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 봉쇄 (2)
나발드 뒤에 있는 남자에게로 시선이 닿았다.
얼핏 보기에 목 언저리까지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다.
얼굴에도 얇은 상처들이 가득했다.
비교적 최근 생긴 것으로 보이는 상처들이었다.
"어제 수도에서 일야관 쪽으로 돌파를 시도한 무리가 있다던데, 그쪽이었나 보군. 짐작은 하고 있었어. 살아남은 한 명이 엄청난 마상기예를 선보였다고 하더라고."
나발드 뒤에 서 있는 남자는 정전에서 나를 막아서고 레이바를 보호했던 친위대였다.
그가 뚜벅뚜벅 몇 걸음을 더 걸어왔다.
로하나스가 바로 허리에 손을 올려 무기를 뽑을 준비를 했다.
손을 들어 로하나스를 제지했다.
친위대는 내 앞에 높여 있는 긴 탁자로 다가서더니, 의자를 빼고 앉았다.
그리고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오늘은 사절로 온 것. 사절마저 죽이는 파렴치한 놈은 아니라고 믿겠다."
로하나스가 발끈했다.
"이런 정신 나간 놈이! 네가 마주하고 있는 분이 누군지는……."
나는 웃음이 터졌다.
"하하하하! 파렴치! 가장 파렴치한 자의 개가 나를 보고 파렴치?"
역설적이고 부조리한 상황에서 비롯된, 속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웃음이었다.
웃느라 비어져 나온 눈물을 닦으면서 나발드를 향해 손짓했다.
"자네랑은 참 연이 많아. 앉게, 뭘 그리 멍청하게 서 있나."
나발드도 의자를 빼고 앉았다.
내가 친위대원을 향해 물었다.
"자, 그전에 호칭을 정리하자고. 나는 그쪽에게 뭐라고 부르면 되지?"
"나는 이름이 없다."
"딱딱하기는. 좋아, 그럼 당신을 개라고 부르겠어. 황제의 충견이니 만족스럽지?"
친위대의 이마에 굵은 핏줄이 솟았다.
나는 빙글빙글 웃으며 약을 올렸다.
"성질내지 말라고. 상처 벌어질라. 꼴 보니 간신히 목숨만 붙어 있는 것 같은데 상처 벌어져서 죽으면 억울하지 않겠어?"
친위대의 이마 올라 있던 핏줄이 사라졌다.
그가 침착하게 말했다.
"본론을 얘기하지. 제마수단장을 데리고 온 것으로 눈치는 챘을 거라 생각한다. 당신의 여동생은 우리가 데리고 있으며, 당신의 측근인 저비스 포츠라니 역시 우리 수중에 있다. 포위를 풀지 않으면 이들의 안전은 보장할 수 없다."
캐슬린 본인은 모르지만 캐슬린은 전이 마법사다.
엄청난 잠재 가치가 있었다.
갑자기 아버지가 황제 앞에 엎어지던 모습이 생각났다.
가족들을 잃고 싶지 않았다.
저비스는 어떤가.
반오러 물질의 생산 과정 전체를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현재 비축해 놓은 반오러 물질의 양은 얼마 되지 않았다.
전투 한두 번이면 모두 소모되어 버릴 정도였다.
카몰에서 경량화된 갑옷과 여분의 반오러 물질이 보내져 오고 있었지만, 그것을 다 더해도 넉넉하다고 하기에는 힘들었다.
애당초 그 물건들이 관문을 통과해 이곳에 도달할 수 있느냐도 불투명했다.
내가 답했다.
"죽여."
친위대는 여전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어떤 표정도 없었다.
"사람 둘의 목숨으로 풀릴 포위 같나? 네놈이 일야관으로 향하면서 죽인 목숨만 스물이 넘을 거고, 평생 불구가 된 사람은 그 배가 넘을 거다. 그런데 두 명의 목숨으로 포위를 풀어? 말도 안 되지."
친위대가 천천히 일어섰다.
마치 저승에서 목숨을 취하러 내려오는 사신처럼 무거운 분위기가 풍겨져 나왔다.
