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대 (3)
편지를 읽어 내려가던 로하나스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마지막 마침표에 도달한 로하나스의 시선이 저비스에게로 향했다.
"알고 계셨습니까?"
"저는 편지를 읽은 적도 없고, 언질을 받은 것도 없습니다. 실례가 아니라면 무슨 내용이었습니까?"
입술을 꾹 물고 있던 로하나스가 내용을 털어놨다.
"후작께서 저희 둘을 기사단에서 영구 제명하셨습니다! 조금 더 넓은 세계를 경험하라면서요. 사힘 너머나 대장벽 너머도 가 보라십니다! 남쪽으로 가도 괜찮고요! 허, 참!"
"예?"
당장이라도 편지를 뺏어서 확인하고 싶은 저비스였지만, 편지를 가지고 있는 오델리아의 표정이 너무나 심각했기에 차마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로하나스는 지금 자신에게 닥친 상황이 납득이 되지 않는지 일어서서 모닥불 주위를 서성였다.
"말은 바로 해야지."
오델리아였다.
"더 넓은 세계를 경험하라는 건 내게 전하신 말이고, 너는 그게 아니잖아."
"아니……."
로하나스의 얼굴이 붉어졌다.
대체 무슨 내용인 걸까.
궁금증을 참지 못한 저비스가 오델리아에게 물었다.
"좀 볼 수 있겠습니까?"
오델리아가 눈빛으로 로하나스에게 동의를 구했다.
'어, 그, 저…….' 하던 로하나스가 결국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편지를 넘겨받은 저비스가 빠르게 편지를 훑었다.
로하나스의 말에 거짓은 없었다.
다만 더 세부적인 내용들이 있었다.
둘을 영구 제명한다는 말, 검은 늑대 기사단은 앞으로 황궁으로 들어가 이전에 붉은 방패 기사단이 수행하던 역할을 이어받을 것이라는 말, 이런 일은 오델리아에게 맞지 않을 것이니 미리 내보낸다는 말, 자신을 찾아오지 말라는 말, 퇴직금은 넉넉하게 챙겨 놓았으니 제뉴인 공작에게 받아 가면 될 것이라는 말까지.
'뭔가 직감하신 건가.'
자신이 카몰로 출발하기 전, 심상치 않았던 시안의 행동을 저비스는 떠올렸다.
주변을 정리하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저비스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앞으로 그분의 앞에는 탄탄대로만 남아 있지 않는가.
'대체 무슨 생각이신지 알 수가 없네.'
그리고 편지 맨 마지막, 추신에 눈이 닿았다.
-추신. 로하나스, 너까지 보내면 칼이 많이 실망할 것 같긴 한데, 네 자리는 수도가 아니라 그쪽이 좋을 것 같아서 보낸다. 고마워할 필요는 없어.
눈을 한 번 찌푸린 저비스가 로하나스와 오델리아를 한 번씩 살폈다.
로하나스는 괜히 헛기침을 하며 자신의 시선을 외면했고, 오델리아는 모닥불을 보며 뭔가 생각 중이었다.
'저 둘이?'
참 기묘하지만 어떻게 보면 괜찮게 보이기도 한다고 저비스는 생각했다.
편지를 오델리아에게 돌려준 뒤 저비스가 조심스레 물었다.
"두 분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오델리아가 가볍게 답했다.
"좋은 선택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각하께 도전하려면 더 발전해야 한다고 느끼고 있었으니까요. 세계에는 강자가 많습니다. 오래간만에 얻은 자유군요."
"오델리아! 어찌 그리 쉽게 말하십니까!"
득달같이 반박하면서도 로하나스는 칼이 자신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오델리아가 기사단에 남아 있는 건 강함을 추구하기 위함이라는 말.
검은 늑대 기사단이 황실 기사단이 되면 어떤 명예와도 비할 수 없겠지만, 실전 경험을 쌓을 기회는 훨씬 줄어들 것이 분명했다.
로하나스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기사단은 곧 가문의 상징. 각하의 말씀대로라면 검은 늑대 기사단 전체가 황실 기사단이 된다는 건데, 이런 예가 있던가? 애초에 기껏 최강의 전력으로 만들어 놓고 무엇이 아쉬워서 통째로 넘긴다는 것이지? 각하께서 생각하시는 건 대체…….'
