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한 마검사의 복수-169화 (169/180)

건곤일척 (5)

마나 소드를 없앴다.

가슴을 깊게 베인 남자가 휘청였다.

온몸에 붕대를 칭칭 동여맨, 황제의 친위대였다.

어찌나 급하게 황제 앞으로 뛰어들었는지, 마나 소드가 그의 상반신 대부분을 베어 낸 상태였다.

무너지는 남자의 뒤로 황제가 보였다.

피가 뿜어져 나오는 상처를 돌보지 않고, 친위대는 간신히 고개를 돌려 황제에게 말했다.

"폐하…… 피하셔야…… 합니다……. 제가…… 막겠나이다……. 어서…… 가소서……."

친위대는 떨리는 손으로 옆구리에 찬 검을 잡으려 했지만 그의 손은 몇 번이고 허공을 움켜쥐었다.

간신히 검의 자루를 잡은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폐하의 곁을…… 지킬 수 있어 영과……."

마나 소드를 만들어 내 다시 한번 휘둘렀다.

친위대의 머리가 피를 흩뿌리며 저 멀리로 날아가 뒹굴었다.

머리를 잃은 몸이 힘을 잃고 쓰러졌다.

공포에 질린 눈을 한 황제를 향해 말했다.

"신파는 취향이 아닌지라."

황제가 나를 향해 소리 질렀다.

"이, 이 간악무도한 놈! 네가 흘리게 한 피가 얼마이며! 너 때문에 스러져 간 목숨은 얼마이냐!"

이상한 일이었다.

황제의 곁을 지키던 네 개의 검은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고, 그의 목소리에서 서릿발처럼 뻗치던 강맹한 기운 역시 사라졌다.

그는 손의 마디가 하얗게 불거질 정도로 강렬하게 두 손으로 검을 붙잡고 있었다.

무엇보다 황제의 눈은 새하얗지 않았다.

내 앞에 있는 남자는 지금 이 순간 만인지상의 고결한 피를 타고난 황제가 아니라 자신을 덮치는 절망에 칼 한 자루로 대항하려는, 평범하디평범한 남자에 불과했다.

마나 소드를 들어서 황제가 잡고 있는 검의 끝에 가져다 대었다.

화려하게 장식된 보검이었지만, 오러로 둘러싸여 있지 않아 부드럽게 베였다.

보검의 조각이 땅으로 떨어져 불편한 소리를 만들어 냈다.

철커덕 철커덕 철커덕.

단 세 번 만에 마나 소드는 보검의 검신(劍身)을 모두 베어 없애 버렸다.

자루만 남은 검은 황제의 떨림을 이기지 못하고 덜덜 움직이고 있었다.

"제가 흘리게 한 피라 하셨습니까? 스러져 간 목숨요?"

나는 황제를 바라보았다.

"예,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제국의 장정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과부를 만들어 냈습니다. 제 알량한 복수를 위해서 말입니다! 그러는 당신은 그동안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전우를 잃은 장병들을 위로하러 오셨습니까? 아니면 지아비를 잃고 어린 자녀에게 다음 날 먹일 끼니를 걱정하는 과부들을 보듬으셨습니까?"

내가 다가가자 황제는 발을 끌며 뒷걸음질 쳤다.

"다, 다가오지 말라!"

"제가 밟고 올라선 피와 살로 만들어 낸 영광은 당신의 것이기도 합니다! 어찌하여 받으실 땐 웃는 낯이시더니, 돌려줄 때는 그리도 인상을 쓰시나이까? 또한 저는 당신에게 계속해서 선택을 양보했습니다. 제 기대를 저버리는 선택을 한 것은 당신입니다."

마나 소드를 잡고 있지 않은 손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친위대의 떨어져 나간 목이 우리를 향해 있었다.

"당신께서 조금만 현명했더라면, 권좌에 대한 집착을 조금만 버렸더라면 저자가 저렇게 되었을 것 같습니까?"

