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대 (2)
카몰 내성의 지하 복도.
저비스, 로하나스, 오델리아가 빠른 걸음으로 그곳을 걷고 있었다.
"이쪽은 분명……."
로하나스가 기억을 더듬을 새도 없이, 저비스가 말을 가로챘다.
"후작 각하의 개인 연무장이지요."
시안의 개인 연무장이라는 소리에 혹시나 시안의 그 강력함의 열쇠라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오델리아가 눈을 반짝였지만 복도가 어둑한지라 무언가를 찾기에는 힘들었다.
굳게 닫힌 연무장의 문 앞에 도달한 저비스가 문에 손을 얹고 주위의 마나를 움직였다.
문에서 다양한 문양이 빛을 발하며 솟아오르다가 사라졌다.
철커덕하며 문이 열리는 소리가 어두운 복도를 울렸다.
"사실 각하께선 이곳에서 수련을 하신 적이 없으니 연무장이라고 부르기는 조금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말입니다."
끼익.
저비스가 문을 당겨 열었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입을 벌리고 있는 두 기사를 끌어당겼다.
"놀랄 틈이 어디 있습니까. 흔적을 지워야 한다니까요."
"아……! 예!"
방의 한편에는 뭔지 모를 식물이 빽빽하게 배양되고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그 배양된 식물을 찌고, 말리고, 뒤틀고, 마법적 처리를 하는 기구들이 빈틈없이 채워져 있었다.
마법과는 그닥 친밀하지 않은 삶을 살아 온 로하나스와 오델리아의 눈엔 이곳은 다른 차원의 공간 같았다.
"감자?"
식물에 가까이 다가선 로하나스의 혼잣말이었다.
송곳니 기사단의 수습이 되고 나서는 잘 먹을 일이 없었지만, 평민 출신인 그가 감자를 모를 리가 없었다.
감자를 향해 손을 뻗으려 하자, 공책과 서류 들을 한 곳에 모으던 저비스가 그것을 보고 기겁해서 소리 질렀다.
"안 됩니다!"
날카로운 소리에 로하나스는 물론이고 오델리아마저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성큼성큼 걸어온 저비스가 로하나스와 오델리아에게 뭔가를 쥐어 주었다.
곳곳에 색칠이 된 연무장의 단면도였다.
"이 식물과 기구 들은 아주 섬세하고 위험합니다. 이것들의 후처리는 제가 할 테니, 두 분은 색칠되어 있는 곳에 있는 책과 서류 들을 모두 이곳에 모아 주십시오. 하나도 빠짐이 없어야 합니다. 그리고 제 지시가 있기 전까지 절대! 절대로 오러를 사용하시면 안 됩니다. 아시겠습니까?"
평소 유들유들하고 서생 같은 인상의 저비스가 이렇게 강하게 말하는 것은 처음 보았기에 두 남녀 모두 고개를 끄덕이고 단면도에 색이 칠해져 있는 구역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비스는 고개를 들어 연무장을 가득 채운 기구들을 보았다.
"하……."
저비스가 깊게 숨을 내쉬었다.
시안에 의해 갑자기 불려 와서 이곳에서 저 감자를 연구한 것이 언제인지 아득했다.
쓰러져 잠이 들고, 깨어나면 문 앞에 알버트가 가져다 준 음식이 놓여 있었다.
자발적인 감금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집착이었다.
이 신비로운 식물을 더 탐구하고 싶었다.
학자이자 마법사인 저비스, 스스로 이 모든 것들을 처분하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었다.
'한 줄기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내가 잘 관리할 수 있잖아. 이건 희대의 발명품이야. 이대로 태우기에는…….'
장갑을 낀 저비스의 손이 감자가 배양되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조심스레 흙을 파내고, 감자 알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걸 품속에 넣으려는 순간, 시안의 말이 떠올랐다.
-이건 이 시대가 품기에는 너무 위험해.
그리고 직접 목격했던 전쟁의 참상이 눈앞에 그려졌다.
피로 물든 들판, 주인을 잃은 채 방황하는 군마, 공기에 빽빽하게 들어찬 낮은 신음들까지.
"헉!"
저비스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직접 손으로 사람을 찔러 죽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누가 저비스 보고 '너는 정말 사람을 죽인 적이 없냐?'라고 물었을 때, 당당하게 '아니다!'라고 대답할 자신이 저비스에게는 없었다.
