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차 이후의 소설 속-15화 (15/164)

◈ 15화 Chapter 5: 주인공 (2)

“흐아압!”

베른의 거친 기합성과 함께 쟁기와 성검이 부딪쳤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일개 농기구인 쟁기와 신의 힘이 깃들었다는 성검이 부딪치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깊이 생각해 볼 필요조차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의 전투는 쉽게 판가름 나지 않았다.

디오가 투정했다.

“역시 보통 쟁기가 아니지 않습니까.”

베른이 발로 다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한스네 대장간은 싸구려를 취급하지 않거든.”

“시간이 나면 저도 한번 가 봐야겠군요.”

“후회하지는 않을 거야.”

그들이 다시 한번 격돌했다.

결과만 놓고 보자면 당장 저 둘의 전투 양상은 팽팽하긴 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용사’의 압도적인 힘을 베른이 ‘용사였던’ 경험으로 메꾸고 있어서였다. 본인이 ‘용사’였으니, 그 힘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역시도 결국 본질적인 차이는 메꾸지 못했고, 균열은 생각보다도 빨리 일어났다.

스륵.

베른과 디오의 몸이 교차하고, 베른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원인은 디오가 ‘용사’여서도, 베른이 약해서도 아니었다.

그저, 상대가 [주인공]이었을 뿐.

「[주인공] 버프가 미약하게 발동 중입니다!」

「[성장하는 주인공] 클리셰가 발동합니다!」

베른이 어느새 살짝 베인 자신의 어깻죽지를 바라보며 씁쓸하게 말했다.

“이거…… 녀석이 괴물을 키운 건가.”

“‘용사의 힘’이 당신에게 있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겁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기는.”

“진심입니다.”

어깨의 상처가 결코 깊은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상처 여부를 떠나서 이제 디오의 힘이 명백히 베른을 넘어서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쯧.’

비록 이렇게 될 거라고 생각은 했었지만, 이 망할 놈의 소설은 조금의 반전도 없이 예상대로 전대 용사인 베른을 [주인공]이 성장하는 경험치로 만들어 버렸다.

악재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대다수의 독자가 [주인공]의 성장에 기뻐합니다!」

「다수의 독자가 [주인공]이 [악당]을 처형하기를 기대합니다!」

기댈 만한 언덕 하나 없는, 참으로 망할 상황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나마 희망이 있다면 루였는데, 루의 경우에는 고대 정령을 조금 밀어붙이고 있기는 했지만, 고대 정령이 가진 특성 탓에 쉽게 끝을 내지는 못하고 있었다.

“소용없다니까요. 저를 죽이려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을 없애야 할 거예요.”

[못할 것 같으냐?]

그리고는 다시금 끝이 안 보이는 화력전을 시작하는 루와 물.

상황이 그러했으니, 아무래도 이제 슬슬 직접 나서야 할 때가 된 듯싶었다.

“가자. 하이디”

내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어느새 다시금 여유를 되찾은 키리엘이 차 한 모금을 머금고는 말했다.

“가려고?”

“이만 이 무의미한 싸움을 막으러 가야죠.”

“돕는 게 아니라?”

“제가 무슨 힘이 있다고”

비록 말은 안 했지만 만약 키리엘이 작정하고 이 싸움에 끼어들었거나, 나와 하이디를 인질로 잡기라도 했다면 이 싸움은 시작하기도 전에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느긋하게 우리랑 차나 마시고 있었다는 말은, 그녀 역시도 무언가 다른 생각이 있었다는 뜻이었다.

「일부 독자가 등장인물, ‘키리엘’의 생각을 궁금해합니다!」

키리엘이 어딘가 씁쓸한 미소로 말했다.

“왠지…… 언젠가 너라면 디오를 구해 줄 수 있을 것 같아.”

「일부 독자가 그녀의 발언에 주목합니다!」

「클리셰가 요동칩니다!」

또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전개가 일어날 것만 같았다.

물론, 순순히 들어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말이다.

“제가 누구를 구해 주고 그럴 처지가 아니라서.”

구해 주기는 개뿔이. 지금 그 구해 달라는 놈한테 죽게 생겼는데.

「클리셰가 파괴됩니다!」

「클리셰 붕괴율: 0.14%」

지금까지는 없었던 파격적인 붕괴율을 보니, 아무래도 [주인공]과 연관된 사항이라서 그런 듯 했다. 예상외의 수확이었다.

내가 거절했다는 사실에 키리엘이 슬퍼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알아. 하지만…… 왠지 그래.”

“엘프의 감인가요?”

“여자의 직감이지.”

그렇게 말한 키리엘이 고개를 돌렸다.

“하이디, 다음에도 만날 수 있을까?”

“그럼요. 다음에 만나면 언니라고 불러도 될까요?”

“너처럼 귀여운 동생이 생긴다는데 누가 마다하겠니.”

……전혀 의도는 안 했지만, 아무래도 짧은 티타임이 하이디와 키리엘, 이 둘 사이에 미묘한 유대감을 만들어 낸 듯 했다.

어찌 되었건 이는 상당히 좋은 소식이었다. 이제 나와 하이디가 이 자리를 벗어나더라도 키리엘이 간섭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하이디의 귓가에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 속삭였다.

“알겠지?”

“응.”

고개를 끄덕이는 하이디의 볼은 어딘가 상기되어 있었다.

「음란서적을 좋아하는 한 독자가 기회를 이용하는 당신의 음험함을 응원합니다!」

관리자에게 언제 제재받았냐는 듯이 다시 나불거리는 걸 보니, 아무튼 솜방망이 처벌이 문제는 문제였다.

