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는 말이 없다 (3)
"다 늙은 노인의 모습일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젊은 모습이잖아? 어떻게 된 거야? 벌써 목표를 이룬 거야? 아니면 그대로 죽어 버린 거야?"
내가 주위를 둘러보는 동안에도 목소리는 쉬지 않고 내게 질문을 해 댔다.
흐려진 시야가 차츰 초점이 잡히기 시작했다.
"어…… 여긴……."
온통 하얀 공간이었다.
투브와 처음 만났을 때와 아주 흡사했다.
아니, 그곳인 것 같았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계속해서 즐거운 듯 혼자 떠들어 대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내가 입은 옷과 전혀 다른 형태의 복식이었다.
"나 누군지 기억해? 투브와 내가 싸웠던 곳에서 만났잖아."
기억이 희미했다.
그때 누가 있었던가?
투브가 처음으로 본래 모습으로 돌아간 날, 마나가 나를 통해 투브에게로 흘러 들어가는 바람에 기절한 기억밖에는…….
남자의 이곳저곳을 찬찬히 살폈다.
그의 머리카락은 나와 같이 짙은 검은색이었다.
왼쪽 허리에 꽂혀 있는 두 개의 검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 본 기억이 있었다.
"……혹시라도 기억나면 똥개한테 고생 많았고 해방 축하한다고 전해 줘."
번뜩 기억이 되살아났다.
"선조님?"
남자가 환하게 웃었다.
"기억하는구나! 보아 하니 내 목소리로는 기억을 못 하고 이 검을 보고 기억한 것 같은데, 맞지? 역시 내 핏줄인가 봐. 무기 좋아하는 건 여전하네."
그는 투브와 싸우다 죽은 내 선조, 메조 몬트라우가 분명했다.
"이게 어떻게 된……."
그가 내 쪽으로 얼굴을 확 가져다 댔다.
"왜? 두려워? 네가 목표한 걸 마쳤으니 '이젠 만족했겠지?' 하면서 너를 죽이거나 아니면 다른 세계로 보내 버릴까 봐? 그런 걱정이라면 안심해. 이건 내 '마지막 호흡'이 만들어 낸 현상이거든."
"네?"
"음…… 어디부터 설명을 해야 하지? 일단 한쪽 당사자만 있으면 나중에 곤란한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양측을 다 부르는 게 맞는 것 같아."
내가 뭐라 말할 틈도 없이 선조님은 두 개의 검을 바닥에 박아 넣었다.
온통 흰 공간에 검은 균열이 생기더니 점점 번져 나가 커다란 검은 원이 만들어졌다.
신이한 현상이 펼쳐지고 있는데도 이 공간에서는 어떤 마나도 느낄 수 없었다.
"이건 마법입니까? 선조님께서도 마법사였던 거고요?"
"응? 아니, 전혀. 뭐라고 해야 하지? 이건 그냥 '의지'야. 강자들의 의지는 세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거든. 너도 때가 되면 알게 될걸."
전혀 이해가 가지 않을 말을 선조님이 늘어놓을 동안, 검은 원에서 투브가 솟아났다.
투브가 어벙한 얼굴로 나를 보다 말을 쏟아 냈다.
"야! 여긴 어디야! 너는 왜 쓰러진 거고? 무슨 짓을 하는 건데!"
"어?"
항상 투브가 나를 향해 생각을 전할 때면 머리가 울리곤 했는데, 그런 것이 없었다.
녀석은 분명 스스로 말을 하고 있었다.
그걸 깨달았는지 투브의 귀가 쫑긋 움직였다.
"이야~ 오래간만이네? 나 안 보고 싶었냐?"
선조님의 목소리에 투브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늑대의 모습으로 변해 선조님께 달려들었다.
"메조! 무슨 짓을 해 놓은 거야! 이 녀석 근처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
"이 녀석아! 엄청 오랜만에 본 사람한테 다짜고짜 이러기냐!"
선조님도 검 두 개를 뽑아 들고 투브에게 맞섰다.
순식간에 이 흰 공간 전체를 압도하는 오러가 선조님의 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둘은 붙었다 떨어졌다를 반복했다.
투브를 찾아 혈혈단신으로 크루슈산맥으로 향했다는 선조님의 전설이 전혀 과장되지 않았음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죽어! 이미 죽었지만 한 번 더 죽어!"
"이 녀석아! 이러면 잘 풀릴 일도 꼬인다니까? 설명을 해 줄게. 기다려! 기다리라고!"
이대로 가다가는 한도 끝도 없어 보이기에 결국 내가 개입했다.
둘의 중간으로 들어가 방어벽을 만들어 내자 선조님의 검이 닿은 왼쪽과 투브의 발톱이 닿은 오른쪽에서 엄청난 폭음이 터져 나왔다.
"저번에 봤을 때는 분명 검사인 줄 알았는데! 내 후손이 마법사라니! 이런 흉측한 일이 있나!"
이건 선조님의 반응.
"왜 막는 거야! 네 선조라고 편드는 거야? 이래서 몬트라우 놈들은 안 돼! 비켜!"
이건 투브의 반응이었다.
