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왕학 (3)
자객의 습격 때문에 변경백 일행은 다른 곳으로 이송되었다.
나에게는 사건의 조사를 위해 퇴궐을 금지한다는 명이 내려왔다.
많은 귀족들이 황궁 내에 머무르고 있었지만, 아버지나 그레이스처럼 대귀족들은 수도에 각 가문의 거주지가 있으니 이미 일찌감치 퇴궐한 상황이었다.
"조사는 무슨, 괜히 내가 퇴궐해서 다른 사람들을 불러오면 어쩌나 하는 걱정 때문이겠지."
조사라고 할 것도 없었다.
나는 변경백을 보러 갔다가 예상치 못한 습격을 받았을 뿐이었다.
자객들 중 몇 놈을 혼절시켜 넘기기까지 했는데 내가 조사를 받을 이유가 없었다.
실제로도 헤레나스가 간단하게 몇 가지를 묻고 사라졌을 뿐, 그 외의 제제는 없었다.
단출한 방에 넣어 놓고 내가 나가려고 하면 엄격하게 금지하는 것이 전부였다.
실력 행사를 하면 나가지 못할 것도 없었지만, 이미 큰 소란을 일으켰기에 더 이상 이목이 쏠리는 것을 원치 않아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았다.
이미 밖에서는 사람들이 바쁘게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소리가 한창이었다.
짧게나마 생긴 시간을 활용하기 위해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내가 지목한 놈들이 수를 썼다는 건 확실해. 누가 가담하고 누가 가담하지 않았는지는 따지지 않기로 하자고, 어차피 죽을 놈들이니까. 그렇다면 문제는 황제가 가담했느냐 하지 않았느냐인데…….'
자객들은 심문장의 간수들을 죽였다.
그리고 도망칠 때 그들이 향한 곳의 기관 장치들은 작동하지 않았다.
첫 번째 사실보다는 두 번째 사실에 더 힘을 주고 싶었다.
죽은 간수들에게는 안 된 말이지만 그런 말단에게까지 나를 급습할 계획을 알려 주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간수들은 그냥 그 시각,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 지독히도 운이 없었을 뿐이었다.
'기관 장치가 작동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황제가 가담했다고 생각하기는 또 허술한 점이 꽤나 많이 보인단 말이지…….'
황제는 나를 최대한도로 경계하고 있었다.
그런 황제가 보냈다고 하기에 자객들은 질이 많이 떨어졌다.
이민족의 살수 집단, 둥지보다도 몇 수는 아래로 느껴졌다.
내가 황제라면 자신이 쓸 수 있는 최고의 패를 써서 나를 죽이려 했을 것이다.
황제가 되기 위해 자신의 형을 몰아내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던 인물이 현 황제다.
괜히 내 경계심만 돋울 짓을 하지는 않을 사람이었다.
정확한 판단이 서지 않았다.
'네 생각은 어때?'
-몰라, 몇 번을 봐도 인간들의 그 복잡한 접근 방식에는 질리니까 물어보지 마.
'너한테 물어보려고 한 내가 잘못이지.'
내가 혼란해하는 사이, 누군가 이곳으로 접근하는 기척이 느껴졌다.
문 쪽으로 내 고개가 돌아가는 것보다 살짝 늦게 투브가 일어서서 문을 향해 긴장된 자세를 취했다.
-인간들의 사고방식을 안 좋아하는 것과는 별개로 이 장소는 아주 마음에 들어. 올 때마다 새로운 놈들이 튀어나오거든.
'그게 좋아? 난 끔찍하던데.'
밖에서 뭔가 픽픽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아마도 나를 지키고 서 있던 기사들이 넘어지는 소리 같았다.
'내게 볼 일은 있으되, 정식적인 절차는 아닌가 보네. 손이 먼저 나가는 유형이고, 누구지?'
-까 보면 알겠지.
문이 벌컥 열렸다.
그곳에 서 있는 것은 키가 크고 몸이 가는 한 소년이었다.
