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1)
사륵.
부드러운 천이 오래되어 반들반들해진 돌계단의 윗면을 스쳤다.
셀 수 없이 많은 문무백관과 귀족 들이 줄을 지어 모여 있는 정전 앞, 모두의 눈은 천천히 단을 오르는 공주의 뒷모습을 향해 있었다.
단에는 시종장이 면류관을 올린 반을 두 손으로 공손히 받치고 있었다.
엄숙한 분위기 속, 가벼운 바람이 황제의 의복을 스치는 소리만이 들렸다.
공주가 단의 맨 위에 다다랐다.
천천히, 위엄 있게 공주가 몇 걸음을 더 옮겼다.
면류관을 받치고 있는 시종장과 그것을 자신의 머리에 씌워 줄 변경백의 앞이었다.
공주는 눈을 조금 더 뒤로 돌렸다.
문이 열린 정전 안쪽 어둑한 곳, 또 다른 단상이 있었다.
앞으로 자신이 앉게 될 곳, 옥좌였다.
"마마."
생각에 잠긴 공주를 변경백이 작게 불러 주의를 환기시켰다.
"신(臣) 페익스, 분골쇄신하여 외침으로부터 제국을 지키겠나이다. 부디 근심 마시고 관을 받으소서."
"제국의 수많은 황제 중 히베아 변경백에게 직접 관을 받은 황제가 있던가요?"
변경백이 감격에 차오르는 얼굴을 하고 있는 사이, 다른 이나타인 시종장이 끼어들었다.
"마마, 관을 쓰게 되면 그 순간부터 마마께서는 제국의 황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 가벼운 언동은 황제의 품위에 어울리지 않사옵니다."
공주가 깊게 심호흡을 했다.
면류관, 옥좌, 아래로 늘어선 수많은 사람들까지.
자신에게 주어지리라 언감생심 꿈도 꾸지 않던 것들이었다.
너무나 급박하게 주어진 것들이기에 두려웠다.
기억이 나지 않지만 황궁에서 카몰 후작과 자신이 싸웠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들이닥치는 압박감과 혼란에 공주의 호흡이 가빠졌다.
"허어……."
면류관을 쓰면 무게에 눌려 목이 부서질 것만 같고, 옥좌에 앉으면 당장이라도 누군가가 자신을 암살하기 위해 뛰어들 것만 같았다.
공주가 한 번 휘청거렸다.
다른 이들이 보지 못하게 변경백이 공주를 가리고 섰다.
공주를 부축한 채로 변경백이 낮은 목소리를 내었다.
"시종장! 왜 그런 말을 해서는!"
"옥좌에 오른다는 것은 그런 의미입니다. 수많은 제약과 억압 속에서 제국의 상징이 되어 만인을 이끌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시종장!"
"변경백께서는 나서지 마시지요. 오롯이 공주마마께서 결정하실 문제입니다. 마마, 마마께서 관을 쓰시고 제가 마마에게 올리는 경칭이 바뀌게 되면 돌이킬 수 없습니다. 각오가 되셨습니까?"
"감히 대관식에서 무엇을 하는 겐가!"
이미 뒤쪽에서는 웅성이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공주와 시종장의 시선이 마주쳤다.
공주는 시종장에게서 다른 인물을 겹쳐 보고 있었다.
시안의 얼굴이었다.
-아마 못 하실 겁니다.
시안이 했던 말이 맴돌았다.
'그렇지. 시종장은 황제가 아니라 황실에 충성하는 인물이니 내가 못 미더울 법도 하지.'
지근거리에 두어야 하는 사람도 자신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었다.
슬프면서 동시에 가슴속에서 뜨거운 감정이 휘몰아쳤다.
'보란 듯이 옥좌에 앉아 성군이 되어 사람들의 존경과 경애를 받으리라. 나중에라도 그가 다시 내게 모습을 보일 때, 이만하면 괜찮지 않았느냐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그런 황제가 되리라.'
늘 양보하고 없는 것처럼 지냈던 공주의 마음에 처음으로 생긴 갈망이었다.