"네놈의 패악을 나에게 뒤집어씌우려 하지 말라! 무엄하다!"

황제가 목소리를 높여 소리 질렀지만, 그것은 이미 궁지에 몰린 약자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최후의 수단으로 몸을 부풀리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아마도 당신의 친위대로 계속 살다 나이가 들어 은퇴한 뒤, 적당한 영지를 받아 그럴듯한 노후를 보냈을 겁니다. 당신이 죽인 겁니다."

짤그랑

황제가 떨어트린 검 자루가 내는 소리였다.

"셀 수 없는 기사와 마법사 들이 죽었습니다. 정확히 하면 죽었다는 말은 틀렸지요. 지금 이 순간에도 황궁과 수도 주위에서 죽어 가고 있을 테니까요. 일반 병졸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네가 죽인 것이다! 네놈의 욕심이 제국을 전쟁터로 만든 것이다!"

"예! 제가 그랬습니다! 저는 적어도 그렇게 해서 제 아래에서 살아남은 자들에게 희망과 자부심을 불어넣었습니다! 당신은 무얼 하셨습니까! 지금도 저기서 죽어 가는 당신의 기사와 마법사 들을 위해 무엇을 해 줄 수 있냐는 말입니다!"

내가 한 발짝 더 다가서자, 황제는 더 뒷걸음질을 치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엉덩이를 땅에 댄 황제가 여전히 나를 피해 뒤로 물러났다.

"제 잘못이 있다면 하나입니다."

계속해서 뒤로 물러나던 황제가 멈췄다.

그의 뒤에는 거대한 모습을 한 투브가 있었다.

투브의 발에 손이 닿은 황제가 기함을 했다.

"으아악!"

"제 도움이 없었음에도 당신은 자신의 형을 죽이고 황제가 되었습니다. 그런 당신의 욕심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제 욕심을 위해 당신에게 권력을 쥐여 준 것. 그것이 제 유일한 잘못입니다."

"무슨 미친 소리냐! 짐을 구하라! 이놈에게서 짐을 구하라! 어서!"

황제가 주위에 대고 애처롭게 소리 질렀다.

그러나 오러 화살 몇 개만이 날아올 뿐, 붉은 방패 기사단과 황실 마법사들은 아군의 거센 저지에 막혀 황제에게 다가오지 못했다.

체념한 듯 황제가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벌떡 일어나 나를 향해 다가왔다.

어찌나 급했는지, 그는 자신의 휘황찬란한 옷이 마나 소드에 찢겨 나가는 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

"카몰 후! 아직도 그대의 제안은 유효한가? 거래, 그래 좋다. 짐과 거래를 하자꾸나. 그대가 찾는 자들이 모두 황궁 안에 있노라. 내 친히 그대를 그곳으로 안내하마. 그리고 그들의 생사여탈을 카몰 후 그대의 손에 쥐여 주겠노라. 그리하면 되겠는가? 그것으로 성에 차지 않는다면, 죽은 자들의 영지에서 일정 부분을 떼어 그대의 영지에 편입시키겠다. 그곳에서 징세와 징병은 모두 그대의 뜻대로 이루어지게 하겠노라. 어떠한가."

내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이 당신이 내린 답입니까. 왜 마지막까지 이리도 추해진단 말입니까. 황태자 시절의 바그안트 서비어는 이렇지 않았습니까! 그때의 당신은 어디로 사라지고 이렇게 된 것입니까!"

황제 역시 일그러진 얼굴로 외쳤다.

"짐은 황제이고, 황제는 곧 제국이다! 짐에게 주어진 숙명은 제국을 존속시키고 번영하게 하는 것이니, 그 대의를 위해 무엇이든 할 것이니라!"

"당신의 잘못된 선택을 대의라는 이름 하에 잊으려 하지 마시오!"

황제를 밀쳐 냈다.

