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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검사의 복수-165화 (165/180)

건곤일척 (1)

"아버지, 저희가 지금 이래도 되는 것인지……."

레이바 비텔스바흐가 자신의 아버지인 몰트 비텔스바흐에게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몰트 전(前) 궁정백은 아무 말도 없었다.

레이바가 다시 아버지를 채근했다.

"아버지! 뭐라도 말씀을 좀 해 주세요!"

"조용히 하거라!"

몰트 궁정백의 호통에 레이바는 곧 입을 다물었다.

황궁 한편에 있는 마구간 앞, 몰트와 레이바 부자(父子)를 비롯한 소수의 경비병들이 모두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그러나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 때문에 주위가 조용해지지는 않았다.

병장기가 마주치면서 내는 챙챙거리는 소리가 그들의 귀를 긁었고, 아련히 들려오는 함성이 마음을 파고들었다.

아버지의 일갈을 마주한 레이바는 입은 다물었지만 계속해서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경비대와 기사단의 희생으로 황궁 수호에는 간신히 성공하고 있다지만, 얼마나 사람이 부족하면 나와 아버지까지 이렇게 호위에 동원된단 말인가. 그것도 마구간 호위라니! 대체 무슨 생각인지?'

레이바가 눈을 흘끗 마구간 입구로 옮겼다.

황실 시종장이 문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비밀 통로를 통해 황제를 비롯한 황족들을 피신시켜 놓고 우리를 희생양으로 삼을 셈인 건가! 벌써 몇 시간이 지났는지, 원…….'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으니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레이바는 알 수가 없었다.

대충 눈치를 보아 하니 아버지인 몰트 궁정백도 정확한 사항은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아버지."

몰트 궁정백이 아들의 치근거림이 귀찮다는 듯이 눈만 내려 바라보았다.

레이바가 작게 소곤거렸다.

"우리라도 몸을 피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궁정백이 가볍게 비웃었다.

"어디로 말이냐?"

"아버지 정도 되시면 황궁에서 밖으로 나가는 비밀 통로 몇 개 정도는 알고 계시지 않으십니까?"

"내가 확인을 안 해 보았을 것 같으냐? 모두 막혔다."

"정말입니까? 어째서요!"

"이쪽에서 나갈 때는 비밀 통로지만 밖에서 들어올 때는 좋은 침투로 아니겠느냐. 아마 농성을 시작하기로 결정한 이후에 모두 막아 버린 것이겠지."

레이바는 잠시 사고가 정지해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이대로 죽는 길밖에 없는 것인가!'

그런 아들의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궁정백이 차분히 말을 이어 나갔다.

"이 난리가 난 것은 폐하께서 우리들을 받아 주셨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순간부터 우리는 폐하의 곁에서 떨어질 수가 없게 된 것이다."

레이바가 어금니를 꾹 물고 말했다.

"이제 와서 명분과 의리를 찾으시는 겁니까? 우리 가문이 어떤 가문입니까. 실리와 이익을 위해서 황실의 밑을 받치던 가문 아닙니까. '보잘 것 없는 영지를 가진 우리 가문이 살아남을 길은 황실의 신뢰와 빛나는 금뿐이다.'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 아니십니까. 두 번의 배신으로 신의는 가라앉았으며, 전쟁 통에 지원한답시고 금은 대부분 소진되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간당간당한 목숨밖에 없는데, 왜 이제 와서 그런……!"

궁정백이 멱살을 잡고 끌어당긴 탓에 레이바는 말을 끝까지 이어 나가지 못했다.

악귀처럼 일그러진 궁정백의 얼굴이 레이바의 눈에 들어왔다.

항상 온화하고 유들유들한 표정을 짓고 있던 아버지였다.

그러나 지금 아버지는 얼굴이 벌게진 채로 거친 호흡만을 내뿜고 있었다.

"나라고 모를 것 같으냐! 뚫린 입이라고 감히!"