엉켜 버린 생각의 실타래를 로하나스가 한참 풀고 있는데, 오델리아가 한마디를 툭 던졌다.
"애송이와 여행하는 것도 나름 괜찮을 것 같고."
퍼뜩 놀란 로하나스가 오델리아를 바라봤다.
여전히 모닥불을 쳐다보고 있는 오델리아였지만 로하나스는 왠지 오델리아의 뺨이 조금 붉어졌다고 느꼈다.
모닥불의 열기 때문이었을까.
"그렇다면 오델리아 경께서는 자유 기사가 되기로 하신 걸로 알면 되겠습니까?"
저비스의 물음에 오델리아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로하나스 경께서는……?"
제법 긴 시간을 고민하던 로하나스가 큰 결심을 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각하께서도 생각이 있으시겠죠."
저비스가 아쉽다는 얼굴을 했다.
"그럼 두 분과 함께 있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군요. 저는 계속해서 수도로 향할 예정입니다. 두 분은 어디로 가실 예정이십니까?"
로하나스가 오델리아를 바라봤다.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데, 오델리아가 갑자기 손에 있던 편지를 모닥불에 던져 넣었다.
"오델리아 경!"
"후작 각하의 직인과 친필입니다. 혹시 악용될 수 있으니 없애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고는 일어서서 모닥불을 끄기 시작했다.
당황한 저비스가 벌떡 일어났다.
"버, 벌써 이동하십니까? 어디로 가시려고 하십니까? 적어도 카몰을 벗어날 때까지는 함께 가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오델리아! 행선지가 어디인지는 알고 갑시다! 오델리아!"
불빛이 많이 약해진 모닥불 앞에서 오델리아가 야영을 하기 위해 펴 놨던 저비스의 자리를 가리켰다.
"정리하시죠."
로하나스의 자리를 보고서도 똑같이 말했다.
"너도."
"영문이나 알고 치웁시다!"
"여행의 첫 번째 행선지는 수도. 제국 밖으로 벗어나는 건 그 이후야."
"분명 편지에 찾아오지 말라고 되어 있지 않습니까?"
"누가 각하한테 간대? 그냥 목적지가 수도라고. 행선지는 여행객 몫 아니야? 뭐, 수도에서 우연히 만날 수도 있고. 그럼 어쩔 수 없지."
그러고는 다시 묵묵하게 주변 정리를 시작하는 오델리아였다.
잠시 멍해 있던 로하나스와 저비스가 번개라도 맞은 듯 허겁지겁 정리를 시작했다.
어느새 준비를 마친 오델리아가 그 둘의 뒤에 대고 말했다.
"최소한의 휴식만을 취하면서 수도로 가겠습니다. 불편해도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비스 님."
"아, 예.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저비스가 허둥지둥하고 있자 채비를 마친 로하나스가 와서 도왔다.
그 틈을 타 저비스가 로하나스에게 살짝 말했다.
"같이 다니면 고생 좀 하시겠는데요."
로하나스가 싱글벙글 웃었다.
"그러려니 해야지요. 저 아니면 누가 오델리아를 감당……."
"빨리!"
어느새 질풍에 올라앉은 오델리아의 불호령에 두 남자의 손이 더욱 빨라졌다.
***
셋이 수도에 도달한 것은 5일 후였다.
갈 때도 빠듯하게 일주일이 걸린 거리를 5일에 주파했으니, 저비스는 죽을 지경이었다.
지친 몸을 이끌고 수도 내의 몬트라우 가문 저택으로 향하니 의외의 인물이 나와 셋을 맞았다.
"저비스!"
"공녀님? 몸은 괜찮으신 겁니까?"
자신들을 향해 뛰어오는 캐슬린에게 로하나스와 오델리아가 말에서 내려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예를 표했다.
역시나 말에서 내린 저비스에게 캐슬린이 달려들었다.
"어떻게 된 거야? 깨어나니 왜 오빠는 황궁에 감금되어 있고, 아버지랑 어머니는 아무 말도 안 하시는 거야! 아무도 말도 안 해 줘! 한스도, 케인즈도, 알버트도! 너는 어디 갔다 오는 건데!"
