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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검사의 복수-156화 (156/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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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브가 곧바로 몸을 크게 만들었다.

이미 투브도 경험한 바 있었다.

어설픈 실력과 각오로는 저자를 이길 수 없다.

스릉 하는, 금속이 부드럽게 서로를 마찰하는 소리가 났다.

내 앞에 있는 자가 검집에서 검을 뽑아 드는 소리였다.

부드럽고 유려한 선을 그리는 여인의 몸과 탄탄하게 잘 벼려진 한 자루의 검.

그림에나 나올 법한 조합이었다.

구면이었기에 나는 인사를 건넸다.

내 기억 속의 어린 여자아이가 아니라, 훌쩍 커서 성년이 다 된 여자에게 건네는 인사였다.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황녀마마."

정확히하면 지금 황녀의 몸을 차지하고 있는 걸로 예상이 되는 초대 황제에게 올리는 인사였다.

"마마가 아니라 폐하라는 말을 붙였어야 했나 싶습니다."

1황녀, 엘리자벳 서비어가 입을 열었다.

낮고 무거운 남성의 목소리였다.

황녀의 몸은 지금 그 안에 깃든 초대 황제, 레인 서비어에게 지배당하고 있었다.

"짐은 그대와 이렇게 해후할 줄 몰랐노라."

철그렁.

황녀가 들고 있던 빈 검집을 떨어트렸다.

잠시 큰 소리가 나나 싶었지만 황궁 밖으로 향하는 수로에서 나는 물소리에 묻혀 사라져 버렸다.

"저 역시 이런 재회를 기대하지는 않았습니다."

황녀가 양손으로 무기를 단단히 쥐었고, 삽시간에 눈이 흰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투브가 당장이라도 달려들듯 몸을 낮췄다.

나 역시 마나 소드를 만들어 내 공격에 대비했다.

그러나 황녀는 수로를 단단히 지키고 섰을 뿐, 선공을 하지 않았다.

"짐이 그대에게 제국과 서비어 가문에 경종을 울리는 자가 되어 달라 했을 때, 그대는 본인의 미약함과 의지를 들어 거절했었다."

황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오러가 격해지기 시작했다.

황제가 보여 준 것 이상의 기세였다.

"짐이 이 아이의 몸에 깃들어 듣기로는 그대는 강대해졌으며 영웅의 자리에 올랐다고 한다. 그런데 왜 지금과 같은 선택을 한 것이냐, 어찌하여 제국을 버리려 하느냐. 짐은 확신하고 있노라. 제국에게는 그대가 필요하고, 그대에게는 제국이 필요하다. 돌아올 것을 명하노라."

"폐하."

한마디, 한마디마다 어금니를 꾹꾹 눌러 가며 말했다.

"현대의 폐하께서 제가 죽이고자 하는 놈들과 손을 잡고 비호하고 계십니다. 저는 그들을 죽여야만 합니다. 황제니, 후작이니, 제국이니 하는 것들은 제 의지를 방해하는 허상들일 뿐입니다."

"어찌하여 높고 넓게 보지 못하는가!"

"제가 왜 높게 봐야 하며, 무슨 이유로 넓게 보아야 합니까? 제 눈에 보이는 것은 제가 죽여야 할 놈들과 그 앞을 가로막는 것들 뿐입니다. 부디 바라옵건데, 비켜 서 주옵소서. 폐하를 해하고 싶지 않거니와 황녀마마의 몸에 칼자국이 남는 것도 바라지 않사옵니다."

"기회를 주었거늘!"

다음 순간, 황제는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마나 소드를 머리 위로 올려 들었다.

엄청난 충격이 위에서 쏟아져 내렸다.

콰아앙!

내 머리 위로 떨어진 황녀의 눈이 떨렸다.

"익숙하지 않으십니까?"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머리 위로 치켜올린 마나 소드는 방패의 형태가 되어 일렁이고 있었다.

황녀는 계속해서 공격을 하려 했지만, 재빠르게 달려든 투브 탓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순식간에 투브의 발톱과 이빨이 황녀를 향해 쇄도했다.

기묘한 몸짓으로 닿을 듯 닿지 않으면서 황녀는 투브의 공격에서 벗어났다.

다시 마나 소드를 검의 형태로 바꾸었다.

황녀의 눈빛에서 침착함이 사라지고 있었다.

멀리서 많은 사람들이 이쪽으로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황녀와의 충돌로 발생한 소리가 너무 컸던 것이 분명했다.

