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과 독수리 (3)
"노체군이 물러갑니다!"
히베아군 병사 하나가 크게 소리쳤다.
"정당히 거리를 유지하며 뒤쫓도록, 해군으로 유명한 가문이 뭍에 올라왔으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지."
간단히 명령을 마무리 지었다.
내가 변경백의 신분패를 제시하기 전까지 15만에 달하는 대규모 히베아군을 이끌고 있던 변경백의 아들, 카른 이나타가 내게 다가와 물었다.
"카몰 후작 각하의 용병술에 감탄했습니다. 대장벽에 오신 적이 있다고 듣기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저희 히베아군에 대한 이해도가 높으실 줄은 몰랐습니다. 아버지께서 일러 주신 것입니까?"
"……그렇다네. 변경백께서 미리 귀띔해 주신 것이 컸네."
사실은 이전 삶에서 히베아군과 연합 작전을 펼쳐 본 적이 있기 때문에 히베아군에 대해 빠삭한 것이었지만, 적당히 둘러댔다.
자기 아버지를 칭찬하는 데 싫어할 아들이 어디 있겠는가, 나와 비슷한 또래인 카른은 얼굴에 은근한 자부심을 띄웠다.
과거의 삶에서 분리 운동을 막기 위해 변경백이 경계선까지 남하했을 때, 변경백 대리로 대장벽에 남아 있던 인물이 카른이다.
따라서 내가 그와 직접적으로 얼굴을 마주하는 일은 없었다.
그런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니, 그것도 수도 앞에서.
참 모를 일이었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된 다음 내가 카른에게 말했다.
"변경백께서 내게 말씀하시길 '그들'을 데려왔다고……. 정말인가?"
카른의 얼굴에 다시 한번 자부심이 꽃피었다.
"예, 사실입니다. 부대 내에서도 아는 사람이 극소수만 있습니다. 한번 보러 가시겠습니까?"
카른이 나를 안내했고, 몇 겹의 철통같은 보안을 넘어 히베아군 진영의 가장 내밀한 곳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마나들이 넘실대고 있었다.
평화롭고 차분하게, 동시에 아주 세심함이 느껴지고 있었다.
카른이 거대한 천막 안으로 나를 안내했다.
안은 굉장히 어두워 잠시 암적응을 해야 했다.
내가 눈을 감고 있는 동안, 투브가 먼저 일말의 탄성을 내뱉었다.
-세상에, 하나가 아니잖아?
내가 눈을 떴다.
야트막한 언덕이 눈앞에 있었다.
눈을 돌리니 몇 개의 언덕이 눈에 더 들어왔다.
다 해서 다섯 개의 언덕이었다.
가르릉거리는 소리와 함께 언덕이 부풀었다 줄었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카른이 아무렇지 않게 언덕에 손을 올렸다.
언덕 위에 나 있던 억센 털이 푹 들어갔다.
카른이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길들이는 데 성공한 흰 원숭이입니다. 식사 시간과 운동 시간을 제외한 대부분의 시간을 마법으로 재워 두고 있습니다. 워낙 먹는 양이 많아서 이렇게라도 해야 밥을 덜 먹습니다, 하하하."
투브가 조심스레 자고 있는 흰 원숭이에게 다가갔다.
-대체 이걸 무슨 수로 길들인 거지? 저번에 봤을 때는 죽음을 무릅쓰고 달려들던데?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대체 무슨 방법으로……."
"생존 경쟁에서 탈락해 대장벽 근처까지 밀려 내려온 야만인 부족들과 협력 관계를 맺었습니다."
"그들은 오랜 기간 제국과 반목하지 않았나?"
"모두 후작 각하의 덕입니다."
"내 덕?"
"예, 각하께서 대장벽 너머로 다녀오신 후, 몇몇 부족이 먼저 저희에게 접근해 왔습니다. 그들과의 공조를 통해 대장벽 근처의 야생 생물들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야만인들의 주술사가 만들어 낸 약물과 저희 마법사들의 마법으로 야생 생물들 중 몇몇 녀석을 길들이는 데 성공했습니다."
"오…… 굉장하군."
어둠이 눈에 익자 흰 원숭이 사이를 누비는 몇몇 사람들이 보였다.