폭풍처럼 쏟아지는 캐슬린의 말이었다.
거의 울다시피 하는 캐슬린을 시종들이 달려들어 떼어 냈다.
다른 시종들이 달려와 셋의 말고삐와 짐을 받아 바리바리 사라졌다.
몬트라우 저택의 집사, 케인즈가 다가와 말했다.
"두 기사분의 무구는 저택 내의 송곳니 기사단 숙소에 보관하고 있겠습니다."
시종들이 달려와 로하나스의 검, 방패, 단창과 오델리아의 대검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케인즈는 셋을 저택 안으로 안내했다.
"공작 각하께서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저희를요?"
저비스의 반문에도 불구하고 케인즈는 그저 사무적인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케인즈가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각하, 포츠라니 가문의 장자인 저비스 포츠라니 님과 기사 두 분을 모셔왔습니다."
문이 열리고, 셋은 안으로 들어섰다.
제뉴인 공작은 로하나스와 오델리아에게 눈도 주지 않은 채로 저비스를 향해 차분하게 말했다.
"포츠라니 백작과 네 공로를 인정해서 노체 공작령 중 일부를 떼어 포츠라니 백작령으로 선포하기로 했다. 또한 저비스 너는 자작으로 봉해질게다. 봉지를 받지는 못하겠지만, 내가 직접 건의드려 유명 약초 산지인 활린 계곡 일부를 네 개인 사유지로 만들 거다. 공주 마마께서 대관식을 마치고 황위에 앉으시는 대로 진행이 될 것이다."
"가, 감사합니다만……."
저비스가 당황하는 찰나 로하나스가 나섰다.
"후작께서는 어떻게 되신 겁니까? 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듣고 싶습니다. 검은 늑대 기사단이 어째서 황실 기사단이 되는 것이며, 후작께서 감금되어 있다는 것은 또 무슨 말입니까!"
감금이라는 말에 공작이 로하나스를 응시했다.
"그럴 만하니 그리된 것이다. 더 이상 시안을 언급하지 마라. 로하나스, 듣기로 둘은 기사단에서 제명되었다지? 떠돌이 기사와 얘기를 나누고 있을 시간은 없다."
"오다가 공녀님을 만났습니다! 뭘 감추고 계신 겁니까! 후작께서는 어디에 계십니까? 뵈어야겠습니다. 떠날 때 떠나더라도 인사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습니까!"
"로하나스! 내가 너한테 무례를 가르쳤더냐!"
시안의 계획에 둘 다 걸려들어서 만들어진 결과이긴 했지만, 제뉴인 공작은 로하나스의 스승이기도 했다.
스승의 호통에 로하나스가 움찔했다.
신분으로 보나 관계로 보나, 로하나스가 공작에게 더 이상 큰 소리를 내기는 어려웠다.
입술을 꾹 다문 로하나스가 고개를 내렸다.
"실례했습니다."
"케인즈가 각자 방을 내줄 게다. 며칠이든 좋으니 푹 쉬다 떠나거라. 너희가 가져가야 할 돈도 말하면 내어주마. 소출이 넉넉한 땅도 떼어 너희 앞으로 돌려놓았으니, 여비가 부족할 일은 없을게다. 나가 봐도 좋다."
마지막까지 꼿꼿이 서서 공작을 응시하는 오델리아를 로하나스가 간신히 돌려세웠다.
다음 날 귀족원에 다녀온 저비스가 가져온 소식은 오델리아와 로하나스의 입을 떡 벌어지게 하기 충분했다.
"예? 변경백께서 후작 각하를 직접 나포한 것으로 모자라, 검은 늑대 기사단이 각하께 칼을 들이대요? 대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그것이……. 일야관을 공격하던 도중 각하께서 노체 공작과 내통하는 징후가 있었다고 합니다."
"내통이요? 각하께서 노체 공작과요?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따라 갈 수가 없습니다!"
"그, 왜. 각하께서 영내에 있는 옥(獄)에 다녀오신 날, 레이바와 지크프리트는 죽였는데 궁정백과 이르한은 죽이지 않으시지 않았습니까. 그때부터 얘기가 조금씩 돌았던 모양입니다. 각하께서 노체 공작 측과 모종의 거래가 있지 않았나 하는……."
