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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검사의 복수-179화 (179/180)

안녕 (2)

"아, 천천히 가유. 속세를 다 털어 버린 양반이 왜 이리 급하시대유. 빨리 가면 산이 읎어지기라두 헌대유?"

"그려유. 느긋허이 가면 누가 잡어먹기라도 한대유? 주위 경관도 즐기면서 천천히 가는 것이 나리에게두 훨 좋을 거여유."

선조님과 투브가 싸웠던 자리인 크루슈산맥으로 향하는 길, 동행하게 된 벼랑구른돌과 이끼위의물이 볼멘소리를 해 댔다.

둘은 각자 나와 알버트가 타고 있는 말고삐를 잡은 채로 종자 역할을 하고 있었다.

아이처럼 작아진 둘을 위해 크기가 작은 말을 구해 볼까도 했으나, 몸이 작아졌어도 무거운 것은 그대로이기에 이들을 태울 수가 없어 어쩔 수 없이 고안해 낸 방책이었다.

가끔 두 도깨비의 힘을 이기지 못한 말들이 고삐에 딸려가느라 캑캑거린다는 것만 빼면, 썩 만족스러운 방안이었다.

"충분히 여유 있지 않나요? 투브도 만족한다잖아요."

말 옆에 고정시켜 놓은 바구니에서 벗어나 말과 나란히 걷고 있는 투브를 가리키며 말했다.

녀석은 강아지의 모습으로 말과 함께 달리다 뒤로 처지기 시작하면 개의 모습으로 변해 따라오는 놀이에 맛 들린 것 같았다.

주위에 지나는 사람이 없기에 나도 그 위험천만한 놀이를 제지하지 않았다.

-엄청 여유 부리는 거지. 당장이라도 널 태우고 뛰어가면 그만인 길을 이렇게 흥청망청 가고 있으니.

내가 투브의 말을 도깨비들에게 전해 주자 도깨비들은 군말 없이 터벅터벅 걸었다.

투브를 이상할 정도로 좋아하는 이들에게 투브의 말은 곧 법과 같았다.

"제가 빠른 게 아니라 두 분 마음이 느린 거 아닌가요? 아니면 저와 같이 마을로 돌아가는 게 불만이라도 있으신 건가요?"

도깨비 둘이 동행하게 된 계기는 내가 이들을 직접 도깨비 마을로 돌려놓지 않으면 앞으로 한참이나 사고를 치고 다닐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이들을 끌고 나온 것이 나였으니 돌려보내는 것도 책임을 져야 했다.

둘은 온갖 불의 형상으로 내게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결국 내게 굴복하고 그들의 마을로 향하는 중이었다.

일부러 말의 눈앞에서 불을 피워서 말들을 놀라게 하는 것은 기본이고, 실수인 척하며 식량을 태워 먹어 꼭 근처의 민가나 도시에 들르게 하는 경우도 있었다.

투브의 말이 아무리 법이라고는 하지만 어디 사람이 법만으로 살아지던가.

도깨비도 크게 다르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불만은…… 없쥬……."

"그래요. 그렇게 이야깃거리를 많이 쌓았는데 불만이 있으시면 안 되죠."

"근디, 지들이 이런 몸뚱이로 가면 즈이 아부지랑 장로 할배가 죽이려 들 거여유. 즉어도 몸이 좀 커질 때 만이라두 어디 좀 머물다 가면 안 되남유?"

이들의 몸이 마나를 받아들여 커지는 데는 몇백 년의 세월이 걸릴 수도 있다고 했다.

몇백 년간 유랑하겠다는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 이끼위의물의 말을 내가 잘랐다.

"그동안 저는요? 두 분이 사고 안 치나 옆에서 붙어 있으라고요? 어림도 없죠."

"사고유? 즈이가 사고를 쳐유? 벼랑구른돌아, 나리가 우리를 너무 띄엄띄엄 보는 것 아녀? 우리가 무슨 사고를 쳤다고 그리 말을 험히 하신대유?"

이끼위의물이 벼랑구른돌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벼랑구른돌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뿐이었다.

"나리가 틀린 말씀을 하신 건 아녀. 적어두 너는 사고를 뭉텅이씩 치잖여. 안 그려? 안 그렇다고 허믄 너는 진짜 그짓말쟁이 도깨빈겨. 양심이 있음 너는 나리 말씀에 수긍해야 혀."

