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한 마검사의 복수-180화 (180/180)

안녕 (3)

"미안합니다. 사정이 있어서 많은 술은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도깨비들은 4동이의 술을 진작 다 비우고 자기들이 담근 술을 꺼내 마시고 있었다.

내 말을 들은 장로 도깨비가 손을 내저었다.

"아녀유, 술은 지들도 많어유. 여그 터가 좋아서 그른가 술 담글 것 천지여유. 마음 쓰지 마셔유. 저그 저놈들 안 봐도 말썽 깨나 부렸을 거인디, 멀쩡히 델구 오신 것만 해두 어디여유."

무릎을 꿇고 있는 벼랑구른돌과 이끼위의물. 그리고 그 옆에 단단히 지키고 서서 둘의 자세가 흐트러질라 치면 그대로 머리통을 후려갈기는 벼랑구른돌의 아버지 도깨비가 눈에 들어왔다.

생각했던 것보다는 일찍 왔지만 몸이 작아질 정도로 힘을 써 대고 다닐 줄을 생각도 못했단다.

사실 둘은 이미 한 번 원래 크기로 돌아갔다가 다시 작아졌으나 그걸 말했다가는 두 도깨비의 뒤통수가 남아나지 않을 것 같기에 일단 접어 두었다.

"고건 좀 도움이 되었는감유?"

내 가슴 언저리를 보며 장로 도깨비가 물었다.

이들을 이주시켜 주고 받은 불의 문양을 말하는 것이 분명했다.

"예, 다른 마법들보다 불을 다룰 때가 배는 더 편안했습니다."

"다행이네유."

어느새 제 아버지의 감시를 벗어난 벼랑구른돌이 내 옆으로 쪼르르 달려와 말을 거들었다.

"할배, 나리 가슴팍의 그거 나리 말고 다른 사람한테 준 적 있었슈? 없쥬?"

"이 썩을 눔, 큰일 날 소리 허고 있네. 나리나 되니까 감사혀서 드린 거여. 아무나 뿌리는 건 줄 알어!"

장로 도깨비가 방망이를 들며 위협하자 벼랑구른돌이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아니, 그러믄 그렇다구 허면 될 걸 왜 손부터 나간대유? 노친네 성깔허고는."

"너 허는 짓 보믄 손이 안 나가게 생겼냐! 너랑 저거, 저거 이끼위의물은 나 승천헐 때까지는 근신여, 근신!"

"할배 언제 승천할 건디유?"

"때 되면 가지 않겄어?"

"아! 그게 뭐여유!"

그러자 벼랑구른돌이 나와 투브 사이로 달라붙었다.

어느새 그 옆에는 이끼위의물도 함께였다.

벼랑구른돌이 무지하게 억울한 얼굴을 하고 내게 말했다.

"나리, 뭐라고 변호 좀 해 주셔유. 즈이가 소소한 사고는 쳤지마는 솔찬허게 도움도 됐잖어유. 안 그래유?"

이끼위의물은 아예 강아지 모습으로 변한 투브를 안아들고 있었다.

"이것 봐유. 투브 님이 지를 얼마나 좋아하시는 줄 알어유? 이런 저희를 근신하려 했다가는 투브 님이 할배를 가만 둘 것 같어유? 어림 반 푼 어치도 없어유."

-아주 이 두 놈들은 자기 필요할 때만 나를 찾네.

그런 투브도 다른 도깨비들이 자신을 우러러보는 것이 그리 싫지만은 않은 눈치였다.

-엿차.

몸을 털어 이끼위의물의 품에서 벗어난 투브가 거대한 늑대의 모습으로 변했다.

나이 든 도깨비들이 술을 퍼마시던 바가지를 툭 놓고 투브 쪽으로 몰려들었다.

"아이고, 아이고. 내 생전에 투브 님의 본 모습을 볼 줄이야. 아이고. 나는 이제 죽어도 좋겄슈."

아, 저번에 왔을 때는 투브가 변하면 내가 기절해서 도깨비들은 투브가 커진 모습을 못 봤었지.

벼랑구른돌과 이끼위의물은 투브 옆에 붙어 서서 자신들은 투브 님이 전장을 누비는 모습을 봤다며 잔뜩 뻐기고 있었다.

'일부러 변한 거야?'