"그래서요?"
"공격 3일 차에 검은 늑대 기사단의 단장이 순찰 중에 노체 공작과 각하께서 몰래 만나는 걸 봤답니다. 단장은 고민하다 이 사실을 변경백께 알렸고요. 변경백께선 병사들을 이끌고 바로 나섰고, 엄청난 희생을 내면서 각하를 생포하는데 성공했다 합니다. 후작께 하사되었던 모든 영지와 작위가 반납되었고, 현재 황궁에 감금되어 계시답니다."
"단장님이 밀고를 하고, 각하께서 생포되어 감금이라니!"
"검은 늑대 기사단은 공로를 인정받아 새로운 황제께서 즉위하시면 황실 소속 기사단이 될 거라고 합니다. 최강의 전력을 황실에서 날름 받아먹겠다는 것이지요."
저비스와 로하나스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오델리아가 일어섰다.
"단장님을 좀 만나 봐야겠어."
***
황궁 안 고즈넉한 정원, 나는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정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식어 가는 차를 보고 있자니 혼잣말이 나왔다.
"알고 한 건 아니겠지?"
2황자에게 처음 초대되었을 때 황자가 내게 내어준 것과 같은 차였다.
괜히 기분이 이상해져 차를 휘휘 젓고 있는데 뒤에 있던 알버트가 말했다.
"차를 그렇게 마구 휘저으시면 보기에 좋지 않습니다."
"하하하, 오랜만에 혼나는 것 같네. 그렇지 않아?"
빙그레 웃은 알버트가 말했다.
"저도 지금까지 도련님을 혼낼 줄은 몰랐습니다. 흠…… 변경백께서 오시는 것 같군요."
"나도 느꼈어. 한창 바쁘실 양반이 자주도 오셔."
시간이 제법 흐른 뒤, 명목상 내가 '감금'되어 있는 곳으로 변경백이 들어왔다.
옆에 털썩 앉는 변경백에게 내가 물었다.
"대관식 준비는 잘되어 갑니까?"
"나쁘지 않다네. 대관식이 끝나면 황제께서 그대를 죽이라 명하실 텐데, 내가 보기에 어째 그대는 그날을 고대하는 것 같으이?"
내가 기지개를 쫙 켰다.
"고대되지요. 무거운 짐에서 해방인데요."
변경백이 혀를 찼다.
"쯧쯧, 무정하기는. 오늘도 궁 앞에 로하나스와 오델리아가 왔다고 하네. 뭐라고 말이라도 해 주는 게 좋지 않겠는가? 벌써 2주가 넘었네."
"저는 할 말 다 했습니다. 적지 않게 챙겨 주기도 했고요."
"그런 말이 아니지 않은가."
"제 거취는 아는 자가 적을수록 좋습니다. 변경백께서도 동의하시지 않으셨습니까?"
"크흠……."
"사실 지금도 너무 많이 말했나 싶습니다. 변경백님과 아버지, 어머니, 칼까지. 변경백께는 말씀드리지 않는 편이 좋았을까요?"
"에헤이, 또 그리 말하면 내가 섭섭하지 않은가."
한 동안 말이 없이 나처럼 정원을 응시하던 변경백이 작게 한마디를 했다.
"그래도 저리 끈질기게 찾아오는 걸 보면 그대는 참 좋은 기사들을 둔 것 같군."
"찾지 말라는데 끝까지 찾으려 드는, 지지리도 말 안 듣는 기사들이지요."
"하하하하, 둘이 들으면 억울하지 않겠나? 마지막 명령 한 번 어겼을 뿐인데?"
"원래 그런 겁니다. 마지막이 좋아야지요."
투브가 터벅터벅 걸어와 내 발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마지막은 새로운 시작이기도 하니까?
"그렇지."
나도 모르게 투브의 말을 육성으로 답해 버렸다.
변경백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응?"
"아닙니다. 혼잣말입니다."
"사람 싱겁기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변경백이 내게 물음을 던졌다.
"그런데 말일세, 그날 노체 공작은 어떻게 불러낸 겐가?"
내가 씩 웃었다.
"궁금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