야만인과 공조했다는 말이 정말인지 얼굴에 붉은 문신을 한 사람이 보였다.
그중 나이가 좀 들어 보이는 야만인이 이쪽을 바라보더니 잠시 굳었다.
그러고는 나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당황한 카른이 본인의 검을 빼 들고 주위에 소리쳤다.
"막아!"
그러나 나를 향해 달려오던 남자는 나와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나를 향해 오체투지를 했다.
그가 엎드린 채로 고개만 들어 나를 바라보고 말했다.
"오오, 시느 사자시여. 다시 뵐 나를 기다리고 이써습니다."
어눌한 제국어가 야만인의 입에서 나왔다.
카른이 내게 물었다.
"아는 자이십니까?"
내가 짧게 말했다.
"흐릭, 시하 부족의 부족장. 일어나."
내 말에 흐릭이 벌떡 일어섰다.
그에게 물었다.
"아직도 부족장인가?"
흐릭은 대장벽 밖으로 나섰을 때, 내가 첫 번째로 향했던 부족의 부족장이었다.
처음에는 좀 대들다가 내가 근처를 불바다로 만들고 나서야 순순히 말을 들었던 기억이 났다.
흐릭이 답했다.
"부족장의 자리는 내려노아씁니다. 이 동물들의 관니를 담당하고 이씁니다, 시느 사자여."
이 흰 원숭이의 파괴력은 내가 직접 실감한 적이 있었다.
3m가 넘는 신장에 맨손으로 대장벽 위까지 기어오르는 강인함, 내 몸에 있는 변환인자 때문에 약화되기는 했지만 합격 마법을 맞고도 살아 있던 맷집까지.
상대하는 입장에서 아주 짜증 났었는데, 이걸 내가 데리고 있다 하니 이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수도 공격을 앞둔 카몰군에는 급조한 공성 병기만 있었다.
그래서 엄청난 희생을 각오하고 있었는데, 훌륭한 생체 공성 병기가 손에 들어온 것이다.
내 시선이 오르락내리락을 반복하는 흰 원숭이의 등에 닿았다가, 투브에게로 옮겨졌다.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생각보다 쉬울 수도 있겠어.'
투브가 질겁했다.
-저, 저 사악한 웃음 봐. 너 또 이상한 거 시키려고 하지?
'이상한 거라니? 언제는 나랑 있으면 안 지루해서 좋다며.'
-그나마 안 지루해서 참아 주는 거야. 괴상하고 이상한 짓만 골라서 하는데 지루하기까지 했어 봐…….
투브가 예의 그 투덜거림을 또 시작했지만 나는 가볍게 넘기고 카른과 흐릭에게 물었다.
"흰 원숭이는 당장 사용이 가능한 건가?"
"몸을 풀 시간이 필요합니다. 얼마나 걸리지?"
카른의 물음에 흐릭은 짧게 답했다.
"2시간, 지금 이놈들 구더있다. 그뉵 이완 필수다."
나와는 눈도 잘 못 마주치면서 극존대를 하더니, 카른에게는 평대를 했다.
협력 관계라는 말이 틀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내가 카른에게 말했다.
"내일 아침, 수도의 서쪽에서 카몰군이 공격을 시작하면 2시간 뒤에 히베아군은 이곳 동쪽 문을 공격한다. 처음부터 흰 원숭이를 투입하도록. 그리고 수도 진입 시 카몰군은 수도방위병단과 황궁 경비대의 진압을, 히베아군은 수도 내의 귀족들의 안전 확보 및 치안 유지, 황궁 내에 억류되어 있는 귀족들의 확보를 맡는다."
카른이 잠시 생각하다 내게 질문했다.
"먼저 병력을 투입해 적의 전력을 소모시킨 다음 흰 원숭이를 투입하는 방안이 좋지 않겠습니까? 흰 원숭이가 강력한 전력이기는 하지만 수도의 방비는 두텁습니다. 공격 첫날에 모든 것을 쏟아붓는 것은 위험하다 생각합니다."
내가 고개를 저었다.