궁정백이 아들의 멱살을 놓았다.

레이바는 처음 보는 아버지의 얼굴에 힘이 풀려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궁정백의 얼굴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러나 아직도 속으로는 분을 식히는지 어깨는 떨리고 있었다.

"기존의 것을 잃어버렸기에 더 악착같이 권력의 곁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황궁을 공격하는 다른 귀족들이 내세우는 것이 무엇이냐. 너와 나를 비롯한 몇몇 귀족들의 목 아니더냐. 밖으로 도망친다고 그 명분이 사라질 것 같으냐? 아마 평생 도망자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러나 저들도 차마 폐하는 건드리지 못한다. 우리를 보호해 주실 분은 폐하뿐이야. 설령 귀족 신분을 잃고 궁 안의 무지렁이로 내려앉을지언정, 살 길은 이것뿐이라는 말이다. 왜 눈앞의 작은 것만을 보고 있는 게냐, 레이바!"

한마디, 한마디 꾹꾹 눌러 뱉는 궁정백의 말이었다.

레이바는 일어서지 못했다.

실제로 카몰군, 히베아군을 비롯해서 수도로 향하는 반(反)황제파 귀족들의 명분은 역성혁명이 아니었다.

황제가 옳지 못한 판단을 했고, 그 이유는 곁에서 황제의 눈과 귀를 가리는 간신 때문이라는, 간신 처단이 명분이었다.

아마 저들이 말하는 대로 간신 처단이 이루어진다면 황권은 크게 추락할 것이 불 보듯 뻔했지만, 어쨌든 제국이라는 제도와 질서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황제는 여전히 존속할 가능성이 컸다.

그렇게 된다면 황제의 비호 아래 황제파 귀족들이 살아남을 가능성이 아주 조금이나마 있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폐하의 곁에서 우리의 쓰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레이바. 멍청하게 평생을 도망자 신세로 다니다가 죽을 궁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벼락처럼 내리치는 궁정백의 호통에 부끄러워진 레이바가 고개를 숙이며 일어나 아버지와 거리를 좀 두고 섰다.

보는 이가 별로 없었다고는 하지만 20대 중반이 넘은 자신이 이렇게 대외적으로 혼이 나고, 주저앉았다는 사실이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비슷한 나이인 카몰 후작은 대군을 이끌고 수없이 많은 공을 세우다 못해 수도까지 점령하려 하는데, 나는 이게 뭐란 말인가!'

레이바는 어린 시절 귀족원 연회에서 시안을 본 순간, 경외감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어린아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티가 나던 우아한 외모, 소국의 왕 이상의 권위와 힘을 가지는 공작가문의 적통, 어떤 것에도 흥미가 없다는 듯한 차가운 눈빛까지.

완벽했다.

이미 황실의 핏줄을 먼발치에서나마 본 적이 있던 레이바였지만, 시안을 처음 본 순간 서비어가문의 회색 머리칼보다 몬트라우가문의 찰랑이는 검은 머리칼이 훨씬 아름답다고 생각할 정도였으니까.

그래서 용기내서 시안의 앞에 나아갔지만 시안은 마치 벌레 보듯 레이바를 내려다보고 말했다.

-나가 봐.

아무리 공작가문의 장자라지만 레이바 역시 전통 있는 궁정백 가문의 적통이었기에 그렇게 무시하고 하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레이바가 자신의 죽음에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기에 차가운 태도를 보인 시안이었지만, 그것을 그때나 지금에나 레이바가 알 방법은 없었다.

부족한 것 하나 없이 자라온 궁정백 가문의 적통이 받은 첫 냉대였다.

냉대는 치욕과 분노가 되고, 그것들은 이내 열등감으로 변질되었다.

레이바의 가슴속에 자리 잡은 열등감은 시안의 소식이 하나씩 들려올 때마다 더욱 크기를 불려 나갔다.

