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왕학 (1)
탁.
2황자, 바그안트 서비어가 기물을 집어 판에 올려 두었다.
이제 갓 10살이나 되었을까. 앳된 모습이었다.
앞에 마주 앉아 다음 차례를 기다리던 1황자, 생귀니엘 서비어가 몸을 앞으로 당겼다.
어서 자신의 차례가 돌아오기를 역력히 기대하는 모습이었다.
2황자가 자신의 기물에서 손을 떼기 무섭게 1황자가 손을 놀려 그의 기물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거침없이 기물을 들어 앞으로 전진시켰다.
깊게 들어온 1황자의 기물에 의해 2황자의 기물들이 형성하고 있던 진(陳)이 무너졌다.
1황자가 들고 있는 기물이 2황자의 기물들 중 가장 크고 우람한 기물을 툭 쳤다.
왕을 상징하는 기물이었다.
2황자의 왕이 휘청하다 옆으로 쓰러졌다.
1황자가 의기양양한 얼굴을 지었다.
"내가 이겼구나. 마지막 수는 악수였다."
2황자가 사람 좋게 웃으며 흐트러진 기물들을 정리하며 말했다.
"마음이 조급해 실수를 했나 봅니다. 역시 형님을 이기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 말에 1황자는 더 의기양양해져 자신이 시도했던 전술의 과감함과 미묘함 따위를 떠들었다.
2황자는 다 알고 있었다.
2황자의 전략이 매번 비슷한 것도, 2황자의 눈이 기물과 판보다는 시중을 드는 시녀에게 더 많이 간다는 것도.
그저 적절히 상대하다가 슬쩍 지는 척을 하는 것, 그것이 황가의 차남으로 태어난 자의 숙명이었다.
시종이 들어와 둘에게 말했다.
"황자님들 공부하러 가실 시간입니다."
1황자가 대번에 짜증을 냈다.
"외교니 법이니 역사니 하는 고리타분한 것은 집어치워라. 날도 좋은데 무슨 공부란 말이더냐. 모든 것은 경험에 미치지 못한다고 했다. 다 내가 폐하의 뒤를 이어 황위에 오르면 저절로 알게 될 것들이지 않느냐."
2황자가 다급하게 1황자를 만류했다.
"폐하께서 저희의 공부를 확인하러 오실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오늘은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1황자가 고집을 부리면 그날의 강습은 취소되기 일쑤였다.
얼마 전부터 1황자와 함께 강습을 듣게 된 2황자는 그 기회 한 번, 한 번이 너무나 소중했다.
1황자가 황태자로 책봉되면 자신에게는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는 기회였다.
잔뜩 짜증을 내며 학자들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향하는 1황자의 뒤를 2황자는 조심스럽게 따랐다.
황제가 태자 책봉을 하지 않고 있는 점, 자신이 청한 제왕학 학습의 기회를 황제가 거부하지 않았다는 점, 형인 1황자가 거칠고 폭급한 성정을 내비치고 있다는 점에서 2황자는 품어서는 안 될 소망을 차츰 가슴 속에 키워 나가고 있었다.
제국의 황제, 거대하고도 불온한 꿈이 2황자의 마음속에서 움틀 대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발아도 하지 못한 작은 씨일 뿐, 거목이 되기에는 너무나 멀었다.
최대한 웅크려 자신의 마음을 들키지 않는 것, 그것이 2황자가 습득한 최상의 제왕학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점점 흐르면서 2황자는 살며시 웅크린 몸을 펴기 시작했다.
황궁에 딸을 시녀로 보냈다가 1황자에게 겁탈당한 귀족에게 돈과 사람을 보내 위로했다.
황제가 1황자를 멀리하고 있다는 소문을 퍼트렸다.
1황자가 여색 놀음에 빠져 있는 동안 공부하고 백성들을 살폈다.
차츰 그에게 동조하는 귀족들과 벼슬아치들이 늘었으나, 그래도 태생은 강력했다.
장자 상속이 우선시되는 제국의 법도에서 차남이라는 위치는 신뢰감을 주지 못했다.
그래서 2황자는 많은 것을 약조하고, 거래했다.
-나를 지지해 주면 경의 가문의 입지를 넓혀 주겠소.
-폐하의 마음을 확실히 돌리게 하면 보위에 오른 뒤에 그대의 딸을 황후로 맞겠소.
-장군의 병력을 제공하시오, 그대의 아들을 제국대학 교수로 임용하겠소.
은밀하고 어두운 거래 속에서 귀족들의 요구는 점점 더 강해져 갔다.
