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곤일척 (3)
우지끈하는 소리를 내며 황궁의 전각이 또 하나 옆으로 넘어갔다.
전각의 기둥 하나를 부숴서 붕괴의 원인을 제공한 내가 착지하자 투브가 옆으로 붙었다.
-두 놈 다 아직 큰 타격은 없어 보이네.
투브의 말처럼 건물의 잔해 뒤에 황제와 공주의 모습이 보였다.
"더 이상 들어가는 건 위험해."
두 명과 맞붙느라 어느새 황궁의 안쪽까지 발을 들인 참이었다.
카몰군과 히베아군은 황군의 격렬한 저지와 여러 마법진으로 인해 내 곁으로 따라 들어오지 못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붉은 방패 기사단도 주위를 맴돌 뿐 접근하려는 기색은 없었다.
투브가 자신의 발 앞에 있던 붉은 방패 기사단의 시체를 옆으로 밀어 치웠다.
그걸 본 기사들이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목숨들은 아까운 모양이야. 그래, 어디 인간 따위가 이 몸에게…….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반짝이는 반오러 물질이 황궁에 내려앉기 직전이었다.
"참 대단한 걸 가져왔군."
황제의 목소리였다.
초대 황제든, 현 황제든 둘 다 막대한 힘을 발휘하는 것은 오러의 힘에 크게 의지했다.
'반오러 물질이 저들의 몸 안에 들어가 효력을 발휘하는 순간, 그때까지만 버티면 된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초대 황제가 입을 열었다.
"황제라는 자리는 암살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는 자리이지. 그중 가장 많이 시도된 것은 독을 이용하는 방법일 테고."
초대 황제가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말을 이어 나갔다.
"공기에 녹아드는 독을 시도하는 자가 단 하나도 없었을 것 같은가? 그에 대한 대비도 안 되어 있을 것 같고? 만일 그리 생각했다면 제국을 우습게 본 것이야."
이번에는 현 황제가 말을 받았다.
"카몰 후, 그대의 이름은 역사에 남기리라. 제국과 황실에 대항하면 어찌되는지에 대한 반면교사로 말이다."
"이 지경까지 왔는데도 그런 말을 하십니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어서 비텔스바흐 부자와 지크프리트 발터, 이르한 노체의 목숨을 제게……."
황제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그리고 그는 내 말을 끊었다.
"그대 주위에서 마법이 사라진다 한들, 그 범위가 황궁 전체를 뒤덮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노라."
"그게 무슨!"
"하찮은 가루 따위로 짐을 이기려 했다면 큰 오산이로다. 준비가 끝난 것 같구나."
그 순간 거대한 마나의 흐름이 머리 위를 뒤덮었다.
황궁의 건물들 위에 수십 개의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마법진이 빛을 발하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엄청난 바람이 불어 닥쳤다.
바람은 황궁 곳곳을 누비더니 이내 다시 위로 치솟아 마법진을 향했다.
황궁에 내려앉으려던 반오러 물질이 거센 바람을 타고 황궁 밖으로 빠져나갔다.
마법진 안팎으로 공기가 순환하며 반오러 물질을 황궁 밖으로 보내는 것 같았다.
"결국 저 물질은 공기를 타고 사람의 호흡기 내로 침투해야 작동하는 것 같더군. 이리 닿지 않으면 무용지물이 아닌가. 황실 마법사들이 마법진을 구성하는 동안 그대를 묶어 두었지. 그대의 얕은 수는 파훼당했노라. 그대에게 남은 것은 죽음……."
화륵.
황제의 말이 끝나기 전, 불덩이를 만들어 두 명의 황제를 향해 던져두고 주위 건물들을 밟고 오르기 시작했다.
투브가 있다고는 하지만 저 두 명을 동시에 상대하는 것은 힘에 부치는 일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저들에게 반오러 물질이 닿게 해야 했다.
'크기가 거대하다고는 하지만 어차피 마법! 내가 가까이 가면 사라진다!'
건물의 위로 올라간 다음, 투브가 하는 것처럼 마나로 발판을 만들어 마법진에 도달할 셈이었다.
비행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면 편했겠지만, 그것은 내가 이해하기에는 어려운 마법이었다.
그러나 내 의도는 얼마 가지 않아 가로막혔다.
피융.
