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대 (1)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일야관이 보였다.
원래 초대 황제가 넘어섰다는 곳은 일야관 내성(內城)이 되었고, 내가 나라드마의 공격으로부터 지켜 낸 곳은 외성(外城)이었다.
내성도 웬만한 성벽 못지않은 높이였지만, 오랜 기간 증축을 거듭한 외성만큼 높지는 않았다.
일야관에 걸려 있는 다양한 깃발 중 가장 큰 깃발이 눈에 들어왔다.
돌 절벽 아래 파도가 일렁이는 문장, 노체 가문의 문장이었다.
그걸 보던 변경백이 한마디를 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리 버티고 있는 겐지……."
옆에 있던 카른이 변경백의 말을 받았다.
"남은 흰 원숭이를 모두 투입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실전에서의 흰 원숭이의 파괴력은 증명되지 않았습니까."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네."
이번에는 아버지였다.
"저들이 버티는 것은 우리가 쉽사리 공격을 하지 못하는 것을 알기 때문일세. 일야관은 방비가 잘되어 있는지라 엄청난 희생을 각오해야 한다네. 수도에서 잃었던 병력 이상을 잃을 수도 있을게야. 그리고……."
아버지가 내 쪽을 흘끔거리며 눈치를 보자, 그레이스가 답답했던지 말을 가로챘다.
"어느 부대 사령관 하나가 인질로 잡은 귀족들을 마구잡이로 처형하는 바람에 우리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다죠? 이미 전란과 내전으로 인해 귀족들이 많이 죽은 상태이기도 해서, 저 안쪽에 틀어박힌 대귀족들의 협력 없이는 앞으로의 제국 통치가 힘들어진다는 점도 한몫할 거고요."
"산탄다르 공의 말도 맞다네. 사실상 우리 쪽에서 화해를 청하는 그림을 원하고 있는 게야. 자신들의 가치를 올리려고 말일세."
아버지의 말에 카른이 혀를 내둘렀다.
"이 판국에 말입니까? 영악한 것도 도가 있지!"
아버지가 씁쓸하게 웃고 답했다.
"이게 중앙 정계라네. 턱 바로 아래 칼이 들어와도 끝까지 허장성세를 부리며 다음 패가 무엇인지 묻곤 하지. 아마 다른 관문들이 모두 함락됐다는 소식이 전해진다면 그때쯤 항복 의사를 전하지 않을까 싶네. 그동안 우리는 이렇게 기다리는 수밖에는 없겠지."
아버지의 말에 틀린 부분은 없었다.
일야관은 그 자체로 거대한 장애물이었기에 넘어서려면 보통의 노력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 사실은 저 위에 서 본 내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외성 밖에 있는 에베군, 제뉴인군과 수도 쪽에 있는 우리가 몇 날 며칠간 합공을 퍼부어도 쉽사리 열리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안에 있는 귀족들은 우리의 적이긴 했으나, 경과야 어찌 되었건 죽은 황제를 비호하기 위해 모인 세력이었다.
앞으로의 순탄한 정국을 위해서라도 저들을 끌어안을 필요가 있었다.
적어도 내가 이들과 함께할 경우라면 그럴 필요가 있었다.
"카른."
"투입 가능한 흰 원숭이는 2마리였던가?"
"수도 성벽에서 떨어진 한 녀석도 목숨은 붙어 있습니다. 며칠 지나면 회복이 완료될 것 같다고 합니다."
"정확히 얼마나 걸리지?"
"일주일……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좋아, 일야관에 최후통첩을 보내지."
"최후통첩이라 하심은 어떤……."
"일주일 후까지 무조건적인 항복과 그동안 누려 왔던 귀족으로서의 권리를 제국에 반납하지 않으면 일야관을 지도에서 사라지게 만들 거라고."
내 말을 들은 아버지가 놀라 외쳤다.
"시안! 무슨 말이냐! 내가 한 말을 못 들은 게냐? 저들은 그저 버티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힘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우리가 힘을 쓰지 않으면, 상황이 정리된 후 저들이 힘을 씁니다. 이미 제국은 쇄신의 단계에 들어섰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새로운 제국에 과거의 얼룩이 번지는 것을 놔두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너무 많은 희생이 따르지 않느냐. 시간이 해결할 수 있는 일이다. 왜 이리 서두르느냐."
"아버지, 여기까지 오는데 많은 피가 흘렀습니다. 그 피가 바라는 것이 불완전한 완성일까요? 저는 그리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한……."
마지막 말을 꺼내는 데는 큰 결심을 해야 했다.