2황자는 그때마다 웃는 낯을 하고, 속으로는 칼을 갈았다.
그리고 인고의 시간을 거쳐 마침내 황제가 되었을 때, 바그안트 서비어는 결심했다.
'이제 나는 거래하지 않겠다. 오로지 요구하고, 요구가 실행되는 지를 바라보기만 하겠다.'
그것이 제국의 황제에게 합당한 일이라고 황제는 생각했다.
이 논공행상은 자신의 그 결심이 더욱더 확고하게 굳어지는 자리여야만 했다.
귀족들을 쥐고 흔들며 그들끼리 충돌해서 자멸하는 것을 바라보는 자리가 되어야만 했다.
자신의 결심까지 꺾어 가며 한낱 후작에게 부탁하고, 거절당하고, 역으로 선택을 강요받는 자리가 되어서는 안 됐다.
'이럴 것이라면 시장 바닥의 상인과 황궁의 황제가 다를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제국의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 중 가장 자신의 편으로 만들고 싶었던 남자, 시안이 그 대상이라는 것에 황제는 더욱 분노했다.
1황자의 기물이 자신의 진영으로 들어오게 놔둔 그 순간 이후, 바그안트 서비어는 그 누구에게도 속내를 비추지 않았다.
하지만 시안에게는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겠다 생각했고, 실제로 황제의 위엄을 내던진 애절한 부탁을 했었다.
그러나 시안에게 황제의 그런 속내는 중요하지 않았다.
황제는 수치스러웠다.
시안이 자신에게 한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거래와 협상의 재료로 쓰려고 품은 뜻이 아닙니다.
그렇게 말한 시안이 황제 자신의 진심은 거래하려고 한다는 생각에 황제는 가슴이 불타는 듯했다.
몇 번이고 시안을 죽음으로 내몬 황제였다.
시안이 죽었으면 하면서도 죽지 않고 돌아와 자신의 든든한 아군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황제의 마음 한구석에 있었다.
그러나 대기실의 일과 정전에서의 일로 황제는 마음을 굳혔다.
제국의 지배자는 요구하는 자이어야 하지, 거래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됐다.
감히 그 금기를 어기려 한 자에게는…….
탁.
아무도 없는 황궁의 방, 황제가 판에서 기물을 움직였다.
황제의 반대편, 아무도 없는 자리 앞에 놓인 기물의 위로 황제의 기물이 움직였다.
황제가 반대편에 놓인 기물을 자신의 기물로 짓눌러 뭉갰다.
퍼석 소리를 내며 왕을 상징하는 기물이 부서졌다.
그것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황제가 일어섰다.
그의 죽음으로 제국은 아주 조금 혼란해지겠지만 황제의 입지는 더욱 강화되리라.
시안의 죽음 뒤에 찾아오는 혼란을 잘 수습할 수만 있다면 제국 역사에 길이 남을 황제가 될 수도 있을 것이었다.
잠시 달콤한 상상을 한 황제가 다시 몸을 돌려 짓눌린 기물을 바라보았다.
뭉개져 버린 기물과 피투성이가 된 시안이 겹쳐 보이는 듯했다.
황제가 입을 열었다.
"충신이로다."
***
황궁의 외곽에 있는 심문장, 나는 창살을 사이에 두고 히베아 변경백과 마주하고 있었다.
대귀족인 것을 감안해서 구속구를 채워 놓지는 않았지만 그의 허리에 매여 있던 강철검은 사라져 있었다.
"제 힘이 되어 주신 것에는 감사하지만 지나치셨습니다. 황제 앞에서 검을 뽑아 든 변경백이라니요."
"나는 내 할 말을 했을 뿐이네."
황제 앞에서 웅대한 기세로 일장연설을 늘어놓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변경백은 짧게 내뱉었다.
지저분한 심문장 바닥에 눌러앉아 팔짱을 끼고 말하는 모습이 이미 단단히 마음을 먹은 모습이었다.
이미 무슨 말을 해도 흔들리지 않을 것 같기에 한숨을 쉬고 변경백에게 말했다.
"저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변경백의 구명을 위해 노력 중입니다. 불편하시겠지만 조금은 더 계셔야 할 겁니다."
"내가 이곳을 나갈 경우는 두 가지 밖에 없다네. 폐하께서 눈을 뜨셔서 그대를 토벌군의 수장으로 삼고 나를 그곳에 복역케 하시는 경우와……."
변경백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의 시선이 내 곁에 있는 투브에게 가서 닿았다.
"죽어서 나가는 것이겠지."
쾅!