너와 자기는 다르다고 선을 긋는 벼랑구른돌의 말에 이끼위의물이 주먹 한 방을 날렸다.

벼랑구른돌도 맞고만 있을 도깨비는 못 되기에 그 역시 이끼위의물에게 주먹을 뻗었다.

삽시간에 둘은 주먹다짐을 시작했다.

문제는 둘의 손에 나와 알버트가 타고 있는 말고삐가 쥐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놀란 말이 발로 땅을 박찼다.

나와 알버트는 재빠르게 말에서 내려 도깨비 둘에게 다가서려 했지만, 투브가 한 발 빨랐다.

-어떻게 하루, 아니 반나절도 조용히 가지를 못 하냐!

투브가 몸을 키워 둘을 앞발로 누르고서야 둘의 투닥거림은 멈췄다.

그나마도 투브의 밑에 깔렸다는 이야깃거리가 생겼다며 그새 죽이 맞아 낄낄대는 도깨비 둘이었다.

"말은 알아서 몰 테니까, 두 분 다 물건으로 변하세요. 그리고 부르기 전까지는 나오지 마요. 이제 곧 제뉴인이라 조심한다고 해도 저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수 있어요. 투브, 너도 빨리 크기 줄여."

"너무 한 거 아녀유?"

"마을에 들러서 술 살 일 있으면 부를 테니까 빨리 물건으로 변하세요. 당장 안 변하면 지금부터 전속력으로 마을로 갈 거니까."

"약속하신 거여유?"

투브가 발을 떼자 그곳에는 낡은 빗과 빗자루만이 놓여 있었다.

말에서 내려 그것들을 챙긴 내가 강아지로 변한 투브의 목덜미를 잡고 들어 올렸다.

"바구니보다는 나한테 안겨 가는 게 낫겠지?"

-그냥 밖에서 다녀도 별문제 없지 않아? 너나 내가 주위를 감지하는 정도가 웬만한 사람들이 우리를 보는 것보다 빠를 것 아냐.

"만약이란 게 있잖아, 만약이란 게. 이미 너와 내가 죽었다는 사실이 제국 전역에 퍼졌을 텐데, 네가 활보하는 걸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떻게 해."

-나는 알 바 아니지.

"서로 서로 좋은 길로 가자?"

말은 그랬지만 투브는 얌전히 내게 안겨 말에 올랐다.

그러고는 땅을 향해 퉤퉤하며 침을 뱉어 대기 시작했다.

자기 침으로 아라크네가 만들어 낸 거미줄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다나?

이쯤 되니 나는 이 인외의 존재들을 이해하려는 시도 자체를 포기해 버렸다.

내가 타고 있는 말에는 투브를 담아 두는 바구니가 매여 있어 빗자루와 빗을 보관할 공간이 없어서 알버트에게 둘을 넘겼다.

알버트가 움찔하며 둘을 조심스레 받아 그의 말 옆에 매어진 바구니에 집어넣었다.

"알버트가 피하는 것도 있네?"

"영주 대리로 카몰에 남아 있으면서 가장 힘들었던 게 뭔지 아십니까?"

왠지 대답을 알 것 같았다.

"증원 계획을 세우는 것도 산출량 점검을 하는 것도, 도깨비 두 분의 말썽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두 분이 밤에 불로 변해 성 복도를 날아다니는 바람에 기절한 시종이 넷이며 불로 그림을 그린다고 집무실을 태워 먹을 뻔한 것이 두 번입니다. 큰일만 이 정도고 자잘한 장난은 하루에도 열댓 번씩 있었습니다. 오죽하면 집무실에서 유령이 나온다고 소문이 퍼져서 다른 귀족들이 집무실에 들어오기를 꺼려 했겠습니까."

"……용케도 안 들켰네요."

주머니 속에서 벼랑구른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이, 들키면 그건 실패한 장난이쥬. 도깨비는 항상 완벽한 장난꾼이여유."

다음에는 이끼위의물이었다.

"영감님은 왜 우리가 늘상 사고만 친 것처럼 말씀허신대유? 그럼 섭허지 않겄어유?"

'후-!' 하고 한숨을 쉰 알버트가 알았다는 듯이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낮에는 몰래 대장간으로 숨어들어 불을 돌봐 주셨습니다. 양질의 가면 생산이 가능한 데에는 두 분의 공도 만만치 않았을 겁니다."

