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화 Chapter 2: 여행길 (1)
[몬스터 습격 사건]이 일어난 지 일주일 후.
하이디는 다시금 평범한 ‘노예 소녀 하이디’로 되돌아갔고, 마을 내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도 모두 다 진정이 돼 가고 있었다.
비록 마을에는 꽤 많은 피해가 생겼고, 죽은 사람들도 은근히 많다고는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내 알 바 아니었다.
「일부 독자가 당신의 인성에 감탄합니다!」
……그럼 울고불고 질질 짜리?
어쨌거나, 행동 방침이 정해진 이상, 내가 더 이상 이 저택에 남아 있을 필요는 없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그래, 그동안 고생했다.”
“잘 지내세요!”
“하이디, 너도 잘 지내렴.”
우습게도, 분명히 노예일 터인 ‘아인즈 반’이 하이디와 함께 이 저택에서 나가고 싶다고 말하자, 그 요구는 너무나도 쉽게 이뤄졌다.
‘무슨 알바 그만둔다고 말한 알바생도 아니고…….’
여차하면 야반도주할 생각까지 했건만, 퇴직금까지 쥐어 주다니.
노예에 대한 작가 놈의 자료조사가 얼마나 형편없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어쩐지 노예에 대해서 심각할 정도로 대우가 좋던 것이 납득됐다.
아마 이 세계에서는 지나가던 평민이 왕국 공주의 뺨을 때려도 “어, 어멋! 나에게 이렇게 대한 건 네가 처음이야!”라고 말하고는 무탈하게 넘어가리라.
뭐, 그 부분은 주인공 한정이겠지만.
다른 조연이 그런 미친 짓을 할 리도 없겠지만, 만약 했다가는 한순간에 머리가 뎅겅 잘릴 것이 분명했다. 주인공이 괜히 주인공이 아니다.
그렇게 저택을 빠져나온 나는 한 가지 의구심을 가졌다.
그것은 얼마 전부터 느낀 기묘한 이질감 때문이었다.
“하이디.”
“응?”
“우리가 살고 있었던 마을 이름이 뭐지?”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나는 지금 내가 살고 있었던 마을의 이름을 모른다.
사정이 그러하니 당연히 이 세상에서 이 마을이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있는지도 모른다.
지도? 그딴 게 있을 리가.
“……응? 글쎄…… 뭐였더라?”
……망할 작가 놈.
그제야 알았다. 어째서 내가 이 마을의 이름을 모르고 있는지.
날림 [설정]도 정도가 있다.
모르긴 몰라도, 원래의 예정대로였다면 이 마을은 노예 소년인 ‘아인즈 반’이 주인공 일행에 합류한 뒤로 다시는 등장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 마을의 [이름]이 없는 이유이리라.
아마도 언급할 때는 ‘반의 고향마을’ 정도로 언급했겠지.
그렇게 ‘반의 고향마을’을 빠져나온 나는 일단 무작정 서쪽으로 향했다.
내가 이런 무식한 방법을 취한 이유는 간단했다.
이런 무식한 여행에는, 항상 준비된 길잡이가 있기 마련이었으니까.
예를 들면…… 저쪽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농부라던가.
“그러니까…… 용사 일행이 어디로 향했느냐고?”
“네.”
“용사 일행이라…… 분명히 봤단 말이지. 우리 집에서 묵고 가기까지 했는걸. 기억이 날 것도 같은데…….”
턱을 쓰다듬으며 기억을 되새김질하는 농부의 모습.
농부와 눈이 마주친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잠깐만, 이거…….
‘이 자식 봐라?’
눈동자를 굴리는 저 눈은 결코 기억을 되새김질하는 눈이 아니었다.
오히려, 잔머리를 굴리고 있는 눈.
그리고 이런 경우에는, 결코 순순히 알려주는 법이 없는 법이었다.
「클리셰가 요동칩니다!」
“아 참! 그러고 보니, 저기 평야를 가로질러 가면 코볼트 군락이 하나 있어. 녀석들 때문에 아주 말썽이야. 그 군락을 처리해 주면 말해 주지.”
「약속된 전개가 당신의 행동을 재촉합니다.」
그럴 줄 알았다.
난데없는 퀘스트였지만, 어차피 이미 내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응, 안 해.”
겨우 사람 행방 물어보는 데 코볼트 군락 한 개를 처리해 달라니.
이 말도 안 되는 요구 조건을 보면, 지금껏 이 소설 속에서 주인공 녀석이 얼마나 호구처럼 굴었는지 알 수 있었다.
“하, 하지만 그걸 처리해 주지 않으면 용사 일행이 어디로 갔는지는 알려주지 않을 거라고?”
“싫으면 말던가.”
내 대답을 듣고는 크게 당황한 농부의 얼굴.
어차피, 저 요구를 승낙한다고 하더라도 한 개의 코볼트 군락을 처리하는 일은 지금의 나로서는 명백하게 무리였다.
즉, 애초에 고민할 필요도 없는 문제라는 이야기였다.
「클리셰가 파괴됩니다!」
「클리셰 붕괴율: 0.031%」
이 세계는 이래서 문제다.