-……응, 이쪽은 크루슈산맥이라고 해도 엄연히 인간의 영역, 일이 끝나면 내가 올 수 없는 곳이야.

'그래서 마지막으로 본 모습 정돈 비춘 거다? 생각지 못한 곳에서 다정한데?'

-다정은 무슨. 그래도 나 좋다고 하는 애들인데 한 번 정도는 추억을 만들어 주는 거지.

'그런 걸 다정하다고 하는 거야.'

-……닥쳐!

매번 이죽거리던 쪽은 투브고 닥치라고 하는 쪽은 나였는데, 입장이 바뀌게 되니 꽤나 신선했다.

하지만 앞으로는 이 문답도 할 수 없게 되겠지.

왠지 모르게 우울함이 밀려들 때, 몸을 작게 한 투브가 내 옆으로 와서 앉았다.

내 손끝에 걸리는 녀석의 부드럽고 서늘한 털이 기분 좋았다.

그걸 본 장로 도깨비가 여전히 뻐기며 서 있는 젊은 도깨비 둘을 향해 말했다.

"니들 둘이 아무리 말을 그렇게 혀도, 결국 투브 님은 말이음이 나리 옆이 편하신겨."

"아, 당연헌 거 아녀유? 뭔 뻔한 말을 그렇게 무게 잡구 헌대유?"

"이, 썩을 눔의 자식. 너는 내가 오늘 그냥 몽둥이로 곤죽을 낼 겨!"

그 꼴을 본 도깨비들이 다시 왁자지껄 웃고 떠들며 술판을 벌이기 시작했다.

참 낙천적인 종족들이었다.

***

도깨비 마을에서 며칠간의 환대를 받은 뒤, 나는 투브와 함께 크루슈산맥 안쪽으로 진입했다.

알버트는 자신이 끼어야 할 자리가 아닌 것 같다며 엔데에서 기다리고 있겠다는 말을 했다.

-제3자가 중요한 일에 끼어들어서는 안 되지요.

나와 투브, 둘만 있게 배려해 주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다면 도깨비들의 술이 엄청나게 알버트 마음에 들었던가.

그것도 아니라면 도깨비들과의 씨름에서 기록한 몇 번의 패배가 영 마음에 쓰이던가.

"쉽네."

영원히 계속되는 굶주림에 고통받는 괴물인 걸귀(乞鬼)를 한 방에 죽인 내가 말했다.

이곳에 처음 왔을 때는 밤에 들려오는 걸귀의 울음소리에도 몸을 추슬러야 했지만, 지금은 마음만 먹으면 이 정도의 괴물은 밤새 무리를 지어 몰려와도 두렵지 않았다.

적어도 나에게 이곳은 원시의 땅이 아닌, 정복 가능한 땅이었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겠지.

내 생각을 읽었는지 투브가 말을 받았다.

-신나게 싸워 댄 직후, 남는 힘을 돌리기에 확장만큼 좋은 것도 없지. 눈으로 덮인 곳, 수풀이 우거지고 괴물이 득실대는 곳. 인간들이 또 한바탕 밀고 들어오게 생겼어.

"제법 인간처럼 생각하네?"

콰직.

투브가 나를 향해 달려들던 걸귀의 머리통을 깨 버렸다.

파편이 후두둑 떨어지자 투브가 더러운 것이라도 되는 양 몸을 피했다.

-어쩔 수 없어. 인간들 중 손에 꼽히게 강한 녀석이랑 꽤 오랜 시간을 붙어 있었잖아. 나도 인간들의 방식을 조금은 이해한 것 같아.

스륵스륵.

주위에서 마치 뱀이 기어 다니는 소리가 났다.

피와 고깃덩이를 섭취하는 나무들이 걸귀의 시체를 향해 나뭇가지를 뻗어오는 소리였다.

삽시간에 많은 나뭇가지들이 걸귀의 시체에 꽂혔다.

"으…… 내가 다녀 본 그 어떤 곳보다 여긴 상상을 초월하고 끔찍해. 아마 태평성대가 계속되어서 인구가 폭발하는 바람에 더 이상 살 곳이 없지 않는 이상 여기까지 진출할 일은 없을 것 같은데."

-모르지. 옆에서 쭉 보니까 인간은 미지의 것을 두려워하면서 동시에 갈구하던 걸.

말을 마친 투브가 몸을 키워 앞으로 나섰다.

