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과 독수리 (4)
콰앙-!
푸른 녹이 가득한 수도의 동문이 다시 한번 흔들렸다.
흰 원숭이 두 마리가 우악스러운 손으로 성문을 내리치고 있었다.
"계속!"
내가 크게 외쳤다.
흰 원숭이들 뒤에서 상태를 보고 있던 흐릭이 앞으로 나섰다.
그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흰 원숭이들의 몸에 치덕치덕 바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도 눈을 까뒤집고 알 수 없는 소리를 떠들어 댔다.
작전 시작 전에 카른이 내게 일러 준 것이 생각났다.
-흐릭이 눈을 까뒤집거든 병사들에게 일정 거리를 유지하라고 하셔야 합니다. 흰 원숭이들의 정신세계를 무의식으로 이끄는 겁니다. 고통도, 출혈도 잊고 앞에 있는 것의 파괴에만 집중하는 상태가 되어 버립니다.
"거리를 벌려라! 머리 위를 조심해!"
성문 앞에 있는 우리를 노리고 날아오는 화살과 마법은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었다.
갈수록 그 빈도와 강도가 강해지는 것이 성벽 위에 증원 병력이 도착한 것 같았다.
그때 날카롭게 귀를 긁는 소리가 들려왔다.
몸이 잔뜩 부풀어 오른 흰 원숭이들이 녹이 올라 벗겨지기 시작한 철문의 표면부를 잡아 뜯어내는 소리였다.
마치 그 성문 너머에 보물이라도 있는 양, 흰 원숭이들은 머리 위로 쏟아지는 마법과 화살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성문을 뜯어내는 데만 열중하고 있었다.
"역시 만만치가 않아. 나 때문에 성벽에 마법을 걸 수 없을 텐데도 저 정도라니."
-그냥 너랑 내가 넘어가는 건 어때? 안쪽에서 도와주면 훨씬 나을 것 같은데.
"할 수 있겠어?"
투브가 가볍게 몸을 털었다.
-처음이 어렵지. 근데 난 이미 한 번 해 봤잖아?
마침 흐릭이 다가와서 말했다.
"무니 열리지 안슴니다. 아네서 마꼬 인는 것 같슴미다. 원숭이 힘 없습니다."
"잠시 중지시켜."
"하지만 기어오르던 원숭이 셋 중 둘 주거씀미다. 지금 아니면 기회가 없슴미다."
"내가 성벽을 넘어가면 그때 다시 흰 원숭이들에게 성문을 때리라고 해."
"어떠케 넘어감니까, 시느 사자여?"
"보고 있어."
적의 공격 목표가 될까 봐 처음 성문을 녹슬게 할 때만 본 모습을 보여 주고 다시 작아져 있던 투브가 한순간에 몸을 키웠다.
내가 그 위에 올라타자 투브는 재빠르게 성문에서 멀어졌다.
역시나 투브는 눈에 띄는지라 곧바로 이쪽으로 공격이 집중되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 화살과 마법 들이 닿을 수도 없을 정도로 투브는 빠르게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한참을 뒤로 빠지던 녀석이 우뚝 멈춰 섰다.
-이만하면 충분하겠어. 원숭이 놈들, 그렇게 느리니 당연히 집중 포화를 맞지.
투브가 자세를 낮췄다.
나 역시 몸을 바짝 낮추고 투브의 등에 밀착했다.
녀석의 털이 곤두섰다.
투브의 몸 주위로 마나가 모여들고 있었다.
그대로 투브는 가속하기 시작했다.
성벽이 엄청난 속도로 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녀석은 도약했다.
히베아군의 머리를 넘어 성벽에 도달한 녀석이 가벼운 몸놀림으로 성벽을 밟고 다시 뛰었다.
지잉. 지잉.
투브가 밟은 성벽에서 마법진들이 발동되려다가 나 때문에 힘을 잃고 사라졌다.
그렇게 몇 번을 더 밟고 올라가자 어느새 성벽 위였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성벽 위에 있는 수도방위병단 병사들은 나를 보고 얼이 빠져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 수도 동문이 보였다.
"저기, 내려가자!"
그때쯤 정신을 차린 병사들이 무기를 들고 투브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나를 향해 화살이 비처럼 떨어졌다.
마법으로 밀어 내고, 마나 소드로 주위를 쳐 내면서 성문으로 나아갔다.
옆구리에 강한 통증이 느껴졌다.
"으윽!"
화살에 맞았나 해서 봤더니 화살은 없었다.
그러나 갑옷이 강한 충격을 받은 듯 우그러져 있었다.
공격은 계속해서 날아왔다.
황궁에서 나를 노렸던, 오러 화살을 쏘아 보내는 친위대 놈이 분명했다.