뭐 하나 쉽게 넘어가려고 하면, 꼭 저런 쌩 양아치 같은 놈들이 사람을 호구 잡으려고 달려든다.
「한 독자가 당신의 사이다성 언행을 좋아합니다!」
“가자. 하이디”
“응.”
내가 미련 없이 하이디와 함께 발걸음을 옮기자, 뒤에서 농부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 잠깐만 기다려!”
“왜요.”
그렇게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쫓아온 농부가 땀을 삐질 흘리며 서 있었다.
“좋아. 좋다고. 용사 일행이 어디로 향했는지 알려주지. 대신, 해 줬으면 하는 게 있어.”
농부는 아직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모르면, 알게 해 줄 수밖에.
“안 해.”
“그러니까 말은 들어보고…….”
“안 해.”
“정말 별것 아니야! 그러니까 일단 이야기나 한번 들어보고…….”
“응, 안 해.”
「다수의 독자가 당신의 철벽에 감탄합니다!」
「클리셰가 파괴됩니다!」
「클리셰 붕괴율: 0.037%」
“……우선 페론 마탑에 들른다고 하더군.”
“아무런 대가 없이 알려줘서 고마워요.”
“아, 아니 알려줬으니까 내 얘기를…….”
“그러면 말해 봐요. 들어는 줄 테니.”
그제야 농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을 시작했다.
“그러니까 말이야…….”
이야기는 별거 없었다.
어려운 가정사.
자신이 처한 곤경.
그걸 위한 해결 방안.
약간 지루한 시간이었으나, 들어 준다고 약속했으니 어쩌겠는가.
모든 이야기가 끝난 후, 하이디의 무릎에 누워서 이야기를 듣던 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망설임 없이 뒤돌아선 내 모습에 당황한 농부가 외쳤다.
“……왜 그냥 가?!”
“들어는 준다고 했지, 이뤄 준다고는 안 했잖아요?”
내 말에 잠깐 벙쪄 있던 농부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그, 그런!”
“그럼 저희는 이만.”
한시가 바쁜 때에, 이런 사소한 대화에 무려 오 분씩이나 낭비하다니.
나답지 않은 실수였다.
“역시 나는 너무 정에 약하다니까.”
오죽하면 대학 때 ‘인성과 도덕성’ 교양 과목에서 B 학점씩이나 받았겠는가.
「한 독자가 당신의 발언에 비속어를 사용하다 제재당하셨습니다!」
「[악]의 성향이 증가합니다.」
“…….”
왠지 하이디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지만, 나는 애써 무시하고는 발걸음을 계속해서 옮겼다.
그렇게 여행길에서 하이디가 짧게 입을 열었다.
“반.”
“응?”
하이디의 얼굴이 빤히 나를 응시했다.
붉게 물든 볼.
어딘가 망설이는 입술.
“우리 어디서 자?”
「음란서적을 좋아하는 한 독자가 당신에게서 특정 대답을 기대합니다!」
……저 양반은 아직도 안 잡혀갔네.
그러고 보니, 잠자리에 대해서는 별로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워낙에 이 세계가 대충대충 유야무야 흘러가다 보니, 어떻게든 되겠지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글쎄.”
뭐, 여차하면 노숙이라는 바람직한 선택지도 있기는 했다.
어쨌든 지금의 날씨가 밖에서 노숙 좀 한다고 얼어 죽거나 할 날씨는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날이 저물자, 길을 걷던 나와 하이디는 적당한 자리에서 노숙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운치 좋네.”
적당히 가지고 나온 모포를 덮은 나는 하늘을 바라보며 누웠다.
달은 밝았고, 예전이라면 절대 보지 못했을 별들도 잔뜩 보였다.
옆에서 누워 있던 하이디가 말했다.
“반.”
“어.”
“잘 자.”
「한 독자가 이 기묘한 간질거림에 흥분합니다!」
……너 아까 그놈이지.
그렇게 누워서 막 잠이 들려던 찰나였다.
갑자기 싸늘한 감각이 들며 귓가에 무엇인가 울려 퍼졌다.
「[개연성]이 거칠게 요동칩니다!」
개연성이?
지금 이 상황에서 도대체 왜?
지금 내가 한 행동이라고는, 그냥 녀석을 찾아서 서쪽 길로 여행을 하다가 길바닥에서 노숙한 게 전부였다.
하이디를 살펴보니, 아직 이변 같은 건 눈치채지 못했는지 여전히 곤히 잠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 의문은 곧 해소될 수밖에 없었다.
“크르릉…….”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다섯 마리의 코볼트.
저 코볼트들이 어디서 나왔는지는 굳이 생각해 보지 않아도 되리라.
-“아 참! 그러고 보니, 저기 평야를 가로질러 가면 코볼트 군락이 하나 있어. 녀석들 때문에 아주 말썽이야. 그 군락을 처리해 주면 말해 주지.”
그런 말이 있다.
말이 씨가 된다고.
하지만 내 경우에는 한 글자를 더 붙이고 싶다.
“씨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