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롤로그
이 세상에는 일종의 법칙이 있다.
식빵을 떨어뜨리면 꼭 잼을 바른 쪽으로 떨어지고, 세차를 한 날에는 비가 오고, 신호등은 항상 내 앞에서 빨간불이 된다.
머피의 법칙 아니냐고?
물론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 약속된 전개가 소설 속에서 등장한다면 나는 다른 표현을 사용하고 싶다.
뻔하디뻔한 전개, 클리셰라고.
지금 이걸 말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이 이와 무척이나 밀접한 연관이 있었으니까.
아마 기억을 되돌려 보면, 별생각 없이 남긴 댓글 하나가 원인이었던 것 같다.
「개뻔한 전개에 암 걸리는 클리셰 덩어리. 하차합니다.」
그렇게 눈을 감았다 뜨니, 완독은커녕 초입 부분에서 하차한 소설 속에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클리셰를 극도로 혐오하는 내가 이곳에 떨어진 것도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것 또한 클리셰일 테니까.
“…….”
말도 안 되는 상황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갑작스럽게 흘러들어 온 기억들이 이곳에서의 내 신분이 무엇인지 일깨워 주었다.
아인즈 반.
줄여서 반이라고 불리는 이 소년은 어느 졸부의 노예로 살아가다가 우연히 주인공에게 구해질 예정이었다.
그리고 아직 읽지는 않았지만, 주인공 특유의 오지랖과 퍼주기 성격을 고려해 보았을 때, 필시 쑥쑥 강해져서 결국 주인공의 동료 혹은 충실한 개가 될 운명이 분명했다.
더군다나 주인공 일행에는 어린 엘프 소녀도 있으니, 조연으로서 약속된 러브라인도 꽤나 충실한 편.
뻔하디뻔한 클리셰.
물론, 반의 입장에서 결코 나쁜 이야기는 아니었다.
이 세계에서 주인공은 어쨌거나 절대적이니까.
옆에서 주인공이 암 걸리는 퍼주기를 일방적으로 받아먹으며 호의호식하면 된다.
그런데 왜였을까.
마침내 찾아온 녀석의 뻔뻔한 낯짝을 보고서 결국 저질러 버린 것은.
“……뭐라고?”
“오지랖 부리지 말고 꺼지시라고.”
선호 역전 현상에 비추어 보면, 인간은 먼 미래에 대해서는 합리적인 선택을 하지만 가까운 미래에 대해서는 놀랍게도 비합리적인 선택을 한다.
그 원인은 다름 아닌 순간의 충동과 유혹.
그리고 그런 내 비합리적인 선택에 대한 대가는, 늘 세상사 편하게만 살았을 주인공의 구겨진 얼굴이었다.
아마도, 녀석이 앞으로 저런 표정을 지을 일은 몇 번 없을 테니까.
“네가 아직 어려서 모르는 것 같은데, 나와 함께 가면 더 넓은 세상을 자유롭게 살 수 있다니까?”
“그래서?”
“……응?”
“그래서 뭐 어쩌라고. 나는 이대로 살 거니까 오지랖 부리지 말고 당장 꺼져.”
물론, 공식 세계관 깡패인 주인공에게 건방지게 저딴 말을 했다가는 딱밤 한 대에 머리가 날아가도 할 말이 없었지만, 문제는 내가 저 주인공이 암 덩어리 호구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좋아. 네 의사가 그렇다면 존중할게.”
그렇다고 해서 곱게 물러났다면 내가 암 덩어리라고 욕하며 하차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받아줬으면 해.”
“디오! 그건…….”
나는 녀석이 내민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여신의 눈물.
풍요와 부의 여신이 흘려서 보석이 되었다는 유래가 있는 저 물건은, 설사 드래곤이라 할지라도 쉽게 손에 넣을 수 있을 만한 물건이 아니었다.
저런 물건을 처음 만난 노예 소년에게 건네다니.
여전히 암 걸리는 녀석이었다.
“필요 없어.”
하지만 이미 주인공의 모습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휑하니 여신의 눈물만이 남아 있었다.
아마 주인공은 이제 동료들에게 자신의 오지랖과 자애로움을 은근슬쩍 어필하고 있을 것이다.
토 나오는 놈.
그리고 그때, 갑작스럽게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씨발.”
이딴 곳에서 값싼 동정이나 받고 있다니.
무언가 속 안에서 굉장한 부글거림이 끓어올랐다.
내가 왜 난데없이 이런 곳에 끌려와서 이 지랄을 하고 있는 거지?
하차한다고 댓글을 남겼기 때문에?
아니면 이 암 걸리고 재미대가리도 없는, 그것도 독창성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클리셰 덩어리 소설을 조금 읽었기 때문에?
아니다.
다 작가 놈 때문이다.
대체 무슨 술수를 부린 건지는 모르겠지만, 녀석이 나에게 앙심을 품고 이곳에 나를 가둬 버린 것이 분명했다.
“……이딴 쓰레기 같은 소설이 그렇게 중요했냐?”
나는 여신의 눈물을 주우며 결심했다.
