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화 Chapter 2: 여행길 (2)
젠장…… 어떻게 하지?
고민을 하면서도 내 손은 어느새 반사적으로 하이디를 슬쩍 깨우고 있었다.
“하이디, 하이디.”
“으음…… 오늘은 아침 안 먹을래.”
……무슨 노예 팔자가 이렇게 늘어졌어?
누가 보면 어디 공작가 영애라도 되는 줄 알겠네.
「한 로맨스 소설 애독자가 [설정] 오류를 지적합니다!」
……나도 아니까 일단은 좀 닥쳐 주쇼. 댁이 대신 깨워 줄 것도 아니잖아.
「한 로맨스 소설 애독자가 등장인물, ‘하이디’를 부드럽게 깨워 줄 것을 요구합니다!」
……이젠 하다 하다 별걸 다 시킨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냥 무시할 수는 없었다.
내 유일한 ‘후원자’인 독자들을 외면했다가는 후일에 이 개연성이라고는 밥 말아먹은 작가 놈에게 어떤 능지처참을 당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슬쩍 하이디를 깨우며 말했다.
그것도 아주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행히 아침 먹을 시간은 없으니까, 우선 일어나.”
솔직히 말해서, 동화 속 왕자님이 있다면 이런 모습일까 싶을 정도였다.
“으음…….”
순진무구한 얼굴로 여전히 잠든 하이디를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것도 기회라면 기회가 아닐까 하는.
솔직히 말해서, 지금까지 쌓아 온 내 [캐릭터]는 너무 잘나고, 똑똑하고, 잘생기고, 신비주의까지 있고 해서 너무 무거운 감이 없잖아 있었다.
독자 친화적이지 못하다고 해야 할까?
때문에 지금 이 순간을 기회로, 나는 내 인간미를 마음껏 발산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으음…… 마침 각도도 좋고, 달빛 아래 조명발도 꽤 괜찮다.
매력 포인트를 따놓기에는 제격인 타이밍.
살짝 새침데기처럼 토라진 표정과 어딘가 불만이 가득한 말투는 이미 일발 장전된 상태.
준비는 완벽했다.
내가 슬쩍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마치 누군가에게 속삭이듯이.
“따, 딱히 네가 원해서 한 건 아니야!”
「로맨스 소설 애독자가 당신의 츤데레 성향에 볼을 붉히며 기괴한 괴성을 내지릅니다.」
「[캐릭터]를 확보하셨습니다. 등장인물 ‘아인즈 반’의 [비중]이 증가합니다.」
「현재 비중: 7.1%」
좋아 죽기는.
거봐라. 내가 한다면 한다니까?
그때였다.
귓가에서 기다리지도 않았던 쓸데없는 소리들이 들려오기 시작한 것은.
「뻔한 행동으로 일부 클리셰가 복원됩니다!」
「클리셰 붕괴율: 0.3%」
……야, 잠깐만.
「소수의 독자가 쓸데없이 전개를 흘리는 당신의 행동을 비난합니다!」
「다수의 독자가 위기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당신의 행동에 대한 [개연성]을 지적합니다!」
「[개연성]이 미세하게 요동칩니다!」
「한 독자가 제4의 벽을 의식하는 당신의 발언에 주목합니다!」
「암 걸리는 행동으로, 다수의 독자에게 [고구마]를 선사하였습니다! 등장인물 ‘아인즈 반’의 [비중]이 감소합니다.」
「현재 비중: 5.5%」
“…….”
……내가 다시는 너희한테 뭐 해주나 봐라.
그제야 눈을 비비며 일어난 하이디가 눈치 없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으응…… 반? 이 밤중에 왜…….”
“쉿.”
“읍읍!”
내가 순간적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자, 하이디가 마치 겁먹은 사슴 같은 눈망울로 나를 바라보았다.
「음란서적을 좋아하는 한 독자가 당신의 행동을 응원합니다!」
……내가 무슨 변태 납치범이냐?
나는 애써 독자의 말을 무시하며 하이디에게 말했다.
“하이디, 잘 들어. 우리는 여기를 아주 조용히 빠져나갈 거야. 그러니까 조용히 해 줄 수 있지?”
