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화 Chapter 1: 노예 소년, 반 (2)
클리셰를 파괴한다.
말이 쉽지, 사실상 이것은 이야기의 약속된 전개를 넘어서 결국에는 상식의 파괴까지도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을 의미했다.
나무에 매달린 사과는 중력의 법칙에 따라서 언젠가는 떨어진다.
인간은 언젠간 죽는다.
지구는 둥글다.
이야기 속에서 바로 이런 절대 명제와도 비슷한 맥락을 가지는 것이 바로 클리셰였다.
즉, 클리셰를 파괴하려면 먼저 저런 상식들부터 뒤엎을 필요가 있다는 뜻.
요컨대, 이런 식이다.
“반! 지금 대체 뭘 하는 거야?”
“보다시피, 소똥 치우고 있는데.”
“치우기는! 외양간을 온통 똥 밭으로 만들 셈이야?”
경악한 하이디의 표정을 뒤로한 채로 나는 하던 일을 마저 했다.
지독한 소똥 냄새가 외양간을 가득 메웠다.
“세상에! 주인님이 아시면 어쩌려고 그래?”
“그러면 더 잘됐지.”
“뭐?”
아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클리셰가 망가지는 것 또한 커질 테니까.
「클리셰가 파괴됩니다!」
「그러나, 그 어느 독자도 당신에게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클리셰 붕괴율: 0.021%」
아무래도 별것 아닌 일이라서 그런지, 독자의 이목을 끌기는커녕 클리셰 붕괴율의 수치에도 별로 영향이 가지 않는 듯 했다.
하지만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나에게는 충분한 시간이 있었고, 그걸 실천할 의지 또한 있었다.
「클리셰가 파괴됩니다!」
「클리셰 붕괴율: 0.028%」
「클리셰에 개입하셨습니다. 등장인물 ‘아인즈 반’의 [비중]이 증가합니다.」
「현재 비중: 0.65%」
마을에 헛소문 내고 다니기, 밀밭에 몰래 불 지르기, 한밤중에 여염집 규수가 경비병과 함께 물레방앗간으로 가는 모습을 보았다고 고자질하기 등.
말하자면, 고의적이고 계획적인 트롤링이었다.
당연히 이러한 일들이 걸리면 ‘반’의 입장도 상당히 곤란해지니, 이런 일들을 최대한 은밀하게 저지르면서도 ‘반’으로서의 주가를 올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반! 네 덕분에 아주 큰 손해를 피할 수 있었구나. 정말 고맙다. 오늘은 너희 모두에게 큰 연회를 베풀겠다!”
말이 연회지, 돼지랑 닭 몇 마리 잡아서 고기나 실컷 먹게 해 주겠다는 뜻이었다.
뭐, 이들에게는 그 정도면 충분했지만 말이다.
“모두 다 네 덕이야!”
꺄꺄 거리며 자연스럽게 나에게 안긴 하이디의 체온과 숨결이 느껴졌다.
이것 참…….
나쁘진 않구먼.
그렇게 모든 일이 순탄하게 흘러가는 듯 했다.
클리셰는 아주 조금씩 느리지만 확실하게 망가져 갔고, ‘아인즈 반’의 [비중] 역시도 착실하게 늘어가고 있었으니까.
이대로라면 이 세계를 부숴 버리는 것도 생각보다 간단할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클리셰에 개입하셨습니다. 등장인물 ‘아인즈 반’의 [비중]이 증가합니다.」
「현재 비중: 0.84%」
그러나 내가 잊고 있었던 사실이 있었다.
주인공 외의 인물이 끝까지 잘나가는 클리셰 따위는 없다는 것을.
「성난 한 독자가 당신의 기행에 분노합니다!」
「[악]의 성향이 증가합니다.」
[악]이라고?
처음에는 그냥 무시하고 넘어갔었다.
어쨌거나 내가 악행을 저지르고 다닌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곧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이 세계에서 [악]으로 규정되는 것이 어떤 일인지.
이곳에 있는 내 유일한 아군을 적으로 돌려 버리면 어떻게 되는지.
「잔뜩 뿔이 난 한 독자가 당신의 죽음을 바라고 있습니다.」
……뭐?
재차 말하지만, 나는 이 세계의 미래를 모른다.
누가 이 재미도, 감동도, 교훈도 없는 고구마 덩어리 소설을 끝까지 읽으려 하겠는가?
