 귀족들을 소집하셨으니 기쁜 마음으로 수도로 왔나이다."

변경백의 여동생, 즈보크 이나타 자작의 외침이었다.

그에 뒤질세라 이번에는 변경백의 뒤, 즈보크 자작의 옆에 있던 남자가 외쳤다.

"이나타 가문은 대대로 서비어의 가장 충성스러운 가신이자 완고한 방패이니 부디 충정을 내치지 마소서."

북부 대장벽 아래의 병참 도시, 스볼의 영주인 티그르 자작의 외침이었다.

황제가 제국 각지의 귀족에게 소집령을 내린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북부에 있는 이나타 가문의 영주들이 올 것이라고는 여기 있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히베아의 최남단 도시인 트렛을 맡고 있는 즈보크 정도나 히베아 밖을 좀 돌아다니는 정도였지, 직접 대장벽에 머물며 야만인들의 남하를 막고 있는 변경백의 등장은 모두에게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었다.

처음에는 변경백을 알아보지 못하다가 세 영주의 휘장과 망토에 그려진 이나타 가문의 문장으로 알아챈 귀족들도 부지기수였을 정도였다.

누군가가 황제를 향해 크게 외쳤다.

"폐하! 이곳은 내전의 후처리를 위한 자리이옵니다. 변경백은 폐하를 지지한다 말은 하였으나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으니 공도 과도 없사옵니다. 변경백은 이 자리에 있을 필요가 없는 인물이옵니다."

주인을 알 수 없는 외침에 많은 귀족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다시 한번 내관들이 뛰어다니며 소란을 잠재우고 나서야 비로소 적막이 찾아왔다.

황제가 단상에서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를 향해 머리를 숙이고 있었지만, 내 위로 떨어지는 황제의 시선을 낱낱이 느낄 수 있었다.

황제의 옥음이 정전을 울렸다.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방금의 발언에 틀린 점이 없다. 변경백은 북부를 수호하는 본연의 임무에는 누구보다 충실했으나, 이 자리엔 어울리지 않는 듯하다. 그러니 돌아갈 것을 명하노라."

스윽.

내 옆에서 변경백이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그의 동생들이 움직이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변경백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태산의 포효가 정전의 공기를 떨게 했다.

"금수만도 못한 버러지 놈들!"

오러를 싣지 않은, 하지만 육성이라고는 믿기 힘든 소리가 '놈들-! 놈들-!' 하는 메아리를 만들며 옅어졌다.

변경백이 순식간에 허리로 손을 가져가 검을 뽑았다.

잘 벼려진 히베아제 강철 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정전에 있던 호위무사들이 자신들의 무기를 바로잡으며 긴장했다.

그러나 어느새 일어나서 자신들의 맏이처럼 강철 검을 뽑아 든 다른 두 자작의 기세에 호위무사들은 쉽사리 접근할 수 없었다.

"당신들이 탐욕에 휩싸여 영지전을 벌일 때, 나는 분명 경고했었다! 그러나 당신들은 멈추지 않았고, 그 탐욕은 기세를 올려 종국에는 제국을 분열시키고 말았다. 그대들의 추악하고 더러운 탐욕 때문이었던 것이다! 신하된 자들이 이러하니, 황제 폐하의 총기마저 가리고 말았다. 군주의 눈을 가린 채로 자신의 배만 불리는 네놈들이 과연 신하라고 칭할 자격이나 있느냐? 기생충과 다를 바 없는 족속들아!"

태산의 절규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나의 선조께서 초대 황제 폐하를 도와 정벌에 나선 것은 너희와 같은 돼지들을 처단하기 위함이요, 종국에 영화를 마다하고 북부로 올라가심은 공신이라는 이름이 다른 이름들을 가릴까 염려하셨음이다! 너희처럼 악착같이 땅 한 뙈기에 집착하는 족속들이 과연 제국의 귀족이더냐? 네놈들과 같은 귀족이라는 것이 수치스럽구나!"

변경백이 고개를 휙 돌렸다.

아까 황제를 향해 '변경백은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 외쳤던 소리가 난 쪽이었다.

"내가 공도 없고 과도 없어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 내 과는 진작 네놈들의 본색을 알아보고 죽이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공은 과오를 없애기 위해 네놈들을 죽임으로써 완성될 것이다."

아직 내려가지 않은 그의 검에서 예기가 흘렀다.

