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화 Chapter 4: 페론 마탑 (1)
소란스러웠던 밤이 지나가고 대강의 주변 정리 후에 마침내 아침이 밝자 나는 가장 먼저 루에게 말했다.
“우선, 우리를 페론 마탑까지 좀 태워 줄 수 있겠어?”
이미 밝혔던 목적임에도 불구하고 베른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아마 그로서는 내가 정말로 저런 무식한 요구를 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경악과는 반대로 루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렵지 않다.]
그 대답에 베른은 이제 아예 포기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상식과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음을 드디어 깨달은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루가 페론 마탑으로 향하는 텔레포트 마법만 써 주어도 감지덕지라고 생각했었으나 상황이 이렇게 되니 너무 생각대로 잘돼서 오히려 어딘가 불길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면서 올라타라는 듯이 길게 뻗은 목을 쭉 내민 루의 모습은 어딘가 고혹적이기까지 했다.
「음란서적을 좋아하는 한 독자가 자신의 뇌 내 망상을 가동합니다!」
「[루의 위에 반이 올라타자, 검게만 보였던 루의 묵빛 비늘이 어느새 붉게 물들었다. 그리곤 펼쳐진 날개와 함께 마치 하늘 위로 날아오르는 기분에 서로의 거친 숨결이 오갔다.]」
「[“루…….”]」
「[그렇게 둘 사이에 도저히 넘어서는 안 될 종족 간의 금기를…….]」
「음란서적을 좋아하는 한 독자가 신고로 출동한 관리자에 의해서 제재당하셨습니다!」
「일부 독자가 크게 아쉬움을 표하며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관리자를 비난합니다!」
……뭐야, 이건?
아무래도 소설이 정상이 아니라서 그런지, 독자 계층도 비정상밖에 안 모여 있는 듯 했다. 하긴, 정상적인 사람이었다면 진작 나처럼 하차했을 테지만 말이다.
‘그리고 끌려왔겠지.’
자조적인 생각이었으나,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나는 이내 한 가지 의문점이 들었다.
‘잠깐…….’
분명히 말하지만, 이 소설의 도입부는 재미라고는 일 푼도 찾아볼 수 없는 쓰레기 소설이다.
도입부부터 주인공의 호구성을 드러내고, 고구마 천 개를 한꺼번에 먹은 듯한 답답함을 선사하는 것도 모자라서 그런 이야기마저 클리셰 덩어리로 이루어진 뻔하디뻔한 이야기였다.
만약 세종대왕이 이 소설을 보았다면 훈민정음의 통탄할 활용에 문자 창제를 망설였을 것이며, 저 멀리 중화권에서 한자를 창제했다던 창힐이 보았다면 자신의 과오를 크게 반성하며 무려 네 개나 달렸다는 자신의 눈을 모두 뽑아 버렸을 것이다. 이 소설은 가히 그 정도의 파괴력을 가지고 있었다.
문제는, 당연히 그런 쓰레기 소설을 하차한 것이 나뿐만이 아닐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렇다면 이 소설을 하차한 인간들이 모조리 이곳에 납치되었는가?
당연하게도, 그건 지금의 나로서는 아무리 생각을 해도 알 수 없는 사항이었다. 작가 본인이 내 앞에 나타나서 구구절절하게 설명이라도 해 준다면 모를까.
어쨌든,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루의 등 위에서의 여행은 생각보다도 훨씬 더 쾌적했다.
드래곤인 루의 마법 덕분인지 음속에 가까운 비행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흔들림이나 멀미도 나지 않았고, 바람 또한 완벽히 차단되어서 거의 무풍지대로 느껴질 정도였다.
‘편하네.’
아마 이 세계에 떨어지고 난 뒤로 처음으로 맛보는 꿀 같은 휴식이 아닐까 싶었다. 제아무리 ‘반’의 노예 생활이 비교적 편했다지만, 어쨌거나 노예는 노예였으니까.
몸이 편해지니, 또 머릿속에서 스멀스멀 잡생각들이 떠올랐다.
나는 이 세계를 부술 수 있을까?
아니, 이 세계를 부수고 나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집으로 돌아갈 수는 있는 건가?
그 전에 죽으면? 이곳에서 ‘반’이 죽으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그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을 때였다.
“무슨 생각해?”