오러 화살이 날아와 내가 밟으려던 곳을 부쉈다.
친위대 놈이 분명했다.
당장이라도 저놈을 죽이고 싶지만 거리가 너무 멀었다.
몸을 틀어 균형을 잡는 순간, 옆에서 초대 황제가 달려들었다.
"내 손으로 인재를 죽이게 되어 아쉽노라."
섬뜩한 소리를 내뱉으며 초대 황제는 계속해서 내 목숨을 노렸다.
투브가 도와주려는 듯 움직였으나 현 황제가 움직이는 다섯 개의 칼에 가로막혀 다가오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만들어 낸 방패 형태의 마나 소드 위로 초대 황제의 일격이 떨어졌다.
콰아앙-!
팔이 떨어져 나가는 듯한 고통이었다.
초대 황제의 공격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반격을 생각할 틈조차 없었다.
정신이 멀어지지 않게 단단히 붙잡고 있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갑자기 공격이 멈추었다.
나는 거친 숨을 쏟아 냈다.
"허억…… 허억…… 하얀 눈의 무신……. 과연……."
괴물 같다는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경지였다.
오러로 움직이는 4개의 검을 포함해 총 5개의 검을 휘두르는 현 황제보다 오로지 검 하나만을 쓰는 초대 황제의 공격이 더욱 매섭고 강력했다.
조금만 더 몰렸으면 정말 죽을 수도 있는 위기였다.
'그런데 어째서?'
간신히 숨을 조금 돌리고 초대 황제를 바라봤다.
"푸헉!"
초대 황제는 몸을 웅크린 채로 피를 쏟아 내고 있었다.
전투 중이라 인지하지 못했는데, 초대 황제가 깃들어 있는 공주의 몸에는 붕대가 둘둘 감겨 있었고, 처음에는 분명 하얀 색이었을 붕대가 이제는 온통 붉게 물들어 있었다.
초대 황제가 입가를 닦으며 몸을 바로 일으켰다.
완전히 닦이지 않고 닦은 방향으로 남아 있는 핏자국이 음산했다.
"이 아이의 몸이 한계에 달했나 보군. 후손의 몸을 이리도 망가트리다니, 짐은 좋은 선조는 못 되나 보구나. 슬슬 끝내주마."
초대 황제가 검을 들어 올렸다.
'움직여! 움직여!'
팔은 고통으로 뒤틀릴 것 같았으며, 다리는 당장 찢겨 나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정신적인 피로감으로 정신이 꺼질 듯 말 듯했다.
3분, 아니 1분이라도 쉬었다면 이 정도는 아닐 텐데, 두 명의 괴물과 맞서면서 너무 많은 체력을 소모했음이 분명했다.
내 눈은 초대 황제가 들고 있는 검을 명확하게 보고 있었다.
시간이 느려진 것처럼 검이 천천히 나를 향해 떨어지기 시작했다.
모든 감각이 열리고 위기감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심장이 쿵쿵대며 전신으로 피를 보내고, 오러와 마나가 몸 안팎을 왕복하며 내 몸을 최적의 상태로 만들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짧은 시간에 극한으로 몰아붙여진 내 신체는 움직일 줄을 몰랐다.
-시안!
투브의 외침이 머릿속에 쩌렁쩌렁 울렸다.
그 순간 황제의 검 끝이 기묘하게 뒤틀렸다.
황제의 검은 내 머리가 아닌 옆을 향해 뻗었다.
기이한 파공성과 함께 날카롭게 벼려진 오러의 날이 황제의 검이 멈춘 곳에서 뻗어 나갔다.
'어째서지?'
잠시 의문이 들었지만 어찌 되었든 기회였다.
회복하는 데 온 정신을 쏟았다.
초대 황제가 매우 불편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신이 오러를 날려 보낸 쪽이었다.
"누구냐."
누군가 파편들을 피해 이쪽으로 접근하는 것이 느껴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칼이나 오델리아도 이쪽으로 접근하지 못했다.
지금 다가오는 자는 보통의 실력자가 아니라는 소리였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를 듣고 나는 빙그레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분명 여성의 몸인데 남성의 목소리라……. 제법 오래 살아 와서 많은 진귀한 것들을 보았지만, 이런 것은 또 처음이군요."
"누구냐고 물었다!"
난입한 남자가 어느새 다가와서 나와 초대 황제 사이를 막아섰다.
