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곤일척 (2)
"오델리아!"
로하나스가 목이 찢어져라 오델리아를 불렀다.
약 30여 보 앞에 오델리아가 서 있었다.
마구 들이치는 검격과 마법 때문에 웬만한 기사들은 전진이 힘든 상황이었다.
그러나 뿌리를 내린 것처럼 오델리아는 제자리에 서 있었다.
무시무시한 길이의 대검을 늘어트린 채로 그녀는 멈춰 있었다.
반 정도가 날아가 버린 투구에서 삐져나온 머리칼이 마구 휘날리고, 역시나 깨져서 형제를 알아볼 수 없게 된 한쪽 어깨 보호대 아래에서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자신의 앞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눈에 담겠다는 듯, 한 치의 움직임도 없었다.
"단장님! 오델리아를 구해야 합니다!"
역시나 연이은 전투로 갑옷에 성한 곳이 없는 칼에게 로하나스가 부르짖었다.
로하나스가 고삐를 잡고 있는 오델리아의 말, 질풍이 계속 주인에게 다가가고 싶다는 듯이 코로 거센 숨을 내뿜고, 발로 땅을 박찼다.
그러나 그것은 강력한 희망 사항일 뿐, 자연재해와 같은 이 상황은 아무리 질풍이라도 순식간에 몸이 찢겨 죽을 것이 분명했다.
몰아치는 바람에 서로의 의사소통도 잘되지 않을 지경이었기에 칼이 목소리를 높였다.
"구해? 저걸 무슨 수로 구해? 오델리아가 당장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기적이야! 그리고 설령 구할 수 있다고 해도 그걸 오델리아가 원할 것 같아?"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칼이 인상을 잔뜩 쓰고 대답했다.
"오델리아가 왜 검은 늑대 기사단에 있다고 생각하나?"
"후작 각하와 승부를 가리고 싶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칼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일부야. 강함에 대한 동경, 궁극의 무(武)에 대한 추구. 이런 것들이 오델리아가 기사단에 머무는 근본적인 이유야. 제국을 통틀어 우리만큼 다양한 상대와 다양한 전투를 벌인 집단은 드물어. 오델리아는 그런 단계를 거치며 스스로를 단련해 왔던 거야. 그리고……."
칼이 몰아치는 바람에 힘겨워하며 고개를 들어 앞을 보았다.
검과 검이 부딪치는 것이라고는 상상하기 힘든 굉음과 섬광이 잠시도 쉬지 않고 터져 나오고 있었다.
한 줄기 빛이 하늘과 땅을 갈랐다.
콰드드득-!
아마도 황궁에서 수백 년을 보냈을 고목 하나가 잘려서 허공을 날았다.
그리고 이미 폐허에 가깝게 변해 있는 건물 하나에 처박혔다.
고목과 폐허가 뒤섞이며 폐부를 휘젓는 듯한 굉음이 터져 나왔지만, 이내 황제와 시안이 맞붙는 소음에 잡아먹혀 버렸다.
성인 대여섯이 붙어서 둥치를 감아 안아도 다 안을 수 없을 만큼 우람한 나무가 검격 한 번에 그대로 잘려 나가는 것을 보고 기사 몇의 표정이 새하얗게 질렸다.
칼이 거리를 더욱 벌리라는 명을 주위에 내렸다.
반대편에서 얼핏 보이던 붉은 갑옷의 기사들도 한층 더 물러나는 것이 보였다.
칼이 아까의 말을 이어 갔다.
"오델리아는 자신이 추구하는 길의 끝에 먼저 도달한 사람들을 누구보다도 가까이서 목격하고 있는 거야. 더 성장할 수도 있고, 거대한 벽에 가로막혀 포기할 수도 있겠지. 그러니 가만 놔둬. 어차피 접근할 수도…… 어이쿠!"
제법 진지하게 로하나스에게 논지를 설파하던 칼이 급히 몸을 옆으로 피했다.
콰아앙-!
무언가 날아와 조금 전까지 칼이 서 있던 자리를 직격했다.
뒤에 있던 황궁의 담장이 그대로 무너졌고, 담장에 걸려 있던 방어 마법진 해제를 시도하던 카몰군과 히베아군 마법사들이 먼지를 그대로 뒤집어썼다.
"오델리아!"
로하나스가 먼지와 파편을 헤치고 들어갔다.
"위험합니다! 아직 마법진 해제가 완료되지 않았습니다!"
주위의 마법사들이 로하나스를 만류했으나 로하나스는 거침없이 잔해들을 뒤로 밀어냈다.
"오델리아! 괜찮습니까! 오델리아!"
잔해의 한 부분이 먼지를 가득 일으키며 무너져 내렸다.
엉망이 된 오델리아가 일어섰다.
"조용히 좀 해, 애송이. 머리 울린다."
오델리아가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러곤 다른 쪽 담장에 박혀 있는 대검을 빼냈다.
마법사들이 오델리아와 대검 주위에 달라붙어 혹시라도 마법의 영향이 있을까 확인했다.
로하나스가 오델리아를 향해 버럭 소리 질렀다.