"않았을 겁니다? 우리 공이 아주 막대한 거 아녀유?"

"장난만 조금 줄이셨다면 저도 그리 말했을 겁니다. 제가 이만큼 살면서 본 그 어떤 어린아이도 두 분만큼 악동짓은 하지 않았습니다!"

"뭐가 어쩌고 어째유? 그건 당연한 거 잖여유. 어디 장난 치는 걸루 도깨비랑 인간을 비교한대유. 어떤 도깨비가 들어도 그 비유는 화를 낼 거구만유! 사과혀유!"

초대 황제와 싸울 때도 평정을 유지했던 알버트가 목소리를 높여 가며 도깨비들과 싸우고 있었다.

보통 시달린 게 아닌 모양이었다.

도깨비 둘도 질 마음이 전혀 없는지 주머니를 들썩이며 떠들어 대고 있었다.

-모습이 문제가 아니었어. 입을 다물게 했어야 했어.

내 마음을 읽는 투브의 말에 당장 내가 도깨비 둘을 조용히 시켰다.

그리고 거친 숨을 내쉬고 있는 알버트를 향해 말했다.

"대장장이들은 히베아로 잘 보냈지?"

"예, 그들의 가족들도 모두 챙겨서 히베아로 보냈습니다."

드워프에게서 배운 대장장이들이었다.

그들의 경험을 썩히기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질 좋은 강철의 생산지인 히베아로 이주를 보냈다.

변경백의 영향력 밑이니 다른 귀족들이 접근하기 힘들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랑운드는 잘 내려갔나?"

"예, 발시안으로 이동해 배를 탔습니다. 툴리앗 왕국으로 가서 육로로 드워프 왕국으로 갈 예정이라 합니다."

"왜? 나한테 말할 때는 절대 안 갈 것처럼 얘기하더니?"

"제자에게 약속을 보여 줘야 한다고……."

"제자?"

"엇, 제가 말씀을 안 드렸습니까? 랑운드 경이 긴을 제자로 들였습니다."

긴은 전생의 기억을 이용해 내가 데리고 온 벙어리 대장장이였다.

손기술 하나만큼은 기가 막힌 녀석이었다.

"노인네…….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나 보네."

"긴이 제자가 안 되겠다고 하자 랑운드가 식음을 전폐할 정도였으니까요."

"걔는 왜 또 그 노인네 제자가 되는 걸 마다했대? 천금을 주고서라도 그 양반에게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이 수백은 될 텐데."

"드워프들이 주사가 심하지 않습니까……. 긴은 술을 입에도 못 댄다고 하더군요."

"그런 이유로?"

"실력이 아무리 좋아도 주정뱅이 스승은 모시기 힘들 수도 있지 않나 싶습니다."

"제자가 되었다며? 어떻게 된 건데?"

"결국 랑운드 경이 술을 줄이는 걸로 타협을 봤습니다."

"드워프가 술을 줄여? 에라이, 도깨비가 장난을 끊지. 긴 그놈도 속았네."

"하하하하! 어찌 되었든 랑운드 경이 긴을 매우 아끼는 건 사실입니다."

그래. 그렇게 제자를 아끼지 않으면 절연한 일족들을 향해 걸어 들어가지는 않겠지.

그것도 오로지 걸작인 '약속'을 보여 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는 더욱더.

긴이 더욱더 날아오를 거라는 생각에 내가 다 뿌듯했다.

우리는 그렇게 꽤 많은 날을 느긋하게 여행했다.

이전에 내가 통과했던 도시인 엔데를 지날 때에는 투브가 바구니에서 눈을 빼꼼히 내밀고는 감탄하기도 했다.

아주 웅장하게 변한 자신의 조각상을 본 직후였다.

-그래! 여전히 밟혀 있는 건 마음에 안 들지만, 저 정도는 되어야지!

'그래도 네 본 모습에는 못 미치는 것 같은데?'

-역시! 나를 알아주는 건 너 밖에 없다, 시안!

나는 투브 위에 서 있는 선조님 동상을 보고 있었다.

뒤로 돌려 찬 두 자루의 검, '트랑젤'을 가만 쓰다듬어 보았다.

당신의 계약을 오랜 후손이 마무리 지으러 간다는 생각에 왠지 기분이 뭉클해지기도 했다.