그것은 소위 ‘사이다’를 지향하는 일반적인 독자 중 하나였던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저 말로 인해서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뻔해도, 너무 뻔했으니까.
“몬스터다. 몬스터가 나타났다!”
“오우거도 있어! 경비대는 대체 뭘 하는 거야?!”
내가 살고 있는 이 작은 마을은 몬스터의 등장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장소였다.
마을 뒷산에는 비공식적으로 드래곤이 살고 있었고, 동서남북 어느 방향을 보아도 탁 트인 평원지대라서 몬스터들이 모여서 살 숲이나 군락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즉, 이곳은 지형 자체가 뜬금없이 몬스터들이 등장할 수가 없는 위치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연성 따위는 깡그리 무시하고서 이런 대형 이벤트가 발생했다?
이런 경우는 오직 한 가지밖에 없었다.
「잔뜩 성이 난 한 독자가 흥미로운 눈으로 당신의 죽음을 기다립니다.」
……망할.
이 평화에 찌든 작은 마을에는 몬스터들의 군세를 이겨낼 만한 병력도, 인재도 없었다.
몬스터의 습격 따위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던 마을답게, 나무 방책은 너무나도 허무하게 허물어졌다.
“사, 살려 줘!”
“꺄아아아악!”
그나마 남아 있는 마을 사람들이 무기를 쥐어 들고 몬스터들을 막아내려 했으나, 애초에 기초적인 훈련조차 되지 않은 그들이 상대가 될 리 없었다.
소설 내에서 개연성이 무시되어도 되는 경우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
첫 번째는 주인공이 위기에 처했을 때.
두 번째는 바로 독자가 원할 때.
지금의 경우가 어느 쪽인지는 굳이 생각해 보지 않아도 되리라.
‘생각하자, 생각해.’
우습게도, 지금의 [몬스터 습격]은 철저하게 클리셰와는 벗어난 전개임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클리셰 붕괴도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내가 이 세계에서 [악]으로 규정됐기 때문에 생겨난 일이었다.
‘어떻게 하지?’
도주?
아니다. 주변은 탁 트인 평야뿐이다.
어린아이의 뜀박질 속도로는 얼마 못 가서 잡혀 버리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뒷산으로 도망가서 드래곤에게 도움을 청할까?
……너무 뻔한 전개다. 가능하면 최후의 방법으로 미루는 게 나을 것 같다.
더군다나 이 세계에서 [악]으로 규정된 나에게 드래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굳이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어떻게 해야 이 위기를 타개할 수 있을까?
하이디가 다급한 목소리로 외양간에 서 있던 나를 찾았다.
“반! 지금 뭐 하는 거야?”
“응?”
“어서 도망쳐야 해! 내 손을 잡아!”
눈앞에 있는 하이디를 보고 있자, 갑자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개연성]이 무너지고 나면 보통 작가는 그걸 어떻게 수습하지?
제아무리 주인공 버프니, 독자가 원하느니 해도 끝까지 개연성이 무너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독자 역시도 존재하는 법이다.
즉, [개연성]은 언제까지나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지금 당장은 넘어가더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수습해야만 한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결국 그 대가를 치를 테니까.
그제야 머릿속에 지금까지 읽어 왔던 수백, 수천 권에 이르는 다양한 소설들이 떠올랐다.
그 소설들이 당연한 듯이 따르는 전개들.
무너진 [개연성]을 수습하는 방식.
‘알았다.’
이런 경우에는 흔히 같잖은 반전으로 기존에 없었던 설정을 추가해서 어설프게 뒷수습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일단 가장 흔하게 떠올릴 수 있는 전개는 뒷산의 드래곤이 배후라는 클리셰인데…….
나는 그 가정을 일부러 배제했다.
별로 도움되는 가정도 아니었을뿐더러, 너무 뻔했다.
내가 굳이 그 뻔한 전개에 발을 맞춰 줄 필요는 없었으니까.
나는 전혀 새로운 가정을 만들어 냈다.
예를 들면,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어린 노예 소녀가 이 몬스터 습격의 배후였다거나 하는.
“하이디.”
“응?”
내 손이 망설임 없이 그 소녀의 뺨을 때렸다.
짝!
손이 얼얼할 정도의 센 소리와 함께 볼이 벌겋게 부어오른 하이디가 울먹거리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바, 반?”