"어쩌자고 저 앞에 서 계셨던 겁니까! 접근하려다 몸이 그대로 갈려 나간 사람이 한둘이 아닌 걸 직접 보고도 그렇게 하셔야 했습니까!"
대검에 상한 부분이 있을까 확인하고 있던 오델리아가 망가져 버린 투구를 벗어던졌다.
금빛 머리칼이 바람에 나부꼈다.
드러난 오델리아의 맨 얼굴을 보고 있던 로하나스는 왠지 모를 부끄러움을 느껴 시선을 피했다.
오델리아가 평소의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평생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기회인데, 내 눈으로 직접 담아 둬야지. 닥쳐오는 위험이 무서워 피하면 그것은 필부이지 기사가 아니야."
"하지만……!"
당신을 걱정하는 사람도 있다는 말을 로하나스는 꺼내지 못했다.
어느새 다가온 칼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사히 돌아온 걸 다행으로 여기자고. 이 녀석도 주인을 잃지 않아서 기뻐하는 것 같으니 말이야."
질풍이 오델리아의 뺨에 자신의 얼굴을 비볐다.
칼이 오델리아에게 물었다.
"오델리아 탈린카, 무엇을 보았지?"
잠시 말이 없던 오델리아가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두 명의 사람과 하나의 짐승을 봤습니다. 그들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제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었습니다. 파괴적이지만 고고했습니다. 당장이라도 그들의 가무에 뛰어들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하는 제가 너무 분했습니다."
"그런 경지를 목도하게 되니 포기하고 싶던가?"
오델리아의 눈이 빛났다.
"더욱 나아가고 싶습니다. 아직 끝이 아니라는 것에 환희가 느껴집니다."
칼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고 로하나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로하나스 이반, 무엇을 보았지?"
무의식적으로 '오델리아의 뒷모습…….'이라는 말이 로하나스의 입에서 나올 뻔했지만, 초인적인 상황 판단으로 로하나스는 그런 참사를 막아 냈다.
"당장은 붉은 방패 기사단이 물러났지만 언제라도 돌입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특히 아무것도 시위에 매지 않은 채로 활을 날리는 자와 온몸을 붕대로 칭칭 감은 자, 이 둘은 기사단원이 아닌 것 같지만 계속해서 각하와 황제 폐하 사이에 난입할 틈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저희도 대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잘 보았군."
한 명은 자신의 경지를 더 높이기 위한 길을 보았고, 다른 한 명은 전체적인 현황과 그에 따른 대비의 길을 보았다.
칼은 만족스러웠다.
검은 늑대 기사단의 초대 단장으로서 앞으로 이 기사단은 걱정이 없겠구나 싶었다.
그러나 아직 단장은 칼 자신이었다.
이 전장에 서 있는 이상 기사라는 자신의 업(業)에, 칼 모예드라는 자신의 이름에 부끄럽고 싶지 않았다.
칼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인간의 범주를 넘어선 자들끼리의 격돌로 아름답고 찬란했던 황실 곳곳이 폐허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굉음과 섬광이 빗발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러를 극한으로 운용해도 황제와 시안, 투브의 속도를 따라잡기 힘들었다.
마음을 단단히 먹은 칼이 주위에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오델리아, 임시 막사로 가서 여분의 갑옷으로 갈아입고 오도록. 그 꼴로 싸우는 건 용납할 수 없어. 다른 기사들은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로 적의 공격에 대비한다! 특히 붉은 방패 기사단의 움직임을 주시하라!"
로하나스가 돌아서려 할 때, 칼이 그의 어깨를 잡았다.
"로하나스, 성 밖으로 나가서 밖의 상황을 알아오도록."
양측의 마법사들과 시안이 온갖 마법을 퍼부어 대고 있어 통신 마법에 혼선이 빚어지고 있었다.
그에 따라 쉴 새 없이 말을 탄 전령들이 오가고 있는 중이었다.
로하나스가 되물었다.
"다른 전령도 있는데 왜 제가……."
칼이 답했다.
"카몰 예비대가 도달할 예정 시간이 머지않았어. 그들은 이곳 지리에 익숙하지 않아. 예비대에게는 반오러 물질이 있고, 성 밖의 지정된 위치에서 반오러 물질을 쏘아 올려야 해. 그들의 유도를 맡아."
로하나스가 밝아진 얼굴로 말했다.
"예비대라면……."
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 전황을 압도적으로 유리하게 가져갈 수 있을 거야."
재빠르게 로하나스가 숨결의 등에 올랐다.
출발하려는 찰나, 칼이 다시 로하나스를 불렀다.
"아! 로하나스!"
"예!"
"아까처럼 뒤에서 바라만 보고 있으면 되던 일도 안 된다. 적극적인 남자가 되라고!"
무슨 소리인가 잠깐 고민하던 로하나스가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 수도의 밖을 향해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
검막(劍幕)이었다.
다섯 개의 검이 단 한순간도 쉬지 않고 여러 폭의 비단결을 만들어 냈다.
황홀할 정도로 잘 짜인 비단이었지만 냉엄한 살기가 그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검의 움직임이 그려 내는 우아함에 잠시 눈을 두었을 찰나.
