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왕학 (2)
"어떻게 할까요? 저 늑대 때문에 계속 사람들이 몰리고 있어요."
치도곤이 구름을 향해 물었다.
심문장을 습격한 인물들은 모두 복면을 하고 무기를 들고 있었지만 투브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성난 야수의 앞발에 짓눌리고 이빨에 채여 이곳저곳으로 처박히기 일쑤였다.
"기다린다. 다른 친위대가 늑대를 상대하러 올 것이다."
구름의 말의 치도곤이 눈을 반짝였다.
"누군데요?"
친위대 인원들도 정확한 친위대의 규모나 다른 인원을 알 수 없었다.
핵심적 인물들 몇몇만이 정확한 친위대의 구성원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치도곤이 알고 있는 친위대는 승려와 구름이 전부였기에 다른 친위대를 목격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내심 대지가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구름은 항상 자신이 대지에 비할 바가 못 된다고 했고 승려는 구름의 겸손일 뿐, 구름이 대지에게 밀리지 않는다 했다.
과연 대지는 어떤 인물일까에 대한 궁금증을 치도곤은 항상 품고 있었다.
치도곤이 구름의 대답을 기다렸으나 구름은 답하지 않았다.
승려의 입이 열렸다.
"나오고 있소."
친위대 셋의 시선이 심문장으로 향했다.
뒷짐을 진 시안의 뒤로 변경백과 자작들이 나오고 있었다.
난장판이 된 심문장을 훑어 본 시안이 뒷짐을 풀지 않고 투브에게 말했다.
"살살해라, 살살. 다 뭉개면 증인이고 뭐고 남아 있는 게 없잖아."
시안을 습격한 무리도 만만한 자들은 아닌지 진형을 좁혔다.
몇이 시안에게 달려들었다 손 쓸 틈도 없이 팔과 다리에 상처를 입고 바닥에 뒹굴었다.
시안의 손에 들린 마나 소드 위에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변경백과 자작들이 상처 입은 자들에게 다가가 빠르게 제압했다.
전투 불능이 된 순간부터 자결을 하려고 준비하던 자객들의 뒤통수에 북부의 거친 손길이 작렬했고, 저항할 수 없는 폭력에 그들은 그대로 혼절하고 말았다.
자객들은 무기를 들지 않은 변경백과 자작들을 노리기로 했는지 그쪽으로 공격을 집중했으나, 시안과 투브는 적절히 공수를 전환해 가며 자객들을 여유롭게 맞았다.
설령 둘의 합공을 뚫고 들어간 자객이 변경백의 앞에 도달해서 칼을 들이대더라도 변경백의 벼락 같은 맨손 박투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다.
북부 대장벽 너머, 야만의 존재들을 상대해 온 변경백에게 인간을 상대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계속되는 동료의 희생에 자객들이 당황하고 있을 무렵, 심문장 주위에서 갑옷이 철그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황궁 경비대의 도착이었다.
"후퇴한다!"
자객 중 하나가 외쳤다.
자객들이 빠르게 품에 손을 넣어 단도를 꺼냈다.
그리고 바닥에 쓰려져 신음하고 있거나 이미 혼절한 동료들에게 던졌다.
비밀을 발설하지 않게 하기 위한 수였다.
많은 수의 단도가 각기 다른 방향으로 날아들고 있었다.
시안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단도의 수가 너무 많았다.
'모르겠다!'
결심한 시안이 짧게 외쳤다.
"버텨요!"
시안의 팔 주위에 마법진이 빠르게 그려졌다.
그리고 시안 주위로 강렬한 바람이 화악 몰아쳤다.
날아가던 단도들이 몰아치는 바람에 방향을 잃고 비틀대다 바닥으로 떨어졌다.
다음 순간 시안은 다시 투브와 변경백 일행을 향해 외쳤다.
"이쪽으로!"
투브가 재빠르게 몸을 작게 해서 시안의 품으로 뛰어 들었고, 변경백과 그의 동생들도 각자 양손에 혼절한 자객을 들고 시안의 곁으로 달려왔다.
'마나 소드는 반응하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너무 큰 규모의 마법을 썼어. 분명 기관 장치들이……!'
시안의 생각이 끝나기도 전, 황궁 담장에 교묘하게 숨겨져 있던 기관 장치가 튀어나와 마법의 근원지를 향했다.
처음에는 수십 발의 작은 쇠구슬이 엄청난 속도로 발사되었다.
시안이 손을 앞으로 내밀어 만들어 낸 마법 보호막에 의해 쇠구슬들은 가로막혔지만, 한 발 한 발 전해져 오는 충격에 시안은 숨을 몰아쉬어야 했다.
"정체불명의 무기에 마법까지……! 소문이 과장이 아니었단 말인가!"
변경백의 감탄도 잠시, 다른 기관 장치에서 쇠사슬로 엮인 그물이 터져 나와 그들을 덮쳤다.