네가 이곳을 그렇게까지 소중히 여기고 있다면.
이 빌어먹을 세계, 모조리 부숴 버리겠다고.
◈ 1화 Chapter 1: 노예 소년, 반 (1)
노예의 생활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아니,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인즈 반은 태어날 때부터 노예로서 태어났으니, 이 생활에 불만을 가질 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에서 태어나서 나름대로 평범한 삶을 살아왔던 ‘나’는 어떤가?
“반! 외양간 치우면, 도련님 산책 가실 때 수발들어 드려라.”
“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나쁘지는 않다. 라는 게 내 생각이었다.
노동 시간은 불규칙적이었으나 대부분 일일 8시간을 넘지 않았고, 주인이 없는 시간은 온전히 내 시간으로서 나름대로의 휴식 시간도 확실한 편이었다.
예전에 일했던 편의점 알바보다도 노동 조건이 좋다는 게 우습다면 우스운 이야기일 뿐.
“반! 오늘은 이만 쉬어라.”
“알겠습니다.”
이렇게 노예들에게 나름대로 베풀었던 졸부 주인은 원래의 운명대로였다면 반을 납치하다시피 한 주인공을 쫓다가 딱밤 한 방에 머리가 날아갈 운명이었다.
그날, 내가 녀석을 따라갔다면 말이다.
본의 아니게 그날의 내 선택이, 그대로 사라져 버렸을 한 생명을 구한 것이다.
이 빌어먹을 주인공은 분명히 호구에다가 암 덩어리지만, 세계관상 기득권층이나 ‘악’이라고 판단되는 경우에는 가차 없이 목을 날린다.
주변인들과 약자를 제외한 인간들에게는 그 어떠한 일말의 자비도 없는 전형적인 주인공의 클리셰를 따르듯이 말이다.
정말이지 사이코패스가 따로 없었다.
더군다나 그 뻔한 클리셰를 따르는 것은 주인공뿐만이 아니었다.
요컨대 마을에 떠도는 실없는 소문들만 들어보아도 알 수 있었다.
“뒷산에 드래곤이 산다더군. 한 번 구경이나 가 볼까? 하하.”
농담처럼 말하지만, 진짜로 살고 있는 거다.
거기다가 높은 확률로 괴팍한 성격을 소지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니 웬만하면 가지 않는 편이 좋다.
“서쪽 대륙에서 마왕이 태동했다는 소문이 있어. 하지만 이곳과는 한참은 거리가 있으니 괜찮겠지.”
조만간 이곳을 떠야 한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 마왕은 지금 용사 일행이 잡으러 갔다던데?”
주인공 일행 이야기다.
다만, 마왕이 여자라는 소문으로 봐서는 퇴치보다는 후일에 히로인 4호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
저 소문들을 듣고 있으니,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한 고민이 생겼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당연한 이야기지만 나는 이 세계의 미래를 알지 못한다.
즉, 선점한 정보를 이용해서 무엇인가를 해나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였다.
그뿐 만이면 다행이련만,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지금의 나는 무척이나 약했다.
주인공 앞에서 거들먹거리는 악역1 하나조차도 당해내지 못할 만큼.
여신의 눈물 덕에 마나와의 친화력이 대폭 상승해 또래의 다른 아이들보다는 마나량도 많고, 정령술에도 어느 정도 재능이 있지만 단지 그것뿐.
그리고 그 이야기는, 아직은 이 세계에서 대놓고 깽판을 칠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것은 설사 내가 나중에 성장해서 강해지더라도 마찬가지였다.
왜냐하면 이 세계에는 공식 세계관 깡패인 주인공이 있었으니까.
녀석은 호구, 고구마, 발암, 둔감 등 다양한 캐릭터성을 가지고 있지만, 녀석에게 한 번 ‘적’으로 간주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내가 알기로 저런 유형의 주인공에게서 ‘적’으로 낙인찍히면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미녀 여자 캐릭터뿐이었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지금 나는 시커먼 사내놈이었고 말이다.
거울 속 얼굴을 보니 미래가 그다지 어두워 보이지는 않았으나, 어찌 되었건 간에 남자는 남자.
여장을 하고 주인공 녀석의 옆에 붙어 있을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지금 와서 내심 후회되는 것은 이 소설을 끝까지 봤어야 했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면 조금 더 도움이 될 만한 정보들을 알고 있지 않았을까?
“…….”
하기야 만약 그랬다면 애초에 그런 댓글을 달지도 않았을 테고, 이곳으로 끌려올 일도 없었을 테니 원론적인 얘기긴 했다.
애초에 나는 이 세계를 부숴 버릴 수 있는 걸까?
작가는 이 세계에서 ‘신’이나 다름없을 텐데, 감히 그런 존재에게 대항하는 것이 가당키나 한가?
그리고 이 세계가 부서지고 나면?
나는 원래대로 살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건가?
아니면 영원히 이곳에 갇혀 있어야 하는가?
“반!”
내 잡념을 깬 것은 같은 노예 소녀인 하이디였다.
“왜?”
“주인님께서 찾으셔.”
“알겠어.”