부드럽고 빠른 움직임이었다.
"오랜만에 뵙는데 이렇게 어수선하니 참 가슴이 아픕니다, 도련님."
"조금만 늦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
"상태가 좋아 보이시지는 않는군요. 회복에 얼마나 걸리실 것 같습니까?"
"1분."
"그 정도면 이 아가씨를 제압하기에 충분할 것 같습니다."
너무나 쉽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옅은 웃음이 피식하고 새어 나왔다.
그걸 보고 있던 초대 황제가 노성을 터트렸다.
"이놈들이 감히 짐 앞에서!"
낮고 짧은 파공성이 터져 나왔다.
초대 황제, 정확히 말하면 공주의 회색 머리카락 몇 가닥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알버트가 말했다.
"누구냐고 물으셨지요?"
알버트가 아직도 공주의 머리카락이 몇 가닥 붙어 있는 검을 들어 올렸다.
잘 벼려진 히베아제 강철 검이었다.
초대 황제와 현 황제가 들고 있는 보검에 비하면 수수했지만, 알버트의 손에 잡힌 이상 그것은 세상 어떤 검보다 강력할 것이 분명했다.
검에 붙어 있던 머리카락은 바람에 흩날려 날아가 버렸다.
초대 황제도 심상치 않았는지 검을 들어 올려 방어 자세를 취했다.
"그저 종자일 뿐입니다."
알버트가 초대 황제를 향해 파죽지세로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
"왜! 어째서 황궁으로 진입하지 말라는 건데! 하수도에 숨어 있는 수도방위병단 소탕도 마무리 됐다며!"
산탄다르 공작, 그레이스가 히베아군 사령관, 카른 이나타에게 쏘아붙였다.
카른은 자신보다 신분이 높은 그레이스의 압박에 대처하기가 여간 곤란한 것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했다.
"황궁 근처에서 다수의 마법진이 발동된 것이 확인되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일단은 이 반짝거리는 물질의 유입을 막기 위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분석이 끝날 때까지는 황궁 진입은 안 됩니다!"
"안에 있는 사람들은 어쩌고!"
그레이스의 지적에 카른의 얼굴이 불편한 듯 일그러졌다.
그렇지 않아도 카른은 황궁 안에 남겨 놓고 나온 히베아군의 생사 여부가 신경 쓰여 미칠 지경이었다.
카른은 황궁 내에 억류되어 있던 사람들을 구출한 후, 수도 밖으로 나가 몰려드는 수도방위병단과 황제파 귀족들의 공격을 막고 있었다.
예정보다 훨씬 일찍 도착한 산탄다르군 덕에 공세는 어렵지 않게 막아 냈다.
기쁨도 잠시 황궁에서 대규모의 마법진이 발동된 후 카른의 마음은 온통 황궁 내부에 가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산탄다르 공."
시안의 아버지이자 제뉴인 공작인 제로 몬트라우였다.
그 역시 카른에 의해 구출된 후 수도 밖 중앙 지휘소에 머무는 중이었다.
"황궁 안에는 시안이 있지 않소."
"시안이 걱정……!"
그레이스는 말을 하려다 얼른 입을 다물었다.
그런 그레이스를 보고 있던 제뉴인 공작이 빙긋 웃고 말했다.
"시안은 내 아들이지만 이미 내가 헤아릴 수 있는 그릇을 넘어섰소. 나는 시안이 잘 해내리라 믿소이다. 우리가 할 일은 시안이 방해받지 않게 해 주는 것이라오."
잠시 머뭇거리던 그레이스가 체념한 듯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때 중앙 지휘소로 거대한 체구의 남자가 들어왔다.
카른이 가장 먼저 반응했다.
"아버지! 갇혀 계시다가 나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쉬셔야 합니다!"
"다들 죽어라고 뛰어다니는데, 내가 놀고 있을 수는 없지. 제뉴인 공께서도 이리 나와 계시지 않느냐!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 오는 길이다."
변경백이 자리를 잡고 앉자 제뉴인 공작이 물었다.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산탄다르군이 합류했으나 수는 열세입니다. 수도방위병단의 재배치가 거의 완료되었다 합니다. 저희는 수도를 감싸고, 황군은 다시 저희를 감싸는 형태입니다."
"내 휘하 병력만 있었더라면……!"