그래도 머리가 나쁜 것은 아닌지,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하이디가 잔뜩 겁을 집어먹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니, 마치 멈춘 것처럼 느껴지던 주변의 [공간]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 시간은 흐르고, 남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 것은 이 뻔한 세계에서는 상당히 흔히 일어나는 일이었다.
왜 거 있지 않은가.
꼭 주인공들이 변신하거나 합체할 때마다 기다려 주는 악당들.
그건 악당들이 정정당당하거나 멍청해서가 아니었다.
이 빌어먹을 뻔한 세계가 원래부터 그렇게 생겨 먹은 것이다.
“크르릉…….”
상황은 어느새 원점으로 되돌아왔고, 아까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하이디가 내 옆에 깨어 있다는 점이었다.
서서히 우리 주위를 포위하기 시작한 다섯 마리의 코볼트가 들고 있는 병기들이 눈에 들어왔다.
롱소드, 못이 박힌 클럽, 휘어진 곡도 등 들고 있는 무기 한번 다양했다.
자, 우선 내가 할 일은 [개연성]을 통한 극복이었다.
“하이디.”
“응?”
“이상하지 않아? 어째서 지능도 없는 몬스터들이 저런 무기를 들고 있을 수 있는지.”
“그러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연성]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독자들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이걸로는 부족하다 이거지.’
대장장이도 없는 코볼트들이 저런 무기들을 소유할 수 있는 이유?
사실 더 생각해 볼 필요도 없이, 그냥 인간이나 다른 종족에게서 뺏었다고 하면 그만이었다.
나 역시도 충분히 그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이런 수를 던져 본 이유는 간단했다.
‘그래도 이 정도 수준은 된다 이거지.’
독자들의 수준을 파악해야, 내가 어떤 수를 쓸지 생각할 수 있었기 때문.
물론, 최악의 경우 하이디를 통해서 ‘마족 하이디’를 강림시키는 것도 가능하기는 했다.
어쨌거나 ‘마족 하이디’는 한 번 등장했었으니, [개연성]의 별다른 무리 없이도 단지 내가 몇 마디를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등장할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일전에 내가 하이디의 [설정]을 건드린 탓에, 그녀는 지금 매우 불안정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
마족도, 노예 소녀도 아닌 그런 상태.
때문에 그것을 건드린다는 것은 하이디의 존재 자체가 [개연성]에 의해서 소멸당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렇기에 나는 그 외에 다른 수를 생각해야만 했다.
하지만 생각이 너무 길었던 탓일까.
“크릉!”
어느새 나와 하이디를 향해서 코볼트들이 덮쳐 오기 시작했다.
“피해!”
나보다 머리 한 개는 작은 키와 덩치에도 불구하고, 코볼트들이 가지고 있는 무기와 머릿수 차이는 결코 무시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이쪽에는 짐짝도 하나 있지 않은가.
어느새 코볼트 한 마리에게 쫓기고 있는 하이디가 내 쪽을 향해서 외쳤다.
“반! 도와줘!”
「소수의 독자가 당신의 영웅적인 면모를 기대합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내 상황도 그다지 여유롭지는 못했다.
“조금만, 아니 좀 많이 기다려!”
「다수의 독자가 당신의 무능함에 고구마를 느낍니다!」
자기들이 직접 여기에 와 보라지! 식칼 든 고블린만 봐도 당장 오줌 지리고 도망칠 놈들이 입만 살아 가지고.
순간적으로 코볼트 한 마리가 휘두른 롱소드가 내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큭!”
간신히 롱소드를 피해 낸 나는 그대로 한 바퀴를 굴러서 코볼트 한 마리와 몸이 엉겼다.
“꾸엑! 꾸엑!”
위급한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하이디 역시 이 주위를 빙글빙글 돌면서 코볼트에게 잡힐 듯 말 듯 아슬하게 추격전을 이어 나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간신히 코볼트 한 마리를 제압하고 몽둥이를 빼앗은 내가 땀에 흠뻑 젖은 채로 외쳤다.
“하이디!”
“꺄악!”
“그대로 도망치면서 내 말 들어!”
「소수의 여성 독자들이 당신의 황당한 요구에 분개합니다!」
니네가 그러거나 말거나, 어차피 이 상황을 벗어나려면 이 방법뿐이다.
“아까 농부 기억나지?!”
“꺄아아악!”
“대답하지 않아도 좋아. 듣기만 해!”
