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한 마검사의 복수-171화 (171/180)

죽은 자는 말이 없다 (2)

"시안!"

지휘 막사를 빠져나온 찰나,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레이스였다.

"예."

"무슨 소리야? 네 지지가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는 얘기?"

"그냥……. 그렇게 될 것 같습니다."

몸을 돌리는 나를 그레이스가 거칠게 잡아 세웠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말해!"

"제 생각 모두를 각하께 말해 드릴 의무는 없습니다. 각하께선 제게 이러실 권리가 없으시고요."

잠시 입술을 질끈 물던 그레이스가 반박하듯 말했다.

"우린 신분패를 교환한 동맹이야. 견고한 동맹.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나는 알 권리가 있어."

그레이스의 눈을 바라보았다.

흔들리지 않는 의지가 느껴졌다.

내가 물었다.

"변경백이 공주 마마를 황제로 옹립한다고 하면, 베이카 장군이 제기한 문제가 완전히 사라진다고 생각하십니까?"

"한동안은 혼란이 계속되겠지."

"저는 그 혼란을 야기한 자입니다. 책임을 져야겠지요. 아니, 책임이라고 하기보다는 업(業)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저 때문에 너무 많은 피가 흘렀습니다. 지극히 사적인 일 때문에 말입니다."

"사적인 일?"

수도를 정복하고, 황제를 죽였다는 승리의 기쁨에 취해 말을 너무 많이 한 것 같았다.

몸을 돌렸다.

그레이스가 더욱 단단히 나를 붙잡았다.

"무슨 사적인 일! 그리고 방금 한 말은 너답지 않아! 내가 아는 시안은 더 자신감 있고, 항상 뻔뻔한 놈이야! 지금처럼 책임이니, 업이니 하는 소리를 입에 담을 사람이 아니라고!"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때의 저라면요.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릅니다."

"뭐가 다른데, 오늘 네 말은 이해 못 할 말투성이야."

"각하께서도 이해하실 날이 올 겁니다."

한 단어, 한 단어를 꾹꾹 힘주어 눌러 말했다.

"평생의 숙원, 아니 죽음을 넘어선 숙원을 이루는 날이 각하께 온다면 말입니다."

그레이스의 얼굴에 당황과 혼란이 마구 떠올랐다.

그녀의 얼굴은 일견 아름다웠고, 일견 슬퍼 보였다.

갑자기 가슴 한편이 아려 왔다.

처음 느끼는 고통이었다.

"오늘의 너는 뭔가 달라."

그레이스의 말이었다.

나를 꼭 붙잡고 있는 그녀를 그저 내려다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 너를 지지해. 힘든 일이 있으면 언제든 좋으니까 찾아와. 아니, 기쁜 일이 있어도, 슬픈 일이 있어도 찾아오고 싶으면 나를 찾아와. 언제든 너를 맞이할 테니까. 약속해 줘."

"……약속드리겠습니다."

나를 붙잡던 그레이스의 손이 풀렸다.

"밤이 늦었습니다. 들어가시지요."

고개를 끄덕이는 그레이스를 뒤로 한 채, 마법으로 내 기척을 옅게 만들었다.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투브가 뭔가 불만족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뭔가 진전이 있나 했더니만, 이런 식일 줄이야.

'헛소리.'

-왜, 오델리아랑 로하나스는 좀 나아진 것 같던데.

그 소리에 내가 되물었다.

'그 둘이?'

-응. 오델리아가 로하나스를 볼 땐 항상 한심하다는 눈빛이었는데, 이제는 귀찮다는 눈빛이거든.

'다른 거야?'

-다르지.

'잘 모르겠네.'

그레이스와 있을 때 가슴 한편이 아렸던 느낌이 아직도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그 느낌을 털어 내기 위해 투브와 별 의미 없는 대화에 열중했다.

어느새 영내에 위치한 감옥 앞이었다.

감옥 근처의 마법이 이상하다고 뛰쳐나온 마법사들 앞에 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으허!"

괴상한 비명을 지르는 마법사들에게 나 때문에 그런 것이니 마법은 이상이 없다고 말했다.

"내가 말한 대로 수감했나?"

"예, 비텔스바흐 부자와 지크프리트 발터, 이르한 노체는 따로 수감해 놓았습니다."

"좋아, 아무도 들이지 말도록."

감옥 안으로 발을 들였다.