도시 외곽의 여관에 짐을 풀고 알버트가 내게 물었다.

"도깨비들의 마을은 굉장히 험해 말을 끌고는 들어갈 수 없다 하셨는데, 말을 처분할까요?"

"음…… 내가 처분할게."

"혹여 도련님의 얼굴을 누가 볼까 걱정됩니다."

"에이, 내가 설마 그럴까. 그리고 근처에 신세진 사람이 있어. 그쪽에 가져다주면 될 거야."

***

조심스레 면도를 하고 있던 알렉스가 얼굴을 씻어 냈다.

거품이 남았을까 이곳저곳을 살피던 알렉스는 입안에 물을 머금고는 퉤 뱉어 냈다.

"아-."

입을 벌려 안쪽을 확인하던 알렉스의 눈에 혀에 길게 난 상처가 눈에 들어왔다.

벌써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스스로 혀를 자를 뻔한 그 흔적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문득 그때의 검은 머리 소년이 떠올라 알렉스는 괜히 몸을 한 번 떨었다.

그때 말을 팔고 남은 돈으로 땅을 조금 사서 욕심 부리지 않고 꾸준히 농사를 지은 결과, 지금에 와서는 나름대로 가족들을 건사할 정도는 되었다.

은인이라면 은인이었지만 그날의 기억만 떠올리면 자다가도 벌떡 깰 정도의 무서운 기억이기도 했다.

정리를 마치고 나가려는데, 이제는 노인이 된 알렉스의 모친이 놀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머어머! 이게 웬 말이야?"

나가보니 말 두 마리가 매여 있었다.

"주위에 말을 기르는 사람도 없는데 이게 무슨 일이람? 이 탄 자국은 또 뭐고?"

가까이 다가가니 말이 매여 있는 곳 주변으로 검게 탄 흔적이 있었다.

알렉스는 소년과의 첫 만남을 생각했다.

말을 털어 가려는 무리를 불로 응징했던 소년이 떠올랐다.

소년은 제뉴인 공작의 장자였고, 시간이 지난 후에는 카몰 후작이 되었다고 들었다.

'후작이 처형당했다는 소리도 있었지.'

알렉스는 씨익 웃었다.

'그럼 그렇지. 그 영악한 양반이 설마 쉽게 죽었으려고. 오셨으면 얼굴이라도 한 번 비추고 가시지. 내가 입이 얼마나 무거운데.'

못내 아쉬웠지만 그런 생각은 속으로만 삼키고 알렉스가 말의 고삐를 풀었다.

"선물이네요."

"선물? 말을 선물을 하는 사람이 있니? 그것도 너한테?"

"예전에 저를 고용해 주셨다는 분 있죠? 땅 산 돈 주신 분이요. 그분이에요."

"아이고! 은인이셨구나! 오셨으면 들어왔다 가시지. 이걸 어떻게 하니. 그런데 그분은 대체 어떤 분이니?"

"글쎄요. 저도 이제는 기억이 가물가물해서요. 어찌 됐든 참 감사한 일이에요. 괜히 주위에 얘기하시면 안 돼요!"

"걱정도 팔자다!"

말을 집 옆에 묶어 놓고 돌아온 알렉스는 예상치 못하게 노모에게 등짝을 맞았다.

"술 적당히 마시라고 했지! 안 본 사이에 몇 동이를 없앤 거야! 누구야! 누구랑 같이 마셨어!"

나이에 맞지 않게 매섭기가 한겨울 바람 같은 노모의 손길을 피하며 알렉스는 외쳤다.

"아! 아파요! 내가 안 마셨어요!"

"그럼 너 말고 누구! 네 아버지는 술 안 드시는데 누구!"

"그분이요 그분!"

"그분? 누구!"

"말 주고 가신 분요!"

노모의 타작이 잠시 멈췄다.

그리고 이내 더 거세게 쏟아졌다.

"팔 게 없어서! 은인을 팔아! 이놈의 자식! 어떻게 철이 이렇게 안 드니! 성공할 거라고 큰소리 뻥뻥 치던 때랑 다를 게 없어! 응!"

"아! 그 얘기는 안 하기로 했잖아요!"

같은 시각, 양쪽 어깨에 술동이를 하나씩 얹고 산을 오르는 도깨비들의 뒷모습을 보며 시안은 생각했다.

'4동이면 부족할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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