나발드가 허겁지겁 몸을 일으켰다.
"황제의 개가 나가신단다! 길 열어 드려라!"
내 외침을 들은 친위대가 몸을 돌렸다.
"후회할 거다."
"황제한테 전해라. 비텔스바흐 부자(父子)와 지크프리트를 내가 죽이면 포위를 풀지도 모른다고 말이야! 아니다! 비슷한 놈들이 죽어 나가는데 한 놈만 살려 둘 수 없지. 이르한 노체 놈의 목숨도 함께. 그것이 가장 적은 목숨으로 이 사태가 마무리되는 지름길이야."
친위대가 나가려는 순간, 내가 한마디를 더 했다.
"물론 폐하께서는 그동안의 과오에 대해 내게 친히 사죄하셔야 할 거다."
파짓.
막사 안에 한 줄기 광풍이 들이쳤다.
동시에 로하나스가 반응했다,
나를 향해 달려드는 친위대원에게 로하나스가 검을 휘둘렀다.
검은 정확히 친위대원의 목을 노리고 있었다.
친위대원은 손을 들어 로하나스의 검을 막았다.
붕대로 칭칭 감겨 있는 손이었다.
그의 손 주위에 오러가 넘실대는 것이 보였다.
오러로 감싼 맨손과 역시 빈틈없이 오러를 끌어올린 검이 충돌했다.
퍼억-!
무언가 터져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친위대의 손을 감싸고 있던 붕대가 사방으로 찢겨 나갔다.
부어오르고 여기저기 찢어진 손이 보였다.
그러나 소리가 난 곳은 친위대의 손이 아니었다.
로하나스의 검이 계속해서 파열음을 내고 있었다.
그리고 눈 깜빡할 사이 로하나스가 들고 있던 검의 날 부분이 사방으로 깨져 나갈 조짐이 보였다.
"으아악!"
나발드가 공포 섞인 소리를 질렀다.
마법 사고에 관련된 수사에 있어서는 따라올 자가 없는 나발드지만 엄연히 그는 일반인이었다.
그는 이런 싸움에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일어섰다.
"놔, 로하나스."
로하나스가 검을 떨어뜨렸고, 마법으로 검 주위에 구 형태의 막을 쳤다.
깨진 검 조각들이 사방팔방으로 뛰쳐나가려다 막에 막혀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냈다.
친위대가 당황한 로하나스를 밀치고 다시 한번 나를 향해 달려들려 했다.
"반 보, 반 보만 움직이면 너는 죽는다."
마법을 쓰지 않는 손에 마나 소드를 만들어 낸 내가 마나 소드를 친위대의 목에 겨누며 말했다.
그때쯤 밖에서 병사들이 뛰어들어 왔다.
나발드는 안색이 하얗게 질렸고, 친위대는 여전히 손에 오러를 끌어모으고 있었다.
아직까지도 막의 안쪽에서 이리저리 튀고 있는 검 파편들을 친위대의 얼굴 앞으로 끌어다 놓았다.
"내 수많은 악명 중에 사절을 죽였다는 말, 한 줄 정도 추가 되어도 나쁘지 않아. 그리고 당신 정도 되는 사람이면 자신과 상대를 가늠하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잖아? 알고 있는 것 아니었어? 당신은 내 발끝에도 못 따라와."
그러나 친위대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이 남자가 궁금해졌다.
그리고 이 남자의 주인이 궁금해졌다.
또한 이 남자에게 자신의 주인이란 어떤 의미일지 궁금해졌다.
이런 자리와 이런 상황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질문이겠지만 나는 친위대에게 물었다.
"네게 황제란 어떤 사람이지?"
낮고 굵은 목소리로 친위대가 말했다.
"세계의 지배자, 만인의 군주, 나의 구원자."
나는 피식 웃었다.
"틀렸어. 권력에 미쳐 판단이 흐려진 남자, 그뿐이야."
이제 마구 날뛰던 검 파편들이 잠잠해져 있었다.
마법을 해제했다.
