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대 (4)
찻잔을 들어 가볍게 차를 한 모금 넘겼다.
알싸한 듯 시원한 향이 코와 입을 메웠다.
"사실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차라리 일야관 안쪽으로 저 혼자 잠입해서 노체 공작의 숙소에 침입하는 것이 더 쉬웠겠지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아무런 증거가 남지 않으니 지금과 같은 상황은 만들어지지 않았겠군."
"맞습니다. 제가 노체 공작과 만났다는 사실을 아군이 알아야 하는데, 저 혼자 들어갔다 나오는 것으로는 목격자가 만들어지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이 계획은 칼이 저와 노체 공작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하나씩 단서를 던져주는 내 화법에 변경백이 몸이 달았는지 앞에 놓인 차를 한 번에 쭉 들이켰다.
마치 할아버지에게 재밌는 옛날이야기를 듣는 어린아이 같았다.
"일단 공격이 시작된 3일간, 저는 적과 접촉할 아군 부대들에게 '이르한이 살아 있다.'라는 말을 퍼트리도록 지시했습니다."
"나도 자식을 둔 아비의 입장으로 이런 말을 하기는 좀 그렇지만, 노체 공작은 이르한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고 들었네만? 게다가 장자인 운트 노체 백작은 공작의 대리로 공작령에 남아 있으니, 매정하긴 해도 후대에 집착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그 말씀도 맞습니다. 사실 이르한은 본인의 능력보다 가문의 후광으로 이루어 낸 것들이 많습니다. 그나마도 다 본인의 무능과 잘못된 판단으로 날려 먹고 저 꼴이 된 것이고요. 하지만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귀족들, 특히 우리 같은 대귀족에 속하는 자들이 하는 모든 것은……."
인상을 찌푸린 변경백이 내 말을 받았다.
"정치이지."
무뚝뚝하고 직설적인 북부인의 기상과 별개로 히베아 변경백은 그런 정치 놀음을 싫어했다.
그가 행하는 인사(人事)의 대부분은 그런 정치와 얼마나 멀어져 있는가를 보는 것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인간사 대부분이 정치이고, 거느린 것이 많아질수록 그 정도는 심해지기 마련이었다.
"예, 그리고 정치는 명분의 싸움이며, 명분은 상징으로 전해집니다."
변경백이 픽하고 웃고는 찻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그새 알버트가 채워 놓은 변경백의 찻잔이 단숨에 비워졌다.
시원하게 찻잔을 비워 낸 변경백이 나를 향해 물었다.
물음이 아니라 확답에 가까웠다.
"궁정백을 죽이지 않은 것은 고위 귀족이라면 타협의 여지가 있음을 남겨 두었음이요, 이르한을 살려 둔 것은 후대를 죽이지 않음으로써 노체 가문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을 보였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겐가? 하찮은 놀음이군."
"아주 근접하셨습니다. 제 의도는 '존중'보다는 '여지'에 가까웠지만 말입니다."
"무슨 소문이 도는 줄 아는가? 후작 그대가 죄수들을 살해하는 취미가 있다고들 수군거리고 있네. 이민족의 수장도 그렇고, 이번 일도 그렇고 모두 자네가 옥에 들어갔다 나온 이후 생긴 일 아닌가. 그런데 그 살인이 모두 계획되었다는 것인가?"
"나라드마의 일은 별개입니다. 그는 제 의도에서 크게 빗나갔지요. 하지만 이번 일은 맞습니다. 제 목적을 이룸과 동시에 후일을 도모한 것이기도 합니다."
"허어……."
변경백이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그대는 대체 어디까지 보고 있는 겐가……."
나는 그저 정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늘하늘 내려오던 나뭇잎 하나가 정원에 있는 연못 가운데에 떨어졌다.
연못에서 길러지던 물고기들이 나뭇잎을 먹이인 줄 알고 수면 위로 자맥질을 해 댔다.
여러 개의 동심원이 생겨나 연못의 가장자리로 퍼져 나갔다가 서로 상쇄되어 사라졌다. 그리고 새로운 동심원을 만들어 내는 것을 반복했다.
저 나뭇잎은 지금의 나였다.
"그대가 보낸 그 상징을 노체 공작이 알아챘다고 하세, 그에게 정확한 연락을 취하는 방법은 무엇이었는가?"
"대장벽에 계실 때 말입니다, 다른 초소에 연락을 보낼 일이 있다면 어떻게 하십니까?"
"전령을 보내거나 마법사들을 이용해 통신 마법을 보내지."
"그대로입니다. 저도 통신 마법을 보냈습니다."
"거짓말! 각 부대마다 통신 마법사들이 이용하는 마나의 영역대가 다르고. 그것마저도 불규칙적으로 바뀌는데, 그대가 무슨 수로 노체군이 통신에 이용하는 마나 영역대를 알아낸단 말인가. 그건 숙련 정도와는 관계가 없지 않은가!"