“반, 도와줘!”
내가 하이디를 향해서 달려가려던 코볼트 한 마리의 머리를 때렸다.
“꾸에엑!”
“아까 농부, 이상하지 않아?!”
「당신의 말에, 일부 독자들이 흥미를 표합니다.」
「[개연성]이 미세하게 요동칩니다!」
“대체 뭐가! 빨리 도와줘!”
나도 마음 같아서는 당장 도와주고 싶다.
그런데 아직도 내 앞에서는 무려 세 마리나 되는 코볼트들이 흉흉하게 기세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것도 한 마리는 나한테 머리를 얻어맞아서 잔뜩 성이 난 상태.
상황은 다급하다 못해 긴박했다.
“그 농부는 도대체 어떻게 용사 일행을 알아보았을까?”
“그야, 자기들이 그렇게 소개했겠지!”
“서쪽 대륙을 공포로 물들인 마왕을 사냥하러 간다는 용사 일행이 자신들의 정체와 행적을 밝힌다고? 무언가 이상하지 않아?”
「소수의 독자가 당신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개연성]이 요동칩니다!」
“어쩌면, 용사 일행에게는 그 농부에게 자신들의 정체와 행적을 밝힐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다수의 독자가 당신이 흘린 떡밥에 대해서 궁금증을 표합니다.」
「[개연성]이 거칠게 요동칩니다!」
좋아. 여기부터가 중요하다.
“간단해. 내 말은, 그 농부가 ‘용사’와 관련된 인물이라는 거야!”
“뭐?!”
「어긋나 있던 [개연성]이 거칠게 요동칩니다!」
“그 농부는 도대체 주변에 코볼트 군락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코볼트들이 귀찮게 할 만큼 지근거리에 살고 있으면서도 왜 아직도 이곳에 자리를 잡고 살고 있었을까? 어쩌면, 코볼트 따위는 그에게 아무런 해조차도 입히지 못한 것이 아닐까?”
사실, 이 말은 궤변에 가까웠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농부가 지나가던 열네 살배기 소년에게라도 도움을 청하려 했던 것이니까.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사실 따위가 아니었다.
늘 그랬듯이, 얼마나 그럴듯하게 보이느냐.
단지 그런 문제였다.
「대다수의 독자가 등장인물, [농부]에 대한 강력한 호기심을 표합니다!」
“어째서 척 보아도 약해 보이는 우리에게 코볼트 군락을 맡기려 했던 걸까? 무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텐데 말이야.”
“모, 몰라!”
“어쩌면, 그는 우리를 ‘시험’하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
“시, 시험이라고?!”
「다수의 독자가 당신의 떡밥에 주목합니다!」
“생각해 봐! 하이디. 무려 ‘용사’와 관련된 정체 모를 인물이, 우리처럼 약한 어린아이들이 뻔히 코볼트 군락으로 가는 것을 알면서도 그냥 죽게 내버려 둘 리가 있겠어?!”
이쯤에서 이 상황과 적당히 맞물리게 해 주면 끝이었다.
“혹시, 그에게는 우리를 방치해야만 하는 어떤 ‘이유’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이, 이유?”
「무협지를 좋아하는 소수의 독자가 [은거기인]의 존재에 열광합니다!」
「다수의 독자가 사이다를 기대합니다!」
그 순간이었다.
째쟁-
쨍!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세상이 깨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 후에 찾아온 것은 마치 모든 것이 멈춘 것처럼 느껴지는 기나긴 정적이었다.
「[개연성]이 완성되었습니다!」
내가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지.
그때였다.
서서히 세상을 움직이는 톱니바퀴가 굴러가기 시작하더니, 이내 완벽한 어둠 속에서 무엇인가가 불쑥 튀어나왔다.
“꾸엑!”
“꾸에에엥!”
그리고 그 불쑥 튀어나온 무엇인가는 순식간에 네 마리의 코볼트 머리를 모조리 깨 버렸다.
당황한 하이디가 그 광경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말했다.
“저, 저게 뭐야?”
누구겠어?
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마침내 어둠 속에서 빠져나온 한 인영을 바라보았다.
눌러쓴 밀짚모자, 꼬질꼬질한 튜닉.
그제야 나타난 농부가 슬쩍 자신의 손에 들린 것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아아…… 이것은, ‘쟁기’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