이번에는 투브가 순식간에 거대화해 앞발을 들어 그물을 향해 휘둘렀고, 쇠사슬 그물이 허공에서 찢겨 철그렁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투브의 발톱에 푸른 불꽃이 붙어 타닥거리고 있었다.
'괜찮아?'
-건드리면 마법이 발동되는 모양이야. 한 번에 찢으려고 발톱에 마나를 씌웠더니 더욱 격렬하게 반응하는 것 같아.
투브는 무덤덤하게 앞발을 털어 불꽃을 흩어 냈다.
기관 장치가 잠잠할 쯤이 되어서야 황궁 경비대와 황실 마법사 들이 도달했다.
그들이 시안 일행을 둥글게 포위하고 무기를 내리라 외쳤지만, 시안은 자객들이 도주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놈들이 담장을 밟을 때, 기관 장치는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황궁의 누군가가 이 일에 동조하고 있군. 변경백의 예상처럼 귀족들의 모의가 아니라 황제가 직접 사주한 것일지도 모르지.'
황실 마법사 복장을 한 노인이 앞으로 나섰다.
시안은 이미 노인을 두 번이나 본 적이 있었다.
한 번은 키스타에서, 한 번은 수도 앞에서.
황제의 명을 전달하러 온 노인이었다.
노인이 정식으로 인사를 했다.
"황실 수석 마법사 겸 황궁 경비 감사 헤레나스 이발테입니다."
이름을 다 듣고 나서야 시안은 떠올렸다.
'은자(隱者)' 헤레나스.
당대의 이름 높은 마법사이지만 대외적인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아 과연 살아 있는가 하는 의문이 귀족 사회에서 심심하면 돌곤 했다.
황실 수석 마법사이지만 얼굴을 비추는 일이 거의 없고, 가끔가다 황궁 경비에 도움을 주는 정도가 전부라고 했다.
베이카 장군이 헤스라고 그를 불렀을 때 왜 알아채지 못했을까.
노인이 시안을 똑바로 바라보고 말했다.
"황궁 내에서 허가받지 않은 인원이 무기를 소지하는 것은 엄금하고 있습니다."
시안은 슬쩍 마나 소드를 없앴다.
노인이 시안 옆에 있는 변경백을 쳐다봤다.
"변경백께서는 그 사항을 어기셔서 감금되어 있으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찌된 일인지 밖에 계시는군요."
변경백이 어깨를 으쓱하고 말했다.
"자물쇠가 파괴되었다네, 소동 때문에 말일세."
헤레나스가 시안 일행을 향해 엄포했다.
"상황이 정리될 때까지 제 보호하에 계셔야겠습니다."
"우리를 습격한 놈들은 어떻게 되었지?"
시안의 물음에 헤레나스는 건조하게 답했다.
"추적 중입니다."
"황궁의 담장을 마구 넘던데, 아무런 마법이나 기관 장치가 발동되지 않더군."
"그런 일은 없습니다. 각하께서도 확인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건 이놈들이 깨어나면 알게 되겠지."
시안이 혼절한 자객들을 내려다보고 한 말이었다.
즈보크 자작과 티그르 자작이 빼앗기지 않겠다는 듯 혼절해서 흔들거리는 자객들의 신체를 바싹 끌어당겼다.
헤레나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이 짐승은 너무 위험합니다."
순식간에 헤라나스의 손에서 꿈틀거리는 무색의 밧줄이 여러 줄기 뿜어져 나왔다.
밧줄이 뱀처럼 빠르게 기어서 투브를 향해 다가왔다.
머리를 치켜든 뱀처럼 밧줄이 한 번 튕겨서 투브를 뒤덮으려는 찰나, 밧줄이 순식간에 흩어져 사라져 버렸다.
투브가 시안 곁에 있어서 변환인자가 마법을 흩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헤레나스의 주름진 얼굴에 놀라움이 스쳐 갔다.
"범상치 않은 짐승이라 듣긴 했지만 마법까지 없앨 줄이야. 굉장하군요."
투브가 불쾌한 기색을 가감 없이 내비쳤다.
-멍청한 노인네, 마나가 어디로 흐르는지 정도는 알아야지.
'다행이야, 내가 아니라 네가 마법을 없앴다고 의심하고 있어.'
-다행은 얼어 죽을 다행! 이런 식으로 덮어씌울 거야?
아까 투브의 발톱에서 떨어져 나간 푸른 불꽃들이 흩어져 타고 있기에 마나의 흐름이 매우 흔들리고 있었다.
그 덕에 헤레나스는 마나를 없앤 것이 시안인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면 헤레나스는 마나가 시안 쪽으로도 흘러들어가 없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인간의 신체 내로 마나가 들어갔다는 사례는 단 하나밖에 없었다.
그것도 확실한 증거나 증언이 아니라 불안정한 목격담뿐이었다.
아니, 목격담이라고 하기에도 무안할 정도였다.