소년의 손에는 낭창낭창해 보이는 나뭇가지가 들려 있었다.
낚싯대처럼 휘어 있는 것이 인상적인 나뭇가지였다.
소년은 악의가 느껴지지 않는, 순수하다면 지극히 순수하다고 할 수 있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분명 심각한 상황이었지만 소년의 분위기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마치 재밌는 놀이라도 찾은 것 같은 눈이었다.
"심문장에서 봤어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심문장에서 나를 본 건 자객들과 황궁 경비대, 황실 마법사 들이 전부였다.
어느 쪽이든 내가 반길 입장은 아니었다.
게다가 이 소년은 기사들을 쓰러트리면서 들어왔다.
자객일 가능성이 높았다.
"당신의 손에 있던 무기, 자유롭게 만들고 없앨 수 있는 것 같던데 뭔가요? 마법의 일종인가요? 그렇다면 분명 설치되어 있는 마법진들이 반응했을 건데 아무렇지도 않더라고요? 정체가 뭐죠?"
내가 물어보고 싶은 것이었다.
묘하게 친화적인 소년의 분위기에 넘어가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며 답했다.
"당신이라니, 나를 그렇게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을 건데. 너는 누구지? 아까 자객들과 한 패인가? 그렇다면 괜한 여유는 부리지 않는 게 좋아."
말을 마치기 무섭게 몸을 살짝 비켜섰다.
내 뒤에서 잔뜩 웅크리고 있던 투브가 소년을 향해 튀어 나갔다.
미리 생각을 전해 놓은 덕분이었다.
너무 큰 소리를 내지는 말라는 부탁도 함께였다.
"이 녀석도 신기했어요."
소년은 여유롭게 몸을 뒤로 날리면서 말했다.
투브는 소년이 좀 전까지 서 있던 곳에 착지할 것 같았다.
그러나 투브는 허공에서 몸을 한 번 뒤집었다.
휙.
투브의 앞발이 허공을 그었다.
거대화하지 않은, 개의 모습이었기에 일견 볼품없어 보였지만, 투브의 발톱 끝에서 마나가 일렁이며 뭉치더니 그대로 네 줄기의 파장이 되어 소년을 향해 날아갔다.
주위에 마법사가 있다면 분명 감지할 정도였다.
내 말은 귓전으로 흘린 모양이었다.
놀라운 일은 다음에 벌어졌다.
소년이 들고 있던 나뭇가지를 한 번 휘둘렀다.
우드드드득.
소름 돋는 소리를 내며 낭창낭창했던 나뭇가지가 뻣뻣하게 변했다.
그리고 소년의 몸에서 삽시간에 오러가 피어올랐다.
"흡!"
사방팔방으로 뻗치던 소년의 오러가 그대로 나뭇가지 주위에 뭉쳤다.
나뭇가지 옆에 어찌나 오러가 두껍게 응집되어 있는지 거대한 곤장을 든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저 정도로 오러를 응집시키는 소년이나, 당장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저 나뭇가지나 의문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대체 이 시대에는 내가 모르던 괴물들이 얼마나 더 있던 것인가.
소년은 곤장을 휘둘러 투브가 만들어 낸 마나 충격파에 맞섰다.
키기기기긱!
마나와 오러가 충돌하며 나는 독특한 소리였다.
소년이 순수한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하! 제국 최고의 군사적 재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 곁에 마나를 이용하는 거대 개라니! 믿을 수가 없군요!"
다음 순간 소년의 눈빛이 바뀌었다.
"죽어 주셔야겠어요."
아까 나를 습격한 어중이떠중이 놈들과는 격이 달랐다.
아니, 격으로 따지면 몇 단계나 위인, 비교하는 것이 미안할 정도였다.
호기심이 일었다.
호기심이라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았다.
강렬한 호승심이었다.
"죽기 전에 이름 정도는 남기게 해 주마."
소년이 미소 지었다.
차갑고도 따스한 미소였다.
