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대 (5)
수도의 거리거리마다 사람들이 넘쳐 났고 각각의 사람들은 얼굴 한가득 기대감을 품고 있었다.
대관식을 앞두고 사람들이 흥청망청 소문을 떠들어 댔다.
소문의 사실 여부는 관계없이, 그저 되는 대로 떠들기에 바빴다.
어디의 무슨 귀족이 땅을 받을 것이라더라, 베이카 장군이 후작으로 봉해질 거라더라, 카몰 후작이 데리고 있던 드워프를 비롯한 대장장이들이 모두 드워프의 영역으로 갈거라더라, 얄츠 이나타 황실 시종장이 근신 처분을 받을 거라더라 등등 새로운 정보라는 명목으로 소문은 빠르게 퍼졌다.
그것은 관리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았다.
황궁으로 바삐 걸음을 옮기는 두 관리가 서로를 알아보고 눈인사를 했다.
키가 큰 관리 하나와 키가 작은 관리 하나였다.
입궐을 기다리며 둘은 자신들이 들은 소리를 주워섬기기 시작했다.
키 큰 관리가 먼저 화제를 던졌다.
"들었는가? 노체 공작과 루지온 공작이 공작령 절반 이상을 황실에 바쳤다는구먼."
"그렇게라도 해야 살아남지 않겠는가? 그 두 공작이 제국에 한 짓을 생각하면 가문 자체가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지경인데. 심지어는 작위를 강하시킨다는 말도 돌지 않나. 어차피 리히트 공작 가문이 멸족해서 6공작이 되었는데, 4공작이 되지 못할 건 뭔가."
"허어…… 그렇게 보면 에베 공작이 참 줄을 잘 탔어. 원래대로라면 1황자파 아닌가. 카몰 후작에게 붙은 덕에 작위도 유지하고, 리히트 지방도 자연스레 흡수한 모양새가 되었고. 대체 전대 에베 공작이 카몰 후작에게서 뭘 봤길래 변절을 했을까 궁금하지 않나?"
"에헤이! 카몰 후작 얘기는……."
"이런, 입이 방정이군."
다들 쉬쉬하고 있지만 카몰 후작은 대관식이 끝나고 처형될 예정이었다.
괜한 오해를 받지 않으려면 입에도 담지 않는 편이 좋다는 것을 두 관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잠시간의 어색함이 지나고, 기다림에 지친 관리가 고개를 쭉 들어 뒤쪽을 바라보았다.
마차가 통과할 수 있는 문 쪽으로 온갖 귀족들의 마차들이 달려가고 있었다.
어찌나 많은 귀족들이 몰려드는지, 마차들이 황궁 입구에서 한참 멀어진 곳까지 줄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오! 변경백이시군."
계속해서 목을 빼고 뒤를 흘끗거리던 키 큰 관리가 말했다.
줄을 서 있는 다른 귀족들의 마차와 달리 이나타 가문의 휘장이 걸려 있는 마차는 별도의 길을 통해 빠르게 황궁으로 진입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키 작은 관리가 한마디를 내뱉었다.
"같은 귀족이래도 어쩔 수 없이 급이 갈리는군그래."
"암만, 원래도 이나타 가문하면 정통성에서 비할 데가 없는 가문 아닌가. 게다가 변경백께서 히베아군을 적극적으로 움직여 주신 덕에 사태가 빨리 진정된 면도 적지 않지. 이미 대관식 이후에 바로 대장벽으로 가실 것이라 말하시기도 하셨으니 진정한 제국의 충신이시지."
"적당한 귀족을 찍어서 대장벽 수호를 맡기고 본인은 수도에 계셔도 될 텐데 정말 대단하시네 그려……."
이번에는 다른 마차가 변경백의 마차가 들어갔던 길을 통해 황실 안으로 향했다.
다시 키 큰 관리가 말했다.
"산탄다르 공작이신 것 같군."
"다들 산탄다르 공작에게 어떤 상이 내려질까 궁금해하고 있네."
"아마 주인이 없어진 카몰을 흡수하지 않겠는가?"
"나도 친한 내관에게 들은 것이라 확실치는 않지만, 자네만 알고 있게나."
지금껏 뜬소문에는 관심 없는 태도를 유지했던 키 작은 관리의 말이었기에 키 큰 관리는 허리를 숙인 채로 귀를 귀울였다.
키 작은 관리의 말이 끝났을 때, 키 큰 관리는 '흥!' 하고 한 번 비웃는 것으로 어이없음을 내비쳤다.