기사단 모의 전투에서의 활약, 영지전 관리관, 후작 작위 책봉, 제국 동부 평정, 툴리앗 원정, 이민족과의 전투 등등 날이 갈수록 시안은 레이바가 쳐다볼 수도 없는 위치까지 올라섰다.

그래서 두 황자가 분열했을 때 레이바는 이것이 자신이 성장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보았다.

궁정백이 1황자와 2황자 사이를 가늠했을 때 레이바는 1황자 측으로 붙어야 한다고 적극적으로 발언했다.

이미 시안이 있는 2황자에서 자신이 빛날 길은 없다고 봤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이 모양 이 꼴이라니…….'

속에서 불이 끓을 노릇이었다.

그때 누군가 다가왔다.

"두 분,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지크프리트 발터였다.

궁정백이 나서기 전에 레이바가 먼저 나서서 정리를 했다.

"아냐, 날이 어두워 잠시 넘어졌을 뿐이야."

레이바의 변명에 지크프리트는 다 안 다는 듯 가볍게 웃었다.

'얼마나 칠칠치 못하면 오러까지 익혀 놓고 밤눈이 어두워 자빠지냐.'는 것이 지크프리트가 레이바를 향해 했던 생각이었고, '가만히 있으면 어디 구석 영지라도 받아서 적당히 살 수 있었을 것을 여성 중심으로 돌아가는 발터가문을 뒤집어보겠다고 나선 멍청이 녀석.'이 지크프리트를 보고 레이바가 한 생각이었다.

표면적으로는 운명 공동체였지만 실상은 서로가 서로를 깔보는 우스운 관계였다.

고개를 돌리던 지크프리트가 말했다.

"그런데 시종장이 보이지 않는군요."

그의 말에 비텔스바흐 부자의 눈이 마구간으로 향했다.

마구간의 문이 조금 열려 있고, 그 앞을 지키고 서 있던 시종장이 사라져 있었다.

당황한 궁정백이 다가가려는 찰나, 안에서 시종장이 나왔다.

밖으로 보이지 않게 천으로 둘러싼 무언가를 안아 든 채였다.

시종장은 빠르게 황궁 안쪽으로 달려 들어갔다.

그 짧은 순간 레이바는 천 바깥으로 나와 있는 회색의 머리칼과 얇은 손목을 보았다.

'공주마마? 안에는 황제 폐하만 계신 것이 아니었나?'

황급히 멀어져 가는 시종장을 궁정백이 불렀다.

"시종장! 폐하께서는……!"

서걱-. 콰앙-!

무언가를 베는 소리 그리고 무거운 것이 쓰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린 곳에는 무거운 마구간의 문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날카로운 것으로 잘린 듯 잘려져 나간 면마저 예리했다.

지크프리트가 어두운 마구간 안쪽을 바라보다가 놀라서 말을 절었다.

"저, 저것은……."

한 자루의 검이 공중에 떠 있었다.

마치 무형의 기운이 검을 잡고 있는 듯 검 주위에 아지랑이 같은 것이 일렁였다.

"마법인가?"

"마나의 움직임이 전혀 없어!"

주위에 서 있던 황실 마법사들이 놀라 제각기 외쳐 댔다.

마구간의 안쪽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그를 확인한 모든 이들이 바닥에 부복해 엎드렸다.

"폐하……!"

황제였다.

눈이 하얗게 변한 황제는 주위로 엄청난 압력을 흩뿌리고 있었다.

그러나 가장 놀라운 것은 그의 주위로 뻗어 나온 형상화된 오러였다.

다 해서 4개의 오러 줄기가 황제의 몸에서 뻗어 나와 각자 검 하나씩을 잡고 있었다.

날이 어두워졌는데도 불구하고 각각의 검들은 찬란한 빛을 흩뿌렸다.