녀석의 발이 땅에 닿을 때마다, 바닥을 가득 메우고 있던 나뭇가지와 풀 들이 떨며 비켜서는 것이 보였다.

확실히 녀석은 이곳의 지배자였다.

그렇게 우리는 계속 나아갔다.

예전에 이곳에 왔던 때처럼 원시의 땅은 밤낮없이 우리를 먹어치우려 했으나, 나와 투브는 그때에 비하면 너무 달라져 있었다.

독을 내뿜는 식물들이 가득한 곳도, 하피가 사는 소리 없는 폭포도 이제는 그냥 스쳐 지나가는 정경에 불과했다.

마치 가벼운 산보를 나온 것 같았다.

이제는 모두 떠나 버려 흔적도 지워지려 하는 옛 도깨비들의 마을을 지나, 마침내 선조님과 투브가 죽은 곳에 이르렀다.

"다 왔다."

크루슈산맥과 어울리지 않게 왠지 영험한 기운이 풍기는 평평한 곳에 도착한 내가 가장 먼저 한 말이었다.

이곳에 온 것은 꽤 예전 일이지만, 기억은 생생했다.

투브의 뼈에서 살과 근육이 솟아올라 거대한 모습으로 변하고, 나는 땅에 얼굴을 박고 쓰러졌던 기억.

그런 생각을 하며 투브를 바라봤다.

녀석은 거대한 모습으로 고개를 치켜든 채, 숨 한 번, 한 번을 음미하는 것처럼 천천히 숨을 내쉬고 있었다.

철그럭.

허리에 차고 있던 선조님의 검 두 개를 풀어 내렸다.

투브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을 죽인 검이라 그런지 여태껏 투브는 한 번도 검을 제대로 마주하지 않았었다.

아마 녀석이 보기에는 이죽거리는 얼굴로 내가 물었다.

"긴장되나 봐?"

-긴장은 무슨. 이 날만을 고대했는데.

그렇게 말하는 녀석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내 머릿속을 강하게 울렸다.

양손에 검을 들고 투브의 유골이 있었던 곳쯤으로 걸어갔다.

괜한 긴장감이 우리 둘 사이를 맴돌기에 실없는 말을 던졌다.

"그냥 이곳에 꽂으면 되는 걸까?"

-잘난 네 선조가 그리 말했으니까 뭐……. 나도 당한 입장이야. 확실히 알 수 없어.

"만약, 정말 만약이라도 지금 상태가 계속 이어진다면?"

나도 모르게 나온 이 질문은 어쩌면 내 본심일 수도 있었다.

아니, 강력한 본심이자 희망이었다.

이미 오랜 시간을 녀석과 함께 보내 왔다.

나는 투브와 강한 유대로 엮여 있었다.

하지만 나는 녀석에게 무언가를 요구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내 복수를 위해 녀석은 헌신했다.

흔들리는 나를 몇 번이나 다잡아 주었고, 자신과는 하등 관계없는 인간들의 분쟁에 끼어들었다.

오로지 내가 한 말만 믿고서!

-계속 이어지면 너만 고생하는 거지, 뭐. 아라크네의 기억을 흡수해도, 네 선조가 알려 준 방법도 통하지 않으면 대체 어떤 방법이 통할까? 너는 아마 평생 나를 해방시키기 위해 등골이 부서져라 뛰어다녀야 할걸? 설마 그런 미래를 원해?

투브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투브는 인간의 사고를 배웠는데, 나는 투브의 사고를 배우지 못했다.

'나는 끝까지 나만 생각했구나.'

검 두 자루를 높이 들었다.

제발, 제발 투브가 자유를 찾길.

나를 위해 노력해 준 녀석에게 최소한의 보은을 할 수 있길!

온 힘을 다해 투브가 마지막으로 쓰러졌던 자리에 검을 내리꽂았다.

그동안 녀석과 지내온 모든 순간들이 머릿속에서 스쳐 지나갔다.

푸욱!

선조님의 쌍검 트랑젤은 땅에 깊게 박혔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실패인가……?"

내가 말하기 무섭게 트랑젤에서 두 줄기 빛이 치솟았다.

놀라 투브를 돌아보니, 녀석의 몸에서도 같은 색의 빛이 뻗어 올라 있었다.

-계약의 끝이 다가 왔구나…….

