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왕학 (4)
"허억, 허억……."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사비시의 턱 아래로 땀이 방울져 떨어졌다.
사비시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의 체력도, 정신력도 한계에 이르렀다는 방증이었다.
"정신 차려! 끝났어. 천천히, 천천히 마법을 마무리 지어."
내 말을 들은 사비시의 입이 앙다물어졌다.
극도의 집중이 필요한 정신 조작 마법을 연속으로 시전하고 있으니 힘들 법도 했다.
변경백과 나를 습격한 자객들의 친국은 모두 마무리가 된 상태였다.
역시나 그들은 나와 변경백을 죽이라는 사주를 받은 살수들이였다.
다만 이들도 누가 사주를 한지는 모른다고 답했다.
그 정도는 이미 예상했었다.
조금 더 지위가 높아 보이는 놈을 잡지 못한 것이 아쉽기는 했지만, 아마 그래도 사주한 자의 정확한 정체는 몰랐을 것이다.
누구를 죽이라고 사주하는데 당당히 정체를 밝히고 사주할 놈이 어디 있단 말인가.
다만 이런 행동을 통해 나를 눈엣가시로 여기는 자들에게 경고를 했으면 된 것이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사비시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가 힘이 빠져 혀를 씹으면서도 내게 작게 물었다.
"이들의 배후를 밝혀야 하는 것 아닙니까?"
"모른다고 하는데 어떻게 밝혀."
"저들의 의식을 한층 더 파고들면 알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무리하지 마. 더 복잡해지면 내가 보조해 주는 데도 한계가 있어. 그리고 아직 하나 더 남았잖아."
자객 무리의 심문은 끝냈지만, 단독으로 나를 습격한 소년이 남아 있었다.
진짜 중요한 인물은 저 소년이었다.
"저 소년은 이 자객 무리가 아니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사주한 자가 다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사비시의 풀려 가던 눈이 다시 초점을 찾았다.
그의 눈이 불타듯 반짝였다.
"출세의 장이 열렸다고 한 건 각하이십니다."
제국 각지의 귀족들, 심지어 황제까지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게다가 인간에 대한 정신 조작 마법을 시행한다는 소식에 은자 헤레나스를 비롯한 황실 마법사들이 잔뜩 몰려와 참관을 하고 있는 참이었다.
평민 출신인 사비시에게 이런 기회는 다시 없을지 몰랐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비시의 눈에 안광이 서렸다.
말릴 틈도 없이 벌어진 일이기에 재빨리 그의 보조를 맞추었다.
사비시의 손에서 뻗어 나온 촉수에 머리통이 잡혀 있던 자객이 바들바들 떨더니 말을 시작했다.
"의뢰를 하러 온 자를 몰래 미행했습니다……. 그가 마차에 오를 때, 보았습니다……. 천칭이 그려진 문장이었습니다……."
자객은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고 입가로 침을 줄줄 흘리기 시작했다.
그의 눈이 핑핑 돌고 있었다.
정신의 붕괴가 온 것 같았다.
내가 외쳤다.
"그만! 사비시, 그만!"
그러나 사비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공포에 질린 눈으로 자신의 손과 자객의 머리통만을 빠르게 번갈아 보고 있었다.
사비시의 눈 주위에 푸른색 핏줄이 불거졌다.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마력 폭주!'
스테판이 내게 처음으로 죽을 때 보였던 현상이었다.
자신의 능력 이상으로 마나를 이용하려 했을 때, 신체 주위에서 마나가 날뛰면서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재빠르게 사비시의 보조를 멈추고 그의 옆으로 다가가 팔목을 잡았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변환인자 때문인지 그의 눈동자를 향하던 푸른 혈관들이 사라졌다.
그러나 사비시는 음습한 비명을 흘렸다.
"으으…… 으으으그……."
내가 잡은 그의 손목 아래로 사비시의 손이 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변환인자가 끊임없이 주위의 마법을 무효화하고 있었지만, 정신 조작 마법의 반작용을 완벽히 막아 낼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결국 자신의 손이 새카맣게 변한 것을 본 사비시는 혼절하고 말았다.
옆에 투브가 보였다.
투브에게 물었다.
'내가 보조를 멈추지 않았다면 사비시의 손이 이렇게 되지 않았을까?'
마법을 구상하고 구축하는 것은 머리이되 그것을 실현하는 것은 손이라는 소리가 있을 정도로 마법사에게 손은 중요했다.
가끔씩 영창만으로도 쉬이 마나를 이용해 마법을 발현하는 마법사들이 있었지만, 인고의 노력을 거쳤거나 타고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아마도 이제 사비시는 극도로 단순한 마법 정도밖에는 쓰지 못할 것이었다.
투브가 고개를 저었다.
-네가 계속 보조해도 반작용을 막을 방법은 없었어. 저놈이 무리했어. 오히려 네가 가까이 다가가서 마법을 무효화시키려 했기에 손에서 멈출 수 있었던 거야. 막지 못했다면 저 자객처럼 되었겠지.
자객은 온몸을 경련하며 입으로 괴악한 소리들을 내뱉고 있었다.
