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과 독수리 (2)
"각하!"
본영으로 돌아온 나를 로하나스가 맞았다.
로하나스의 얼굴에는 반오러 물질의 체내 유입을 막기 위한 가면이 씌워져 있었다.
내 곁으로 빠르게 다가오는 의료 부대에게 캐슬린과 저비스를 넘겨주었다.
난장판이 된 전장을 뚫고 오느라 둘은 온통 흙투성이였다.
캐슬린과 저비스 모두 기절해서 가느다란 숨소리만을 흘리고 있었다.
"베이카 장군께선?"
"지휘 막사에 계십니다."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돌아오면서 보니 아군 부대들이 각자의 자리를 찾아 전개하고 있었다.
베이카 장군의 용병술이 펼쳐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이런 상황에서 괜히 내가 끼어들면 전체적인 흐름이 무너질 수 있었다.
"검은 늑대 기사단은? 이미 출격했나?"
"예."
"말 타! 그쪽으로 가자!"
로하나스가 말에 오르는 걸 기다리고 있는 사이, 마법사 하나가 내게로 달려왔다.
통신 마법사 중 하나였다.
"침투해 들어온 적 병력이 모두 빠져나갔습니다!"
"전이 마법으로?"
"그렇습니다!"
"적의 피해는?"
"20명 정도의 붉은 방패 기사단원이……."
"그게 전부? 고립된 적은 없고?"
"예, 현재까지의 상황으로는 그렇습니다."
"반오러 물질을 사용하자마자 빠져나갔군……."
붉은 방패 기사단을 일거에 소탕하려는 의도로 가지고 있던 반오러 물질을 쏟아부었지만, 그들이 전이 마법의 사용 횟수를 한 번 더 늘린다는 큰 위험을 감수하면서 빠져나갔다.
저번 침투로 붉은 방패 기사단의 무력을 체험했기에 더더욱 아쉬웠다.
적의 핵심 부대가 거의 전력을 보존한 채로 사라졌다.
요절한 전이 마법사도 없는 것 같았다.
이미 전장에 뿌려지기 시작한 반오러 물질은 노체군과 수도방위병단을 상대하는 데 큰 역할을 하겠지만, 그래도 입맛이 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들은 반오러 물질을 소문으로만 들었을 뿐, 직접 경험하는 것은 처음이다. 정보 수집 차원에서라도 다시 붉은 방패 기사단을 침투시키지는 않겠지.'
황제가 아무리 내 목숨에 눈이 멀었어도, 그 정도로 멍청한 판단을 할 사람은 아니었다.
게다가 수도 내부에는 할 장군을 비롯한 수도방위병단의 많은 참모들이 있으니 더더욱 그랬다.
투브의 등에서 내려 지휘 막사로 향했다.
말에 오를 준비를 하고 있던 로하나스가 황급히 뒤따르는 소리가 들렸다.
지휘 막사 안은 분주했다.
통신 마법사들이 끊임없이 각 부대의 소식을 알리고, 지휘부의 결정을 아래로 전파했다.
내가 온 것을 보고 베이카 장군이 상석을 양보하려 했지만 나는 간단히 고개를 좌우로 저어 그 결정을 물렸다.
옆으로 다가온 내게 베이카 장군이 넌지시 말을 걸었다.
"인질들은 무사히 구출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예, 조금 귀찮아질 뻔했는데 다행이었습니다."
"황실 마법사의 몸에서 괴물이 튀어나왔다고……."
이미 목격한 사람이 수두룩하니 그럴 리 없다고 잡아 뗄 수도 없었다.
"으아악!"
뒤에서 누군가가 기겁하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전령 하나가 투브를 보고 놀라 자빠져 있었다.
베이카 장군이 인상을 찌푸리고 말했다.
"웬 소란이냐!"
"죄,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기 머리가!"
전령이 가리킨 곳에는 개의 형태를 한 투브가 아라크네의 골통을 물고 있었다.
'그걸 들고 왔어?'
-이놈의 머릿속에 있는 걸 흡수해야 할 거 아니야. 한순간에 되는 게 아니라고! 오래 살아온 놈인 만큼 방대하고 복잡해!
'그럼 어디 안 보이는데 가서 먹어! 머리통을 물고 다니는 건 좀…… 그렇잖아!'
재빠르게 투브와 생각을 나누면서 상황을 수습했다.