닫힌 문 뒤에서 병사들의 수군거림이 흘러 들어왔다.

"내 동기가 말하길, 예전에 테르다마스에서 각하께서 혼자 감옥에 들어갔다 나오셨을 때, 이민족의 대족장이 죽었다는데 이번에도 그렇게 되는 거 아니야?"

"그때 조사로는 그 족장 놈이 사슬을 끊고 각하를 죽이려했다고……. 그리고 그때는 이민족이었고 지금 안에 있는 건 제국의 귀족이잖아. 아무리 적대적이었다고는 하지만 그때처럼 죽이지는 못하지 않을까?"

***

덜그럭.

낡은 의자를 끌어다 철창 앞에 놓고 앉았다.

안쪽에 꾀죄죄한 몰골로 묶여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에게 병사들이 한 얘기를 전해 주었다.

"그렇다는데? 당사자들의 생각은 어떻지? 내가 너희들을 죽일까? 아니면 적당히 구슬리다 인질로 쓸까? 너부터 말해 봐."

내 고개가 향한 쪽에는 이르한 노체가 있었다.

"사, 살려 주시오. 우리는 구면 아니오. 아버지께서 일야관에 계실 것이오. 나를 사절로 쓰시오. 무슨 일이 있어도 아버지가 항복을 하시도록 설득하겠소."

"구면이라……. 구면이긴 구면이지. 발시안에서 만났으니까."

이르한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런데 사절 얘기는 현실성이 없어. 네가 가지 않아도 그쪽의 선택지는 그거 하나거든. 항복을 하지 않는다? 일야관 채로 불타게 될 거야. 내게는 그럴 힘이 있으니까."

"어찌 그리 잔혹하시오. 조금만 생각해 보면 피를 덜 보고, 더 유하게 풀어 나갈 수 있지 않소이까."

"너와 네 형제들, 네 아버지는 생각을 많이 해서 군을 그렇게 일으킨 건가? 단어 선택에 조금 더 주의를 기울여야겠는데."

이르한이 무언가를 더 말하려 했지만 나는 시선을 돌렸다.

몰트 비텔스바흐가 있었다.

"궁정백, 변론할 내용이 있나?"

"우, 우리는 최선의 선택을……"

궁정백이 입을 열려는 찰나, 날카로운 소리가 터져 나왔다.

"어차피 죽일 것을 상정하고 온 것이 아니냐! 아버지! 놈은 저희가 고통 속에 발버둥치는 것을 즐기고 있을 뿐입니다! 정전에서 일말의 고민도 없이 저를 죽이려 들던 놈입니다!"

레이바의 말에 관자놀이 주위가 불끈 솟는 것이 느껴졌다.

마지막 순간, 귓가에서 속삭이던 레이바의 목소리가 다시 들리는 것 같았다.

"그래, 맞아. 더더욱 고통 속에서 일말의 희망을 찾아 몸부림쳤으면 했는데, 네 녀석 때문에 흥이 깨졌네."

내가 몸을 일으켰다.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지크프리트였다.

"사, 살려 주시오! 어머니께 진언해 후작에게 무조건적으로 협력하겠소."

가소로웠다.

"네가 아크라파소 후작에게 진언을 해? 여성 중심인 발터가문의 분위기를 견디지 못해 가문을 배신하고 나온 놈이? 웃기지도 않는 소리를 하고 있네. 친아들인 네놈보다 적인 내 의견이 더 무게감 있을 거다. 그리고 이미 후작은 네 모든 행동을 개인적인 일이었다고 선을 그었어. 내놓은 자식이라는 거지."

"당신은 모르오! 남자라는 이유로 가문에서 무시당해 온 나날들을!"

팔크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도 발터가문 사람이었다.

팔크 역시 가문의 그런 분위기가 싫어 절연한 뒤 붉은 방패 기사단이 되었다.

재능도 재능이었겠지만, 붉은 방패 기사단이라는 이름은 재능만으로 달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셀 수도 없는 땀방울이 그를 받치고 있었을 것이다.

마부석에 앉아 말을 몰던 팔크의 모습, 밤이 되면 마차 옆에 불을 지펴 놓고 맨손 박투를 보여 주던 모습, 붉은 갑옷을 입고 전장에서 마주쳤던 모습, 뒤에서 들려오던 그의 단말마까지 생생했다.