실금이라도 했는지 자객이 앉아 있던 의자 아래에 작은 웅덩이가 생겨 있었다.
사비시는 손이 불타고 혼절하기는 했지만 저런 상태는 아니었다.
내관을 불러 사비시를 데리고 나가도록 했다.
제법 가까운 곳에서 보고 있던 마법사들은 이 일에 대해 수군거리며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분명 내가 개입하고 반작용이 사라진 것에 대해서도 말이 나올 테지만, 그냥 인간에 대한 정신 조작 마법의 위험성 정도로 우길 생각이었다.
누구도 시도하지 못할 마법이니 적당히 먹혀들어 갈 것 같았다.
귀족들은 역시 자신의 주변에 앉아 있는 사람들과 수군거리고 있었지만 마법사들과는 조금 달랐다.
귀족들의 눈은 한쪽을 향해 있었다.
그 시선들이 모이는 곳에 몰트 비텔스바흐와 레이바 비텔스바흐 부자(父子)가 있었다.
사법의 수호자, 비텔스바흐 가문이 쓰는 문장이 바로 천칭이었다.
"모, 모함이옵니다!"
얼굴이 새하얗게 변한 몰트 전(前) 궁정백이 다급하게 외쳤다.
그를 향해 일갈했다.
"조용히 하시오! 폐하께서 친국 중이신데 어디라고 나선단 말이오!"
그러나 몰트 궁정백은 몸을 일으켜 달려 나왔다.
그리고 황제가 앉아 있는 단상 앞에 엎어졌다.
"억울하옵니다! 누군가의 모함이옵니다! 신이 한때 잘못된 마음과 생각을 품었다는 것은 부인하지 않겠사옵니다. 그러나 그것이 잘못된 길임을 알고 배신자, 변절자 소리를 들어가며 폐하의 아래로 들어왔나이다. 비텔스바흐가 어떤 가문이옵니까. 제국의 사법을 수호하는 가문이입니다. 저런 조악하고 추잡한 술수에 현혹되시면 아니 되옵니다, 폐하!"
궁정백의 뒤에 다른 누군가가 엎어졌다.
레이바였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레이바가 황제를 향해 말했다.
"폐하께서 직접 내려다보신 심문이라고는 하지만 방향이 심히 편중되어 있사옵니다! 아직 검증을 거치지도 않은 방법입니다. 인간에게 하는 정신 조작이라니, 위험성이 너무나 커서 마법사들 사이에 금기인 방법입니다! 어찌 이런 위험한 방법을 쓴다는 말입니까! 게다가 저 마법사는 후작이 데리고 있던 군인입니다! 후작이 저희 가문에 무슨 억하심정이 있는 줄은 모르겠으나 의도가 불순한 심문이옵니다!"
이 심문의 의도 자체를 흩트려 화살을 내게 돌리려는 수가 보였다.
황실의 뒤처리를 맡는 가문인 만큼 음흉하기 짝이 없었다.
저들이 내 권위를 의심하고 있으니 더 큰 권위를 내세워 실력 차이를 보여 주기로 했다.
"말조심하시오. 폐하께서 친국을 하겠다 하시었고, 무엇보다 이 모든 과정은 황실 마법사들이 보고 있었소. 위험성은 있을지언정, 과정에 이상이 있었다면 저들이 먼저 나섰을 것이란 말이외다. 그대가 폐하의 친국을 의심하는 것으로 모자라 황실 마법사들의 능력을 무시하는 것이오? 마법사들의 생각이 궁금하군그래."
한 곳에 모여 있던 황실 마법사들이 내 물음에 자기들끼리 작게 웅성였다.
마법사 중에서도 난 놈들이라는 황실 마법사 중에 '정확히 알지는 못하는 마법이라 잘 모르겠소.' 하고 말하는 놈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다 마치고 던져 놓은 말이었다.
마법사들의 작은 소란이 가라앉기 전, 재빠르게 말을 이어 나갔다.
엎드려 있는 레이바를 똑바로 내려다봤다.
여전히 녀석은 바닥에 붙어 있었다.
"그리고 눈이 있다면 보지 않았는가? 내가 옆에서 구경만 하고 있던가? 직접 마법을 보조하지 않았는가. 위험하다면 내가 제일 위험했지! 더러운 혀 놀림은 그만두는 것이 좋을 게다!"
레이바가 벌떡 일어섰다.
"그렇다면 후작께서는 어찌 그리 멀쩡하시오? 후작의 부하는 손이 타고 혼절했는데, 어찌하여 후작은 그리 멀쩡히 서 계시냐는 말이오! 우리 가문이 거슬리니 부하 하나 정도 희생해서 몰아붙이려는 속셈 아니시오? 애초 후작은 자신이 마법을 쓸 수 있다는 것도 비밀로 하지 않으셨소? 아카데미에서도, 제국 대학에서도 교육받지 않은 마법인데, 후작의 마법에 대한 위험은 누가 책임지는 거요? 마법사라는 것을 감추고 오늘과 같은 일을 계속 벌여 오신 것은 아니오!"
그 말에 귀족 사이에 다시 웅성임이 퍼졌다.
"말을 삼가라!"