하늘을 뚫을 듯이 높이 솟던 빛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트랑젤을 꽂은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투브와 나를 이어 주던 '무언가'가 끊어졌다.

저벅.

투브가 나를 향해 걸어왔다.

녀석이 내 손등에 자신의 주둥이를 대어 밀어 올렸다.

들린 내 손 위에 녀석이 입을 대었다.

무언가가 가볍게 톡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쥐어 보니 작은 반지였다.

"이타르의 반지……."

녀석은 나를 통한 마나 공급 없이도, 이타르의 반지로부터 마나를 공급받지 않아도 기품 있는 거대한 늑대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너를 믿은 보람이 있었네."

머릿속에서 들리는 말이 아니었다.

투브의 육성이었다.

눈시울이 시큰했다.

왠지 모르게 그냥 그랬다.

녀석이 내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가볍게 가져다 댔다.

붉어진 내 눈을 가리기 위해, 당장이라도 떨어질 듯 샘솟는 눈물을 가리기 위해 녀석을 안았다.

그동안 고생한 투브를 위해 흘리는 눈물이었지만,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우는 거야?"

녀석의 부드러운 털에 얼굴을 묻은 채로 고개를 저었다.

"너와 함께한 모든 순간을 잊지 못할 거야. 고마웠다, 시안."

나는 녀석을 놓아 주었다.

눈물이 멈출 줄 모르고 솟아올라 시야가 흐렸지만, 나를 바라보는 녀석의 노란 눈만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녀석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멀어져 가는 녀석의 뒤에서 내가 물었다.

"우리가 다시 볼 수 있을까?"

검은 늑대가 잠시 멈춰 섰다.

"한 번 만났으니, 두 번도 만날 수 있겠지. 그때까지……."

마지막 말을 남기고 투브가 다시 몸을 돌렸다.

"그때까지 안녕."

함께하자는 말이 턱밑까지 올라왔지만, 그렇게 하기에 녀석이 내게 해 준 것들이 너무 많았다.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이것이 전부인데…….

난 투브를 막아설 수 없었다.

그사이에 투브는 크루슈산맥의 울창한 숲속으로 몸을 감췄다.

어느새 뺨을 타고 흐르고 있는 눈물을 닦아 냈다.

그리고 올라가지 않는 입꼬리를 당겼다.

두 번도 만날 수 있겠지…….

작게 혼잣말을 했다.

녀석을 향해서 하는 말인지, 아니면 나를 다잡기 위해 하는 말인지 모를 말이었다.

"그때까지 안녕."

Epilogue.

3년 뒤.

"히베아 변경백이 증원 요청을 했다고?"

"그러하옵니다, 전하."

그레이스 바크하임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3년 전, 내전의 공을 인정받아 공작령이었던 산탄다르 지방은 카몰 지방을 흡수함과 동시에 바크하임 공국(公國)으로의 지위를 인정받았다.

제국과의 관계는 이전보다 더 친밀했으나, 어찌 되었건 그레이스가 소국의 왕이 되었다는 소리였다.

내전 이후 산탄다르가 다른 공작령에 비해 입은 피해가 적어 힘의 불균형이 초래되자 그레이스가 황제를 찾아가 담판을 지어 얻어 낸 결과이기도 했다.

향후 영구적인 상호불가침 조약과 제국 재건에 적극적으로 협조할 것.

이것이 그레이스가 황제에게 내민 조건이었다.

제국의 조정에서는 극렬한 반대 의견이 들끓었지만, 그레이스의 공헌과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

게다가 기존의 조세보다는 적은 양이긴 했지만 조공조로 꼬박꼬박 곡물과 특산물을 보낸다는 조건도 함께였으니, 괜히 또 다른 분란을 야기하기보다는 산탄다르의 독립 쪽으로 이야기가 기울었다.

이 일이 있은 후 제국 각지의 귀족, 특히나 공작들에 대한 황실의 경계가 더 삼엄해졌음은 물론이었다.

재상의 말을 들은 그레이스가 손을 올려 이마를 톡톡 쳤다.

"제국의 재건에 손을 보태겠다 했지, 제국 확장에 힘을 쓰겠다 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황제는 빠르게 제국을 안정시켰으며, 이민족들에게 점령당했던 사힘 지방 대부분을 수복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제는 야만의 땅으로 여겨졌던 북부 정벌을 천명한 상태이기도 했다.