“이러니까 공권력이 무시 받지.”

“응?”

“혼잣말이니까 신경 쓰지 마.”

이제 이런 혼잣말 정도는 신경도 쓰지 않는지, [독자]들도 비교적 잠잠했다.

아니, 오히려 지금 상황에서 나 따위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눈앞에서는 바로 그 [주인공]이 활약하고 있었으니까.

피를 흘리며 무릎을 꿇은 [악당], 베른이 이죽거렸다.

“야…… 이제부터 착하게 살 테니까 이번만 살려주면 안 될까?”

「비굴함을 보였습니다! 등장인물, ‘전대 용사 베른’의 [비중]이 감소합니다.」

「현재 비중: 6.1%」

“……적에게 목숨을 구걸하다니. 대체 ‘용사’의 품위를 어디까지 떨어뜨릴 셈입니까.”

“그게 밥 먹여 주냐? 아무튼 꽉 막혀 가지고. 그래서 살려줄 거야 말 거야?”

본래였다면, 호구에 암 덩어리인 [주인공]이 할 선택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비록 베른이 [악]의 성향을 띠고 있긴 했으나, ‘전대 용사’라는 거물을 그리 쉽사리 죽일 수는 없을 테니까.

그런데 문제는…… 역시 그놈들이었다.

「대다수의 독자가 등장인물, ‘용사 디오’에게서 [사이다]를 기대합니다!」

「한 독자가 [주인공]의 선택에 따라서 하차할 것임을 선언합니다!」

……망할 사이다패스 놈들.

그 때문일까. 쉽사리 결정을 못 하고 망설이던 디오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기회는 이미 늦었습니다.”

「대다수의 독자가 [주인공]의 선택에 환호성을 보냅니다!」

「등장인물, ‘용사 디오’의 [정의 구현] 성향이 증가합니다!」

그럼 그렇지.

아무래도 기적은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진짜로 내가 나서야 할 때가 다가왔다는 뜻이기도 했다.

내가 성검을 치켜올려 든 디오를 향해서 외쳤다.

“잠깐!”

「비교적 임팩트 있는 등장과 함께하였습니다! 등장인물, ‘아인즈 반’의 비중이 증가합니다.」

「현재 비중: 9.9%」

좋아. [주인공]에게 까불려면 이 정도 [비중]은 있어야지.

아쉬운 차이로 10%가 되지 않는 게 아까웠지만 어쩌겠는가, 있는 거라도 잘 써먹어야지.

내가 나타나자 악재 속에서도 애써 이죽거리던 베른의 표정이 굳었다.

“……반? 안 도망가고 뭐 했어?”

“뭐하긴, 구하러 왔죠.”

“망할! 상황 파악이 아직도 안 돼? 내가 시간이라도 끄는 동안 최대한 멀리 도망쳤어야지! 네가 제아무리 난놈이라지만, 이번 상대는 정말로 무리야!”

잔소리하기는. 내가 세 살배기 어린애도 아니고.

당연히 그런 사실쯤은 잘 알고 왔다.

“걱정하지 말고 지켜나 봐요.”

내가 시선을 돌리자, [주인공]의 차가운 시선이 나를 훑었다.

“뭐지?”

옛날에 보았을 때와는 다른, 철저하게 [악]을 바라보는 저 눈빛은 도저히 일반인이 감내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대다수의 독자가 사이다 전개에 훼방을 놓는 당신을 비난합니다!」

「대다수의 독자가 당신이 [정의 구현] 당하기를 바랍니다!」

“할 이야기가 있어.”

“너도 살려 달라고 애원이라도 할 셈인가?”

……망할 베른. 괜히 쓸데없는 짓을 해서 선택지나 좁히고 말이야.

이 자리를 벗어나면 내가 들었던 잔소리의 백배는 퍼부어 줘야겠다.

“그런 거 아니니까 일단 들어나 보시지?”

순간,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움직인 성검이 눈 깜짝할 사이에 내 목에 닿았다. 베른과의 전투가 얼마나 격렬했는지, 날에 닿은 목에서 무척이나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말해 봐라.”

이제부터는 정말로 실수하면 안 된다. 만약 조금이라도 입을 잘못 놀렸다가는, 그대로 사망이었다.

“이 싸움을 멈추고, 조용히 가던 길 가. 이게 내 요구 조건이야.”

“우습군.”

「다수의 독자가 당신의 황당한 요구에 어안이 벙벙해집니다.」

「대다수의 독자가 황당한 요구를 하는 당신을 조롱합니다!」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야지. 대신, 나는 네가 가장 원하는 걸 하나 주지.”

“내가 가장 원하는 것?”

[주인공]이 원하는 것.

이 말은 즉, ‘용사 디오’가 움직이는 가장 근본적인 행동 원리가 무엇인가였다.

지금까지는 단순히 ‘용사니까’ 같은 시시한 이유인 줄 알았지만, 아까 디오가 했던 말과 키리엘과의 대화로 그 이유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단서는 두 가지였다.

-“상관없습니다. 제가 ‘용사’를 그만두고 나면, 더 이상 이곳에 없을 테니까.”

-“그래!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더라도 따라갈 거야!”

[주인공]이 이곳에서 이뤄낸 모든 것을 걸고서라도 가고 싶어 하는 곳.

또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

그곳이 어디인지는 뻔했다.

「[개연성]이 거칠게 요동칩니다!」

내가 말했다.

“네 고향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알려주겠다.”

1