익숙한 여성의 목소리가 레이바를 향해 찌르듯 퍼졌다.
뒤를 돌아보니 그레이스가 일어나 있었다.
그레이스가 레이바를 향해 성난 말을 폭포수처럼 쏟아 냈다.
"후작은 자신의 용병술과 마법을 통해 수많은 난관을 헤쳐 왔다! 나, 산탄다르 공작, 그레이스 바크하임이 그의 곁에서 목격했으니 보증하겠다! 그 난관에는 레이바 네 녀석과 네 아비가 불러온 제국의 분열 또한 포함된다! 폐하의 아래에 들어와? 후작의 기세가 이리도 맹렬하지 않았다면 네놈이 그런 생각을 추호라도 했겠느냐? 설령 배신하지 않았더라도 이민족의 곡도에 목이 잘렸을 것이다! 제국을 안정시키고 이민족의 진출을 막아 낸 것인 누구인 줄 알고 그리 지껄이느냐! 배신이 몸에 익은 놈 따위가 제국의 충신에게 그따위 말을 하다니!"
그레이스가 황제를 보고 외쳤다.
"폐하! 히베아 변경백의 말을 기억하소서! 레이바 비텔스바흐의 말 가운데 제국을 위한 말이 한마디라도 있사옵니까? 모두 자신의 핏줄과 가문을 위한 말이옵니다! 저자의 작태가 말하는 돼지와 다를 것이 무엇이옵니까!"
말하는 돼지라는 소리에 몇몇 귀족들이 일어섰다.
아마 비텔스바흐 가문의 도움을 받은 자들이겠지.
"공작이야말로 말을 가려 하시지요! 폐하께서 계신 곳입니다!"
그레이스가 지지 않고 외쳤다.
"폐하! 저들이 하는 말은 향기로 덮은 분변과 같나이다! 그럴듯한 냄새만 날 뿐, 먹지 못하는 것이옵니다!"
갈수록 더해 가는 그레이스의 말에 다시 다른 귀족들이 외쳤다.
"분변이라니! 폐하! 산탄다르 공작에게 퇴장을 명하소서! 품위를 스스로 깎고 있나이다!"
이 촌극에 종지부를 찍은 것은 황제였다.
"수석 마법사가 와 있는가."
마법사 무리에 있던 헤레나스가 앞으로 나섰다.
"살피라."
황제의 말에 헤레나스는 이미 심문이 끝난 자객, 죽어 버린 자객, 소년을 살폈다.
그는 투브에게도 접근하려 했으나 투브가 송곳니를 드러내는 바람에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헤레나스의 뒤를 따라 나온 마법사들이 마법의 흔적을 읽기 위해 여러 마법들을 사용했다.
혹시나 나 때문에 마법이 실패할까 싶어서 슬쩍 물러나 있었다.
헤레나스는 다른 마법사들을 두고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가 아주 옅게 마나로 막을 만들어 쳤다.
마나가 거의 움직이지 않는, 알아채기 힘들 정도의 마법이었다.
그가 나를 향해 말했다.
"제 추측으로는 각하께서는 맛있는 음식을 나중에 드실 것 같군요."
"무슨……!"
재빨리 고개를 돌려 소년을 바라봤다.
그는 처음 내던져진 그대로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다만 계속해서 흘리던 신음이 들리지 않았다.
옆에 있던 투브에게 생각을 전했다.
'야! 걔 건드려 봐!'
-뭔데?
'빨리!'
투브가 앞발로 소년을 툭툭 건드렸다.
-뭐야? 왜 반응이 없어. 죽었어?
헤레나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맛있는 음식은 가급적 먼저 먹는 편이 좋습니다."
그리고 나와 자신 주위에 만들어 놨던 막을 해제했다.
황제 앞으로 나아간 헤레나스가 몸을 낮추고 말했다.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은 마법이라 시전자의 의도가 어떻게 적용되었을지 알지 못하옵니다. 그러나 후작의 주장에 따르면 '자신을 습격한' 저 소년은 현재 죽어 있사옵니다. 이곳으로 이송되고 심문 전에 저희가 검사한 결과 어떠한 이상 징후도 없던 바, 카몰 후작이 무언가 꿍꿍이를 감추고 있다고 생각되옵니다."
"개소리 마! 주위 마법사들이 조사를 위해 마법을 쓰는 동안 당신이……!"
헤레나스가 몸을 돌렸다.
그리고 나를 향해 한 줄기 섬광을 쏘아 보냈다.
나를 향하던 섬광은 마치 원래 그랬던 것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변환인자 때문이었다.
모두가 놀라워하는 가운데 헤레나스가 다시 몸을 돌려 황제에게 말했다.
"심문 전에 카몰 후작 또한 몸수색을 받았사옵니다. 그의 몸에서는 마법을 방해하거나 효과를 저해하는 어떠한 물건도 발견되지 않았사옵니다. 그는……"
귀족들의 소란이 커져 가고 있음에도 헤레나스의 목소리는 내 귀에 선명하게 들렸다.
"마법을 없앨 수 있는 것 같사옵니다. 전설로만 전해 오던 '변환인자'가 아닌가 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