"그게 가당키나 한 소리인가? 전례가 없는 일일세."
"그래서 확실치 않다 하지 않았는가."
"아무리 확실치 않아도 그게 무슨……. 어떻게 산탄다르 공작에게……."
키 큰 관리는 고개를 강력히 저었다.
키 큰 관리가 자신의 말을 대놓고 무시하자 기분이 나빠진 키 작은 관리가 딴청을 피웠다.
다시 뒤쪽으로 익숙한 마차가 지나갔다.
키 작은 관리가 그걸 보고 말했다.
"제뉴인 공작이시군. 공작 부인과 함께 입궐하시나 본데."
"두 분도 참 안 됐지. 엄청난 공을 세웠는데, 아들이 저 모양이 되어서……."
"어허! 조심하래도!"
키 작은 관리는 이놈 옆에 있다가는 경을 치겠다 싶어 황궁 안으로 발을 빠르게 옮겼다.
"이봐! 같이 가자고!"
키 큰 관리가 영문도 모른 채로 발걸음을 빨리해서 키 작은 관리의 뒤를 따랐다.
***
회색의 긴 머리를 한 여인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 아버지와 오라비들을 닮아 황홀하기까지 한 외모였다.
"제가 잘할 수 있을까요?"
앞으로 몇 시간 후에는 황제가 될 여인의 목소리가 떨렸다.
나는 그녀를 보는 것이 왠지 불편했다.
그녀의 먼 선조도, 그녀의 아버지도, 그녀의 오라비도 내게 제국을 지켜 달라 부탁했었는데…….
결과적으로 권신을 쳐 내고 화합을 이루어 냈으니 나는 제국을 지킨 것일까?
아니면, 그저 나라는 복수귀가 결과론을 읊고 있는 것일까.
고개를 들어 엘리자벳 서비어를 바라봤다.
캐슬린과 비슷한 나이.
그녀는 20대에 제국이라는 거대한 집단을 이끌어 나가야 했다.
내가 만들어 낸 결과였다.
그러나 내 대답은 그에 비해 무성의했다.
"모릅니다."
잠시 놀란 얼굴을 한 공주가 웃었다.
"솔직하네요, 후작은. 변경백에게 같은 얘기를 했으면 당장 바닥에 엎드리고는 자신을 비롯한 문무백관들이 뼈가 부러지고 골수가 타들어 갈 때까지 충과 신으로 보필하겠다고 했을 텐데."
"저도 마마의 신하였다면 같은 얘기를 했을 겁니다."
내가 황궁에 유폐되어 있는 동안, 공주는 주위의 만류를 물리치고 나를 찾아왔다.
처음 찾아왔을 때는 눈이 하얗게 변한 채로, 주위에 오러를 뿜어내며 나를 죽이려 들었다.
그녀에게서 초대 황제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공주에게 나는 황제이자 자신의 오라비를 죽인 원수였다.
홀로 남은 자의 한(恨)과 원(怨)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녀를 단숨에 제압해 기절시켰다.
그녀의 오러는 분명 강맹했으나 연약했고, 파괴적이었으나 명백하지 않았다.
그렇게 일주일간 나를 찾아와 기절하기를 반복한 후, 공주는 또렷한 눈동자를 하고 나를 찾아와 말했다.
"얘기 좀 하죠."
그것이 레인 서비어의 후손, 바그안트 서비어의 동생이 아니라 오롯이 엘리자벳 서비어와 내가 마주한 첫 순간이었다.
"변경백에게 들었어요. 당신은 스스로를 옭아매고 내가 죽음을 언도하길 기다린다죠? 왜죠? 황제를 죽이고 제압할 수 있으면서 왜 내 언도 따위를 기다리는 거죠?"
"마마께서 저의 죽음을 확인해 주셔야 비로소 제가 굴레에서 해방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시작된 대화는 끝이 없이 이어졌다.
그녀는 총명했고 밝았으며 들을 준비가 되어 있고 주위를 살필 줄 알았다.
애초에 2황자가 아니라 공주를 먼저 황제로 옹립했다면 하는 후회 아닌 후회가 들 정도였다.
그렇게 공주는 매일 대관식 준비가 끝나면 나를 찾아왔다.
나는 그녀를 피하지도 막지도 않았다.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어쩌면 회귀 이후 내가 바꿔 낸 가장 큰 결과를 회피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주가 다시 내게 물었다.
"아직까지 후작은 제 신하이지 않나요?"