'무기를 통해서 오러를 한 점에 모으는 것도 극에 달한 경지일진데, 저렇게 오러를 형상화해서 물리적으로 움직이다니……. 폐하께서는 대체 무슨 일을 겪으셨단 말인가…….'

압도적인 황제의 모습에 말을 못 하던 궁정백은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떠오른 결론이 있었다.

'살았다!'

제국이 어떻게 세를 넓혀 갔는가, 압도적인 무력을 소유한 초대 황제의 이름에 기댔기에 가능하지 않았던가.

지금 눈앞에 있는 황제는 이미 인간의 경지를 아득하게 넘어 선 것이 분명했다.

서 있는 모습만으로도 천신(天神)이라 할 만했다.

저 모습을 부인할 귀족은 없을 것이라 궁정백은 믿었다.

때마침 황제가 입을 열었다.

"가자, 제국의 법도를 흩트리려는 자들을 벌할 시간이로다."

황제의 발걸음이 멀어졌다.

그러나 마치 절대적인 공포를 마주한 것처럼 바닥에 엎드려 있던 사람들은 쉽사리 일어나지 못했다.

신을 마주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

"수도 밖의 통신입니다. 노체군과 루지온군이 공격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수도방위병단도 속속들이 도착하고 있다고 합니다."

로하나스의 말에 내가 퉁명스레 말했다.

"좋은 소식은 없는 거야?"

"에베군과 카몰 예비대가 거의 다 도달했다고 합니다. 일주일 안쪽으로 제뉴인군과 산탄다르군도 합류가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심문장에 있던 분들을 무사히 탈환한 것도 큰 성과이지 않습니까."

"느려, 황궁에 진입한 지 3일째야. 더 늦으면 황제 확보가 어려워져."

변경백 삼 남매를 비롯해 아버지와 어머니를 무사히 확보한 것은 큰 수확이었다.

오랜 기간 좁은 곳에 있느라 몸이 약해져 있긴 했지만 모두 건강에 큰 이상이 있지는 않았다.

문제는 황궁을 점령하는 것이 지지부진하다는 것이었다.

온갖 방비가 최대한도까지 올라가 있는지 하루 종일 전진해도 건물 하나를 넘어서기 힘들었다.

지형의 이점을 이용해 공격해 오는 황궁 경비대와 붉은 방패 기사단은 더욱 아군을 괴롭게 했다.

간간히 등장하는 황제의 친위대 놈들은 순식간에 아군 병사를 수십 명씩 황천으로 보내곤 했다.

그래서 내가 나서면 또 곧바로 사라져 버리니 속이 여간 쓰린 것이 아니었다.

성 내부의 수도방위병단도 지하 하수도로 숨어들어 유격전형태로 아군을 괴롭히고 있었다.

수도 밖에서 베이카 장군이 황제파의 진입을 잘 막아 주고 있기에 망정이지, 아주 위태한 상태였다.

"생각 이상으로 느려. 역시 나랑 투브만 들어가서 뒤지고 다니는 수밖에 없나?"

-혼자 가! 혼자! 나는 아라크네의 지식을 소화하기도 바쁘단 말이야!

투브에게 뭐라고 하려던 찰나에 전령 하나가 내 앞으로 와서 한쪽 무릎을 꿇고 말했다.

"심문장 근처에 있던 병력이 공격당하고 있다고 합니다!"

"공격?"

황군은 최대한도로 방어적인 행태를 보였다.

이제 와서 공격이라니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황궁 안으로 진입한 수도방위병단인가? 어차피 조금 상대하다 보면 하수도로 사라질 놈들이야. 피해를 최소화하는 선에서 적당히 상대하라고 해."

전령이 머뭇거리다 말했다.

"적 병력을 이끄는 것이…… 황제 폐하 같다고 합니다."

말을 듣자마자 나는 투브의 목덜미를 잡고 밖으로 나섰다.

가장 중요한 기물이 앞으로 나섰다.

낚아챌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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