"혼란한 제국을 수습하는 데 카몰 후작의 공에 비할 자가 없다 들었다. 그런데 그는 어떠한 보상도 입에 담은 적 없으며, 심지어 지금도 수운을 이용해 제국 곳곳의 재건을 돕고 있다 한다. 네놈들이 주인 없는 땅을 차지하려 식량을 모으고 병력을 모집하는 지금에도 말이다!"

넓은 공간에 변경백의 목소리만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스스로 수도를 떠나 오랜 기간 북부의 험지를 지켜온 가문이 내짖는 소리에 그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변경백이 몸을 돌려 단상의 황제를 마주 봤다.

그리고 그는 양손으로 검의 손잡이를 단단히 붙잡고 칼날을 아래로 했다.

한 줌 기합도 없이 그는 그대로 검을 내리꽂았다.

검이 단상 앞의 돌과 마찰하며 나는 소리가 귀를 긁었다.

그의 두 동생들도 똑같이 검을 바닥에 박았다.

힘을 잔뜩 받은 검들이 바닥에 깊이 박혀 파르르 떠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릴 정도였다.

"폐하! 부디 마음을 바로 하시고 눈을 크게 뜨소서! 이런 돼지 같은 이들에게 휘둘리지 마소서! 말씀만 하소서, 이나타가 선봉이 되어 저들을 뿌리 뽑겠사옵니다!"

"자신들이 불리해지면 주인마저 참살하는 놈들이옵니다! 악귀보다 못한 놈들에게 베풀 자비는 없나이다!"

즈보크 자작과 티그르 자작의 외침이었다.

동생들의 외침에도 꼿꼿이 서서 황제를 바라보고 있던 변경백이 말을 시작했다.

"폐하의 앞에 무장을 하고 나아간 죄, 정전에서 검을 뽑아 든 죄, 모두 죽음으로 사죄하겠나이다. 하지만 그 이전에 신의 소원이 있사옵니다! 폐하께 충정을 바친 이들을 불러 모아 저 간악한 무리의 토벌을 명하소서! 그렇게만 하신다면 신 페익스, 가진 모든 것을 내려놓고 병사로 종군하여 기쁘게 제국을 정화하겠나이다! 오랜 옛날, 신의 선조가 폐하의 선조를 도와 그리하였던 것처럼 폐하를 도운 뒤에 즐거이 죽음을 맞겠나이다!"

말을 마친 변경백이 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대었다.

뒤에서 그의 동생들이 똑같이 하는 듯, 엎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내린 나는 만족의 웃음이 새어 나가지 않게 신경 쓰고 있었다.

대충 이러이러한 말을 해 주었으면 한다고 변경백에게 일러 주기는 했지만, 내가 원했던 것보다 훨씬 상세하고 강력한 표현이었다.

나의 의도도 의도지만, 변경백이 품고 있던 생각이 터져 나온 것 같았다.

변경백의 발언은 참 절묘했다.

'황제는 아무 잘못이 없다. 다 탐욕스러운 귀족, 너희들 때문이다. 그러니 너희는 벌을 받아야 한다.'라는 의미를 아주 제대로 일갈했다.

그 와중에 나를 띄워 주었으며, 심지어 1황자파 귀족들의 배신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기까지 했다.

나만 그렇게 느낀 것은 아니었는지 쉬이 입을 여는 귀족이 없었다.

중앙 귀족들이 촌뜨기라고 은연중에 무시하던 북부인에게 크게 한 방을 맞은 셈일 것이다.

표정을 정돈한 뒤, 나는 황제에게 고했다.

"한 말씀만 올리겠나이다."

황제는 꽤 긴 침묵 후에 내가 발언하는 것을 허가했다.

"……고하라."

"변경백의 발언, 분명 거친 부분이 있나이다. 하지만 그것 또한 제국과 폐하를 염려하는 그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옵니다. 부디 그의 충심을 귀히 여기소서. 진실 된 신하가 폐하를 위함 또한 폐하의 복이옵니다."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말을 쏟아 냈다.

변경백의 등장과 호통으로 분위기가 반전된 지금이 기회였다.

황제를 더 압박해야 했다.

부디 황제가 흔들리길,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 않길.