하이디가 말한 ‘주인’은 아마 이 집의 작은 아들인 베르단이 분명했다.
녀석은 반을 마치 친구처럼 여기고 있었으니까.
아마 서술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반’이 떠나갔다면 상당히 상심했을 것이다.
“오늘은 뭐 하고 놀까?”
논다. 라고 말하면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피시방, 노래방, 당구, 볼링, 이 정도가 끝이었다.
그런 나에게 물어봤자 아이디어가 나올 리가 있겠는가.
그리고 그것은 일평생을 노예로서 살아온 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주인님이 하고 싶은 거요.”
“으음…… 그러면 숨바꼭질하자!”
“숨바꼭질이요?”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 멍청한 도련님은 필시 자신이 숨으려 할 테고, 나는 못 찾은 척하면서 어디 구석에 적당히 자리를 잡고는 잠이나 한숨 자면 그만이었다.
만약 다른 노예나 고용인들이 나를 발견하거든, 그냥 도련님과 숨바꼭질 중이라고 대답하면 되니 말 그대로 꿀이었다.
“자, 숨는다! 눈 감고 열까지 세!”
“네 그럴게요. 하나, 둘…….”
나무가 삐걱거리며 뛰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걸 보니, 어디 창고에라도 들어간 모양.
“열! 찾겠습니다. 도련님!”
예전에는 “앗! 아직 못 숨었단 말이야!”라고 멍청하게 대답하더니, 이제는 꽤 성장한 모양이었다.
뭐, 어차피 그래도 못 찾은 척하며 지나갔을 테지만 말이다.
저택은 꽤 넓었지만, 탁 트인 공간 때문에 막상 숨을 곳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물론 내가 찾고 있는 것은 베르단이 숨어 있는 곳이 아니라, 적당히 들어가서 내가 쉴 곳이었지만 말이다.
“응?”
이런 게 있었나?
내가 발견한 것은 마치 지하실로 통하는 듯한 작은 입구였다.
평소라면 발견하지 못했을 테지만, 얼마 전에 있었던 저택 대청소 때문에 이 문을 가리고 있었던 장식장을 치워서 드러난 듯 했다.
갑작스럽게 강렬한 흥미가 돋았다.
저곳에는 무엇이 있을까?
과거에 이 저택에 살고 있던 사람이 남긴 어마어마한 유산?
가문에 얽힌 선대들의 비밀?
그리고 거기까지 생각하던 나는 예전에 집사가 메이드들과 나누던 대화를 떠올렸다.
-“이 저택은 원래 과거에 궁정 마법사였던 베인 후작님께서 사셨던 곳이지. 어느 날 베인 후작님께서 갑작스럽게 실종된 후, 그의 원혼이 나온다는 둥 흉흉한 소문만이 떠돌던 이곳을 주인님께서 사들이신 거고 말이야. 자네들도 혹시나 이곳에서 무언가 특이한 것을 발견한다면 함부로 접근하지 말고 나에게 보고하게. 함부로 건들면 어떤 흉사가 일어날지 모르니.”
그 순간이었다.
「클리셰가 요동칩니다!」
「약속된 전개가 당신의 행동을 재촉합니다.」
갑작스러운 소리에 나는 이내 정신을 차렸다.
지금 내가 하려고 한 행동이 무엇인지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찾아온 기시감.
잠깐만, 이 전개…….
이 느낌이 무엇인지 내가 모를 리가 없었다.
나는 지금 나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저 빌어먹을 문을 열고 안에 들어서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전개는 내가 그토록 혐오하는 뻔한 전개였다.
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후에 곧바로 치워 두었던 장식장을 다시 밀어서 드러난 문을 가렸다.
혹시나, 나를 비롯한 누군가가 이 빌어먹을 ‘클리셰’에 희생되지 않도록.
“하지 말라는 일은 하는 게 아니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조차도 넘어갈 뻔했다는 것은, 만약 다른 인물이었다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저곳으로 들어섰을 거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게 바로 클리셰의 무서운 점이었다.
너무나도 뻔하고, 예측이 가능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절대적이다.
그때였다.
귓가에 다시 한 번 이상한 소리가 들려온 것은.
「클리셰가 파괴됩니다!」
「암에 걸릴 뻔한 한 독자가 당신의 선택에 찬사를 보냅니다!」
……독자라고?
‘설마.’
나는 당장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서 집사를 찾아갔다.
“집사님.”
“무슨 일이냐?”
“다름이 아니라…… 제가 수상한 문을 발견해서 말입니다.”
하지 말란 행동은 안 하고.
보고하래서 충직하게 보고를 한다.
단지 그뿐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효과는 충분했다.
「클리셰가 파괴됩니다!」
「색다른 전개를 기대하던 독자가 당신의 행보를 궁금해합니다.」
「클리셰 붕괴율: 0.02%」
「클리셰에 개입하셨습니다. 등장인물 ‘아인즈 반’의 [비중]이 증가합니다.」
「현재 비중: 0.5%」
“…….”
그제야 알았다.
내가 이 세계에 꼬장을 부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또, 작가보다 위에 있는 놈이 누구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