파짓-!
미처 느끼지 못한 사이에 검 하나가 얇게 뺨을 베고 지나갔다.
재빠르게 몸을 빼려는데 계속해서 다른 검들이 내가 딛을 곳을 점하고 몸의 중심을 흩트리는 공격을 해 왔다.
수십 번의 공격을 막아 내고서야 간신히 숨을 고를 수 있었다.
목 너머에서 비릿한 피 냄새가 올라왔다.
마나 소드를 만들어 내고, 마법을 퍼붓느라 양손 모두 감각이 없었다.
그저 내가 살기 위해 앞에 있는 자를 죽이는 병기가 된 것 같았다.
빠른 속도로 몸이 원 상태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들어올 땐 흔들렸던 숨이 나갈 때는 강건해져 나갔다.
고개를 들었다.
소매와 가슴, 다리 등 곳곳이 찢어진 옷을 입고 있는 황제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주위에 꼿꼿이 떠 있는 4개의 검과 그가 손에 들고 있는 1개의 검, 모두 5개의 검이 당장이라도 나를 베어 버릴 듯 나에게 향해 있었다.
황제가 입을 열었다.
"짐의 선조를 만났다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몸을 안정시키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리고 몇 시간을 맞붙어 싸우면서 나는 확신했다.
'이길 수 있다.'
내 이런 생각을 아는지 황제는 말을 이어 갔다.
"짐도 그분을 만났다. 오랜 세월 봉인되어 있던 가문의 비전과 그분의 깨달음을 전수받았지. 왜 짐에게 그리하신 줄 짐작하겠느냐?"
온통 하얗게 변해 초점이 없는 것 같은 황제의 눈이 나를 향했다.
"제국이 무너지는 것을 원치 않으셨기 때문이다. 카몰 후 그대는 악(惡)이다. 제국을 뒤흔드는 악!"
황제의 말이 끝나기 전 투브가 앞발을 휘둘러 황제를 향해 마나를 날렸다.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은 채로 황제는 주위의 검을 움직여 어렵지 않게 투브의 공격을 쳐 냈다.
"미물의 재주치고는 가상하다."
그 소리에 투브가 달려들었지만 황제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은 채로 주위의 검만 움직여 투브의 모든 공격을 받아 쳐 냈다.
그 틈을 타 내가 황제 주위에 있는 검을 얼리려 시도했다.
콰드득 소리를 내며 검이 얼어붙나 싶더니, 이내 검에서 짙은 오러가 뿜어져 나와 얼음을 흩어 냈다.
당황하지 않고 땅을 박찼다.
저 검들은 황제의 몸에서 뻗어 나온 오러 가지에 연결되어 있었다.
잠시나마 달라진 검의 무게에 황제의 오러 운용이 흐트러졌길…….
수십 번의 참격과 수십 번의 마법이 황제를 향해 떨어졌다.
나와 황제가 입고 있던 갑옷과 옷은 넝마에 가깝게 변해 버린 지 오래였다.
그러나 황제의 검들은 여전히 황제를 수호하고 있었다.
황제가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감히 황제의 몸에 손을 댄 것도 크나큰 불경일진대, 이리도 무례하다니."
"권력이라는 허망함이 그리도 놓기 힘든 것입니까, 폐하. 어찌 이리도 힘든 길을 택하셨나이까."
"그 입 다물라!"
황제의 몸에서 엄청난 양의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맞서려면 맞설 수도 있었겠지만, 괜한 체력 소모를 막기 위해 몸을 뒤로 물렸다.
-위! 그놈이다!
강대한 기운이 나를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황제는 여전히 나와 대치하던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나 나를 향해 접근하는 기운은 황제보다도 강맹하고 엄청났다.
나는 다시 한번 몸을 피해야 했다.
콰아아앙-!
굉음과 함께 먼지가 자욱이 피어났다.
먼지 너머로 여리여리한 음영이 보였다.
"짐에게 그런 모욕을 주고 도망가다니, 이 자리에서 죽여 주마."
공주의 몸에 잠든 초대 황제였다.
다만 몸 곳곳을 싸맨 붕대엔 핏자국이 역력하고, 얼굴에 핏기가 하나도 없는 것으로 보아 정상적인 상태는 아닌 것 같았다.
'하나라면 모를까, 둘이라니…….'
-그러게 빨리빨리 처리했어야지!
'내가 놀았냐! 죽어라고 싸웠잖아!'
2 대 1이 되어 버려 당황하고 있던 찰나, 무언가 쏘아 올려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피유우-! 피유우-!
수도 밖에서 쏘아 올려진 그것은 내가 수없이 보아 왔던 그것, 반오러 물질이었다.
반짝이는 반오러 물질이 바람을 타고 수도 안쪽으로, 황궁 안쪽으로 날아오기 시작했다.
한 손에 마나 소드를 만들어 내고, 다른 손에 마법진을 그려 냈다.
"두 분 황제 폐하, 제 승리가 가까웠나이다. 부디 괘념치 마소서."
두 명의 황제와 나 그리고 투브가 얽혀 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