짤그랑 하는 소리를 내면서 조각들이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나는 마법의 목표를 친위대의 팔로 옮겼다.
우드득!
뼈와 뼈가 뒤틀리는 소리가 났다.
찢어진 붕대가 친위대의 뒤틀린 한쪽 팔을 보기 흉하게 가리고 있었다.
당장 고통에 혼절해도 이상하지 않으련만, 친위대는 상처 입은 야수 같은 신음만을 흘리고 있었다.
"끄으으으……."
"팔 한쪽 정도면 암살자에게 베푸는 자비치고는 굉장하지 않아?"
결국 친위대는 혼절했고, 공포에 질려 벌벌 떨고 있는 나발드가 보였다.
내가 주위에 대고 말했다.
"둘에게 말을 주고 수도 쪽으로 내쫒아라."
병사들이 억센 손으로 나발드와 친위대를 끌고 나갔다.
그 뒤에 대고 내가 말했다.
"나발드, 그대가 본 모든 것을 낱낱이, 하나의 거짓 없이 전해. 과장을 좀 더하면 나는 좋고."
둘이 나가고, 엉망이 되었던 주위가 좀 정리되었다.
로하나스는 시종일관 굳은 얼굴이었다.
조심스럽게 입을 연 로하나스가 나를 향해 물었다.
"그자는 대체……."
"황제의 친위대. 너는 잘했어. 팔이라도 뜯겨 나갈까 봐 걱정했는데 손아귀 정도면 선방한 거지."
그제야 로하나스가 검을 쥐고 있었던 손을 들었다.
어느새 찢어진 로하나스의 손바닥에서 붉은 피와 살점이 보였다.
"그자는 맨손이지 않았습니까! 저는 무장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강했고, 너는 저자보다 약했어. 그게 결론이야."
로하나스가 입술을 꾹 물었다.
이 일로 로하나스가 한 층 더 성장하길 바랄 뿐이었다.
다음 순간, 머리가 핑 울렸다.
투브가 벌떡 일어섰다.
-마나가 이 정도로 요동친다니!
밖에서 거대한 함성이 들렸다.
"적습이다!"
***
시안과 구름이 충돌하던 시각, 황제는 시종장과 함께였다.
황실 시종장, 얄츠 이나타 백작이 황제에게 걱정스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정녕 이 방법을 쓰셔야겠습니까, 폐하."
"관문들 밖에 여러 군대들이 얽혀 있다 들었다. 짐의 군대가 먼저 안쪽에서 바깥으로 활로를 뚫으면 전세를 유리하게 가져갈 수 있을 것이다."
"수도는 천혜의 요새입니다. 포위당하긴 했으나 지원군이 올 때까지 몇 주고, 몇 달이고 버틸 수 있습니다. 저들은 자멸할 것인데 벌써부터 이런 방법을 동원하는 것은……."
황제가 근엄하게 말했다.
"짐이 그런 것을 모를 것이라 생각했는가."
시종장이 허리를 깊게 숙였다.
"황공하나이다."
황제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게 버티다 승리하면, 제2, 제3의 카몰 후작이 생길 것이다. 짐은 그러한 것을 원하지 않는다."
황제는 주먹을 꽉 쥐었다.
어찌나 강하게 쥐었는지 뼈마디가 하얗게 변할 정도였다.
"압도적인 무력과 파괴적인 권위. 그것만이 앞으로의 후환을 없앨 수 있는 길이로다. 사람과 사람의 갈등이나, 짐에겐 짐만의 방법이 있노라. 시행하라."
그동안 희생되는 인력, 특히 마법사들의 희생은 어떻게 메울 셈이냐고 황제에게 반문하고 싶은 시종장이었지만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아군의 마법사가 죽는다면, 적의 마법사 역시 죽이면 된다.
그렇게 합리화한 시종장은 밖으로 걸어 나가는 황제의 뒤를 종종걸음으로 쫓았다.
황제가 도달한 곳은 제국에서 손꼽히는 무력 집단, 붉은 방패 기사단이 위치한 곳이었다.