더욱 날뛰려는 둘을 진정시킨 건 몇 분 후의 일이었다.
***
"말해. 하나의 거짓도 없이."
강아지 모습을 하고 내 품에 안긴 투브가 선조님을 향해 엄하게 말했다.
선조님은 그 모습이 귀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투브를 향해 환하게 웃음 지으며 손을 뻗다가 투브의 이빨에 손을 한 번 물리고 말았다.
아쉽다는 듯 손을 한 번 쓰다듬고 쌍검을 검집에 집어넣은 선조님이 투브를 향해 말했다.
"좋아, 말해 줄게. 대신 화내지 않기야."
"그건 네가 할 말의 내용에 따라 다르지."
잠깐 투브의 눈치를 살피다 입을 연 선조님의 말은 적잖이 충격적인 것이었다.
"투브, 너와 내가 맺은 계약은 불공정 계약이야."
"뭐?"
날카로운 투브의 반응에 선조님이 움찔하고는 말했다.
"네가 알고 있는 이 계약에 대해 말해 봐."
"네가 나를 죽이지 않는 대신, 내 남은 힘을 이용해서 네 후손 중 하나를 과거로 돌려보내 준다."
"그래, 그랬지. 나는 필멸의 존재인지라 계약의 증인이 될 수 없지만, 드워프가 만든 무기인 이 쌍검, '트랑젤'이 괴물인 너와 나의 계약의 증표가 되었지."
"괴물이 아니라 영수!"
"뭐 어찌 되었건."
선조님이 개구쟁이 같은 표정을 지었다.
"이 계약의 발효 시점은 언제였을까?"
"죽음으로 맺은 계약이니, 너와 내가 죽었을 때……."
투브가 내 품에서 펄쩍 뛰어 벗어났다.
"너 그때 바로 죽은 게 아니었구나!"
"맞아. 나는 너보다 아주 짧은 시간 더 살아 있었어. 그때 조건을 더 추가했지. 내 후손이 목적을 이루기 전까지 네가 후손에게서 일정 거리 이상 벗어나지 못할 것."
말릴 새도 없이 몸을 커지게 한 투브가 선조님을 향해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선조님을 깔고 앉은 투브가 날카롭게 외쳤다.
"왜!"
투브에게 깔린 채로, 날카로운 이빨이 목에 닿아 있는 상태임에도 선조님은 흔들림이 없었다.
선조님이 그대로 투브에게 물었다.
"저 후손 녀석이 입은 옷을 보니 나 때와는 아주 먼 시간이 흐른 것 같은데, 너는 궁금한 적 없어? 내 많고 많은 후손 중 왜 하필이면 저 녀석만이 너와 만나 과거로 돌아오게 되었는지?"
"왜 그랬는지나 말해!"
"내 후손들에게도 제약을 걸었으니까. 자신의 죽음에 강렬한 분노를 품은 자, 시간을 되돌려서라도 정해진 죽음을 뒤틀려는 자만이 네 도움을 받는다는 조건 역시 걸었으니까!"
"그게 무슨 상관인데!"
"강인하고 확고한 의지를 가진 내 후손을 네가 도와주길 바랐거든."
"무슨 미친 소리야! 그럴 거면 네가 직접 돕지 왜 나를 이용해!"
아직까지도 투브의 밑에 깔려 있는 선조님이 환하게 웃었다.
"말했잖아. 나는 필멸의 존재라 세상에 개입할 수 없다고.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네가 맘에 들었거든."
"뭐?"
환하디환한 선조님의 얼굴과는 다르게 투브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그 틈을 타서 선조님은 몸을 비틀어 재빠르게 투브에게서 빠져나왔다.
"후손! 이름이 뭐지?"
"시안입니다."
"그래, 시안. 이 녀석과 같이 지내보니 어때? 괜찮지 않았어?"
투브가 고개를 홱 돌려 나를 날카롭게 째려보았다.
"에…… 뭐…… 좋았다고 생각해요."
"것 봐! 쟤도 너를 마음에 들어 하잖아! 솔직히 너도 내가 마음에 들었지? 몇 날 며칠 동안 같이 산을 구르며 치고 박았는데, 그런 상대는 처음이었다고! 지금도 그때 생각만 하면 온몸이 짜릿짜릿해!"
어느새 다시 검을 빼든 선조님이 자세를 낮추고 있었다.
그리고 투브를 향해 까딱였다.
들어와 볼 테면 들어와 보라는 그 행동에 잔뜩 약이 오른 투브가 여지없이 달려들었다.
다시 한 동안 투브의 고함과 선조님의 광소가 울려 퍼졌다.
"하…… 보고 있자니 머리 아프네."
***
둘을 뜯어 말린 것은 조금 후의 일이었다.
여전히 씩씩대는 투브와 검을 흔들며 도발하고 있는 선조님의 사이에 서서 내가 말했다.
"검은 넣어 주시죠. 이대로는 끝이 없을 것 같아요."
"맞아! 그때나 지금이나 메조 너는 나를 못 이겨! 요행이었을 뿐이야!"
"너도 진정 좀 해.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아는 건 선조님뿐이야."