"증원 요청에 응하지 않으신다면 전략 물자 관리 차원에서 공국으로 보내지고 있던 히베아제 철 공급을 절반 이하로 줄일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노친네……. 빡빡하게 구시네. 그만 아들한테 물려주고 거기서 내려오실 때 되지 않았나?"

일국의 왕이라고 하기에는 거친 언사에 신하들이 흠칫 놀랬다.

"곡물을 조금 더 보낼 수는 있어도, 사람을 보낼 수는 없다 전해. 어차피 그쪽에서도 안 될 걸 알면서 찔러나 본 거야."

어느 한 신하가 조심스레 의견을 냈다.

"카몰 지방의 영주들에게 공문을 보내어 인원을 차출하는 것은 어떠하십니까. 4군단이 이전하기는 했으나, 카몰의 영주들이 보유한 병력 역시 일전의 내전에서 경험을 쌓은 훌륭한 군사입니다."

카몰이라는 소리에 그레이스가 바로 눈을 치켜떴다.

"안 돼."

"전하, 어찌하여 카몰 지방에만 그리 특혜를 주시나이까."

"그곳은 주인이 있는 땅이고, 나는 잠시 맡고 있을 뿐이야."

"전하! 그곳의 주인이었던 자는 일전에 죽었나이다! 지금의 주인은 전하이시옵니다!"

그레이스가 벌떡 일어났다.

'시안은 죽지 않았어!'

스스로에게 수천 수백 번 했던 말이었다.

분명 시안은 자신을 찾아오겠다고 약속했다.

아직 그때가 되지 않았을 뿐.

시안은 죽지 않았다.

그러나 그 말은 혀끝에 맴돌 뿐,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시안은 분명 처형되었고, 죄목은 제국의 적과 내통한 죄였다.

제국의 공작이었고, 공국의 왕인 자가 공개적으로 그런 자를 옹호할 수는 없었다.

그저 시안의 흔적이 있는 곳을 건들지 않는 것, 그것이 그레이스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못 들은 걸로 하겠어. 히베아로 곡물을 올려 보내. 이상."

그레이스가 몸을 돌려 신하들을 뒤로하고 빠져나갔다.

***

"하아…… 왕이라는 거 생각보다 쉽지 않네."

그날 밤, 예복을 벗고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은 그레이스가 머리맡에 앉아 자신의 머리를 빗겨 주는 유모를 향해 말했다.

모든 친족이 역병으로 죽은 그레이스에게 유모는 정을 붙일 유일한 사람이었다.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겠지?"

한참 조용히 그레이스의 머리를 빗겨 주던 유모가 조심스레 운을 띄웠다.

"저…… 전하."

"왜?"

"슬슬 후대를 준비하셔야 하지 않을까요?"

그레이스가 몸을 벌떡 일으켰고, 그 바람에 빗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탈한이지? 아니다, 스왈로?"

그레이스가 신하와 가신 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대며 유모를 추궁했다.

뻑하면 자신에게 회견을 청한 다음 어느 가문의 몇째 아들이 번듯하네, 몇 번째 아들이 듬직하네 하는 작자들이었다.

다른 사람들이었다면 잔뜩 짜증이 난 그레이스의 모습에 제법 겁을 먹었겠지만, 그레이스를 아기 때부터 보아 온 유모는 역시 여유가 넘쳤다.

"앉으시지요, 전하. 아직 머리를 덜 빗었습니다. 듣자 하니 변경백께서도 장성한 아들이 있으시다죠?"

"카른? 그 곰 같은 놈?"

"아니면 발터가문은 어떠신가요? 그쪽은 여성들이 기가 세서 남자들이 유순하다고 하던데요."

"싫어! 무슨 결혼이야!"

"전하! 기껏 왕조를 만들어 놓으시고 다른 사람들에게 넘길 생각이십니까?"

"내가 알아서 할게!"

"알아서 하는 걸 믿다가는 전하의 혼례보다 제가 먼저 죽을 것 같아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이후에도 유모는 몇 개의 가문을 더 읊어 댔다.

분명 가신들이 압력을 넣은 것이 틀림없었다고 생각한 그레이스는 귓등으로 듣고 흘려 넘겨 버렸다.

한참 둘이 아옹다옹 대고 있는 사이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똑똑.