“흠…… 아직 모자란가.”
짝!
짝!
당연한 이야기지만, 열네 살배기의 소년이 동년배 소녀의 뺨을 때리는 모양새는 전혀 좋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것이 지금처럼 몬스터들이 마을로 밀려오고 있는 다급한 상황이라면 더욱더.
이 파격적이다 못해 인간 쓰레기적인 행보는 당연히 많은 파란을 불러일으켰다.
「당신의 기행이 수많은 독자를 적으로 만듭니다!」
「[악]의 성향이 증가합니다.」
「등장인물 ‘아인즈 반’의 [비중]이 증가합니다.」
「현재 비중: 3.15%」
악역도 역할이라는 건지, [비중]이 순식간에 확연히 늘어났다.
울먹거리면서 의아함과 원망스러움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하이디의 모습이 보였다.
내가 그녀에게 짐짓 진지하게 말했다.
“이제 이런 짓은 그만둬.”
“뭐, 뭐……?”
이제는 황당함까지 합쳐진 그녀의 표정이 보였다.
눈물을 펑펑 터트리는 하이디의 얼굴을 보니 가슴 한곳이 콕콕 찔렸다.
조금 미안하지만, 어쩌겠는가.
이게 모두가 사는 방법인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이디가 정말로 이 [몬스터 습격 사건]의 배후가 맞느냐 하는 사실 유무 따위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보이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대체……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반!”
“연기는 그만하고, 이제 그만 정체를 드러내시지.”
「한 독자가 당신이 흘린 기묘한 떡밥에 궁금증을 표합니다!」
「어긋나 있던 [개연성]이 요동칩니다!」
좋아.
그렇게 계속 궁금해하라고.
네가 [개연성]을 무너뜨리면서까지 나를 죽이려고 한다면, 나는 그 무너진 [개연성]을 이용해 주지.
그것도 실컷.
“이제 모습을 드러내라. 나는 이미 네 정체를 알고 있다.”
“그러니까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고!”
「그제야 몇몇 독자들이 [개연성]에 의구심을 제기합니다!」
「[개연성]이 거칠게 요동칩니다!」
그때였다.
마치 유리창이 깨지는 듯한 소리가 세상 전체에 울려 퍼졌다.
「어긋난 [개연성]이 회복됩니다!」
콰지직-!
그 소리와 함께, 눈앞에 있는 하이디의 몸이 점차 변하기 시작했다.
이마에서는 뿔이 돋아났고, 등 뒤에서는 검은색 날개가 마치 검은색 불꽃처럼 타오르듯이 뻗어 나왔다.
어느새 눈을 붉게 물들인 하이디가 내 턱을 붙잡았다.
“알고는 있었지만, 어지간히도 눈치가 빠른 인간이구나.”
이제는 변해 버린 목소리.
돋아난 뿔과 날개로 보니, 그녀가 어떤 존재가 되었는지는 안 봐도 비디오였다.
“그래 맞다. 내가 바로 몬스터들을 이곳으로 부른 장본인이다. 그렇다면 마족인 내 정체를 꿰뚫어 본 네 정체는 뭐냐?”
「일부 독자들이 당신의 명석함에 감탄합니다!」
「등장인물 ‘아인즈 반’의 [비중]이 증가합니다.」
「현재 비중: 5.15%」
마치 비트코인처럼 치솟는 평가와 비중.
작가 놈은 나를 얕봐도 너무 얕봤다.
“내가 누구냐고?”
“그래.”
거참, 노예 소녀에서 갑자기 출세 좀 했다고 저런 싸가지 없는 반응이라니.
은혜를 모르는 것도 정도가 있다.
아무래도 교육을 조금 해 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됐고, 지금은 닥치고 내 말 들어.”
“……인간 따위가 건방지게!”
하이디를 [몬스터 습격]의 배후 마족으로 만든 것까지는 성공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어떻게 해야 저 하이디를 내 마음대로 주무르는 것이냐인데…….
사실 여기까지 이야기가 진행됐으면 그다지 걱정할 것은 없었다. 이 뻔한 세계에서 ‘이성’을 상대하는 법은 무척이나 간단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쉬운 길을 너무 쉽게만 간다면 재미가 없지 않겠는가.
때문에 지금은 가장 충격적이고,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할 말이 필요했다.
“사랑한다. 씨발 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