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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차 이후의 소설 속-9화 (9/164)

◈ 9화 Chapter 3: 블랙 드래곤, 루 (2)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이 컴컴한 어둠 속에 보이긴 뭐가 보여?

더군다나 블랙 드래곤이면 비늘 색부터가 이 어둠에 완전한 보호색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물론, 내가 이곳에 드래곤이 나타났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하이디가 그런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었을뿐더러, 내가 느끼는 이야기의 흐름상 이때쯤 등장하는 것이 맞긴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의문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어째서 클리셰가 움직이지 않은 거지?’

이와 같은 일이 있을 때면 항상 요동치던 [클리셰]가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은, 지금의 전개가 나에게 있어서는 뻔한 전개일지언정, 이 소설 내에서는 상당히 이질적인 일이라는 말이었다.

도대체 이야기의 수준이 얼마나 저렴한 건지 짐작도 가지 않을 정도였다.

그때였다.

부스럭-.

지금까지의 고요함이 마치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나무의 잎사귀들이 들썩이고, 땅이 거칠게 울렸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노란색 눈동자가 이쪽을 응시했다.

어느새 순식간에 얼굴에서 웃음기를 싹 지운 베른이 말했다.

“……이봐, 소년.”

“말하세요.”

“그 방법…… 지금 써야 할 것 같은데.”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다.

이 상황을 마냥 긍정적으로 보기에는,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저 떡 벌어진 아가리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크오오오오!]

그리고 이내 울려 퍼진 드래곤 피어.

제발 안 그러기를 바랐건만, 드래곤 피어를 듣자 나도 모르게 몸이 굳어 가는 것을 느꼈다. 이래서야 준비해 온 ‘방법’은커녕, 이대로 입 한 번 뻥긋하기도 전에 그대로 잡아먹힐 판국이었다.

「다수의 독자가 참신함이라고는 내팽개친 고인물 설정에 식상해합니다!」

……제발 더 따져 줘라.

이대로 드래곤의 야식으로 사라지기에는 내 청춘이 너무 아깝지 않은가. 안 그래도 ‘반’은 이제 막 14살 정도밖에 안 됐는데 말이다.

하지만 그런 [독자]들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이 상황이 변하지 않는 이유는 간단했다.

이 뻔한 세계에서는 바로 그런 [설정]이야 말로 그 어떤 [개연성]으로도 건드릴 수 없는 난공불락의 요새나 다름없었으니까.

때문에 아무런 전투 능력이 없는 지금의 나는 이 상황에서 무력하기 짝이 없었다.

“큭!”

들려온 침음성에 눈동자를 슬쩍 굴리자, 그래도 썩어도 준치라는 건지 베른이 드래곤 피어에 간신히 대항하며 메고 있던 쟁기를 꺼내 든 채로 어둠 속에 있는 노란빛 눈동자를 견제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하이디는?

재빨리 눈동자를 더 굴려서 하이디의 안색을 살폈으나, 예상외로 멀쩡히 서 있었다.

내가 하이디를 향해서 간신히 짜내듯이 외쳤다.

“하이디?”

“…….”

“하이디!”

이런, 멀쩡하기는 개뿔이 아무래도 선 채로 기절한 모양이었다.

어떻게 할까?

가장 쉬운 방법으로는 [마족 하이디]를 다시 일깨워서 눈앞에 있는 드래곤에 맞서게 하는 방법일 테지만…… 아무래도 하이디의 운명이 걸려 있는 방법이다 보니 최악의 상황이 아니라면 그 방법만큼은 쓰고 싶지 않았다.

더군다나 쉬운 방법은 내가 그렇게도 싫어하는 ‘뻔한’ 방법이 아닌가. 당연히 패스였다.

“……아무래도 처음 계획대로 가야겠구만.”

“뭐?!”

혼잣말에 대답하는 베른의 모습을 보니, 참 귀도 밝다 싶었다.

「다수의 독자가 혼잣말을 하는 당신을 주목합니다!」

「일부 독자가 당신의 [중2병] 성향을 의심합니다!」

……사실, ‘반’의 나이로는 오히려 그것보다 아래니까 상관없지 않냐?

「소수의 독자가 당신의 성향을 불편해합니다!」

「[중2병] 성향을 드러내셨습니다. 등장인물 ‘아인즈 반’의 [비중]이 감소합니다.」

「현재 비중: 8.1%」

야……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그나마 다행인 것은, [독자]들에게서 그런 인식이 박혔다고 해서, 직접적으로 ‘반’의 [중2병] 성향이 증가하지는 않았다는 점이었다. 나는 그것을 유일한 위안거리로 삼으며 드래곤을 향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안녕?”

원래대로였다면, 드래곤을 향해서 대화를 시도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이었다. 더군다나 눈앞에 있는 드래곤이 ‘루’처럼 소문이 더러운 드래곤이라면 더욱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자신 있게 나선 이유는 간단했다.

「[대의명분이 있는 악당] 버프가 발동 중입니다!」

무언가 어둠 속에서 브레스처럼 보이는 불꽃이 거대한 입속에서 이글이글하다가 사그라진 것을 본 것 같은데…… 아마 기분 탓은 아닐 것이다.

「[선]을 지지하는 한 독자가 [악당]의 끈질긴 생명력에 안타까움을 표합니다!」

그거 아쉬워서 어쩌나? 앞으로 더 질기게 살아남을 텐데.

그때였다.

눈앞에 있는 어둠 속에서 심장을 옭아매는 듯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한테 한 것이냐?]

“여기 너 말고 또 누구 있어?”

[흥미롭구나.]

고작해야 조금 많이 큰 파충류 주제에 뭐라도 되는 것처럼 내려다보는 꼴이라니. 아무튼 드래곤이라는 놈들은 저게 문제였다.

옆을 바라보니, 당장이라도 나와 드래곤 사이에 뛰어들려는 베른의 모습이 보였다.

동료를 위해서 고작 쟁기 하나 들고 저 사지로 뛰어들 생각을 하다니. 말이 [악당]이지, 내가 볼 때는 지밖에 모르는 준 사이코패스 [주인공] 놈보다 훨씬 더 나았다.

“……괜찮은 거냐?”

“지켜보기나 하시죠.”

우선, 기선제압은 필수였다.

내가 어둠 속의 블랙 드래곤을 응시하며 조용히 말했다.

“내가 살면서 너처럼 좆같이 생긴 뱀은 처음 본다.”

그리고 찾아온 것은 마치 영원처럼 느껴지는 기나긴 정적이었다. 잠시 동안 바람조차 불어오지 않는 정적이 이어지자, 베른이 당황을 넘어서 이마에 땀을 삐질 흘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 지금 뭐라고…….”

그리고 당황한 것은 베른뿐만이 아니었다.

「음란서적 애독자가 당신의 비유에 감탄합니다!」

「다수의 독자가 당신의 기묘한 발언에 주목합니다!」

「애완용 파충류를 키우는 한 독자가 당신의 발언에 주목합니다!」

[독자]들이 연신 댓글들을 쏟아내는 동안, 눈앞에서는 커다랗게 뜬 파충류의 노란색 눈동자가 한참 동안 눈만 껌뻑이고 있었다.

명백한 당황이었다.

[……뭐?]

“귀는 더럽게 커 가지고 이것도 못 들어? 다시 한번 말해 줄게. 너처럼 좆같이 생긴 뱀은 살면서 처음 본다고. 이 파충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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