"맞습니다. 하지만 일야관은 노체군이 틀어박히기 이전에 수도방위병단이 맡아서 관리하던 곳입니다. 수도방위병단의 마나 영역대를 이용했습니다. 3일 내내 공격을 받아서 손이 한창 부족할 텐데, 설마 노체군 소속이 아니었다고 수도방위병단 소속의 통신 마법사들을 기용하지 않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통신 마법사와 중개소의 위치를 정확히 알아야 통신 마법이 성립할 텐데?"
"에이, 아실만큼 아시는 분이 왜 이러십니까. 제가 이민족들을 막은 곳이 저 일야관입니다. 통신 마법 중개소의 위치 정도야 훤히 알고 있습니다. 중개소의 위치뿐이겠습니까. 대략적으로 어디쯤에 지휘 막사가 있을지도 알겠기에 그쪽으로 직접 통신 마법을 보냈습니다."
"그, 그걸 순순히 믿던가?"
"그럴 리가요. 처음에는 무반응으로 일관하다가 이르한에게 들은 노체 가문의 치부 몇 개를 일야관 내의 모든 중개소에 보내기 시작하니 반응이 좀 오더군요."
"사람 거, 악취미하고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그 이후는 뭐 일사천리였습니다. 노체 공작도 전면전을 원하는 것은 아니었을 테고, 흰 원숭이와 반오러 물질 맛을 보니 어질어질했겠지요. 그때쯤 슬쩍 흘렸습니다. '최대한 사정을 봐줄 테니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자. 다만 나도 그쪽과 미리 이야기를 한 것이 걸리면 안 되니 최대한 조심스레 봤으면 한다.'고요."
"그래도 그자가 설마 직접 나올까 했네만……."
"안 그래도 사절을 보내라느니, 아니면 자기 측에서 사절을 보내겠다느니 어떻게든 움직이지 않으려는 바람에 아주 골치 썩었습니다."
"그래, 그랬겠지. 어찌 끌어냈는가?"
"일야관 안에 있는 공작은 노체 공작 한 사람만이 아니었습니다."
몇 초 뒤 변경백이 탁자를 치며 박장대소했다.
"와하하하하! 루지온 공작에게도 똑같은 권유를 하겠다고 협박을 했군! 제국의 공작을 상대로 저울질을 할 줄이야! 미쳤군! 미쳤어! 와하하하하!"
태산 같은 남자가 온몸을 떨어 대며 시원하게 웃으니 방이 쩌렁쩌렁 울리는 것 같았다.
"루지온 공작은 몸이 달아 있었을 겁니다. 제가 노체 공작에게는 무언가 신호를 보내는 것 같은데,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들려오는 게 없으니 말입니다. 실제로 루지온군과 대치한 부대 쪽에서 전해 오기를 루지온군이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패색이 짙은 상황에서 두 공작은 눈치 싸움을 하고 있었을 겁니다."
신나게 웃고 눈물을 닦아내던 변경백이 마무리를 지었다.
"이 다음부터는 내가 아는 이야기로군. 후작이 내게 언질을 주었던 것처럼, 검은 늑대 기사단과 내가 대기하고 있다가 그대와 노체 공작의 밀회 장소를 습격하는 것 말일세."
"예, 그대로입니다. 의문이 해소되셨습니까?"
"완벽하네, 완벽해. 일이 잘 풀린다면 대장벽에 한 번 더 오는 건 어떤가? 아까워서 하는 말일세, 아까워서. 그대가 도와주면 야만인 정벌이 더 쉬워지지 않겠는가?"
"카른도 훌륭합니다. 아들을 더 밀어 주셔야지요."
완곡한 거절에 변경백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문득 생각난 것을 내가 물었다.
"제가 공격한 사람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최대한 뼈나 신경을 피해 찔렀습니다. 마법도 사용하지 않았고요."
변경백과 칼을 비롯한 아군이 나를 추적할 때 상황을 만들기 위해 내가 공격했던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다들 큰 무리 없이 회복될 거라 들었네. 그 짧은 시간에 200여 명이나 다치게 하고 도망갈 줄이야. 기가 막히더군."
"개활지였습니다. 만일 제가 전력을 다하고 이 녀석도 제대로 힘을 보여 줬다면……."
시선이 투브에게로 닿았다.
200여 명이 다치는 게 아니라 2,000명 이상이 죽었을 것이라는 말이 쉬이 나오지 않았다.
변경백도 내가 하려는 말을 알았는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이게 제가 사라져야 하는 이유입니다."
"공주 마마께서는 그대가 결정을 철회해 주길 바라고 계시네."