반오러 물질을 흡입하고 저항 한 번 못 해 본 채 죽어 간 사람들의 원망이 귀에 맴도는 것 같았다.
'그래. 나는 이 참상에 적극 동조한 거야. 기념이라니 말도 안 될 일이지.'
저비스는 요새 시안에게서 느껴지는 어두운 기색을 알 것 같았다.
시안은 자신보다 몇 배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있을 것이다.
결국 모든 것의 시작은 그에게서 나왔고, 지금에 와서는 스스로 끝맺음을 하려 하지 않던가.
저비스는 손에 힘을 꾹 주었다.
감자의 단단함이 손에 전해져 왔다.
'이런 진귀한 것을 연구할 수 있었던 기억만 남기자.'
굳게 결심한 저비스는 품속에 있던 감자를 꺼내 배양토 위로 올려놓았다.
그리고 배양토가 담겨 있는 판을 하나하나 꺼내어 로하나스와 오델리아가 옮기고 있는 서류 주위로 가져다 놓기 시작했다.
***
"네, 그게 마지막인 것 같군요. 수고하셨습니다."
연무장의 이곳저곳을 확인하던 저비스가 기구의 제어장치들을 하나하나 분리하며 말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비스가 손을 내려놨을 때, 연무장의 바닥은 엉망진창이었다.
중구난방으로 쌓여 있는 연구 자료와 참고 서적, 조각조각 분리된 채로 책상과 선반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기구, 바닥 곳곳에 흩뿌려진 감자와 흙더미까지.
마지막 서류 더미를 내려놓은 로하나스가 허리를 피며 말했다.
"누가 보면 사람이 안 산 지 몇 년은 된 집인 줄 알겠군요. 자, 이제 뭘 하면 됩니까?"
"제가 문을 열 때, 오러를 운용하시면 됩니다. 두 분 다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한 분만요."
그 말에 오델리아가 의문을 표했다.
"그게 전부입니까?"
"예, 느끼셨겠지만 이 공간에는 굉장히 많은 보안장치가 되어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오러를 감지하면 이 기구들이 발화하면서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태우는 장치입니다. 이걸 이렇게 쓰게 될 줄은 몰랐는데, 참……."
"만일 오러를 운용할 줄 아는 침입자가 이곳에 침입했을 때, 안에 저비스 님이 계셨다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안전장치 정도는 있겠지요?"
"없습니다."
이번에 놀란 것은 로하나스였다.
"예?"
"그 경우 저도 타 죽었겠지요. 두 분은 여기서 만들어진 것의 위험성을 아시지 않습니까. 보안을 피할 공간이 안에 있다면 침입자가 그곳에 숨었다가 물건을 훔쳐 가거나, 저를 납치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만일에라도……."
"만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각하께서도 로하나스 경처럼 생각하시고 제 몸을 피할 공간 정도는 만드는 게 어떻겠냐고 하셨지만, 제가 거절했습니다. 제가 만들어 낸 물질입니다. 저만큼 위험성을 아는 자는 또 없을 겁니다."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나오는 저비스의 말에 로하나스는 왠지 모를 숙연함을 느꼈다.
비록 기사와 마법사라는, 다른 길을 걷고 있지만 존경심이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오델리아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다시 한번 연무장을 쭉 돌며 놓친 것이 없나 확인하고, 저비스에게 말했다.
"시작하시죠. 오러 운용은 제가 하겠습니다."
저비스가 문에 손을 대자 다시 한번 문이 철커덕 소리를 내며 열렸다.
"제가 됐다고 할 때 빠져나오시면 됩니다. 시작하시죠."
저비스의 말에 오델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
숨을 깊게 들이 쉰 오델리아가 몸 곳곳으로 오러를 밀어 보내기 시작했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넘실대고, 피부에 핏줄이 툭툭 솟았다.
그러자 그녀 주위에 널브러져 있던 기구들이 순식간에 새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펑, 펑.
몇몇 기구는 달아오르는 것으로 모자라 부풀고, 터지기까지 하는 실정이었다.
"됐습니다!"
오델리아가 몸을 뒤로 뺐다.
문에 몸을 대고 준비하고 있던 로하나스가 힘껏 문을 앞으로 밀었다.
쾅!
"나오세요!"