옆의 공간에 따로 수감되어 있던 티그르 자작이 주먹으로 창살을 내려쳐 나는 소리였다.
간수들이 움찔하며 물러나는 것이 보였다.
"무슨 이유로 형님을 죽입니까? 형님이 죽으면 내가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히베아에 소집령을 내려서……."
"조용해라!"
성난 자작의 목소리는 변경백의 일갈로 인해 단박에 수그러들었다.
변경백이 간수들을 향해 말했다.
"후작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니 자리를 비키게."
간수들이 머뭇거리다 하나둘 자리를 떴다.
그가 나를 향해 손짓했다.
창살 가까이 다가가자 변경백은 손가락 하나를 펴고 바닥에 슥슥 그었다.
그의 손가락이 지나간 바닥이 움푹 패여 글자가 생겨났다.
오러를 이용해 필담을 나누고 있었다.
-황궁에는 눈과 귀가 많아 말로 하지 않겠네.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자네의 의견에 수긍하지만 자네에게 직접 지목당한 자들은 그렇지 않을 걸세. 폐하께 직접 탄원을 하거나…….
변경백이 손가락이 멈추었다.
그리고 다시 빠르게 움직였다.
-자네를 해하려 할 수도 있네.
동시에 밖에서 털썩하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이 쓰러지는 소리였다.
티그르 자작과 즈보크 자작이 몸을 일으키고, 변경백이 빠르게 바닥에 그려진 글자들을 손바닥으로 짓뭉개 지웠다.
그런 그들을 향해 내가 말했다.
"생각보다는 늦었네요."
황궁에는 온갖 기관 장치가 되어 있고, 특히 마법 사용에 민감하기 때문에 마법은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그 동안의 경험들은 내 기감을 잔뜩 끌어 올려놓았다.
자리를 비킨 간수들이 누군가의 습격에 의해서 밖에서 죽어 간다는 것을 알아채는 것쯤은 간단했다.
상황을 지켜보기 위해 움직이지 않았을 뿐.
"증인을 확보하기에 좋은 시기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마나 소드를 만들었다.
마나 소드도 결국에는 마법의 일종, 어떤 함정이나 기관 장치가 발동할지 알 수 없었다.
다행히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나는 마나 소드를 휘둘러 변경백과 자작들이 갇혀 있는 곳의 자물쇠를 부숴 버렸다.
"일련의 소동으로 인해 자물쇠가 파괴되었습니다."
뻔뻔한 내 말에 티그르 자작이 피식했다.
여전히 앉아 있던 변경백이 나를 향해 물었다.
"누가 보냈을 것 같은가?"
"모르지요, 워낙 많아서요."
문을 열고 나오던 즈보크 자작이 그 말을 듣고 말했다.
"감히 이나타를 습격하려 들다니, 누가 되었든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
"우리가 나설 필요까지는 없는 것 아니에요?"
치도곤이 아래를 내려다보며 구름에게 물었다.
수십은 족히 되어 보이는 인원들이 무기를 들고 심문장을 겹겹이 포위하고 있었다.
그런 치도곤의 물음에 구름은 가볍게 고개를 젓고 승려를 향해 물었다.
"안의 상황은 어떻게 되지?"
"사람 넷과 알 수 없는 것 하나가 있다는 것 정도만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상 시야를 가까이 하려 하면 마법이 흩어져 버립니다."
치도곤이 승려를 흘겨보며 말했다.
"알 수 없는 것은 또 뭐예요? 옆에서 보는 것처럼 보는 게 승려 아저씨의 마법 아니었어요?"
"마법이 흩어져 버린다오.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구름이 둘의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후작의 곁에 있는 검은 늑대일 거다."
"늑대가 맞기는 해요? 그냥 털이 좀 검은 똥개 같던데?"
치도곤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변경백이 가두어져 있던 심문장의 문짝이 뜯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밖에서 안쪽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안쪽에서 밖을 향하는 소리였다.
문이 떨어져 나가기 무섭게 거대한 검은 늑대가 튀어나왔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사람들이 당황하는 사이, 늑대가 고개를 하늘로 올려 들었다.
아우우우우우!
늑대의 울음소리가 황궁 구석구석으로 퍼져 나갔다.
야성의 소리에 황궁 곳곳이 분주해졌다.
특히 귀족들이 머물고 있는 곳에서는 무슨 일인지 파악하기 위해 사람들을 사방으로 보내기 시작했다.
높은 곳에서 이 모든 것을 보고 있던 구름의 입에서 거친 말이 흘러나왔다.
"젠장!"
이제 '은밀'은 없는 일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