"놓으라."
두 발로 단단히 선 공주가 변경백을 향해 말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휘청거리던 공주가 위엄이 잔뜩 어린 목소리로 말을 하니 변경백은 살짝 놀랐다.
변경백이 재빠르게 부축을 그만두고 황제의 앞으로 움직였다.
공주는 선명하고 맑은 눈으로 면류관을 바라보고 있었다.
"짐은 각오가 되었다. 시종장은 짐을 보필할 각오가 되었는가?"
공주와 싸움이라도 할 듯 매서운 눈빛을 하고 있던 시종장이 고개를 내렸다.
그리고 양손으로 받치고 있던 반을 내밀었다.
면류관에 달려 있던 구슬들이 물결치듯 흔들렸다.
공주가 머리를 숙였다.
변경백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면류관을 들어 황제의 머리에 씌웠다.
턱에 맞게 끈을 조인 뒤, 황제가 고개를 들었다.
모습을 보이기 위해 황제가 몸을 돌려 단의 끝으로 향하는 동안, 시종장과 변경백이 먼저 단의 가장자리에 가서 섰다.
면류관 너머로 풍기는 황제의 위엄에 단 아래 모여 있는 사람들은 절로 감탄사를 흘렸다.
시종장이 우렁차게 외쳤다.
"만세! 만세! 황제 폐하 만세!"
사람들이 외치는 만세 소리가 황궁을 넘어 수도, 제국의 곳곳에 퍼져 나갔다.
다시 며칠 뒤, 정전에 모여 있는 신하들을 향해 황제가 명했다.
"아직도 곳곳에 카몰 후작을 신봉하며, 그의 복권을 바라는 자들이 많다고 들었다. 짐은 제국에 평화가 깃들었으면 한다. 그리하기 위해 불온한 자들을 척결하고자 하니, 그 첫 걸음은 카몰 후작의 처형일 것이다. 수도의 광장에서 카몰 후작을 공개 처형할 것이니라."
***
"공개 처형이라니……. 각하의 지금 처지가 말이 아니지만, 그래도 후작이신데……. 폐하께서는 어디까지 욕을 보여야 만족하신단 말입니까."
저비스가 분기 넘치는 말을 내뱉었다.
"처형에 대해 다른 목소리는 없습니까?"
로하나스의 질문에 저비스가 고개를 저었다.
"내전의 종식 이후, 사유화된 군부대의 기강 확립을 위해 전 병력이 재배치에 들어갔습니다. 각하에 대해 가장 우호적인 분 중 하나인 베이카 장군께서도 제국 남부로 가신지라 목소리를 내기 힘드십니다."
"그래도 베이카 장군께서는 대관식 직후에 후작 작위에 오르시지 않았습니까. 그만한 위치라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수도 점령 이후 건강히 급격히 안 좋아지셨다고 합니다. 남부로 내려가시는 동안에도 줄곧 위태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완벽할 정도의 고립이군요."
로하나스가 이마를 감싸 쥐었다.
그런 로하나스를 한 번 본 저비스가 조심스레 말했다.
"카몰의 영주들이 탄원을 하고 있다지만, 애당초 부모되시는 제뉴인 공작 내외분께서 아무런 행동을 취하고 있지 않다 보니 탄력을 받기 어렵습니다. 또한 전쟁 범죄 역시 사실은 사실이지 않습니까."
"전쟁 범죄라니요!"
"항복해 온 포로를 묻고, 옥에 있는 죄수를 마음대로 죽였으며, 검증과 인가가 이루어지지 않은 물질을 전쟁에 살포했습니다."
저비스의 말에 로하나스가 벌떡 일어났다.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제국은 아직도 지옥도였을 겁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것과 이게 다를 것이 뭡니까!"
둘의 분위기가 과열될 조짐이 보이자 듣고만 있던 오델리아가 로하나스의 어깨를 잡아 말렸다.