로하나스를 거칠게 밀어 낸 저비스가 문에 손을 대고 마법을 영창하기 시작했다.
안쪽에 공기를 밀어 넣어, 불을 더욱 커지게 만들 생각이었다.
문 너머에서 마치 괴물이 그르륵거리는 듯한 소리가 잔뜩 들리더니 얼마 후에는 타닥타닥거리는 소리로 바뀌고, 다시 시간이 조금 더 지나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끼이익.
다시 문을 연 셋의 눈에 보이는 것은 온통 까만 재가 되어 버린 물건들이었다.
"이야……. 이건, 남아 있는 게 없겠는데요."
재를 뒤지던 로하나스의 말이었다.
그런 로하나스에게 오델리아가 말했다.
"모르지. 옷 벗어."
"예?"
"몸이나 옷에 숨겼을 수도 있잖아. 확실히 하자고. 저비스 님, 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잠시 망설이던 둘은 오델리아가 먼저 속옷만 남기고 옷을 훌훌 벗는 걸 보고 왠지 망측해져 겉옷을 벗어던지고 말았다.
두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가 잿더미 가운데서 속옷만 입고 있는, 참으로 진귀한 광경이었다.
"확인 다 했나?"
오델리아가 자신이 벗어 놓은 옷을 확인하고 있는 로하나스를 재촉했다.
자연스레 고개를 돌리던 로하나스가 여전히 오델리아가 속옷 차림인 것을 알고 고개를 반대로 돌렸다.
"예, 끝났습니다."
"확실하게 해, 나처럼."
이미 로하나스와 저비스의 옷가지는 낱낱이 까발려서 재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저비스의 품에 있던 편지가 오델리아에게 의해 들켰으나, 편지를 봉인한 밀랍에 찍혀 있는 시안의 문장을 보고 오델리아는 저비스가 뭔가 따로 맡은 것이 있겠거니 하고 넘어갔다.
"확실합니다."
"좋아, 임무 완수로군. 옷 입어. 돌아가자고."
재를 털어 내며 옷을 입던 저비스의 뒷골에 식은땀이 흘렀다.
'만일 아까 감자를 넣어 놨다가 지금 걸렸으면 나는 잿더미 속에서 죽었겠지?'
다행이었다.
그리고 자신을 이곳에만 두지 않고 직접 전장을 목격하게 해 책임감을 심어 주려 했던 시안이 지금 이 순간 누구보다 고마웠다.
***
카몰 본성이 저 뒤의 작은 점으로 보일 때쯤, 제법 먼 거리를 달려왔다 생각한 일행이 야영을 준비했다.
"오델리아, 아쉽지 않습니까?"
"뭐가?"
"일야관 공격에 참여하지 못했지 않습니까. 각하께서 저와 당신에게 이런 임무를 맡겼을 때, 당연히 거부할 줄 알았습니다."
"……황궁에서 황제와 각하의 전투를 보기 전의 나였다면 그랬겠지."
로하나스가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날 자신이 보았던 것은 상식을 초월하고 한계를 넘어선 무언가였다.
그들을 인간으로 칭하기에는 같은 범주로 묶인 자신이 너무 초라해지는 기분이었다.
"조금 쉴 시간이 필요했어. 다시 마음을 다잡을 시간 정도? 그리고 오래간만에 이렇게 돌아다니니 예전에 방랑했던 시절도 생각나고 해서 좋아. 두셋씩 다니는 여행도 나쁘지 않은 것 같고."
전장에서 멀어져서 그랬을까?
둘은 부담을 내려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렇게 야영을 할 준비가 끝나고, 작은 모닥불을 두고 로하나스, 오델리아, 저비스가 모여 앉았다.
"오늘 푹 쉬십시오. 내일부터는 수도까지 강행군이 될 겁니다."
오델리아가 저비스를 향해 말했다.
저비스는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고 품속에 손을 넣어 편지를 꺼냈다.
재가 묻어 군데군데가 거뭇해진 편지를 오델리아에게 내밀었다.
"일을 마치면 각하께서 두 분께 드리라 한 편지입니다."
의아한 표정의 오델리아가 편지를 받아 봉인을 뜯어 냈다.
로하나스가 편지를 보기 위해 자연스레 오델리아의 옆에 붙어 앉았다.
편지의 첫 마디는 이랬다.
-로하나스 이반, 오델리아 탈린카, 둘은 이 편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