"폐하, 황녀마마의 몸에서 주무시는 동안에도 제법 많은 것들을 들으신 모양입니다?"

초대 황제는 내 말에 대답할 모양새가 아니었다.

그는 말까지 절고 있었다.

"네, 네 녀석의 무기……. 이타르처럼 형태를……."

"저는 이타르를 만났습니다."

초대 황제가 포효했다.

"거짓말!"

그가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의 얼굴, 아니 황녀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꽉 다문 입술, 거친 숨을 뿜어내는 코, 하얗게 변한 눈.

그녀가 들고 있는 검이 내 미간을 찌르기 직전이었다.

그러나 황녀가 내민 검은 내게 닿지 못했다.

헤어진 연인에게 닿고 싶어 하듯, 나를 향한 검이 파르르 떨렸다.

내 팔에서 수십 가지의 마법진이 각자 빛을 내고 있었다.

황녀의 몸은 발아래서 솟아 나온 축축한 진흙과 억센 나뭇가지로 덮여 있었다.

"이타르를 만났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당연히 마법을 쓰지요. 믿기 힘드셨나 봅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으셨던 겁니까?"

"이노옴……!"

초대 황제가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몸을 뒤틀었지만, 그럴수록 나뭇가지가 근육과 관절을 옥죌 뿐이었다.

황녀의 몸에서 발산되고 있는 오러와 기세가 어찌나 굉장한지 계속해서 진흙들이 떨어져 나가고, 나뭇가지들이 우두둑 소리를 내며 꺾이고 있었다.

주위 마나를 모조리 끌어다 쓰고 있는데도 이 정도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진작 사지가 뒤틀려 죽을 정도인데도 나는 긴장을 풀 수 없었다.

결국 나는 다시 마법을 써 황녀 주위의 공기를 없애 버렸다.

제법 버티나 싶더니 황녀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

결국 혼절하는 순간까지 황녀의 눈은 하얗게 변해 있었다.

초대 황제에게 제국이란 무엇이길래 이렇게까지 할까.

제국에 대한 애정인가, 이타르와 마법사에 대한 공포심일까.

고민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굉음을 냈을뿐더러 대놓고 마법까지 써 버렸다.

이쪽을 향하는 다수의 소리가 더욱 가까워져 있었다.

'가자.'

투브가 나를 등에 태우고 수로로 뛰어 들었다.

얼마쯤 가다 보니 강철로 만든 거대한 창살이 보였다.

내관이나 궁녀가 탈출이라도 하는 걸 막을 셈이었나 보다.

마나 소드로 몇 번 그어 주니 창살의 한쪽이 무너져 내렸다.

깊은 곳으로 잠수해 황궁을 벗어났다.

다행스럽게도 아직 이곳까지 황궁의 벙력을 보내지는 않은 것 같았다.

"푸하!"

수로 변으로 올라와 몸을 정리했다.

투브가 몸을 털 때마다 물방울이 사방으로 부서졌다.

물방울에 반사되는 석양빛이 서글펐다.

-네놈 따라다니다가는 절대로 제 명에 못 죽을 거야. 아침에 여기 들어올 때만 해도 저녁에 이렇게 물 범벅이 될 줄 알았겠어?

"아직 불평하기는 일러."

-응?

내가 한쪽을 가리켰다.

황궁의 담장보다 몇 배는 높아 보이는 수도의 성벽이 있었다.

-저기도 마법이 잔뜩 걸려 있어?

"당연하지. 그런데 조금 방비가 약한 곳은 알고 있어."

태양달에 갔을 때 받아 놓은 정보였다.

내전으로 인해 마법사들의 수가 부족해져서 제대로 정비가 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다고 했다.

내 말을 들은 투브가 몸을 쭉 켜면서 말했다.

-귀찮은 것들만 없으면 저런 것 정도는 문제도 아니지.

***

"엄마, 밖이 왜 이렇게 시끄러워요?"

수도에 사는 어린아이 짐이 그의 어머니에게 물었다.

이민족의 일야관 침공 때 남편을 잃고 혼자 가정을 꾸려 가고 있는 짐의 어머니, 율리는 5살배기 아들을 품에 꼭 껴안았다.

"별일 아니야. 곧 조용해질 거야."

"밤인데도 계속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어요. 뭔가를 찾는 거 아닐까요?"

"우리가 신경 쓸 게 아니란다."