"저를 가까이 해서 좋을 것이 하나 없습니다. 지금 이렇게 와 계시는 것만 해도……."
"오라버니의 남아 있는 친위대는 제게 충성을 맹세했어요. 그중 하나가 궐 내부를 제 손금 내려다보듯 할 수 있습니다. 누가 이쪽으로 접근하면 알려줄 겁니다. 그 이전에 제가 이 후원에 접근하지 말라는 명을 내려놓기도 했습니다."
"친위대는 비밀스러운 존재여야 합니다. 제가 무슨 짓을 벌일 줄 알고 친위대의 구성 인원을 그리 쉽게 말하십니까. 또한 친위대는 오로지 마마의 사람으로 구성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 아룁니다."
"제가 걱정되나요?"
"당연한 것을 말하는 것이 그대로 걱정이 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 사람이 없는 걸요. 어릴 적부터 두 오라버니 사이에서 존재감을 지우기 급급했던지라 제 세력이라고는 없어요. 지금도 이 현실이 무섭고 두려워요.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기도 해요."
탁자에 올려놓은 공주의 손이 작게 떨렸다.
그녀는 손을 재빨리 탁자 아래로 내렸고, 나는 못 본 척을 해 주었다.
"이런 제가잘 할 수 있을까요?"
"아마 못 하실 겁니다."
내 대답에 공주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봤다.
"하지만 못 하면 어떻습니까. 만인지상인 제국의 황제이지 않습니까. 못 한다고 해서 황제를 타박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또 처음에는 못 할지라도 꾸준히 하다 보면, 10년이나 20년 뒤에는 처음보다 나아져 있지 않겠습니까?"
"아까는 모른다면서요."
"자신의 약한 부분을 솔직히 털어 놓을 줄 아는 사람은 언젠가 발전하기 마련입니다."
내 말을 곱씹던 공주의 곁에 투브가 다가가 앉았다.
투브를 향해 손을 꼬물거리던 공주가 내게 물었다.
"만져 봐도 될까요?"
"직접 물어보시는 편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항상 말입니다."
공주가 투브와 눈을 맞췄다.
투브가 펄쩍 뛰어올랐다.
"어멋!"
공중에서 녀석은 강아지의 모습으로 변해 공주의 무릎 위에 안착했다.
"허락한 것 같습니다."
투브는 나를 향해 승리의 눈빛과 생각을 보내 오고 있었다.
-나는 황제의 무릎에 올라앉은 몸이다! 어떠냐, 시안! 네가 아무리 용을 써도 이건 절대 못할 걸!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투브를 쓰다듬던 공주가 나를 향해 말했다.
"만약 내가 공표하면 어떻게 할 셈이죠? '카몰 후작은 죽은게 아니다! 어디엔가 살아 있다!' 이렇게요."
"제게 있어도 달라지는 것은 별로 없을 겁니다. 지금도 황궁을 떠날 수 있지만, 조금 더 납득할 만한 마무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뿐입니다. 반면에 마마께서는 재위 기간 내내 본인이 한 말에 얽매이실 겁니다. 그 방향은 권해 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공주가 살며시 웃었다.
"역시 저를 걱정해 주고 있군요."
다음 순간 공주가 눈빛을 바꿨다.
"후작, 죽지 않을 생각은 없는 건가요? 당신 같은 사람이 필요해요. 누가 뭐래도 내게 정도(正道)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이요."
"앞으로 마마를 뵐 일이 없다 생각하기에 어느 정도의 무례를 무릅쓰고 말씀드리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저는 정도와 먼 사람입니다. 말씀은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생각을 다시 한번……."
"오래 전부터 해 왔던 생각입니다. 변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때 밖에 있던 시비가 공주에게 시간이 다 되어 간다고 알렸다.
공주가 일어섰다.
"부디 성군이 되소서."
내 말에 공주가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답했다.
"감히 짐과 눈을 맞추고 그런 소리를 하다니 무엄하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나갔다.
문이 열리기 직전 공주가 몸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후작, 사람은 가질 수 없는 것에 더욱 매력을 느낀대요."
"……."
"안심해요. 질척거리지는 않으니까. 다만 아쉽네요. 나는 그대에게 매력을 느끼는데 그대를 품기에 내 배포가 작아서요."
드르륵.
문이 열렸다.
공주가 나를 향해 마지막 사담(私談)을 건넸다.
"만인지상이 될 내가 품을 수 없다면 사라지는 게 맞겠죠. 내가 후작 그대를 죽이라 명하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