"그때는 달았고 지금은 쓰다. 그런 것뿐이지. 아무래도 이상해. 네가 말한 대로 완벽할 정도의 고립과 정보 통제야. 검은 늑대 기사단 중 누구도 우리를 만나려고 하지 않는 것도 그렇고. 애초에 확실한 것은 각하께서 처형당한다. 이것뿐이야. 나는 각하께서 그리 쉽게 죽지 않을 인물이라는 걸 알아."
"그래도 만일 각하께서 처형당하신다면……."
현실을 부정하는 듯한 저비스의 목소리에 대수롭지 않은 결론을 내놓는 오델리아였다.
"각하의 명은 거기까지였던 것이지요. 개인적으로는 크게 유감이긴 합니다."
각하의 명은 거기까지다.
딱 잘라 말하는 오델리아였지만 저비스와 로하나스는 그 문장 자체가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심지어 그것은 말을 꺼낸 오델리아도 마찬가지였다.
"각하의 마지막을 담아 두는 것도 옛 부하의 마지막 정일 겁니다. 사람이 많이 몰릴 것으로 같으니 일찌감치 나가시죠."
오델리아의 말을 끝으로 셋은 각자의 방을 향해 흩어졌다.
***
수도의 중앙 광장, 유례없는 삼엄한 경비가 펼쳐지고 있었다.
중앙에 세워진 높은 단을 중심으로 가장 가까운 곳에는 황실 기사단이 된 검은 늑대 기사단과 황실 마법사들이, 그 밖으로도 위험성을 이유로 수도방위병단 병사들이 몇 겹의 경비망을 만들어 냈다.
그 경비망 너머에는 사람들이 한가득이었다.
수도에 거주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나와 있는 것 같았다.
시대롤 호령했던 카몰 후작이 죽음을 맞는 자리, 사람들은 자신이 역사의 한 순간에 서 있다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그 인파 안에서 오델리아가 로하나스에게 물었다.
"가까이 갈 길이 있어 보여?"
"없습니다. 무력을 쓰면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그 이후의 일은……."
"불가능하지는 않겠다……."
자신의 말을 곱씹는 오델리아를 로하나스가 다그쳤다.
"설마 그런 무모한 생각을……."
로하나스가 화를 내기 전, 주위에서 함성이 치솟았다.
"와!"
처형대로 올라온 카몰 후작과 처형인 때문이었다.
겹겹이 포진되어 있는 병사들 때문에 거리가 너무 멀어 아무리 오러를 운용해도 시안의 정확한 모습을 잡아내기가 힘들었다.
황실 마법사들이 펼치는 몇 겹의 방어 마법도 한몫하는 것 같았다.
무릎을 꿇고 있는 죄수가 짙은 검은색 머리를 하고 있다는 것 정도가 처형당할 자가 시안임을 알려 주는 유일한 지표였다.
처형인이 칼을 뽑자 주위가 적막해졌다.
오델리아가 천천히 호흡하며 오러를 운용하기 시작했다.
로하나스가 오델리아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안 됩니다."
"구출하는 것도 아니고, 죽은 사람 얼굴만 확인하겠다잖아. 잡혀도 황실 기사단장이랑 아는 사이고 제국을 구했는데, 설마 나도 죽이겠어?"
높이 치켜든 처형인의 검이 아래를 향해 호선을 그렸다.
뿜어져 나오는 붉은 피가 만들어 낸 흥분이 광장을 뒤덮었다.
그 광기의 도가니에서 오델리아가 처형대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젠장!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지!"
로하나스도 오델리아를 막아서기 위해 재빠르게 뒤를 쫒았다.
일반 경비병들은 그들을 막아 세울 수 없었다.
몇 번의 몸놀림으로 자신들을 향해 덮쳐드는 자들을 피한 오델리아는 더욱 거침없이 나아갔다.
익숙한 기운이 쇄도하고 있음을 느낀 검은 늑대 기사단원들이 재빠르게 오델리아 쪽으로 뭉쳤다.
예상치 못한 사태에 사람들이 당황하기 시작했고, 혼란은 빠르게 가중되었다.