찻잔을 들었다.
"이 차, 제가 죽인 황제와 마신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황제가 아니라 황태자였지요."
"……."
"그때 황태자는 저를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고, 중히 쓰려 했습니다. 지금 어찌 되었습니까?"
변경백은 말이 없었다.
말을 찾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꽤 기다려 봐도 그는 답변을 내놓지 못했다.
"저는 존재만으로 반체제의 상징이 될 것입니다. 제 의도와는 전혀 관계없이요. 새로운 황제께서는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 거라 보십니까? 황제를 보필하며 제국을 수호할 이타나가문은 그것을 감당할 수 있으시겠습니까?"
한참 후에야 변경백이 입을 열었다.
"그대의 용단, 고맙네."
"제가 원한 것이기도 합니다. 마무리를 잘 부탁드립니다."
고개를 깊게 끄덕인 변경백이 일어섰다.
나가면서 그가 잠깐 멈칫하더니 내게 물었다.
"공작 각하와 공작 부인께서는 그대의 결정에 대해 별 말씀 안 하시던가?"
"안 하셨다면 거짓이겠지요."
"주제 넘는 이야기 같지만, 떠난 후에라도 꼬박꼬박 편지 정도는 보내드리는 게 어떨까 하네. 자식이 어디 있든 궁금해하고 보고파 하는 것이 부모 마음이라네."
내가 뭐라 답할 새도 없이 변경백은 방을 나서 버렸다.
***
일야관 공격을 하루 앞둔 저녁, 나는 어머니와 아버지 앞에 있었다.
"지금 뭐라고 했니, 시안?"
어머니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게 되물었다.
"말씀드린 그대로예요. 모든 일이 끝나면 명목상 저는 적과 내통하고 제국의 기강을 흔들었다는 죄로 잡혀 있다가, 새로운 황제 폐하가 등극하시고 난 뒤에 황권 강화를 위해 죽게 될 거예요."
"명목이라면 실질적으로는 다른 의미가 있다는 거니?"
"예, 제가 세상에서 사라지기 위한 연막이에요."
어머니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어머니의 눈에 눈물이 비쳤다.
일어선 어머니가 양손을 펼쳤다.
"이리와라 내 아들, 한 번 안아 보자."
내가 다가서자 어머니가 나를 부서져라 꽉 안았다.
어머니 역시 백작가의 여식이고 공작 부인이다.
내 존재가 제국과 황실에 얼마나 큰 위험이 되는지 정도는 충분히 알고 계실 터였다.
말없이 내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로 내 뒷머리를 쓰다듬던 어머니가 입을 여셨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 물기가 배어 있었다.
"미안하다, 시안. 아무 도움도 못 주는 엄마라서 미안해."
"못 보는 거 아니에요.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여러 시선에서 벗어나는 걸요. 알버트랑 여기저기 다녀볼 생각이에요. 꼬박꼬박 편지하고, 맛있는 특산물 있으면 제뉴인이나 수도로 보낼게요. 1년에 한 번씩은 얼굴 뵈러 갈 거고요. 너무 걱정 마세요."
나도 모르게 이런저런 말이 재빠르게 튀어나왔다.
여전히 눈물이 그렁그렁한 어머니가 손으로 내 뺨을 만졌다.
"그래, 착하기도 하지."
아버지가 다가와 어머니를 부축했다.
어머니를 조금 진정시킨 아버지가 나를 향해 말했다.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차라리 네가 만인지상이 되는 게 어떨까도 싶구나."
그 말에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저는 고생하고, 아버지는 상황(上皇)으로 뒤에서 좌지우지하시려고요?"
아버지도 빙긋 웃고 말했다.
"그래, 그 정도 호사는 누려 봐야지."
"아버지께서 이런 농담을 하시는 걸 알면, 다른 사람들이 깜짝 놀라 까무러친다니까요. 자중하시죠, 공작 각하."
"종종 찾아 오거라. 언제든 반길 테니."
"예, 그렇게 해야죠. 캐슬린에게는 말하지 마세요. 제가 살아 있다는 걸 알면 괜히 찾겠다고 여기저기 뒤지고 다닐 것 같은데,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제가 직접 나서든가 할게요."
"그래, 그리하마."
마지막에는 아버지의 목소리에도 물기가 묻어 있었다.
나를 걱정해 주는 가족이라는 존재가 있다는 것이 이런 기분이었구나.
참 생경하면서도 따스했다.
-야! 일어나!
이 녀석은 정말 내 기분을 망치는 데 특출 난 재능이 있었다.
눈을 뜨니 여전히 황궁 안이었다.
옆에서는 투브가 펄쩍거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많아!
"내전에 외침까지 겪고 등극하는 새로운 황제잖아. 그 대관식인데 사람이 좀 많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