하루 종일 수도는 시끄러웠다.

입궐했던 귀족들이 혼비백산하여 뛰어나오는 것이 목격되었고, 몇몇 귀족들은 그 길로 가솔들을 이끌고 수도를 벗어나기까지 했다.

수도방위병단 소속 병사들이 계속해서 황궁으로 들어갔다가 해가 저물 때쯤에는 두셋씩 짝을 지어 수도 전역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수십 명이 황궁에서 죽었다는 소문, 전각 하나가 전소되었다는 소문 등 불길하고 흉흉한 소문만이 거리에 돌았다.

사람들의 입에서 입을 타고 소문이 점점 커져 갔다.

소문의 중심에는 카몰 후작이 있었다.

그가 역모를 계획하고 있었단다.

율리는 그 이야기를 쉽사리 믿지 않았다.

남편의 동료들이 전해 준 이야기에 따르면 카몰 후작이 없었다면 일야관이 함락당하고 이민족들이 수도까지 밀어닥쳤을 것이라 했다.

전쟁의 영웅이 무엇이 아쉬워 역모를 계획한단 말인가.

율리는 소문에 혼란스러웠지만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저 불안해하는 아들을 한 번 더 안아주는 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내일이 되면 다시 평소와 같이 돌아와 있을 거야. 어서 가서 자자."

율리의 품에서 빠져나온 짐이 명랑하게 말했다.

"자기 전에 에이미한테 갔다 올게요."

에이미는 남편의 죽음에 대한 보상금으로 산 말이었다.

이 말을 주위에 빌려주는 것으로 모자(母子)는 생활비를 충당하고 있었다.

또한 짐이 아버지의 부재를 에이미와의 유대로 잊고 있다는 생각에 율리는 짐이 에이미와 함께 있는 것을 말리지 않았다.

율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에이미 잠자리라도 봐주고 오렴. 하지만 너무 오래 있지는 마라."

"네! 금방 갔다 올게요!"

짐은 재빠르게 뒷문을 통해 헛간을 개조해 만든 마구간으로 나갔다.

에이미의 털을 골라 주고, 짚을 쳐서 잠자리를 봐준 짐이 말했다.

"잘 자! 내일 봐!"

에이미도 기분이 좋은지 콧김을 푸르릉댔다.

그리고 짐의 귀에 이질적인 소리가 들렸다.

쿠훙.

뭔가 무거운 것이 땅을 딛는 소리였다.

너무 오래 있지는 말라는 어머니의 말이 한순간 짐의 머리를 스쳤지만, 오래 담아 두기에 짐은 아직 어린아이였다.

짐은 곧 마구간 뒤의 울타리를 기어올랐다.

짐의 집 뒤쪽은 동네 사람들이 채소를 기르는 공용 텃밭이 있었고, 조금 더 가면 수도의 성벽에 닿을 수 있었다.

울타리의 끝까지 기어오른 짐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어둠이 꿈틀거리는 것 같은 거대한 늑대가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건장한 청년이 타고 있었다.

늑대는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으며 마침내 짐의 집 울타리에 가까이 다가왔다.

위압적인 광경에 짐은 고개를 움츠려 몸을 숨겼다.

늑대에 탄 청년이 지나가며 스치듯 말했다.

"누구한테도 말하면 안 된다, 꼬마야. 비밀로 해."

놀란 짐이 고개를 들었다.

썩 잘생긴 청년, 카몰 후작 시안 몬트라우의 시선과 짐의 시선이 마주쳤다.

시안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 세워 입에 가져다 댔다.

짐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안이 몸을 낮춰 투브의 등에 바짝 붙었다.

팟-!

검은 늑대가 땅을 박찼다.

짐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고 말았다.

"어……!"

늑대는 수도의 성벽으로 달려들고 있었다.

그리고 투브는 그대로 성벽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투브의 발이 닿는 곳마다 푸르고 붉은 마법 불꽃이 튀었다.

짐은 거대한 검은 늑대가 수도의 성벽을 넘는 것을 보고 힘이 풀려 울타리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뒤에서 짐을 찾는 소리가 들렸다.

"짐! 거기 있니? 오래 있지는 말라니까."

***

"각하!"

수도 밖에 대기하고 있던 군영으로 들어가자 로하나스를 비롯한 참모들이 급히 나를 맞았다.

나는 그들을 향해 단호하게 명했다.

"전원 무장해. 수도를 포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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