오러를 쓰지 못하는 황제는 너무도 가벼이 밀려나 바닥을 뒹굴었다.

마나 소드를 들어 올렸다.

그것을 본 황제가 네발로 기어 내 발에 매달렸다.

"이럴 수는 없다! 시안! 신하가 군주를 죽이는 것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니라! 짐은 억제력이다. 짐이 죽으면 제국이 붕괴하고 온 대륙에 혼란이 올 것이다! 그대가 하려는 일의 무게를 생각하라! 짐은 살아야 한다! 짐은 살아야 한단 말이다!"

"틀렸습니다. 그것은 스스로를 과대평가한 당신의 착각일 뿐입니다."

마나 소드를 내리꽂았다.

가볍고도 묵직한 감촉이 손에 와 닿았다.

이번에는 확실했다.

"우욱……! 감히……! 짐을! 어찌 신하 된 자가……! 푸헉!"

황제가 꿰뚫린 가슴을 부여잡고 바닥을 뒹굴었다.

가슴과 입에서 붉은 선혈이 울컥울컥 밀려 나오는 것이 보였다.

"당신은 암군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암군의 신하로 남느니 암군을 처단한 자로 남겠습니다. 몸에 더 이상의 상처는 내지 않겠습니다. 신하 된 자로 드리는 마지막 자비입니다."

"너는…… 주군을 죽인 놈으로…… 푸헉! 기억될 것이다! 제국을 멸망하게 한 자로! 으으윽!"

"제국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피를 쏟아 내던 황제가 내 말을 듣고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황제의 자리는 하나이지만 서비어의 핏줄은 많습니다. 그리고 권좌에는 강한 자가 앉아야지요."

"그것이 무슨……."

"초대 황제께서 말씀하지 않으신 모양이군요. 초대 황제께서는 적통 중 그 세대(世代)의 가장 강한 서비어의 몸에 깃드십니다."

황제의 눈이 커졌다.

"당신의 자질이 공주마마의 자질에 미치지 못한다는 뜻이지요."

"이노옴!"

황제가 몸을 일으키려다 바닥으로 엎어졌다.

"무리하지 않는 것이 좋으실 겁니다. 움직이려 할수록 상처에서 피가 더 많이 배어 나올 테니까요."

엎어진 황제에게서는 그르륵거리는, 귀에 거슬리는 숨소리만이 들려왔다.

그나마도 점점 소리가 작아지고 있었다.

"당신까지 죽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내 솔직한 심경이었다.

그러나 살려 두기에는 너무나 멀어져 버린 상황이었다.

결국 서로의 목숨을 노리게 될 거라면, 내가 살아남아야 했다.

황제의 가느다란 숨소리가 끊어졌다.

어지러웠다.

쓰러지듯 앉는 나를 투브가 부축했다.

-고생했어.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야. 종착점을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을 하나 치웠을 뿐이지."

-솔직히 놀랐어. 네가 아무리 성장했다 해도 이런 괴물을 이길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거든. 처음에 이 녀석을 봤을 때의 전율이 아직도 기억나.

손을 뻗어 투브의 머리에 올렸다.

녀석은 별 저항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못 미더운데 잘도 도왔네."

-그거야 뭐……. 네 복수가 마무리되어야 우리의 이 지긋지긋한 동업 관계도 끝이 나니까…….

"그래, 지긋지긋하다. 얼른 보내 줘야지."

다리에 힘을 주어 일어섰다.

황제의 시체는 내 발치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잔뜩 오러를 끌어올려 크게 외쳤다.

"암군, 바그안트 서비어가 죽었다! 모두 전투를 중지하라! 무의미한 희생을 멈춰라!"

***

"이 길이 맞는 겁니까?"

황궁 북쪽의 숲, 지크프리트 발터가 몰트 비텔스바흐에게 물었다.

몰트 궁정백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자신도 확신이 없었다.

몰트 궁정백이 아주 어릴 때, 할아버지가 흘리듯 한 말이었다.