"누구냐!"

유모가 날카롭게 외쳤다.

밖에서 어린 시비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하를 배알하고자 하는 분이 있사옵니다."

"시간이 늦었다. 내일 공무가 시작되면, 내가 직접 찾을 것이니 편히 쉴 곳을 제공하라 일러."

그레이스가 명을 했음에도 밖의 인기척은 사라지지 않았다.

시비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당황함이 가득 묻어 있는 목소리였다.

"그, 그것이 전하께 이것을 꼭 전달하라고 부탁 받았사옵니다. 귀한 것으로 보여 무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사옵니다."

그레이스가 유모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유모가 재빠르게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문이 열리고, 시비에게서 무언가를 받아 든 유모가 갈 때보다 더 빠른 걸음으로 그레이스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유모가 내민 것을 본 그레이스가 그것을 재빠르게 쥐어 들었다.

자신의 수납장을 열어 다른 무언가를 챙겨 든 그레이스가 재빠르게 뛰어나갔다.

문 밖에 있던 시비를 붙잡고 그레이스가 물었다.

"이 사람 어디 있어!"

"저, 접견실에……."

단숨에 접견실로 달려간 그레이스가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인자한 미소의 노인이 그레이스를 먼저 맞았다.

시안의 종자, 알버트였다.

그리고 그레이스의 눈이 자신에게 등을 보이고 있는 남자에게 닿았다.

남자의 갈색 머리카락이 검은 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시안이 돌아서며 말했다.

"그렇게 빠르게 뛰어다니시면 다치십니다, 각하."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그레이스가 심호흡을 하고 말했다.

"이젠 전하야. 각하가 아니라, 멍청아."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그레이스의 손바닥에는 가운데가 잘린 시안의 신분패 위아래 조각이 놓여 있었다.

시안이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세상에는 제가 죽은 걸로 하고 여행 중이었는데 말입니다. 참 이상하지 뭡니까. 뭘 먹거나 볼 때마다 각하, 아니 죄송합니다. 전하의 모습이 떠오르지 뭡니까. 허 그것참……. 그래서 신분패나 다시 받을 겸…… 얼굴도 좀 볼 겸해서……."

시안의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할 때쯤, 그레이스가 시안에게 달려들어 시안을 부서질 듯 꽉 안았다.

"잘 왔어. 잘했어. 안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어. 안 죽었으면 얘기라도 해 줬어야지!"

"여전히 세상에는 죽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도 많이 고민하고 찾아온 겁니다."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그레이스가 고개를 들고 마구 저었다.

"아냐, 아냐, 잘했어. 진짜 잘 왔어. 그런데 투브는?"

시안이 손으로 발쪽을 가리켰다.

"모종의 일 때문에 2년 정도 떨어져 있긴 했는데, 결국은 무료했는지 절 찾아왔습……. 아야! 물지 마!"

그레이스와 시안의 발치에 강아지 모습의 투브가 살랑살랑 꼬리를 치며 앉아 있었다.

체면이고 뭐고 없이 자신이 시안에게 달려들었다는 것을 자각한 그레이스가 뒤늦게 몰려오는 부끄러움에 시안을 밀쳐 내고 쭈그려 앉았다.

그리고 투브를 들어 품에 안았다.

눈물을 닦아 낸 그레이스가 시안에게 물었다.

"둘이 떨어져 있는 건 한 번도 못 봤는데? 2년이나? 왜?"

시안이 어깨를 으쓱했다.

"질기고 질긴 계약이 있었습니다."

"계약?"

"지금은 모두 청산되었습니다. 이제 저와 투브는 동료죠."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를 해. 어머!"

자신의 뺨에 닿는 촉촉한 느낌에 그레이스는 약간 놀랐다.

그레이스의 어깨를 딛고 선 투브가 뺨을 핥는 감촉이었다.

그걸 본 시안이 가볍게 웃고 말했다.

"그 결과는 이겁니다."

투브가 시안에게로 폴짝 뛰어가 안겼다.

그리고 강아지 형태의 투브를 시안이 두 손으로 받쳐 들어 그레이스 쪽으로 내밀었다.

다음 순간 그레이스는 그만 놀라 기절할 뻔했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투브, 네 인사가 영 맘에 안 드셨나 본데? 다시 한번!"

즐거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투브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안녕?"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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