"그래, 나는 네가 어떤 설움을 당했는지 몰라. 하지만 같은 고통을 겪고도 자신의 운명을 개척한 사람을 알지. 비겁하게 가문 탓을 하고, 박쥐 짓을 하는 게 아니라 말이지. 나는 궁금했어. 나를 죽이는 데 대체 네가 왜 있을까. 역시나 보잘 것 없는 열등감이었네. 궁금해할 가치도 없었어."

"당신을 죽이다니? 무슨 소리를 하는 게요! 정신 차리시오, 후작!"

지크프리트가 수감되어 있는 곳으로 들어가니 놈이 몸을 비틀어 대며 나를 피하려 애썼다.

"너무 많은 걸 말했나 봐. 항상 평정을 유지하자고 스스로 그렇게나 다짐했는데, 오늘따라 쉽지가 않네."

"그, 그만! 오지 마! 다가오지 마!"

서걱.

한 순간이었다.

지크프리트의 머리가 떨어졌다.

몸을 벽에 붙여 묶어 놓은 탓에 머리를 잃은 지크프리트의 몸이 흔들거렸다.

그 미미한 떨림에 나는 묘한 만족감을 느꼈다.

열의 섞인 숨을 뱉었다.

"하."

심장이 쿵쿵대며 뛰고 있었다.

옆에서 빽빽대는 소리가 이 열광의 순간을 방해하고 있었다.

"이 무슨 짓이요! 우리를 이런 식으로 대우할 수는 없소! 당신이 지금 하고 있는 짓의 무게를! 으아아! 치우시오! 치워 주시오!"

이르한이 나를 향해 거칠게 소리치다 자신을 향해 굴러오는 지크프리트의 머리를 보고 기겁했다.

"시끄럽네."

마법으로 이르한을 잠시 질식시켰다.

놈의 몸이 축 늘어졌다.

지크프리트의 시체와 이르한이 있는 방을 나왔다.

몰트 궁정백과 레이바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궁정백의 눈에서는 공포가, 레이바의 눈에서는 분노가 읽혔다.

다시 의자를 끌어다가 부자(父子)가 함께 수감되어 있는 방 앞에 앉았다.

저들에게 나는 어떻게 보일까.

신일까 악마일까.

"아까 그건 무슨 소리요?"

"응?"

"후작을 죽이는데 지크프리트가 있었다는 말."

궁정백이었다.

이 순간에도 뭔가 내 약점을 잡아 보려 노력하는 모양이었다.

"궁금한가?"

피비린내가 퍼지기 시작했다.

"궁정백, 당신의 아들이 당신 작위를 물려받으면 어떻게 될 것 같나?"

궁정백은 말이 없었다.

"당신보다 훨씬 황실에 충성하게 될 거야. 황제의 위협이 될 만한 자들을 제거하려 들걸?"

"우리 가문은 황실에 충성하오! 그 정도는……!"

"그래, 맞아. 부인할 생각은 없어. 다만 너희에게 안 좋은 사실은 그렇게 죽은 자 중 하나가 되살아났다는 거지."

"되살아……? 설마 사령 마법?"

"더 이상은 묻지 마. 이 순간만을 기다려 와서 그런지 오늘따라 말이 많아. 나답지 않긴 해."

내가 침착함을 되찾으려 애쓰는 동안, 궁정백은 몸을 뒤틀며 나름의 추리를 뱉어 대고 있었다.

"당신은 카몰 후작이 아니지! 진짜 카몰 후작은 영지전에서 죽은 게야! 저 몸을 차지한 것은 유제프! 사령 마법사인 스테판 유제프다! 이놈! 영지전으로 가문이 몰락한 것에 앙심을 품은 게냐! 사특한 마법사 놈!"

"아쉽지만 방향이 틀렸어. 당신 추리는 글러먹었다는 소리야. 머리 좀 식히는 게 좋겠어."

이번에는 궁정백도 기절시켰다.

내 시선이 레이바를 향했다.

그는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에 당황스러워하면서도 눈을 이글이글 불태우고 있었다.

그래, 그 정도는 되어야 죽일 맛이 나지.

"네 아버지의 목숨은 네가 하는 것에 따라 달렸어."

"나를 살려 둘 마음은 없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정답이야. 아쉬워. 너는 머리도 좋고 행동력도 있어 보이는데 왜 나에게 대항하는 길을 택했을까. 생각할수록 아쉬워."