-우리 가문이 아무리 황실을 위하는 가문이라고 해도 황실보다는 가문이 우선일 때가 있지 않겠느냐? 황실 북쪽의 유물 보관소들을 넘어가면 황궁 외벽이 나올 것이야. 외벽이 꺾이는 곳에 자세히 보면 우리 가문의 문장처럼 파인 곳이 있다고 들었다. 그곳에 궁정백에게 대대로 수여되는 휘장을 가져다 대면, 수도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통로가 드러난다고들 하더구나. 먼 옛날 가문의 어른 한 분이 몰래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하던데…….

그것이 진짜냐고 묻는 어린 몰트에게 그의 할아버지는 그저 가문에 전해지는 이야기일 뿐, 자신도 확인해 보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그런데 지금 그 말에 한 줄기 희망을 품고 그곳으로 향하고 있는 중이었다.

지크프리트의 질문에도 아무 답을 하지 않는 자신의 아버지에게 답답해진 레이바가 다시 되물었다.

"아버지! 투항하는 길이 더 나을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도망치다 잡히기라도 하면 변명도 할 수 없습니다."

비텔스바흐 부자, 지크프리트 발터, 이르한 노체를 비롯한 몇몇 내관과 황실 마법사들은 황제가 쓰러졌다는 소리를 듣고 바로 이곳으로 이동해 온 길이었다.

그러나 궁정백은 묵묵히 앞만 보고 걸어 나갔다.

이윽고 황궁 외벽에 도착하고 나서야 그가 입을 열었다.

"우리 가문의 문장 모양으로 파인 곳을 찾으시오! 어서!"

멀리서 들려오던 소음이 어느 순간 멎은 것 같았다.

다들 마음이 급해져 손으로 외벽을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여, 여기! 여기에 있습니다!"

내관 하나가 소리쳤다.

궁정백이 떨리는 손으로 휘장을 떼어 내어 그곳에 가져다 댔다.

파여 들어간 곳과 휘장은 마치 원래부터 그랬던 것처럼 스르륵 맞아 들어갔다.

그리고 외벽 한쪽이 살짝 들리더니 통로가 생겨났다.

서늘한 바람이 밀려 나오는 것이, 다른 곳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 분명했다.

레이바가 물었다.

"어디까지 연결되어 있는 겁니까? 수도 안이라면 잡히고 말 겁니다."

"수도 바깥까지 연결되어 있다고만 들었지, 나도 어디까지 연결되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모두 머뭇거리고 있는데, 이르한이 거침없이 몸을 안으로 들이밀었다.

"지체하면 뒤에 있는 자들만 죽는 거요."

그 말에 하나둘 들어가기 시작했고, 마지막 사람이 들어가고 얼마 뒤에는 튀어나온 부분이 다시 잠겨 들어 원래의 외벽 모양으로 돌아갔다.

통로는 어두웠기에 황실 마법사들이 불을 밝히며 나아가야 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통로를 몇 시간이나 걸어 벗어났을 때, 그들은 수도에서 꽤나 떨어진 어느 산의 바위 뒤로 나올 수 있었다.

멀리 수도의 성벽이 보였다.

사람들이 살았다며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궁정백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카몰 후작이 황제를 죽였든, 죽이지 않았든 제국의 정세는 한동안 혼란할 것이 분명하다. 망명이다. 다른 왕국으로 망명을 가야 해. 기왕이면 먼 곳으로. 드워프들의 땅으로…….'

그가 미처 생각을 다 마치지 못했을 때, 주위가 밝아졌다.

수십 개의 불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모두가 놀라고 있을 때, 불빛 사이로 한 남자가 등장했다.

거대한 검은 늑대를 탄 남자, 시안이었다.

"비싼 돈 주고 정보를 산 보람이 있었네. 대체 이런 건 어떻게 알아냈나 몰라."

털썩.

몰트 궁정백은 다리가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