"포위로 인해 이미 저들의 사기는 많이 꺾여 있다. 우리에게 우호적인 귀족들의 병력이 합류를 시도하고 있다고는 하나, 그들보다 수도방위병단의 지원 부대가 먼저 도착할 것은 자명하니 단기간에 승부를 본다."
"하지만……."
아무래도 카른은 내가 못 미더운 모양이었다.
내가 힘주어 말했다.
카른이 아버지인 변경백을 존경하는 것을 알아채고 하는 말이었다.
"변경백께서 나를 신뢰하실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뭔가 더 의견 제시를 하려던 카른이 움찔했다.
흐릭은 내가 하는 말이 다 옳다는 듯 그저 고개만을 끄덕이고 있었다.
밖으로 나서며 내가 물었다.
"카른, 수도는 처음인가?"
"예, 저는 히베아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작위를 받게 되면 수도에 오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이렇게 오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하하하."
카른은 내 또래였지만 덩치가 크고 순박한 웃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카른에게 나는 말했다.
"안타깝군."
"무엇이 말입니까?"
"수도에는 아름다운 곳이 많거든."
"예?"
"자네가 처음으로 눈에 담는 수도의 모습이 불타고 무너져있을 거라 생각하니 참 안타까워."
내 말에 충격을 받은 듯 제자리에 멈춘 카른을 두고 나는 투브와 함께 히베아군 안에 마련된 검은 늑대 기사단의 숙영지로 돌아갔다.
***
"두려워하지 말고 화살을 날려라! 마법사들은 마나로 성문을 보호하는 데 집중해!"
성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함성을 배경으로 수도방위병단의 총사령관, 카멜 할이 크게 외쳤다.
"이곳은 수도다! 결코 함락되지 않는다! 놈들은 마지막 발악을 하고 있을 뿐이야! 다른 부대들이 우리를 지원하러 올 것이다! 그때까지만 버티면 된다!"
손수 성벽에 올라 병사들을 독려하는 카멜이었다.
몇몇 순수한 병사들은 그런 카멜에게 깊은 감동을 받았지만, 실상은 조금 달랐다.
'내가 이렇게까지 나섰는데, 모든 일이 진정된 후에 폐하께서 나를 무시할 수는 없겠지.'
몰락해 가는 남작 가문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나 등 떠밀리다시피 군에 입대한 카멜은 공명심과 출세 욕구가 어마어마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이미 리히트 공작이 죽어 7공작이라는 상징성은 무너졌고, 산탄다르, 에베의 공작은 군대를 일으켜 수도로 향하고 있는 상태. 그들의 명분은 황제의 눈을 멀게 한 불충한 자들의 처단이지만, 실상은 반역과 다르지 않다.'
카멜의 입가에 슬그머니 옅은 웃음이 걸렸다.
'그치들은 절대 수도의 성벽을 넘지 못한다. 계란으로 바위를 칠 뿐이야. 그들이 꺾이고 나면…… 내가 공작이 되겠지?'
남작의 아들인 자신이 공작이라니.
대영주가 된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카멜은 몸을 떨었다.
밖에서 달려드는 카몰군이 등불에 달려드는 나방같이 느껴졌다.
'얼마든지 달려들거라, 네놈들의 목숨을 양분 삼아 더욱더 크게 되어 주마.'
카멜은 이후로도 성벽 여러 곳을 둘러보았으나 어느 곳을 보나 뚫릴 위험은 없었다.
지휘소로 돌아온 카멜이 참모에게 물었다.
"노체군의 동향은 어떻게 되지? 카몰군이 서쪽 성문에 힘을 쏟고 있으니 공격하기 좋은 기회일 텐데."
"소극적인 움직임만 보인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노체군은 어제 그 가루가 전장에 살포된 이후로 큰 피해를 입었던지라 조심하는 것 같습니다."
카멜은 무언가를 말하려다 관두었다.
자신이 허용하지 않는 이상 누구도 수도 안쪽으로 들어올 수 없다.
노체군이 움직이지 않으면 자신의 공은 더 커지니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카몰 후작의 모습은 보인다더냐?"
"카몰군 어디에서도 후작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자신의 아버지, 어머니가 위협당하는 데도 미동 하나 없던 독종이다. 발견 즉시 우선적으로 사살하라."