투브를 달래고 있자니, 선조님이 말을 걸었다.
"대단한데? 저 녀석이 저렇게 커지려면 주위 마나를 엄청나게 잡아먹는 것 같던데 어떻게 녀석과 연결된 네가 멀쩡한 거지? 나는 저 녀석이 작아진 채로 조언자 역할을 하기를 기대했던 거였거든."
이제 와서 변환 인자니, 이타르의 반지니 얘기를 하기에는 너무 구구절절했다.
나는 간단한 한마디로 그간의 사정을 축약해 버렸다.
"제법 많은 일이 있었거든요."
선조님은 그 많은 일이 궁금한 눈치였지만, 나는 이 이상한 공간에 더 이상 있고 싶지 않았기에 얘기를 진전시키고 싶었다.
"투브와 저를 묶어 놓은 사람이 선조님이시라면, 이걸 풀 방법을 아시는 것도 선조님이시겠죠?"
"그 전에 내가 처음에 네게 물었던 것 기억해?"
선조님은 내게 목표를 이룬 건지, 아니면 죽은 것인지 물었었다.
"목표를 이뤘습니다."
"어떤 목표였지?"
"복수요."
"복수라, 강한 동기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네. 궁금했거든, 나와 투브의 계약을 통해 자신의 과거로 향한 후손이 어떤 결과를 낼지. 그래서 네가 회귀한 목표를 이루거나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죽을 때 내 남은 의지가 실체화해서 등장하도록 했어."
"그것도 역시…… 계약의……?"
계약이라는 소리에 투브의 귀가 쫑긋 섰고, 선조님은 투브에게 보이지 않게 손가락을 입에 대었다.
몰래 한 줄을 더 추가한 모양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와 투브가 죽은 곳까지 찾아 올 줄도 몰랐어. 워낙 험한 곳이었어야지. 내 예상을 몇 번이고 깨부순 걸 보면 그 복수를 위해서 많이 노력했나 보네."
"네, 그것만을 위해 살았으니까요."
선조님이 환하게 웃었다.
"저 녀석과 계약을 한 보람이 있어서 다행이야."
"계약이 아니야! 넌 나한테 사기를 친 거라고!"
여전히 투브는 소리를 빽빽 지르고 있었다.
그런 투브를 그저 귀엽다는 듯이 쳐다본 선조님이 다시 내게 말했다.
"네 목표가 완료된 시점에서 계약도 끝났어."
투브가 선조님에게 달려들었다.
"그럼 내가 이렇게 종속되어 있는 것도 끝이라는 거야?"
재빠르게 몸을 피한 선조님이 투브의 물음에 답했다.
"계약은 끝났지. 하지만 그 증표는 남아 있잖아. 다시 너와 내가 죽은 곳에 가서, 트랑젤을 꽂아. 트랑젤은 소멸하고, 모든 계약이 말끔히 종료될 거야. 종속된 자들이 각자의 걸음을 내딛겠지."
선조님이 허리에서 검 두 자루를 풀어 내게로 내밀었다.
내 손이 그것에 닿으려는데, 선조님이 내게 물었다.
"어땠어? 후회 없는 시간이었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감사합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보자."
"나중이라시면……?"
선조님은 내 말에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투브를 향해 다시 웃으면서 말했다.
"너도 나중에 보자!"
"내가 너를 왜 봐!"
내 손이 선조님의 검에 닿기 직전, 불현듯 떠올라 내가 물었다.
"근데 어째서 예전에 저와 만났을 때는 투브 보고 해방을 축하한다고 하셨죠?"
선조님의 얼굴이 잔뜩 곤란한 표정이 되었다.
"나도 너무 오래간만이라 깜빡했어."
"야! 이 정신 빠진 놈아!"
투브가 다시 선조님을 향해 달려들었다.
선조님이 다급하게 외쳤다.
"가! 빨리!"
선조님이 내 손목을 잡고 끌어당겨 자신의 검에 내 손을 닿게 했다.
휘청하는 느낌과 함께 몸이 앞으로 꺾였다.
어둠이 시야를 가렸다.
그 후에는 찌를 듯한 빛이 눈앞을 가득 메웠다.
"으으……."
주위가 왁자지껄했다.
"각하께서 눈을 뜨셨다!"
"저비스 님을 모셔와 어서!"
막사 천장에 동그랗게 매달린, 마력 전구가 눈에 들어왔다.
방금 전까지 선조님과 있던 기억이 선명했다.
-그걸 어떻게 깜빡해? 어떻게 인간이 그렇지? 누구 마음대로 내가 마음에 든대? 재수도 없지!
투브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원래대로 돌아온 모양이었다.
몸은 가뿐했다.
최상의 상태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몸을 일으키려는데, 이질적인 소리가 들렸다.
철그럭.
다리 아래에 두 개의 검이 놓여 있었다.
그걸 본 투브가 말했다.
-번거롭게도 해 놨네.
손을 뻗어 투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게. 그래도 이 정도는 번거로워도 되지 않을까? 너와 내가 함께하는 마지막 여정이 될 것 같은데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