"자작의 말 역시 모난 곳이 없나이다. 짐승도 충정을 알거늘, 어찌 이미 폐하를 배반하고 그것으로 모자라 다시 자신의 주인을 죽인 자들을 품으려 하시나이까. 그들을 품는 것은 자비를 보여 주는 길이 아니옵니다. 그들을 죽이고 새로운 뜻을 피소서. 용단을 내려 제국에 광영을 내리소서!"

제국에서 충심으로 손꼽히는 가문의 직계와 현재 최고 공신의 발언이다.

옛날 같았으면 아무리 대귀족이라 해도 황제를 이렇게까지 몰아붙이기는 쉽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얘기가 달랐다.

황제는 나를 견제하기 위해 무리수를 몇 번이고 두었다.

그의 아래 남은 것은 아슬아슬한 발판뿐이었다.

나는 지금 황제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고개를 들어 그를 보고 싶은 마음을 꾹 억누르고 마지막 제안을 던졌다.

그는 아마 이 제안을 거부할 수 없을 것이었다.

"신 시안, 오로지 제국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 많은 목숨을 밟아 가며 이곳에 이르렀나이다. 아뢰었던 자들의 죽음으로 여정에 마지막 방점을 찍고자 하오니 부디 윤허하소서. 모든 죄와 모든 짐은 신이 짊어지겠나이다. 피의 시대는 소신이 끝내겠사오니 부디 공명정대함으로 제국을 이끄소서!"

마지막 문장을 뱉었다.

"모든 것이 끝나면, 신은 그저 조용히 산야에 묻히겠나이다."

내 말이 끝나고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그마한 웅성임이 귀족들 사이에 퍼졌다.

그 웅성임은 옆으로, 옆으로 빠르게 번져 나갔다.

이 모든 상황 속에서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내 머리 위로 황제의 시선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황제의 옥음이 내렸다.

"피로하다. 금일은 여기까지다."

황제가 밖으로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다음에 들려오는 소리는 호위들이 다가오는 소리였다.

그들은 변경백과 그의 형제자매를 연행했다.

그제야 나도 일어섰다.

몸을 돌렸다.

수많은 눈들이 나를 바라봤다.

걱정스러운 그레이스의 눈, 황망해하는 아버지의 눈이 스쳐 지나갔다.

내 원수들의 눈을 찾았다.

그들은 이미 빠져나갔는지 찾을 수 없었다.

***

"어떻더냐?"

황궁의 내밀한 곳, 황제가 허공을 향해 말했다.

"그때와는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입니다."

방의 어둠에서 만들어진 것처럼 갑자기 존재감을 드러낸 존재가 황제에게 답했다.

구름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황제의 친위대였다.

황제가 말이 없자 구름이 냉큼 덧붙였다.

"하지만 명만 하신다면 이루어 내겠나이다."

친위대에게 황제의 명은 무엇보다 우선이었다.

감히 절대 권력에 도전하는 자들은 사라져야 한다는 것이 친위대의 생각이었다.

"카몰 후작을 죽여라, 가장 은밀하고 빠르게."

황제의 명에 구름은 빠르게 답하고 잠시 생각했다.

이교도의 습격에서 봤을 때의 시안과 오늘 멀리서 바라본 시안.

같은 사람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결이 달라져 있었다.

구름이 사라지려 할 때, 황제가 다시 물었다.

"누구와 함께 가느냐?"

"대지와 함께……."

황제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 쓸 수 있는 모두를 데리고 가거라."

"그리하면 폐하의 경호가……"

"짐의 한 몸 지킬 정도는 된다. 친위대의 모든 역량을 동원해 카몰 후작을 죽여라. 그것이 지금 짐이 원하는 단 한 가지이다."

구름이 사라지고, 밖에서 누군가 인기척을 냈다.

"들어오라."

시종장이 황제의 곁으로 다가왔다.

"부디 제 사촌의 무례를 용서하소서."

시종장은 변경백의 처분이 걱정인 모양이었다.

황제는 덤덤하게 답했다.

"그의 충정은 높게 사겠노라. 하지만 쉬이 선동당한 어리석음은 안타깝구나."

시종장이 놀라 되물었다.

"선동이라 하심은……?"

황제는 시안 생각에 입술을 질끈 물었다.

그리고 말을 했다.

시종장의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니었다.

"감히 짐의 제안을 거부한 것으로 모자라 거래를 하려고 하다니, 가당치도 않도다."

시종장은 그저 입을 다물고 고개를 깊게 숙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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