"저 머리가 그 괴물의 머리입니다. 투브가 웬만한 것에는 흥미를 안 가지는데, 저건 물고 안 놔줍니다. 보기에 흉하니 다른 곳에 데려 놓겠습니다."
"괴물의 머리라……. 적어도 제국은 괴물들의 위협에서 자유롭다고 생각했는데 버젓이 저런 놈이……."
베이카 장군이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정신을 차린 듯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이리저리 지시를 했다.
통신 마법사 중 몇이 괴물의 머리라는 소리에 궁금했는지 투브에게로 접근했다.
마법사라는 자들은 목숨이나 두려움보다는 호기심이 항상 앞서는 족속이다.
마법사 하나가 조심스레 아라크네의 머리에 손을 대려는 순간 투브가 윗입술을 들어 올려 적의를 드러냈다.
"으아!"
마법사 하나는 그 자리에 엎어졌고, 할 일이나 충실히하라는 구박을 받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투브는 아라크네의 머리를 물고 털레털레 막사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그걸 보고 있던 나는 놀라운 것을 발견했다.
"어?"
막사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내게 집중됐다.
로하나스가 즉각 반응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나는 재빨리 투브가 있던 자리로 가서 섰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지 않게 발로 아래쪽을 문질렀다.
"아냐, 아냐."
다급하게 투브에게 말했다.
'어떻게 된 거야!'
-아라크네 놈, 그 뱀과도 만난 적이 있어. 나름대로 연구를 해 본 것 같아.
'그럼 너도 나라드마의 뱀처럼……?'
-확실하지 않아. 흉내 정도 내 본 것뿐이야.
'다른 건? 너와 내 감각이 동화되는 것의 해결책을 아라크네가 알 수도 있다고 했잖아.'
-기다려, 소화 중이야. 가능하면 이 녀석에게 직접 듣고 싶었는데 일이 이렇게 돼서 유감이야. 나는 영수인지라 마나에 대한 감응력은 너희들보다 좋지만, 마법이라는 체계에는 익숙하지가 않아.
'마법사의 조력이 필요하다?'
-그렇지.
아라크네 정도 되는 마법사가 탐냈던 마법사가 내 수중에 있었다.
그것도 둘이나.
캐슬린과 저비스.
하지만 둘은 치료에 전념해야 했다.
상황은 미미하게 호전되고 있었다.
"3보병대대, 적군 선봉 격파! 할린 언덕 확보."
"유성우 기사단, 적군 기사단 추격 중, 이후 지시 요망."
"검은 늑대 기사단, 적 침투에 대비해 아군 진영 내부에서 대기 중."
통신 마법사들이 계속해서 전장의 정보를 보내 왔다.
그중 한 통신이 막사 내부에 긴장감을 불러왔다.
"수도 동북부 포위 전선에서 전파! 대규모 부대가 수도로 접근 중!"
베이카 장군이 놀라 외쳤다.
"일야관 말고 뚫린 관문이 있단 말인가! 정확한 규모와 소속을 확인하도록! 어서!"
일야관은 수도의 서부에 위치한다.
현재 카몰군은 수도를 뺑 둘러싸고 포위하고 있지만, 일야관을 돌파하고 들어온 노체군에 맞서기 위해 주요 전력은 수도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반대편인 동쪽은 상대적으로 취약한 상태, 저 부대가 황제를 지지하는 부대라면 포위망이 뚫릴 수도 있었다.
'온 건가.'
그러나 나는 급박한 막사의 분위기와는 맞지 않는 웃음을 속으로 짓고 있었다.
통신 마법사의 말이 울려 퍼졌다.
"백색 무장……. 태양, 독수리……! 이나타 가문의 문장! 히베아군으로 확인!"
전령 하나가 로하나스에게 달려와 무언가를 속삭였고, 로하나스가 다시 그 내용을 전파했다.
"수도에서 나왔던 병력이 퇴각하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노체군 역시 많은 피해를 입고 진영을 뒤로 물리고 있다고 합니다."
긴장감이 팽배했던 지휘 막사에 안도감이 내려앉았다.
그러나 이어진 로하나스의 말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각 관문을 지키고 있던 수도방위병단 및 기타 군단들이 최소한의 인원만을 남기고 수도로 향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총력전이라는 소리였다.
아버지의 제뉴인군도, 그레이스의 산탄다르군도, 알버트가 데리고 오는 중인 카몰군의 예비 병력도 도착하지 않은 상태에서 벌어진 급박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일야관을 통해 황제파 귀족들의 병력은 계속해서 유입되고 있었다.