성벽 위의 한 망루에서 나와 투브를 향해 계속 공격을 하고 있었다.
-저 새끼가!
옆구리에 오러 화살을 몇 대 얻어맞은 투브가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냈다.
웬만한 날붙이로 몸을 찔러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투브인데, 이 오러 화살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참아! 목표는 저놈이 아니야!"
마나 소드로 날아오는 오러 화살을 쳐 내면서 내가 말했다.
-저놈은 기필코 내가 죽인다.
투브는 당장이라도 저 친위대에게 달려가고 싶어 했지만, 지금의 목표는 그가 아니었다.
투브는 자신에게 덤벼드는 병졸들을 무더기로 성벽 아래로 쓸어 내며 성문을 향해 나아갔다.
"막아라! 죽여!"
지휘관들이 목이 찢어져라 명령했지만 희망 사항은 희망 사항일 뿐, 우리의 전진은 거침이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성문 안쪽에 도착할 수 있었다.
흐릭이 내 지시를 잘 이행하고 있는 듯, 계속해서 성문이 쿵쿵거리는 소리와 함께 진동하고 있었다.
"좀 막아 줘."
투브에게 말하고 녀석의 등에서 내렸다.
투브가 내 뒤를 막아 주는 동안, 나는 성문으로 접근했다.
성문이라는 이름이 주는 투박한 느낌과는 다르게 수도의 성문은 그 위에 조각된 부조들로 인해 하나의 예술 작품 같았다.
지금은 그 위에 녹이 잔뜩 슬어서 마치 흉물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굳건히 성문을 가로지르고 있는 빗장 위에 손을 올렸다.
"휠 정도면 되겠지."
가슴에 새겨진 도깨비의 문장이 후끈거렸다.
마나들이 내 주위로 모여들었다가 종국에는 내 안으로 들어와 흘렀다.
그리고 그것들은 내 가슴으로, 손끝으로 향해 맹렬한 지옥의 불이 되었다.
빗장이 순식간에 새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제어장치와 연결되어 있는 부위에도 불을 지졌다.
적당히 되었다 싶을 때, 마법을 없애고 뒤로 물러섰다.
녹이 오른 채로 새빨갛게 달아오른 거대한 철문은 지옥의 관문 같기도 했다.
끼이이익-!
달아오른 빗장이 계속해서 가해지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휘어졌다.
나는 투브의 등에 올라타서 말했다.
"조금 더 안쪽으로!"
투브가 몸을 날리는 것과 동시에 시뻘건 성문이 앞으로 쓰러졌다.
키아아아아악-!
몸과 손에서 흐른 피가 하얀 몸을 붉게 적신 흰 원숭이 두 마리가 괴성을 지르며 성안으로 난입했다.
그 뒤로 역시나 흰 무장 곳곳이 붉게 물든 히베아군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서문까지 진격하라! 서문을 열고 카몰군을 수도 안으로 불러들여!"
내 외침과 동시에 주위에서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전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밀고 나가려는 자와 막으려는 자의 치열한 힘 싸움이었다.
"기사들은 나를 따라 황궁으로 간다!"
히베아군 소속 가문들의 기사들이 내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내 옆으로 붙은 기사 중 한 명의 이목구비가 눈에 익었다.
"카른? 사령관이 왜 여기에 있지?"
카른이 어색하게 웃고 내게 답했다.
"성문 앞에서 작전을 진두지휘하다 못해 단신으로 성벽을 넘으신 분이 제게 그런 말씀을 하실 자격이 되십니까? 하하하. 저도 북부인이자 히베아 남자인데 어찌 뒤에서 보고만 있겠습니까. 제가 뒤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면, 아버지께서 노하실 겁니다. 평생의 대부분을 직접 대장벽을 수호하는 데 바치신 분 아닙니까. 지휘는 참모들에게 맡겨 놨으니 괜찮을 겁니다. 카몰군과 통신 마법을 연결해 두기도 했습니다."
내가 자신을 꾸짖을 거라 생각했는지, 카른은 묻지도 않은 말을 주절주절 길게도 늘어놓았다.
"그리고 아직 멀쩡한 수도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많이 눈에 담아 둬야 하지 않겠습니까?"
카른의 마지막 말에 어이없는 웃음이 픽 새어 나왔다.
하지만 금세 진지한 얼굴을 하고 카른에게 말했다.
"지켜주지는 못하니 알아서 임무를 수행하도록."
뒤를 돌아보니 온통 하얀 히베아군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검은 무리가 보였다.
"그렇게 먼저 가시면 어떻게 합니까? 깜짝 놀랐지 뭡니까, 으하하하하."
검은 늑대 기사단을 이끌고 내게로 합류한 칼이 기세 좋게 웃으면서 말했다.