목소리가 들려온 곳에서는 어느새 내 옆으로 바짝 다가온 하이디가 똘망똘망한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요 계집애 봐라.
저런 얼굴을 보면 놀리기 싫어도 놀리고 싶어졌다.
“네 생각.”
“뭐, 뭐?”
아무튼, 놀릴 때마다 이렇게 일일이 반응하는 것을 보니 도무지 질리지 않는다.
“농담이야. 그냥 이런저런 생각 좀 했어.”
“치…….”
얼굴을 홍조로 붉게 물들인 하이디의 얼굴을 보자, 잠시 지나쳤던 잡념이 우습게 느껴졌다.
하긴, 이런들 어떻고 저런들 어떻겠는가.
눈앞에 거슬리는 게 나타나면 치우면 되고, 방해하면 잡아 족치면 된다.
그게 뭐든 간에.
「일부 독자가 당신의 [중2병] 감성에 손발을 오그라트립니다!」
「등장인물, ‘아인즈 반’의 [중2병] 성향이 증가합니다!」
시끄러워. 원래 사람은 밤에 센티해지는 법이야.
「다수의 독자가 당신의 발언에 오류를 지적합니다!」
아, 맞다. 지금 아침이었지.
루의 마법으로 외부와 단절된 상태라서 미처 눈치채지 못했었다.
내가 그런 실랑이 아닌 실랑이는 벌이는 동안, 어느새 내 어깨에 얼굴을 기댄 채 새근새근 잠든 하이디의 숨결이 느껴졌다.
「음란서적을 좋아하는 한 독자의 부계정으로 추측되는 독자가 당신의 행동을 응원합니다!」
“…….”
저놈은 질리지도 않는 건가.
아무튼 인터넷 실명제가 이래서 필수다. 신고하고 정지를 먹이면 뭐 하나, 금세 저렇게 다시 나타나는 것을.
그때, 바닥에서 울려 퍼지는 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봐, 인간…… 아니, 반.]
대뜸 이름을 부르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마음의 벽이 많이 허물어진 모양이었다. 나쁘지 않은 신호였다.
“왜?”
[……곧 도착이다.]
“아 벌써? 역시 대단한걸.”
[…….]
저 침묵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적어도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왜 그런 말도 있지 않나.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물론, 내 경우에는 드래곤이겠지만 말이다.
거기다가 따로 돈은 물론이고 별다른 노력도 안 드니 정말이지 마법의 기술이 아닐 수가 없었다.
문득, 그렇게 생각하니 이 세계가 더 우스워졌다.
어차피 세상은 결국 돈 많고 말 잘하는 놈이 지배하는 법인데, 의미 없이 검술 배운다고 힘 빼고, 마법 배운다고 힘 빼고, 대체 그게 뭐 하는 짓거리란 말인가.
차라리 그 시간에 논술 학원이나 다니던가.
제아무리 소드 마스터나 대마법사가 잘났다 하더라도 어차피 말 잘하는 놈이 반역죄로 몰아가거나, 국가의 힘으로도 부족하면 마왕으로 몰아가면 된다.
「대다수의 독자가 아리스토텔레스가 무덤에서 일어날 당신의 개논리에 반박합니다!」
뭐, 물론 예외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그런 놈을 보통 이 세계에서는 [주인공]이라고 부른다는 점이었지만.
그 말은 즉, [주인공]에 준하는 존재가 아니고서야 이 세계에서 힘 하나 믿고 까부는 건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라는 점이었다.
내가 일신의 무력을 키우기 위해서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대다수의 독자가 핑계를 위한 당신의 기나긴 변명에 감탄합니다!」
「[귀차니즘] 성향이 증가합니다!」
「자신만의 철학을 주장하였습니다. 등장인물 ‘아인즈 반’의 [비중]이 증가합니다.」
「현재 비중: 8.6%」
전혀 예상외의 소득에 아무래도 앞으로 개소리를 더욱 많이 해야겠다고 다짐하고 있던 때였다.
피이이이잉-!
마치 폭죽이 날아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루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공격이다.]
“……공격? 어디서?”
대체 어떤 미친놈이 감히 하늘을 날고 있는 드래곤을 대뜸 공격한단 말인가.