정확히 말하면 대마법사라는 인물에 대한 동화였으니까.
따라서 헤레나스는 시안이 마법을 없앴을 가능성을 배제했다.
자유자재로 크기가 바뀌는 저 생물 쪽에 무게를 두는 것이 타당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시안이 앞으로 나섰다.
"내 소유물이니 더 이상의 접근은 용납지 않겠다."
소유물이라는 소리에 투브가 움찔했지만 헤레나스의 눈에 가득한 탐구욕을 알아채기라도 한 건지 일단은 가만히 있었다.
"아쉽군요. 아주 희귀한 생물인 것 같은데……."
"나는 변경백을 면회하러 왔다 봉변을 당했으니 이 사건의 피해자다. 사건의 경과를 변곡점마다 보고받기를 원한다."
시안의 당당한 자태에 헤레나스는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리 하겠습니다, 일단 안전한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헤레나스가 시안 일행을 이끌고 심문장을 빠져나갔다.
이 모든 것을 보고 있던 치도곤이 다시 구름에게 물었다.
"늑대는 멀쩡한데요? 결국 다른 친위대는 오지 않았던 건가요?"
"제압하려 시도했다, 실패했을 뿐."
무슨 소리인가 갸웃거리던 치도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황실 수석 마법사가 친위대인 건가요? 친위대가 우리처럼 다 정체를 숨기고 있는 것은 아니었군요?"
말이 없는 구름 대신 승려가 나섰다.
"세상 많은 것은 음(陰)과 양(陽)으로 나누어진다오. 친위대도 다르지 않소. 우리처럼 음지에서 암약하는 존재도 있고, 대지처럼 양지의 신분을 가지고 있는 자도 있소."
구름이 둘의 대화를 끊었다.
"일단 경과를 지켜보다 기회가 생기면 목표를 죽인다. 돌아가지."
발걸음을 뒤로 하는 동안, 구름의 머릿속에는 두 가지 광경이 떠올랐다.
붉은 방패 기사단도 오러를 운용하지 못했던 그날의 습격에서 시안이 오러를 끌어올리던 모습, 그리고 황실 수석 마법사의 마법이 시안의 앞에서 흩어지던 모습.
관계가 있을 것 같았지만 실마리는 잡히지 않았다.
시안이 이끄는 부대는 상대방의 오러를 제약하는 무언가를 쓴다고도 했다.
오러의 제약, 흩어지는 마법, 통하지 않는 독…….
구름은 황제에게 돌아가 암살이 실패했음을 알렸다.
그리고 시안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청했다.
"생각하는 방법이 있느냐?"
황제의 물음에 구름이 답했다.
"그의 측근을 잡아 심문하고자 합니다."
"후작의 측근이라 할 자들은 모두 수도나 수도 주위에 있다. 사라지면 금세 의심을 살게다."
구름이 눈을 반짝였다.
"툴리앗과 나시와르를 시찰하러 간 시찰단이 일야관 앞에 도달했다 합니다. 그 안에 후작의 누이가 있습니다. 또한 제뉴인 공작가의 후원을 받는 포츠라니 백작가의 장자인 저비스 포츠라니가 그곳에 동행 중입니다. 저비스는 장기간 카몰과 후작의 곁에 머문 것으로 확인되었으니 가치가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시행하라."
구름이 사라지기 전, 황제가 물었다.
"그대들의 정체를 알아챈 것 같든가?"
"아마 알아채지 못했을 겁니다."
황제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
다음 날 정전에 모인 귀족들은 다들 어젯밤의 소란을 화제로 삼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은 계속 비어 있는 카몰 후작의 자리로 향했다.
시종장과 내관이 들어와 곧 황제가 들어올 것임을 알리고 나서야 수군거림이 조금 줄어들었다.
황제가 입장하고 단상에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간밤에 소란이 있었다 들었다. 당사자인 카몰 후작은 어디 있는가?"
아무도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시안이 등장했다.
정전의 중앙 통로로 걸어오는 시안의 뒤에, 온갖 구속구로 결박된 어제의 자객들이 줄줄이 따라 들어왔다.
"폐하! 감히 황궁에서 소란을 피운 놈들이옵니다! 친국(親鞫)을 위해 이 자리에 대령했나이다! 부디 이놈들의 배후가 누구인지 밝혀 주소서!"
시안이 당당히 외치고 단상 앞으로 나아갔다.
다시 한번 귀족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일었다.
그리고 잠시 뒤 내관들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웅성거림은 더욱 커지고 말았다.
"아니, 이게 무슨!"
"꺄아악!"
거대한 늑대의 모습으로 정전에 들어오는 투브 때문이었다.
투브의 입에는 앞의 자객들보다 훨씬 더 많은 구속구로 결박되어 있고, 무엇보다 얼굴이 퉁퉁 부어 과연 사람의 얼굴인가 싶은 치도곤이 물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