"제 신상을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을 권유 드립니다. 굉장히 복잡한 일에 휘말릴 수 있거든요."
기시감이 들었다.
소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제 얼굴과 목소리도 잊으셔야 할 겁니다. 그 일은 제가 도와드릴게요. 물론 이건 죽여 드린다는 뜻이지요."
내가 만나 본 누군가의 말과 흡사했다.
누구지?
언제 이런 대화를 했지?
번뜩 스쳐 지나갔다.
"구름!"
소년이 멈칫했다.
"친위대군."
내 말에 소년의 입가에 달려 있던 미소가 사라졌다.
잠시 후 소년은 더욱 환히 웃었다.
"구름 아저씨에게 당신 얘기를 하면 늘 피하더라고요. 그래서 만난 적이 있다는 소리가 거짓말인 줄 알았는데, 진짜였군요!"
소년이 자세를 고쳐 잡았다.
투브가 몸을 낮추고 온몸의 털을 곤두세웠다.
나도 마나 소드를 만들어 냈다.
"어서! 뛰어라!"
밑에서 사람들이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아까 난 소음이 역시 문제가 된 모양이었다.
여기서 저놈을 놓칠 수는 없었다.
황제를 궁지로 몰아넣을 완벽한 제물이 저 녀석이었다.
"장소가 영 좋지 않죠?"
녀석이 창문을 열고 밖으로 뛰어 나갔다.
나도 따라서 몸을 날렸다.
내 손에는 눈치 좋게 강아지의 모습으로 변한 투브의 뒷덜미가 잡혀 있었다.
-살살! 살살 잡아!
***
같은 시각, 승려가 황급히 구름을 찾았다.
"무슨 일이지? 목표에게 이상이 있나?"
구름의 물음에 승려가 쩔쩔매며 답했다.
"내 마법이 닿지 않아 치도곤에게 감시를 명했는데, 놈이 사고를 쳤소이다!"
치도곤과 사고.
너무나도 기가 막힌 두 단어의 조합에 구름의 머리에는 불길한 느낌이 스쳤다.
승려는 그런 구름의 생각을 확인시켜 주었다.
"놈이 단독으로 후작에게 접근했소!"
구름이 벌떡 일어섰다.
시안에게 과도할 정도로 관심을 가지던 치도곤 생각이 났다.
잘 하겠거니 하고 감시를 붙였는데 결국 사고를 친 것이다.
그러나 벌어진 일은 벌어진 일, 수습을 해야 했다.
"위치는?"
"이미 황궁을 벗어났소."
"방향은?"
"황궁 북쪽으로 향했소이다."
황궁의 북쪽에는 언덕 사이에 지어진 유물 보관소가 있고, 더 나아가 황궁을 벗어나면 황실 소유의 언덕들과 숲이 있었다.
치도곤은 그곳에서 시안을 제압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구름의 생각은 달랐다.
치도곤이 시안을 이길 가능성은 보이지 않았다.
"동원할 수 있는 자들은?"
"대지는 조사 때문에 오지 못하외다. 명멸은 일야관으로 향하고 있으니 그대만이 움직일 수 있소."
친위대는 몇 명 더 있었으나 그들은 양지의 인물, 갑작스러운 소집에 응하기 힘들 것이었다.
결국 황궁의 감시를 위한 승려를 제외하면 움직일 수 있는 것은 구름 자신밖에 없었다.
연속해서 황제의 곁을 비우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치도곤이 죽게 놔둘 수는 없었다.
'어쩌면…… 이 기회에 후작을 죽일 수도 있을지 모른다!'
작은 희망이 구름의 마음 한편에 자리 잡았다.
누구보다 은밀하고 재빠르게 구름은 황궁 북쪽 너머의 숲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 도달한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처참히 허리가 꺾여 땅에 처박힌 아름드리나무와 우악스러울 정도로 거대한 짐승의 발자국, 박살이 나 사방으로 흩어진 바위 잔재들이었다.
그곳에는 누구도 없었다.