모든 기사단원이 기사단의 자랑인 붉은 무구를 갖추고 도열해 있었다.
기사단 중간, 중간에 역시나 붉은 옷을 입고 있는 마법사들이 보였다.
그들은 몇 개의 조로 나뉘어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모든 조의 중심에는 잔뜩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마법사들이 있었다.
시종장이 황제에게 두루마리를 건넸다.
황제가 손수 그것을 풀어 한쪽을 잡고 아래로 던졌다.
촤르륵-.
한참을 아래로 펼쳐진 두루마리 안에는 수많은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대들의 이름이다. 이 중 많은 이름은 다시 이 자리에 모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짐과 제국은 모든 이름을 기억할 것이니라. 가라! 제국의 적에게 진정한 공포를 선사하라! 용맹무쌍하게 싸우고 돌아오라!"
조의 중심에 있던 마법사들이 영창을 시작했다.
제국 전체를 통틀어도 채 10명이 되지 않는다는 전이 마법사들이었다.
나시와르 시찰단에 포함된 1명과 임무를 맡고 나가 있는 3명의 전이 마법사를 제외하고, 수도에 있던 5명의 전이 마법사가 모두 모여 있었다.
눈 깜빡할 순간, 전이 마법사들은 주위의 병력과 함께 수도의 성벽 밖으로 이동했다.
시안의 카몰군이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는 곳이었다.
전이 마법사 하나가 즉시 피를 토하며 절명했다.
전이 마법의 대가인 생명력 때문이었다.
이동 위치에 있던 카몰군 부대 하나가 마법의 여파 때문에 순식간에 사라졌다.
잠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해 얼떨떨해하던 카몰군이 정신을 차렸다.
"적습이다! 붉은 방패 기사단이다!"
"전이 마법이다! 마법사를 불러와!"
동시에 수도의 성문이 열렸다.
안쪽에서 대기하던 수도방위병단의 병력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혼전이 벌어졌다.
"팔크!"
누군가 붉은 방패 기사단원인 팔크 발터를 불렀다.
달려오던 말을 찔러 기사 하나를 낙마시킨 팔크가 고개를 돌렸다.
같은 붉은 방패 기사단원인 카스탈리안 사바트였다.
"왜!"
"너는 카몰 후작을 직접 봤다고 했지?"
"몇 번 같이 있었지! 왜? 그 양반 얘기는 왜 해. 내가 저번에 그랬지? 웬만하면 그 양반이랑은 안 붙는 게 좋을 거라고!"
카스탈리안은 팔크의 답을 듣고도 계속 질문을 했다.
"그 사람이 타고 다니는 게 검은 늑대라고 안 했어?"
"맞아! 사실 그걸 늑대라고 하기도 좀 그래. 엄청 크거든. 어이쿠야!"
자신의 목을 노리고 들어오는 창을 쳐 낸 팔크가 다시 외쳤다.
"갑자기 왜 물어보는데!"
카스틸리안은 비명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으악!"
무언가 데굴, 팔크의 발 옆으로 굴러들었다.
카스틸리안의 머리였다.
팔크가 고개를 돌리기 전, 불길한 소리가 들렸다.
쿵!
거대한 그림자가 자신의 위로 드리우는 것을 느끼면서 팔크가 고개를 돌렸다.
네 개의 눈이 보였다.
사람의 눈 둘.
짐승의 눈 둘.
그러나 팔크는 왠지 모르게 짐승의 눈 네 개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익숙한 목소리가 팔크를 향해 말했다.
"나발드도 그렇고, 오늘은 구면들과 인연이 닿는 날이었나 봐. 그렇지 않나, 팔크?"
팔크는 답하지 않았다.
어느새 옆으로 모여든 동료들과 진을 짜서 거대한 늑대의 움직임을 봉쇄하려 시도할 뿐이었다.
그것이 팔크가 해야 할 일이었다.
시안에게 목숨을 구원받은 팔크가 아니라 붉은 방패 기사단원 팔크가 해야 할 일.
팔크에게 늑대의 우악스러운 앞발이 날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