"지금까지 흘린 피에 비하면 일야관에 흐를 피는 아주 적은 피입니다. 눈앞의 작은 것을 아끼려다 멀리 있는 큰 것을 잃고 싶지 않습니다."
"시안! 네 말도 일리가 있지만 너무 급해!"
그레이스가 나를 말리려 들었다.
그러나 나는 명령을 거둘 생각이 없었다.
"카른, 총사령관으로서의 명령이다. 일주일 후, 총공세를 펼친다. 그동안 군율을 해치는 자는 내 이름을 대고 죽여도 좋다. 로하나스, 남은 반오러 물질을 일야관 공략에 모조리 쏟아붓는다. 이상."
모두가 얼어붙었다.
나는 뒤돌아서 개인 막사로 향했다.
몸을 돌리며 마주친 변경백의 눈에서 의심의 빛이 읽혔다.
그래, 묵묵히 바라보는 눈으로 변경백은 많은 것을 읽었더랬지.
이번에는 나도 읽혀 버린 것 같았다.
***
그날 밤 변경백은 시안의 막사를 찾았다.
시안의 막사에 다다랐을 때, 변경백은 안에서 나오는 저비스와 마주쳤다.
저비스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저비스 포츠라니……. 마법 제약의 명가인 포츠라니 가문의 적통. 수년간 카몰 후작을 곁에서 보좌했지……. 대외적으로 반오러 물질은 카몰 후작 혼자 만들어 낸 것이지만, 그 물질과 가면을 분석한 우리 마법사들 말로는 마법 제약과 광물 주조에 뛰어난 자질이 있는 자들이 도왔을 것이라고 했다……. 역시 저비스 저자인가……. 나이도 어려 보이는데…….'
빠르게 생각을 마친 변경백이 스쳐 가는 저비스를 향해 말했다.
"잠시."
저비스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변경백이 태산 같은 몸을 돌려 저비스에게 서릿발 같은 질문을 날렸다.
"병상에서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었다고 들었는데, 몸은 괜찮으신가?"
변경백의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저비스는 이 상황을 얼른 벗어나야 한다고 느꼈다.
"염려해 주신 덕에 많이 좋아졌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로군. 각하께서 이 늦은 밤에 병자를 데리고 무슨 얘기를 하셨는지, 실례가 아니라면 물어봐도 되겠는가?"
"벼, 별 얘기 아니었습니다. 난리가 끝난 이후의 계획 정도를 물어보셨을 뿐입니다."
"그래? 후작께서 본인의 계획도 이야기해 주시던가?"
"아닙니다. 그저 제 계획만……."
"그렇다면 자네의 계획을 나도 들어볼 수 있겠는가?"
툭툭 내던지는 변경백의 말이었지만, 저비스는 자신이 한쪽으로 몰이당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
"저를 찾아오셨으면 들어오시지, 왜 애먼 사람을 잡고 계십니까."
밖에서 두런거리는 소리를 듣고 나온 시안이었다.
"사람을 잡다니, 누가 들으면 크게 오해하겠네 그려. 후작과 워낙 친분이 있는 자이니 궁금해서 그랬네."
시안은 저비스에게 어서 가 보라는 눈빛을 보내고 변경백에게 말했다.
"들어오시지요. 그렇지 않아도 부탁할 것이 있었습니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변경백이 막사 안으로 들어섰다.
시안의 옆에 낯익은 인물이 서 있었다.
"공주 마마를 생포하는 데 큰 힘을 발휘했다 들었네."
변경백의 말에 알버트가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우연이었습니다. 늙은 몸으로 방해나 되지 않으면 다행이었는데 말입니다."
그 말에 변경백과 시안은 몹시도 심한 위화감을 느꼈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시안이 변경백에게 자리를 권했다.
"앉으시지요. 그렇지 않아도 부탁할 일이 있었습니다."
"부탁? 어떤 부탁?"
"가족에게도 꺼내지 못할 부탁입니다. 꼭 들어주신다고 약조를 해 주시지요."
시안의 강권에 변경백이 떨떠름한 얼굴이 되었다.
"일단 들어나 봤으면 하네만……."
제법 시간이 흐른 뒤, 변경백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외쳤다.
"일야관을 점령한 뒤에 본인을 압송하라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겐가!"
***
한적한 산길을 세 마리의 말이 달리고 있었다.
각각의 말에 사람이 올라탄 채로, 계속해서 말에게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으앗!"
행렬의 맨 뒤에서 말을 몰던 자가 휘청하며 낙마할 뻔했다.
앞서 달리던 둘 중 하나가 말머리를 돌려 뒤로 붙었다.
"조금 쉬었다 가시지요? 벌써 수도를 떠난 지 일주일째입니다."