옆의 참모들이 놀라서 물었다.
"생포가 아니라 사살입니까?"
카멜이 인상을 팍 쓰고 답했다.
"폐하 앞에서 검을 뽑은 역적이다! 위험성은 증명되었다. 생포해서 죗값을 치르게 하는 것보다 죽여서 후환을 없애라는 것이 폐하의 명이다."
참모들 역시 아래쪽에서 붉은 방패 기사단을 쓸어버리던 시안의 모습을 목격했던지라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동쪽 성문에서 통신 마법이 전파되었다.
"히베아군, 수도 동문(東門)으로 접근 중."
카멜이 낮게 읊조렸다.
"성동격서(聲東擊西)라…… 뻔하군. 아니지, 서쪽을 먼저 공격했으니 성서격동인가?"
자신감 넘치는 카멜의 말에 참모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그 웃음은 공포에 찬 통신 마법사의 말에 의해 사라졌다.
"정체불명의 동물이 동쪽 성벽 위로 기어오르는 중! 마법사 증원 요청!"
카멜은 참모들을 대동하고서 바로 동문으로 달려갔다.
성벽 위에서 내려다보는 동문은 아비규환이었다.
짐승의 포효가 성벽 너머에서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크아아아아아!
다섯 마리의 흰 원숭이 중 둘은 계속해서 성문을 때리고 있었고, 나머지 셋은 성벽을 기어오르고 있었다.
수도를 지켜야 하는 수도방위병단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던지라 흰 원숭이들의 몸 곳곳에 화살이 박혀 있고, 몇 군데는 마법으로 인해 만들어진 깊은 상처가 보였다.
"이, 이것들은 뭐냐! 죽여라! 절대 성벽을 넘게 하지 마라!"
성벽 위에서 흰 원숭이들을 향해 한층 더 강하게 마법이 폭사되었다.
마법이 적중할 때마다 흰 원숭이들은 성벽 아래로 피를 흩뿌렸다.
그 아래에 있던 히베아군의 흰 무장이 점차 붉게 물들었다.
그러나 이미 야만인들의 주술과 약물로 이성을 잃고 파괴 병기가 된 흰 원숭이들은 악착같이 위로 올라가려 애썼다.
"이런 걸 많이 데려오지는 못했을 것이다! 전력을 다해 막아라!"
카멜이 목이 터져라 외친 덕분인지 결국 흰 원숭이들을 성벽에서 떨어트리기는 했지만 위협은 끝이 아니었다.
전령이 다가와 카멜에게 말했다.
"마법사들이 말하기를, 갑자기 동문에 어떠한 마법도 걸리지 않는답니다!"
"그게 무슨 소리……!"
한 줄기 섬광이 카멜의 머릿속을 스쳤다.
'카몰 후작의 주위에서는 마법이 사라진다!'
그리고 동문에 설치된 통신 마법 중개소에 들어가 통신 마법사에게 외쳤다.
"지휘소에 전해! 여기 카몰 후작이 있다! 여유 병력을 모조리 이쪽으로 보내라고 해!"
통신 마법사가 상황 전파를 하자 수도 곳곳에서 대기하고 있던 수도방위병단 병력이 동문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카멜이 그들을 성벽으로 올려 보내면서 외쳤다.
"막아야 한다! 저들은 수도의 높은 성벽과 강철 같은 성문을 넘지 못한다!"
그때 모두의 공포심을 깨우는 소리가 성벽 앞에서 들려왔다.
아우우우우우-!
느닷없이 들려온 늑대의 울음소리에 모두 일시적으로 고개를 움츠러뜨렸다.
고개를 든 카멜의 눈에 들어온 것은 중심부터 시퍼렇게 녹이 슬어 가는 거대한 성문이었다.
쾅-!
아직 성문 앞에 남아 있던 흰 원숭이가 녹슨 성문을 힘차게 가격했다.
평소 같으면 꿈쩍도 하지 않았을 성문이 파르르 떨며 자신의 몸에 붙어 있는 녹을 사방으로 흩어 냈다.
성문과 성벽 안쪽에서 그것을 목격한 사람들 얼굴에 공포심이 번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