이건 악룡, ‘루’가 아니라 다른 드래곤이었어도 왕국이 멸망해도 할 말이 없는 사안이었다.
[페론 마탑.]
“마탑에서? 도대체 왜?”
[페론 마탑은 과거에 일족 중 하나인 ‘레’에 의해서 한 번 큰 피해를 입은 적이 있다. 아무래도 나를 ‘레’로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마탑까지 갈 수 있겠어?”
그리고 들려온 대답은 전혀 의외였다.
[……확신할 수 없다.]
“도대체 왜?”
“그 이유는 내가 말해 주지.”
목소리가 들려온 곳에서는 어느새 낮잠에서 깨어난 베른이 서 있었다.
“페론 마탑은 천 년 전에 블랙 드래곤, ‘레’에 의해서 큰 피해를 입은 적이 있다. 그 이후로 페론 마탑에서는 무려 천 년간의 기나긴 공사 끝에 마탑에 대 드래곤용 결계와 마법공학 포탑 설치를 끝내게 되었고, ‘레’가 나타나기만을 벼르고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마침 우리가 이곳을 지나가게 된 거고?”
“그런 거지.”
즉, 제아무리 루라도 페론 마탑에서 쏟아내는 공격에는 당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피해를 입기 전에 먼저 대응하는 방법도 있다.]
“아니, 그건 참아 줘.”
물론, 루가 직접 공격에 나선다면야 페론 마탑에 막대한 피해를 입힐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 페론 마탑에 ‘녀석’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만약 그랬다가는 모든 것이 끝장이었다.
베른이 이를 악물었다.
“제기랄…… 망할 제국 마법사 놈들.”
“제국이라고요?”
“페론 마탑은 제국에 소속된 마탑이야. 그래서 저렇게 막대한 자금을 끌어들일 수 있었던 거지.”
그 말에 무언가가 떠오른 내가 재빨리 외쳤다.
“루! 지금부터 마탑에서 날아오는 공격을 피하지 마!”
순식간에 베른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뭐?!”
그도 그럴 것이 아직도 루의 마법 방어막 바깥에서는 수백 개의 화염과 번개가 페론 마탑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쟁에서나 쓸 법한 막대한 화력.
그나마 대부분의 공격은 비행으로 피하고 나머지는 보호막으로 견뎌 낸 덕에 아직까지 버티고 있었던 것이기에 당연히 루 역시도 부정적이었다.
[그랬다가는 나는 어떻게든 버틸 수도 있지만, 내 등 위에 있는 너희들은 위험해질 수도 있다.]
“걱정하지 말고 내 말대로 해 줘.”
[……알았다.]
갑작스럽게 요란한 비행을 멈추고 페론 마탑으로의 직선으로 경로를 바꾼 루의 모습에 베른이 비명을 질렀다.
“지금 미쳤어? 개죽음당할 셈이야?!”
그와 함께 큰 소리에 잠에서 깨어난 하이디가 내 팔을 꼭 붙잡았다.
“반…… 우리 괜찮은 거야?”
내가 하이디에게 작게 웃어 주고는 말했다.
“괜찮아.”
그 순간이었다.
거대하게 뭉쳐진 화염구 하나가 루의 거체를 거의 한 뼘 차이로 스치고 지나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물 샐 틈도 없어 보이는 폭격이 눈앞에서 아른거렸으나, 그 어느 것도 아슬아슬하게 스치기만 할 뿐 ‘루’의 몸을 건드리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울렁거리는 세계.
「클리셰가 요동칩니다!」
계속해서 쏟아지는 마법 속에서 당장 어떤 마법이 적중해도 이상하지 않을 광경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마법도 우리에게 닿지 못했다.
모든 것이, 내 예상대로였다.
「[대의명분이 있는 악당] 버프가 발동 중입니다!」
“우와악!”
나는 머리끝을 화염 마법에 살짝 그을린 베른에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안 맞을 테니.”
“그걸 어떻게 확신해?!”
어떻게 확신하긴.
“그거 알아요?”
내 질문에, 생사의 경계 속에서 긴장을 놓지 못하던 베른이 침을 삼키며 대답했다.
“뭘?”
긴장한 그의 모습을 보며 내가 낮게 웃으며 말했다.
“오직 제국의 마법사들만이, 이토록 정확한 사격이 가능하다는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