로하나스의 걱정스러운 물음이었다.
"더 빨리, 카몰에 더 빨리 도달해야 합니다."
익숙지도 않은 말을 타느라 몸에 잔뜩 근육이 뭉치고, 잠도 줄여 가며 달리느라 눈 아래가 퀭한 저비스가 답했다.
"지금 저비스 님의 몸 상태나, 이 말의 상태나 휴식을 해야 합니다."
그제야 저비스는 자신이 타고 온 말이 거친 숨을 뿜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나야 그렇다치고, 당신네들 말은 어떻게 그렇게 줄곧 쉬지 않고 달릴 수 있는 겁니까?'라는 말을 하려는 찰나, 저비스는 옆에서 자신을 끌어당기는 강한 힘을 느꼈다.
"으억!"
말 옆으로 떨어지는 저비스를 오델리아가 공주님 안기로 받았다.
그러고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저비스 아래를 바치던 손을 풀어 버렸다.
그 탓에 저비스는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어야 했다.
"으악! 뭐 하는 겁니까! 오델리아 경!"
"저비스 님의 행동이 저희의 목적에 심각한 지체를 불러 온다 생각했습니다. 부디 무례를 용서하시길. 잠시 눈을 붙이고 6시간 후에 출발하겠습니다."
얼떨떨해하는 저비스를 두고, 오델리아가 질풍의 옆으로 가서 배낭 몇 개를 풀어 간이 야영 장비를 꺼냈다.
한참 장비를 챙기던 오델리아가 멍하니 서 있는 로하나스를 보고 인상을 썼다.
"애송이! 뭐 해!"
"아! 예! 갑니다!"
그때까지도 오델리아에게 공주님 안기로 안겨 있던 저비스의 모습을 곱씹던 로하나스가 펄쩍 뛰어 숨결의 옆으로 가 야영 장비를 꺼냈다.
그걸 본 저비스는 나무 등걸에 기대어 앉아 천천히 숨을 돌렸다.
'벌써 일주일인가…….'
시안의 막사 앞에서 변경백을 마주친 것이 지금으로부터 딱 일주일 전이었다.
'지금쯤 일야관 공성이 시작되었겠지.'
일야관에 틀어박힌 자들이 항복을 하든 항복을 하지 안 든 시안은 그들을 곱게 살려 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변경백을 마주친 날, 시안이 자신에게 했던 말이 생각났다.
"저비스, 그동안 고마웠어."
"어째서 그런 말씀을……."
"그냥 들어. 내가 네게 하는 마지막 부탁이야. 반오러 물질의 공정을 모두 불태우고, 너도 잊어. 누가 물어도 모른다고 해. 아마 난리가 끝나면 아버지가 너와 네 아버지의 공로를 높이 사서 적지 않은 영지를 수여하실 거야. 네 안전을 위해서라도 가급적이면 그곳에서 나오지 마. 내 개인적인 일을 완성하고자 반오러 물질을 만들어 냈지만, 이건 이 시대가 품기에는 너무 위험해. 너도 알고 있지?"
저비스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기사라는 단어를 사라지게 할 수 있는 물품이었다.
전이 마법사 이상의 위험성을 지닌 가루였다.
"바로 출발해. 로하나스와 오델리아를 딸려 보낼게."
"왜 이리 못 볼 것처럼 말씀하십니까?"
저비스의 물음에 시안은 엉뚱한 소리를 했다.
"네가 형님이라고 부를 때마다 기분이 묘했어. 시작은 강제였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잖아. 내 스스로 운명을 개척했다는 자부심이 들었지. 고마워."
"예? 오늘따라 영 이상하십니다?"
그런 저비스를 시안이 짧게 한 번 꽉 안았다.
그리고 저비스를 밀어 냈다.
"어서 가. 누가 올라온다. 덩치는 큰데 발걸음은 가벼운 걸로 봐선 변경백이네. 잡히지 않도록 조심하고."
다시 생각해도 뭔가 아귀가 맞지 않았다.
대화라기보다는 알 수 없는 시안의 말을 듣다 나온 것이지 않은가.
정신을 차린 저비스가 오델리아와 로하나스를 돕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바스락.
품 안에 담아 둔 편지가 느껴졌다.
반오러 물질 공정을 다 파기한 후에, 로하나스와 오델리아에게 전달하라고 시안이 준 것이었다.
"왜 그러십니까? 어디 불편하신 곳이라도 있으십니까?"
"아, 아닙니다. 도와드릴게 없나 해서……."
저비스는 당장 편지를 전달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이내 그 생각은 따뜻한 모닥불에서 몰려오는 훈기와 쏟아지는 졸음에 휩쓸려 사라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