알버트는 카몰에 남아 있던 마지막 반오러 물질을 가지고 오는 중이었다.
즉, 알버트의 도착 전까지는 반오러 물질을 사용할 수 없다는 소리였다.
수적인 열세.
방법은 하나였다.
내가 베이카 장군을 향해 말했다.
"포위는 끝났습니다. 이렇게 된 이상 수도 공격을 감행해 황제를 확보해야 합니다. 부대를 재정비하세요."
참모들 몇 명이 굳은 얼굴이 되었다.
그동안은 수도에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포위 진영만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큰 피해가 발생하지 않았다.
포위와 공격은 달랐다.
수도, 특히 수도의 성벽은 오랜 세월 개축에 개축을 반복해 엄청난 규모의 요새가 되어 있었다.
그런 곳을 뒤에서 적이 들이칠지도 모르는 상황 속에서 공격해야 한다니, 나라도 저런 표정을 지을 것 같았다.
베이카 장군이 내게 물었다.
"히베아군은 어떻게 하실 요량이십니까?"
"히베아군의 지휘는 제가 맡겠습니다. 장군께서는 오로지 카몰군의 지휘에만 신경 써 주시면 됩니다."
어리둥절해하는 베이카 장군에게 나는 무언가를 꺼내 그만 보일 정도로 살짝 보여 주었다.
백작을 상징하는 은빛 신분패였다.
잠시 신분패를 내려다보던 베이카 장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이건……."
은빛의 신분패 위에 마치 칠이 벗겨진 듯, 회색의 돋을새김으로 그려진 독수리.
뒷면에 새겨진 소유주의 이름까지.
현재로써는 제국에 단 하나 존재하는 변경백의 신분패였다.
"사정이 있어 받게 되었습니다. 히베아 측에서도 무리 없이 받아들일 겁니다."
로하나스에게 검은 늑대 기사단을 모두 데리고 오라고 명령한 후, 나도 밖으로 자리를 옮겼다.
나가면서 아까 투브가 있던 자리를 괜히 발로 몇 번 더 문질렀다.
투브의 발자국 모양으로 남은 푸른 녹은 내 발길질 몇 번에 사라져 버렸다.
밖으로 나와 준비가 되는 동안 수도를 바라보았다.
높은 성벽이 나를 마주했다.
제국의 오랜 역사에서 저 성벽을 넘어 수도를 점령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그것에 도전하려 하고 있었다.
"하."
짧게 웃음이 나왔다.
실패할 것 같지 않았다.
멍청한 판단을 한 황제가 내게 사죄하고, 남은 내 원수들을 죽이는 그림이 머릿속에서 생생하게 그려졌다.
만족스러운 상상이었다.
"각하!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로하나스였다.
"가자."
상상은 머지않아 현실이 될지니.
***
자객들이 황궁에서 변경백과 나를 해하려 하기 전이었다.
"이걸 제게 맡기셔도 되는 겁니까?"
어두운 심문장 안, 내가 창살 너머의 변경백에게 물었다.
내 손에는 변경백이 반 강제로 들려 준 그의 신분패가 있었다.
변경백은 심드렁하게 답했다.
"내 부하들이지만 고집불통인 놈들투성이라네. 그런 거라도 있어야 자네를 따를 걸세. 내가 이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미리 말은 해 놓았지만, 그대가 덜컥 가서 '변경백의 말을 듣지 않았소.' 하고 지휘를 한다하면 거부감이 있지 않겠는가."
변경백은 이런 일을 대비해 몰래 히베아군을 수도 주위로 이동시키고, 이목을 피하기 위해 자신과 형제들이 먼저 수도로 입성한 것이라 했다.
"도움에는 감사하지만, 히베아군의 피해도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변경백이 가느다랗게 웃었다.
"그대가 대장벽 너머로 다녀온 이후, 나도 놀고 있지만은 않았다네. 나름의 준비를 했지. 모두 그대 덕이라네."
변경백이 내게 힘주어 말했다.
"자네가 지니고 있는 반오러 물질만큼이나 강력한 무기가 히베아군에 있네."
변경백의 설명을 다 들은 내가 황당한 표정을 짓고 말했다.
"그게 정말입니까?"
"물론, 잘 사용하길 바라네."
변경백이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그리고 가능하면 빨리 꺼내 줬으면 한다네. 영 불편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