"하하하하하!"

레이바의 웃음소리가 감옥 곳곳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한참을 웃던 레이바의 웃음소리가 뚝 그쳤다.

"말은 바로 해야지. 당신에게 적대했기에 여기까지 왔는 걸. 당신의 편이 되어 뒤를 좇았다면 그저 그런 참모들 중 하나가 됐겠지만, 나는 지금 여기서 당신과 눈을 마주하고 있잖아? 당신을 넘어서지 못했을 뿐. 그뿐이야."

입꼬리가 귀를 향해 당겨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 이제 와서 푹 수그리면 맛이 없지. 나도 네게 감사하고 싶어. 결심이 약해지려고 할 때마다 네놈의 그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거든. 몸으로 쑤시고 들어오던 그 날붙이의 감촉도 잊을 수 없지! 뼈 사이를 뒤틀던 그 소름끼치는 감촉!"

"미쳤군! 후작 당신은 미쳤어!"

"그래, 난 미쳤어. 너는 이해할 수 없겠지. 내가 이 순간을 얼마나 고대해 왔는지를!"

품에서 단도를 꺼냈다.

이 녀석에게는 내가 겪은 고통을 그대로 느끼게 해 줄 셈이었다.

한 손으로 녀석의 목 언저리를 잡고 들어 올렸다.

벽에 튀어나와 있는 기둥에 묶여 있었기에 저항감이 느껴졌지만, 개의치 않고 녀석을 끌어당겼다.

뚜둑 하는 소리가 나며 레이바의 몸이 들렸다.

기둥에 묶여 있던 사슬이 끊긴 것인지, 레이바의 뼈가 부러졌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마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는 걸로 봐선 후자에 가까운 것 같았다.

"다시 한번 고마워. 네 덕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

"크으…… 저주할 테다. 혼백만 남을지라도 너를 죽일 테다!"

푸욱.

녀석의 가슴팍을 향해 단도를 찔러 넣었다.

쿵쿵거리는 진동이 단도를 타고, 내 손에 전해졌다.

"으으……"

레이바의 눈꺼풀이 떨렸다.

몸을 비틀며 저항하려 했지만, 그럴수록 단도가 깊이 파고들기만 할 뿐이었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레이바의 머리를 붙잡고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다시 한번 레이바가 몸을 뒤틀었지만, 나는 놈을 놓아 주지 않았다.

녀석의 귓가에 속삭였다.

"혼백으로는 나를 못 죽여. 과거로 돌아가는 정도는 되어야 할 거야."

이제 레이바는 신음도 내지 않았다.

그르륵거리는 불편한 소리만이 녀석의 입에서 나고 있었고, 그마저도 이내 희미해져 버렸다.

복수의 완성이었다.

밖으로 빠져나와 의자에 걸터앉았다.

황홀함과 허무가 동시에 찾아왔다.

-나머지 둘은 살려 둘 셈이야?

"내가 죽이지 않아도 다른 귀족들에 의해 죽을 목숨이야. 이 두 명은 내전의 원흉이기도 하니까."

-네 말에 의문을 품은 놈들이야. 처리하지 않아도 괜찮겠어?

"내 걱정해 주는 거야?"

투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한 말을 들었다 해도, 이놈들 말을 믿을 자가 얼마나 있을까? 그냥 미친 소리 정도로 치부되겠지."

급격하게 피로감이 몸을 감쌌다.

격전의 여파와 복수를 끝냈다는 안도감이 몰려오고 있는 모양이었다.

터덜터덜 감옥 밖으로 나섰다.

내가 이곳에 있다는 소리를 들었는지 감옥 밖에는 로하나스가 서 있었다.

"각하……. 그 모습은……."

고개를 내려다보았다.

피가 묻지 않은 곳이 없었다.

"아…… 내 독단으로 제국의 앞길을 막을 자들을 처단……."

땅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왁자지껄한 소리가 잠시 들리더니 멀어졌다.

"각하께서 쓰러지셨다! 들것을 가져와!"

눈을 떴을 때, 내가 마주한 것은 막사의 천장이 아니었다.

낯설지만 예전에 들어 본 것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저번 만남이 마지막 만남이 아니었네. 이걸 기뻐해야 하나? 아쉬워해야 하나? 너무 오래되어서 계약의 조건들을 나 스스로도 깜빡하고 있었지,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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