아무리 오델리아라지만 무기를 들지 않은 상태, 완전무장을 한 기사단에게 맞설 수는 없었다.
"그만하지."
옛 동료들에게 포위된 오델리아에게 건네는 싸늘한 칼의 말이었다.
"옆에 있을 때는 참 든든했는데, 맞서려니 이런 기분이군요."
오델리아가 두 손을 펴서 어깨 근처로 들며 저항 의사가 없음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낮췄다.
타앗-!
오델리아의 굽힌 몸을 밟고 로하나스가 뛰어올랐다.
기사 몇을 넘어선 로하나스가 가공할 만한 속도로 처형대로 접근했다.
"접근하지 못하게 해! 시체를 치워!"
억센 마법에 눌리면서도 로하나스는 처형대에 구르고 있는, 검은 머리칼을 가진 머리통을 눈에 담았다.
그리고 외쳤다.
"각하! 각하! 이놈들! 부끄럽지도 않느냐!"
로하나스의 눈은 웃고 있었다.
그가 직접 목격한 시체의 얼굴은 시안이 아니었다.
시안은 살아 있었다.
사라지고자 한 시안의 의도를 이해한 로하나스가 더욱 크게 울부짖었다.
시안의 부관이 처형 현장에 뛰어들었고, 시신을 확인하고 오열했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졌다.
이 모든 소동을 뒤로하고 수도 밖으로 나가는 무리가 있었다.
노인이 물었다.
"참으로 충직하지 않습니까? 저런 부관과 함께한 것은 도련님의 복이십니다."
모자 아래로 검은 머리칼이 살짝 드러난 청년이 피식 웃었다.
"결과적으로는 도움이 됐는데, 너무 우격다짐 아니야? 로하나스가 쓸 방법은 아니었어. 차라리 오델리아가 뛰어들었다면 믿겠다."
"사랑하는 사이끼리는 닮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말 옆에 달린 조그마한 바구니에서 투브가 머리를 내밀고 알버트의 의견에 지지를 보탰다.
-그래, 벌써 둘이 닮기 시작한 거야. 아, 청춘이구나.
시안은 투브가 튀어나온 바구니의 뚜껑을 닫아 버렸다.
"아유, 이놈 이거, 요새 들어 더 까불어. 아주 지 세상이야."
***
황궁의 후원, 시안이 이름뿐인 유폐를 당한 곳.
창가에서 정원을 바라보고 있는 황제를 향해 변경백이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무사히 떠났다고 합니다."
"그런가요……. 아니, 그러한가."
변경백이 빙긋 웃었다.
"말투는 차차 익숙해지시겠지요. 제게는 편히 하셔도 됩니다."
황제가 머쓱한 웃음을 짓고는 변경백에게 물었다.
"어디로 간다던가요?"
"말을 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저 시작된 곳으로 간다고만 했사옵니다."
"끝까지 비밀스러운 남자네요. 시작된 곳이라……."
다시 창밖의 연못으로 눈을 돌린 황제에게 변경백이 물었다.
"금일의 처형으로 궁정백의 자리가 비었사옵니다. 혹시 생각해 둔 인편이 있으신지……."
오늘 처형당한 자는 머리를 검게 물들인 몰트 비텔스바흐 궁정백이었다.
시안의 죽음을 확정 지으면서, 거추장스러운 궁정백도 죽이는 수.
황제가 직접 고안해 낸 수였다.
'쉽게 볼 분이 아니다.'
변경백은 차분히 황제의 명을 기다렸다.
토옥.
황제가 바라보고 있는 연못에 꽃잎이 떨어져 파장을 만들어 냈다.
황제가 다시 한번 말을 입안에서 굴렸다.
"시작된 곳이라……. 저의, 짐의 시작은 이곳이겠구나."
황제가 일어섰다.
"궁정백 자리에 어울릴 자들을 엄선해서 올리라. 짐의 치세는 지금부터 시작이니라."
그 당당한 목소리에 변경백은 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