자신의 희망이 부질없던 것이었음을, 그리고 치도곤의 생사가 불확실해졌다는 것을 안 구름이 어금니를 꾸욱 물었다.
또한 자신의 눈이 확실했음이 알았다.
이교도의 습격을 받을 때의 시안은 잊어야 했다.
친위대는 정말 뛰어난 무인 중에서도 황제에 대한 충심이 굳건한 자들을 쓰거나, 무재(武才)가 있는 어린 아이들을 키워 썼다.
치도곤은 그 많은 무재들 중 손꼽히는 녀석이었다.
나이가 어린 것 말고는 흠결이 없다고 해도 좋았다.
늑대의 도움이 있었던 것 같기는 했지만 시안은 그런 녀석을 제압했다.
구름은 눈앞의 현실이 믿기지 않았다.
전장에서의 시안의 활약은 귀가 아플 정도로 들어왔다.
그러나 그것은 다대다의 상황이지 이런 일대일의 경우가 아니었다.
황제의 친위대를 제압할 정도의 무력이라면 결코 얕볼 수 없었다.
구름이 승려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승려가 놀라 물었다.
"치도곤은……!"
"생사가 불확실하다."
"그럴 리가……!"
"카몰 후작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위험할지 모른다. 폐하께서 염려하시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명멸이 캐슬린 몬트라우와 저비스 포츠라니를 확보하는 대로 전력을 다해 그를 죽인다."
***
투브가 물고 들어온 소년을 바닥에 패대기쳤다.
소년이 가늘게 신음했다.
모두의 눈이 소년을 향했다.
심지어 황제도 소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황제가 말했다.
"감히 이 중요한 시기에 구국의 영웅이자, 제국의 귀족을 해하려 들다니. 용납할 수 없는 일이로다. 후작의 말처럼 짐이 친국하겠다."
말이 좋아 황제의 친국이지, 온갖 방법을 동원해 자백을 받겠다는 소리였다.
온갖 방법에는 물론 고문, 그중에서도 마법을 이용한 고문이 허용된다.
아마도 자객을 보낸 측과 황제는 고문을 이용해 이 증인들을 죽일 생각인 거 같았다.
황제의 친국을 위해 마법사들이 몇 시간을 달라붙어 임시적으로 황제 앞 단상, 작은 공간의 기관 장치를 해제했다.
사람 몇이 누울 정도의 공간, 이 공간 안에서는 마법을 써도 기관 장치로 인한 공격을 받지 않는다.
그때를 틈타 내가 황제에게 말을 올렸다.
"폐하, 신(臣)이 전쟁터에 있는 동안 적에게서 정보를 빼내는 데 효과가 좋은 방법을 발견했사옵니다. 폐하의 노고를 덜어 드리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니, 부디 허가하소서."
황제가 고개를 저었다.
"중요한 심문에 확인되지 않은 방법을 쓸 수는 없노라. 준비가 얼마나 걸릴지도 모르는 노릇 아닌가."
"그렇지 않습니다. 확실한 효과를 보았습니다. 이 방법을 통해 캐낸 정보로 이민족을 격퇴했나이다. 그리고 이미 준비는 다 해 두었사옵니다."
내가 신호하자 내관이 군복을 입은 한 남자를 데리고 왔다.
남자는 잔뜩 주눅이 들어 땅만 보고 이곳으로 오고 있었다.
내 곁에 온 남자의 어깨에 내가 손을 얹자 남자가 깜짝 놀라 어깨를 움찔했다.
그런 남자에게 속삭였다.
"긴장하지 마, 출세의 장이 열렸잖아. 네 실력을 보여 줘."
"이런 자리라고는 말씀을 안 하셨지 않습니까……."
"이런 자리면 어떻고, 저런 자리면 어때. 잘해 보자고, 사비시."
사비시 프리메.
내 도움을 받긴 했지만 최초로 인간에 대한 정신 조작을 성공한 마법사였다.
나는 자객과 이 친위대 놈의 머릿속에 든 생각을 다 까발릴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