분해하는 제뉴인 공작을 변경백이 달랬다.
"제뉴인군은 에베군과 협력하여 일야관에서 유입되는 황제파 병력을 막고 있다 합니다. 더 이상의 유입을 막는 것만 해도 큰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왕이면 일야관을 넘어 노체군과 루지온군의 뒤를 잡아 주면 좋으련만 그것까지 기대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그때 다시 누군가가 중앙 지휘소로 들어왔다.
누이론트 백작과 카몰 예비대를 이끌고 합류한 그의 부인, 예카테리나 스와힐리, 누이론트 백작 부인이었다.
제뉴인 공작이 장인, 장모를 맞아 일어섰다.
"오셨습니까. 인사가 늦어 죄송합니다."
누이론트 백작 부인이 갑옷을 입은 채로 사위의 손을 붙잡았다.
"아닙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각하와 제 딸이 무사히 돌아온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런데 알버트가 동행했다고 들었는데, 왜 같이 오시지 않고……."
"후작께서 황궁에 계시다는 말을 듣고 안내하던 기사와 함께 바로 황궁으로 갔습니다."
여기저기 인사를 나누던 백작 부인이 지휘소 내의 어두운 분위기를 눈치채고 물었다.
"반오러 물질과 경량 갑옷을 가지고 왔는데도 왜 이리들 기운이 없으십니까?"
카른이 나서서 답했다.
"그것은 정말 기쁜 소식이지만 수의 열세가 심각합니다. 저들이 희생을 각오하고 밀고 들어온다면 저희는 수도 안으로 피신해야 하는데, 카몰군, 히베아군, 산탄다르군을 모두 합치면 30만이 넘는 병력입니다. 수도 안에는 이 정도 인원을 수용한 공간이 충분하지 않을 겁니다."
그 말을 들은 백작 부인이 긴가민가한 얼굴로 말했다.
"영주 대리가 제게 맡기고 간 것이 있습니다. 도움이 될 거라면서요."
"알버트가요? 무엇입니까?"
"이것들입니다……."
백작 부인이 사람을 시켜 가지고 온 물건을 들여오도록 했다.
모든 이들의 관심이 알버트가 백작 부인에게 남겨 두고 갔다는 허름한 물건에 집중되었다.
허름하기 짝이 없는 빗자루와 빗이었다.
무겁고 어려운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변경백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이게 지금 어떤 도움이 된다는 것입니까?"
백작 부인이 민망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저도 잘 모릅니다. 그저 이들이 변하면 유성우가 내릴 것이라고만……."
말이 끝나기 무섭게 펑 소리와 함께 빗자루와 빗이 변했다.
"어후! 그 말 언제 나오나 하고 기다렸슈. 안 알려 주고 갔나 혔잖어유. 약속을 단단히 혀가지구 마음대로 텨 나갈 수도 없구. 답답해 죽는 줄 알았잖어유."
"우리가 활약하면 되는 거쥬?"
갑작스럽게 나타난 도깨비 둘에게 모두가 얼이 빠져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사이, 이끼위의물이 성큼성큼 탁자로 걸어가 지도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벼랑구른돌에게 다가가 지도 이곳저곳을 가리켰다.
"요기랑 요기랑 요기에 불 질러 주면 되는 거 아녀?"
"맞는겨? 다르면 어뜨케 하려고 그려."
"올라가면 알 수 있지 않으까?"
"하기사! 장로 할배도 늘 그랬자녀, 눈으로 직접 보고 판단허라구. 올라가 볼려?"
알 수 없는 대화를 주고받은 두 도깨비가 지도를 손에 들고, 다른 손에는 방망이를 든 채로 지휘소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제야 모두 정신을 차리고 급히 도깨비 뒤를 따라 뛰어나갔다.
그러나 지휘소 밖에 도깨비는 없었다.
"저기!"
그레이스의 목소리였다.
그녀의 손과 시선은 하늘 높은 곳에 닿아 있었다.
주위 사람들이 그레이스처럼 목을 꺾고 위를 볼 때쯤, 하늘로 솟은 도깨비들이 방망이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수 없이 많은 불덩이들이 노체군과 수도방위병단의 머리 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눈앞에 펼쳐지기 시작한 압도적인 광경에 그레이스는 간신히 한마디를 내뱉었다.
"유성우가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