오델리아와 로하나스를 비롯한 다른 기사단원들도 완전무장을 한 채로 말에 올라 있었다.
"제가 넘으면 따라 넘어 올 줄 알았는데, 그렇게는 안 되나 보네요."
칼의 농담에 역시 가볍게 농담으로 응수했다.
그리고 내 주위에 모여 있는 검은 늑대 기사단과 히베아군의 기사들에게 외쳤다.
"황궁으로!"
***
"카몰 후작이 기사들을 대동하고 황궁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황제의 앞에 명멸이 한쪽 무릎을 꿇고 머리를 깊게 조아렸다.
황제는 말이 없었다.
그런 황제 뒤에 서 있던 구름이 명멸을 향해 말했다.
"후작을 죽이고 돌아오겠다 말하지 않았나?"
서릿발처럼 차갑고 날선 구름의 말에 명멸은 온몸이 굳었다.
황제가 입을 열었다.
"그만하라. 명멸의 판단을 믿는다. 황궁 내에서 대항하는 것이 옳다 생각했겠지. 너희들은 물러가 그를 맞이할 준비를 하라."
구름과 명멸이 황제에게 목례를 하고 사라졌다.
밖에서 누군가가 인기척을 냈다.
"폐하, 시종장이 알현을 청하옵니다."
"들라하라."
황실 시종장, 얄츠 이나타 백작이 종종걸음으로 황제를 향해 들어왔다.
"폐하, 동문이 뚫렸다 합니다. 서문이 버티고는 있으나 지원군이 올 때까지 버틸지는 알 수 없사옵니다. 어찌하오리까?"
"그리 되었는가……."
황제가 고개를 들어 아무것도 없는 천장을 바라봤다.
시종장이 용기를 내어 진언했다.
"폐하, 한 말씀만 올리겠사옵니다. 저들은 왕조를 뒤엎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공을 더 알아주길 원할 뿐이옵니다. 요구를 수용하시어 비텔스바흐가와 발터가 그리고 노체가의 일부를 처형하시는 것이 어떠한지……."
"시종장."
"여기 있나이다."
"시작은 그러하되 끝은 어디겠는가?"
시종장은 아무 말이 없었다.
황제의 말은 이어져 나갔다.
"제국의 중앙집권이 이어져 온 이유는 마법사들의 독점과 사병 소유의 제한에 있었노라. 한데 그것들이 귀족들의 손에 넘어간 지금 저들의 요구를 들어준다면, 무슨 수로 다시 그것들을 제국의 손으로 돌려놓겠는가 이 말이다. 그리고 저들은 요행으로 수도에 진입했을 뿐, 아직 짐의 군대가 무너진 것이 아니다. 수도방위병단과 짐을 지지하는 자들이 오고 있지 않은가. 짐은 항전할 것이니라. 그것이 선조들께서 지켜 오신 제국이라는 가치를 훼손하지 않는 길일 것이니……."
시종장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황실 경비대와 황실 마법사, 붉은 방패 기사단에 결사항전 하라는 명을 전달하겠나이다. 부디 약해지지 마소서."
시종장이 나가고, 황제는 자신의 보검을 뽑아 보았다.
자신의 앞에 나서는 자들을 이 검으로 직접 참할 생각이었다.
황제는 서비어의 핏줄이었기에 강했다.
그리고 동시에 서비어의 핏줄이었기에 강함을 통제받았다.
그것을 마음껏 펼쳐 볼 수 있을 것 같아 황제는 한편으로 설렘 비슷한 감정을 느끼기도 했다.
밖에서 다시 인기척이 들렸다.
"폐하, 공주마마께서 배알을 청하십니다."
"들라하라."
황제의 여동생인 엘리자벳 서비어가 들어섰다.
전대 황제가 살아 있을 때는 황제의 딸인 황녀였지만 현대 황제가 즉위한 이후에는 황제의 동생인 공주로 직위가 달라져 있었다.
이제 하나 남은 핏줄이기에 황제는 공주에게 마음이 갔다.
정확히 말하면 자신의 세력 없이 자신의 말에 순종했기에 더더욱 이용하기 좋았던 것이었다.
이 사태가 진정되면 황제는 엘리자벳을 유력 귀족에게 시집보낼 생각도 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오늘의 엘리자벳은 분위기가 달랐다.
황제가 앉아 있는 곳 앞까지 걸어온 엘리자벳이 입을 열었다.
"아이야, 종사(宗社)를 지킬 마음이 있느냐? 네게 힘을 주려한다."
자신이 알고 있는 엘리자벳의 목소리와는 전혀 다른 굵은 목소리에 황제는 등 줄기에 소름이 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